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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켜라!>를 절찬하는 이유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데뷔작이라는 것. 요즘 한국영화의 신인감독들은 너무 물렀다. 좋은 영화를 만들고는 있지만 너무 쉽게 타협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세련되고, 매끄럽고, 원숙하고, 장르적 규칙을 적절하게 수용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은 나중에도 할 수 있다. 잘 다듬어진 데뷔작을 보는 일은 나름대로 좋은 일이지만, 희열을 주지는 못한다. 나는 지금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허름한 코아아트홀에서, 전혀 낯선 이름의 홍상수 감독이 만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고 나오자, 유난히 바람이 몸을 휘감고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세상이 조금 더 회색으로 보였다. <지구를 지켜라!>는 그런 점에서 탁월하다. <지구를 지켜라!>를 보고 나오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기분이 묘했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엉킨 느낌은 이상하게 즐거웠다. <지구를 지켜라!>는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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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랄하고 비굴하고 때론 인간이길 포기했어요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고, 백윤식은 오십에 영화를 만났다. 50여년의 세월 속에서 30년 넘도록 브라운관의 스타로 군림해왔던 그는 <지구를 지켜라!>를 통해 연기인생의 새 장을 열었다. 1970년 KBS 공채로 연기활동을 시작한 이후 뭇 여성의 애간장을 태우는 꽃미남이었고, 특집극에서 나운규, 이중섭 등이나 <TV문학관>의 주연을 단골로 맡는 연기파였으며, <서울의 달> <파랑새는 있다>에선 무표정한 얼굴로 촌철살인의 유머를 구사해 ‘코미디언을 웃기는 연기자’로 불렸던 백윤식이지만 <지구를 지켜라!>의 강 사장 역은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었다. TV와 제작 패턴이 크게 다른 영화현장에 적응하는 것에서부터 한국영화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내용의 시나리오를 소화하는 점,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강 사장 캐릭터를 체화하는 일까지 그로선 하나같이 난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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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3. ‘찌리리’와 ‘찌지직’을 극복하라 -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살다
“잠깐 스톱. 영화사에서 온 분들 좀 불러줘요.” 백윤식은 등골 저편에서 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아직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인데 벌써 찌리리하다니.’ 백윤식은 걱정이 됐다. 일을 하다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맞거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몸 안 깊숙한 곳에서 전류 같은 게 발생하곤 하는데, ‘찌리리하다’는 건 이때 쓰는 그만의 표현이다. 이보다 더한 단계는 ‘찌지직’이라고 하는데, 촬영 도중 이 단계로 진입한 적이 없었던 건 천만다행으로 보인다.
이날의 ‘찌리리’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쌀쌀하던 어느 날 신체의 틀을 뜨기 위해 미사리 부근의 특수분장 업체를 찾았을 때 발생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특수분장 직원이 그에게 “혹시 감기 걸리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었다. 난데없는 질문에 도리질을 치며 맥락을 파악하려는데 갑자기 콧구멍만 남겨두고 머리 전체에 실리콘을 칠하는 게 아닌가.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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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5. 세대를 넘어 부산을 넘어 - 행운과 불운의 쌍곡선
따지고 보면 운이 좋은 거였다. 천재인지는 몰라도 특별한 것만큼은 확실한 장준환 감독이나 개성이 진한 홍경표 촬영감독, 집요할 정도로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장근영 미술감독을 굳이 거명하지 않더라도 그의 영화작업에 함께한 스탭들은 모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벌레들이었으니까. 백윤식에게 2002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단지 만족스런 영화 한편에 출연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 20년 이상 어리지만 마음만은 어울릴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보냈다고 추억하기 때문이다. 이건 스탭들이 그를 배려했던 만큼, 그 또한 그들의 젊음 안으로 들어가려 무던히 노력한결과이기도 하다. 장준환 감독에 따르면 백윤식은 촬영장의 활력소였다. 그는 김 형사 역의 이주현을 보면서 “쟤는 칙칙이(백윤식은 땀을 표현하기 위해 물을 분사하는 기구를 그렇게 불렀다)만 뿌려주면 좋아하더라” 식으로 엉뚱한 말을 툭툭 던져 촬영장의 긴장감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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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反戰)과 반전(反轉), 어두웠던 파티장전쟁과 쇼 사이에서 갈등했던 75회 오스카, 작품상은 <시카고>몇몇 스타들이 이라크 전쟁을 이유로 불참할 것을 밝혔을 때, 이번 오스카에서 반전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터져 나올 것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지상 최대의 쇼'는, 세계 최고의 각본 없는 드라마답게 또 다른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제75회 아카데미 영화상 주요 부문 수상 결과작품상 <시카고>(미라맥스 제작) | 감독상 로만 폴란스키 <피아니스트> | 여우주연상 니콜 키드먼 <디 아워스> | 남우주연상 에이드리언 브로디 <피아니스트> | 여우조연상 캐서린 제타 존스 <시카고> | 남우조연상 크리스 쿠퍼 <어댑테이션> | 각본상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녀에게> | 촬영상 콘래드 L. 홀 <로드 투 퍼디션> | 각색상 로널드 하우드 <피아니스트> | 의상상 콜린 애
