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새 고속도로를 달린 조르주(장 뒤자르댕)는 어느 중고 의류 판매자의 집에 도착한다. 전날 예약한 100% 사슴 가죽 재킷을 손에 넣은 그는 덤으로 디지털 캠코더까지 얻는다. 그는 금세 새 옷과 사랑에 빠지고, 뜻밖의 선물인 카메라로 창밖 풍경도 찍어본다. 그날 밤 재킷을 입고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던 조르주는 괜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직업을 묻는 이들에게 영화감독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바의 종업원 드니스(아델 에넬)는 그에게 공짜 술을 건네며 자신이 프로를 꿈꾸는 아마추어 영상 편집자라 귀띔하는데, 이에 조르주의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렇게 재킷을 향한 그의 집착도 지독해진다. 자기 목소리로 재킷에게 음성을 부여한 그는 재킷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이를 실현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영상이 모일수록, 조르주를 휘감는 사슴 가죽 의류도 늘어간다.
<디어스킨>은 당혹스러울 만큼 뻔뻔한 블랙코미디인 동시에 서늘한 호러이자 도발적인 메타 영
<디어스킨> 블랙코미디인 동시에 서늘한 호러이자 도발적인 메타 영화
-
진주만 습격을 다룬 할리우드영화가 또 한편 도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중립을 지키던 미국은 1941년 크리스마스를 몇주 앞둔 12월 7일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습격을 당한다. 미국을 참전하게 만든 이 사건은 할리우드에서 이미 마이클 베이 감독의 <진주만>(2001)에서부터 잭 스마이트 감독의 <미드웨이>(1976),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의 <도라 도라 도라>(1970) 등의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당시 해군이었던 존 포드 감독은 실제 미드웨이 해안 전투 당시 현장에 머물다가 전투 장면을 영상에 담아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도 했다. 이 장면은 영화에 묘사되기도 한다. <미드웨이>는 미국인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진주만 공습에서부터 태평양 전세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버린 미드웨이 전투를 일궈낸 해군과 공군의 숨은 노력을 담아낸 영화다.
작전 명령을 내리는 군 수뇌부와 적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공작기관, 그리고 해상에서 직접 전투에 임하는
<미드웨이> 진주만 습격을 다룬 할리우드영화
-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로 꼽히는 <캣츠>는 1981년 초연 이후 전세계 30여개 국가에서 공연된 스테디셀러다. T. S. 엘리엇의 동시집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은 1년에 단 하루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고양이를 뽑는 신비한 밤을 배경으로 한다. 단순한 스토리라인에 동화 같은 상상력으로 고양이의 매력을 표현한 작품인 만큼 독특한 율동과 다채로운 현대무용, 유명한 사운드트랙이 중심이 된다. 특히 늙고 초라한 고양이 그리자벨라, 극장 고양이 거스, 밤의 제왕 맥캐버티 등 개성 넘치는 고양이들이 각자의 사운드 넘버에 맞춰 경연을 벌이는 구성은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직유법에 가깝다.
<캣츠>만의 이러한 매력들은 영화화할 때 고스란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어 돌아온다. 서사보다는 퍼포먼스 중심인 데다 무대장치와 구성이 꽤 중요하며 무엇보다 고양이 분장에서 오는 위화감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관건이다. 예고편부터 구설에 올랐던 어색한 CG와 의인화, 이른바 불쾌한 골짜기
<캣츠> 상상력으로 고양이의 매력
-
천하를 호령하는 왕과 평생 궁궐에 갇힌 채 백성을 섬겨야 하는 사대부의 볼모는 가끔 이음동의어가 된다. 세종(한석규)이 유독 곡진히 아꼈던 장영실(최민식)이 관노 출신이면서 천재 과학자였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영광과 고난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시대의 한가운데에 선 두 남자. 이들이 함께 조선의 시계와 천문대를 발명하는 이야기인 <천문>은 그래서 필연과 운명의 드라마다. 두 사람의 크나큰 신분격차, 이들을 갈라놓으려는 조정의 끊임없는 방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함께하려는 절절한 이끌림이 멜로드라마의 고전적 구도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유능한 신하를 알아보는 감식안이 탁월했던 세종의 곁에는 뛰어난 인물이 많았지만, <천문>을 보고나면 그중에서도 유독 장영실과 특별했으리라는 낭만을 품지 않기가 어렵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행복> <호우시절>과 같은 사랑 이야기의 장인이자 전작 <덕혜옹주>에
<천문: 하늘에 묻는다> 허진호 감독 - 두 배우가 현장에서 속닥속닥… 믿고 맡기니 새로운 모습이 보였다
-
-
우린 여전히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이도를 잊지 않고 있다. 한 나라의 왕임에도 버럭 화를 내고 육두문자를 쓰길 주저하지 않는, 언제나 백성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배우 한석규의 프리즘을 관통하여 세상에 나온 바 있던 이도 덕분에 세종은 역사책 속 한없는 존경의 대상이었던 세종대왕이 아니라 보다 현대적인 세종의 이미지를 얻게 됐다. 그랬던 그가 영화로 다시 한번 세종을 연기한다는 것은 배우로서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터. “<뿌리 깊은 나무>를 찍을 때 이도에게 친구가 있다면 아마 장영실이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해본 적 있다. 너무나 많은 죽음을 목격하며 살았던 왕으로서 그분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평생 골몰했다. 때문에 드라마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장영실과 절친한 사이였을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역사가 보여주지 않는 당시의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허진호 감독의 <천문>이 주목하는 점은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세상 누
<천문: 하늘에 묻는다> 배우 한석규 – 강렬한 한 장면을 위하여
-
최민식 배우는 말한다. <천문>의 “장영실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다.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는 순수한 사람. 혹은 하늘에 미쳐 있는 사람. 함께 별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물. 그에게 필요한 건 성공이나 권세, 부귀영화가 아니라 그저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다”. 어느 날 세종은 그에게 설계도 하나 없이 그림만 보고 물시계를 만들어볼 것을 명한다. 제작과 발명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안전한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그 명령이 황망하고 무서운 일이었겠지만 장영실에겐 즐거운 기회였다. 세종이 꿈꾸면 장영실이 실현시킨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신분을 뛰어넘어 같은 꿈을 하늘에 그려나간 지음(知音)이 되었다.