제75회 아카데미 영화상 The 75th Annual Academy Award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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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부시 정신차리시오!" 부시 대통령에게 강도 높은 비난을 한 마이클 무어.캐서린 제타 존스(왼쪽)는 만삭의 몸에도 퀸 라티파와 <시카고>의 주제가를 불렀다.스코시즈 역시 미라맥스의 열의에 밀려 각종 토크쇼 홍보까지 참여했다. 작품상 후보 중 유일하게 미라맥스와 연고가 없는 <피아니스트>의 선전도 ‘무조건 따놓은 당상이니 인정하라’는 식의 귄위적인 홍보전이 저항을 자극했음을 짐작게 한다. <갱스 오브 뉴욕>에 비할 수는 없지만 <디 아워스>의 실망도 컸다. 문학적 배경, 유려한 형식미, 명품 연기 앙상블로 제작단계부터 확실한 오스카 카드로 불렸던 <디 아워스>는, 영화가 지닌 미덕의 1/3 미만인 니콜 키드먼의 연기를 공인받는 트로피 한개로 만족해야 했다.또 다른 통쾌한 반란은 시상식 현장 공연에서 제외된 에미넴의 <Lose Yourself>에 돌아간 주제가상.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 시상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에게서
제75회 아카데미 영화상 The 75th Annual Academy Award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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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 계기로 본 히치콕 베끼기의 역사4월4일부터 4월11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히치콕 회고전’이 열린다. 수없이 많은 숭배자들을 거느리고, 여전히 서스펜스의 아버지로 우뚝 서 있는 히치콕. 히치콕과 그를 따르는 히치콕주의자들의 관계를 따라가며 그 간격의 폭을 재본다. (서울시네마테크는 5월 중순 히치콕 회고전 2탄을 준비 중이다.)프랑수아 트뤼포는 이렇게 썼다. “히치콕이 서스펜스만을 다루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가 가장 덜 지루한 영화감독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1925년 <쾌락의 정원>으로 데뷔하여 76년 <패밀리 플롯>을 끝으로 은퇴하기까지 총 54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히치콕이 흥행에 실패한 사례는 손에 꼽힐 정도이다. 그는 언제나 대중을 사로잡는 감독이었다. 누벨바그 세대는 그런 히치콕을 전면에 세워 영화의 본질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누구의 작품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라고 트뤼포는 히치콕의 독창적
4월 4∼11일까지 열리는 히치콕 회고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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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 드 팔마는 그를 모방하지 않았다?히치콕에 대한 트뤼포의 말을 조금 변형하자면,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누구의 영화를 따라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몇 안 되는 감독’이 바로 브라이언 드 팔마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자신을 히치콕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싸이코>에 영감을 얻어 <자매들>을 만든 것이라고 말한 그 순간부터 평단은 브라이언 드 팔마를 히치콕의 인형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브라이언 드 팔마는 <강박관념>을 만든 뒤에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나아가 히치콕의 <현기증>과 <사이코>를 조합한 것으로 유명한 <드레스드 투 킬>을 만든 다음에는 자신의 영화가 히치콕과 다른 점이 많다며 오히려 성질을 냈다. 특이한 반응이긴 하지만, 다행스럽게 드 팔마만의 창조력은 점점 더 빛을 발한다.하지만 <강박관념>은 <현기증>을, <드레스드 투 킬>
4월 4∼11일까지 열리는 히치콕 회고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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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가 사랑한 영화들4월4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히치콕 회고전 상영작 9편39계단 | The Thirty-nine Steps | 1935년 | 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 출연 매들린 캐롤 | 81분 | 흑백“<39계단>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빠른 전환입니다.” 영국 시절 히치콕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영화이며, 히치콕의 이름을 알리는 데 공헌한 영화. 영국을 여행 중이던 리처드 핸니는 ‘미스터 메모리’의 공연을 보게 된다. 공연 도중 총성이 울리고 뮤직홀은 엉망이 된다. 핸니는 공연장을 빠져나오며 영국 스파이인 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자신이 영국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고, 39계단이라는 국제 범죄단이 중요한 정보를 국외로 빼돌릴 것이라고 말한 뒤 칼을 맞고 죽는다.숙녀 사라지다 | The Lady Vanishes | 1938년 | 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 출연 마거릿 록우드 | 97분 | 흑백도시에 눈사태가 나고 기차가 정지한다. 승객들은 호텔에 머문다. 그리
4월 4∼11일까지 열리는 히치콕 회고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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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씨 부부 | Mr. and Mrs. Smith | 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 출연 캐롤 롬바르드 | 95분 | 흑백“이 영화는 여배우 캐롤 롬바드에게 내 우정을 표하기 위해 만든 겁니다.” 데이비드 스미스와 애니 스미스 부부는 많은 부분에서 규칙들을 무시하면서 살아간다. 애니는 시간을 거슬러갈 수 있다면 그래도 다시 결혼할 거냐고 데이비드에게 묻는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털어놓는다. 스크루볼코미디에 가까운 히치콕 코미디영화. 그러나 질 들뢰즈가 가장 히치콕적이라고 부른 영화.망각의 여로 | Spellbound | 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 출연 잉그리드 버그만 | 111분 | 흑백그린 매너스 정신병원 원장 머치슨 박사가 은퇴하고, 에드워즈 박사가 새로 부임한다. 그러나 에드워즈 박사에게서 이상한 모습들이 발견된다. 직원들의 질문에 이상한 답변을 하기도 하고, 극도의 신경증적인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여의사 피터슨은 에드워즈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심한 정신분열
4월 4∼11일까지 열리는 히치콕 회고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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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여자` 줄리언과 르네는 어떻게 스크린 여왕에 등극했나이웃집 여자들이 수상하다. 아무래도 대형 사고를 칠 모양이다. 너무 수수해서 지나쳤던 얼굴인데, 이젠 쉽게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들은 한번 눈짓과 숨결에 백 마디 말을 실어보낸다. 그렇게 여자의 꿈과 일상을, 시대의 불안과 강박을, 일과 사랑과 가족에 대한, 그들 삶의 모든 흉금을 털어넣는다. 이 강력하고 신비로운 화술의 달인들은 바로 <디 아워스> <파 프롬 헤븐>의 줄리언 무어와 <시카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르네 젤위거다.오랜 세월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그들은 오늘을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메이저와 인디, 비극과 희극을 수시로 오가면서 체득한 지각 능력과 균형 감각이 이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듯 보이는 이들 두 배우는 최근 들어 ‘가장 미더운 여배우’라거나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의 소유자들로 칭송되고 있다. 또 ‘꽃미녀’ 니콜 키드먼과 ‘원래 연기파
줄리언 무어,르네 젤위거 - 두 여자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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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불온한 어머니여<부기 나이트>에서 <디 아워스>까지, 떠도는 뮤즈 줄리언 무어“이 여자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누군가 묻는다. 붉은 머리, 각진 턱, 창백한 얼굴 위에 촘촘히 박힌 주근깨, 마흔이 가까운 늦은 나이에 수면 위로 자신을 드러낸 줄리언 무어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대중에게 그리 익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인디와 메이저, 비극과 희극을 오가는 14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스멀스멀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머릿속에, 관객의 심장에 자신의 존재를 박아내려갔으며, 기존 메이저 여배우들이 소비되었던 것과 정반대 지점에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비옥한 영토를 가꾸어왔다. 그리고 올해 아카데미는 자살충동을 느끼는 신경쇠약 직전의 어머니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발 아래서 처절하게 무너지는 것을 목격해야 하는 가정주부를 연기한 그를 여우 조연, 주연상에 동시에 노미네이션시키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배우의 무엇이 안정지향적인 할리우
두 여자 이야기 - 줄리언 무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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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프롬 헤븐>줄리언 무어는 <사랑의 이름으로>라는 독립영화에 출연하면서 만나게 된 오랜 남자친구이자 영화감독인 바트 프로인들리히와의 사이에 현재 두 아이가 있다. 97년 12월 첫째아들 칼이 태어났고, 지난해에 태어난 “푸른 눈이 백설공주 같은 둘째딸” 리브는 오는 4월 돌을 맞는다. “아이를 낳은 건 인생의 최고의 경험이자 축복이에요. 모성애는 나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죠.” 그는 아이들과 누구보다 밀접한 교감을 나누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고 보모의 손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키워내고 있다. 이는 에이전트를 거치지 않고 자신에게 날아온 모든 시나리오를 꼼꼼히 직접 읽는 그의 작업태도와도 일맥 상통한다. 덕분에 아들 칼은 피가 튀고, 엽기적인 행각이 난무하는 <한니발>의 촬영현장에 매일 엄마와 함께 출근했을 정도였다. “앤서니(홉킨스)는 칼에게 ‘스스스스습~’ 하는 렉터 박사가 입맛 다시는 소리를 가르쳤어요. 지금도 칼에게
두 여자 이야기 - 줄리언 무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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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옷을 벗다`시카고를 뒤흔든 미모으 재즈 킬러` 르네 젤위거르네 젤위거는 <시카고>의 촬영이 한창이던 지지난해 겨울 토론토의 번화가에서 봉변을 당했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가를 즐기던 그녀는 허름한 차림으로 테이크아웃 커피를 홀짝이며 구찌 매장을 서성이다가, 그만 눈높은 점원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음료 반입 금지’의 룰 때문이려니 짐작하고 순순히 물러난 그녀를 뒤늦게 알아본 매장 책임자가 호텔로 사과 선물을 보내 수습에 나섰으나, 그 바람에 이 해프닝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르네 젤위거는 이런 일에 분노하지 않는다. 그녀의 산책을 방해하는 건 대개 그녀를 팝스타 주얼이나 비욕으로 착각하고 사인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더러 이렇게 아는 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혹시 우리, 같은 학교 다니지 않았나요?”르네 젤위거는 무대 위의 화려한 조명보다는 옥외의 밝은 햇살이 더 잘 어울리는, 평범한 얼굴과 몸매를 가졌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
두 여자 이야기 - 르네 젤위거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