허진호 감독의 <천문>은 세종과 장영실 사이 우리가 몰랐던 끈끈한 관계가 있었다는 상상으로 출발하는 영화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與,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천문: 하늘에 묻는다> 배우 최민식 – 우리 배우
-
<천문: 하늘에 묻는다>(이하 <천문>)는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관계를 바라보는 영화다. 조선의 시간과 하늘을 연 발명가들.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허진호 감독의 상상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역사를 그대로 옮겨 재현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빌려와 재해석하는 이 영화는 세종과 장영실의 끈끈하고 오래된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세종 역을 맡은 한석규 배우와 장영실을 연기한 최민식 배우의 캐스팅은 그래서 더없이 미덥고 정확하다. 연기라는 같은 꿈을 꾸고 있는 두 사람이 20년 만에 스크린에서 재회한 장면은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대부분을 채운다. 거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미묘한 시간을 절묘하게 포착해내는 허진호 감독의 감성이 더해져 그야말로 사람 냄새가 나는 진득한 영화로 거듭났다. 이번 기획에서는 최민식, 한석규 두 배우, 그리고 허진호 감독의 인터뷰를 통해
<천문: 하늘에 묻는다> 허진호 감독과 한석규•최민식 배우를 만나다 – 애정에 가까운 신의
-
새해가 밝았다. 2019년도 수많은 작품들이 관객들을 만났다. 그런데 올해 극장가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것이라 예상했지만, 끝내 모습을 비추지 않은 한국영화들이 있다. 후반 작업, 개봉 타이밍 논의 등 여러 이유로 2019년 개봉하지 못한 작품들이다. 전도연, 정우성, 윤여정 등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도 원래 2019년 개봉 예정이었지만 2020년 2월로 개봉이 미뤄진 사례다.
크랭크업 소식이 들려온 지 1년이 넘었지만, 공식 개봉일이 발표되지 않은 영화들도 아직 남아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팬들의 목이 1m가 되어 버렸다는 작품들. 부디 2020년에는 안정적으로 개봉일을 확정해 관객들을 마주하기를 바라며, 2019년 개봉하지 못한 한국영화 다섯 편을 알아봤다.
<검객>
첫 번째는 2017년 9월 크랭크업, 촬영을 완료한 지 벌써 2년이 넘어간 <검객>이다.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던 혼란스러운 시기의 조
목이 빠질 것 같아요! 다가올 2019년 미개봉 한국영화 5
-
한국과 중국의 젊은 영화감독들이 상호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중청년꿈키움단편영화제가 어느덧 6회를 맞이했다. 베이징 CGV인디고점에서 지난 12월 11일부터 13일까지 사흘간 열린 이번 영화제는 CJ문화재단이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CJ 중국 본사와 함께하는 글로벌 문화공헌 사업이다. 한중 양국의 영화감독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또 현지에서 초청작 상영은 물론 시네마클래스도 여는 등 영화제가 여러모로 내실을 키워나가는 모습을 <씨네21>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단편경쟁부문을 두어 젊은 영화감독들에게 상금도 수여한 이번 영화제는 영화언어야말로 국경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한국과 중국의 2019년 극장가 박스오피스 풍경은 예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한국 극장가에서는 디즈니 영화 3편을 포함해 모두 5편의 천만 관객 돌파 영화가 등장해 역대 박스오피스 순위 리스트를 갱신했다. 중국 극장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올해 초 46억위안 흥행 수익을 돌파하며
제6회 한중청년꿈키움단편영화제 밀착취재
-
갈 길이 멀지만, 느리게나마 균형추가 맞춰지는 길목에 선 상징적인 해였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상업영화 평균 개봉작 76편 중 여성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7.9%에 불과했지만 2019년은 한국영화 흥행 순위 10위권 중 네 작품이 여성감독의 연출작인 반전의 해였다. <82년생 김지영>(367만명), <돈>(338만명), <가장 보통의 연애>(292만명), <말모이>(281만명)의 스코어는 역대 여성감독 흥행 순위 3, 4, 6, 7위에 해당하며, 모두 감독의 첫 장편영화라는 점에서 충무로의 미래까지 기대케 한다(이상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12월 18일 기준). 또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영평 10선’,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각본상 등을 받으며 여성감독이 연출한 상업영화 중 올해 시상식에 가장 자주 소환된 <생일>은 이창동 감독의 연출부를 거친 이종언 감독의 데뷔작이다. 한국영화계의 기념비적인 한해를
2019년 주목받은 신진 여성 상업영화 감독 3인의 연말 결산 토크 <돈> 박누리 감독•<생일> 이종언 감독•<82년생 김지영> 김도영 감독, “몇년 후에는 여성감독 대담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
천만 영화가 무려 5편이나 나왔다. 역대 가장 많은 관객이 극장가를 찾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겨울과 올해 초만 해도 ‘한국영화 위기설’이 모락모락 피어오른 걸 떠올려보면 2019년 한해동안 쏟아진 박스오피스 기록이나 성과들은 예상 밖이다. 지난 12월5일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올해 한국 영화산업을 되돌아보는 토크쇼인 ‘영화 배급과 흥행’(주최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아카데미)이 열렸다. 김성훈 <씨네21> 기자가 진행한 이 토크쇼는 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전 시네마서비스 배급 이사)와 최재원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로컬 프로덕션 대표가 참석해 그 어느 때보다 화제가 많았던 올해 한국 영화산업의 주요 순간들을 배급과 흥행 전략의 관점으로 복기했다. 장장 3시간이나 진행된 이날 대담을 7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올해 한국 영화산업은 정말 호황일까
2019년은 ‘천만 영화’가 가장 많이 나온 해다. <
7가지 키워드로 돌아보는 2019년 한국영화 배급과 흥행
-
시대가 변했다. 2018년 연말 베스트영화를 선정할 때 평자들의 요구가 있었다. 2차 매체와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소개된 좋은 영화가 많으니 이제 선정 대상을 늘려야 한다는 불만이었다. 겨우 1년 만에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굳이 범주를 늘리지 않아도 이미 넷플릭스 영화들이 올해의 영화 1, 2, 3위를 모두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한정적이나마 극장 개봉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무서운 일이다. 그만큼 시네마의 가치를 충실히 구현하는 작품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중심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현상의 방증이기 때문이다. 시네마란 무엇인가. 지난해 겨울 <로마>가 화제의 중심에 놓였다면 올해는 <아이리시맨>과 <결혼 이야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로마>와 <아이리시맨>은 온전한 감상을 위해 극장에서 본다는 체험이 매우 중요한 영화이기에 이와 같은 모순적 상황 자체가 적지 않은 질문들을 촉발시킨
[2019년 총결산⑬] 올해의 외국영화 총평, 6위부터 10위까지의 영화들
-
올해의 외국영화 1위 <아이리시맨>
영화란 무엇인가. 어떤 영화들은 종종 한편의 의미를 넘어 전체로 확장되는 화두를 던지곤 한다. <아이리시맨>이 마틴 스코시즈의 최고작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아이리시맨>은 2019년에 도착함으로써 “마틴 스코시즈 사가의 정점”(김봉석)에 발을 디딘다. 다시,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면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아이리시맨>은 바로 그 “시간이 만들어낸 역작”(장영엽)이다. 마틴 스코시즈는 미국의 역사와 개인사를 겹쳐놓은 이 영화를 통해 “자신들이 손수 쌓아올린 신화를 주름진 육체로 소멸시킨다. 동시에 끝까지 품위 있는 자태로 영화의 환영성을 완강히 지탱해내는 괴력을 발휘한다”.(홍은미) “지나치게 늦게 나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반드시 극장에서 보아야 할 시네마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듀나)이란 평은 거기에 기인한다. 사실 “<대부> 이후 갱스터는 미국 역사를
[2019년 총결산⑫] 2019 외국영화 베스트 5
-
순수한 영화적 즐거움을 기대하며 극장을 찾은 관객에게, <기생충>의 서사가 그 기대에 걸맞은 쾌감을 선사했음은 ‘올해의 각본’이라는 투표 결과가 잘 보여주고 있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자기 학대와 정신분열”에 시달려 고충이 많았다는 봉준호 감독에게 <기생충>은 남다른 작품이었다. “2017년 가을,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평화롭고 잔잔하고 행복했다.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시나리오 전체의 구조와 디테일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서, 어떻게 하면 다음에도 이렇게 쓸 수 있을까, 내가 그 시기에 먹은 음식이 뭐였는지 생각할 정도다. (웃음)” 봉준호 감독과 함께 <기생충> 각본을 쓴 한진원 작가는 “각 세대의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시선이 있기 마련이고, 나 또한 우리 세대의 시선으로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 힘쓰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2019년 총결산⑪] 올해의 각본 - <기생충> 봉준호•한진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