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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1일 밤. 신상옥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멜로와 사극, 코미디와 무협, 전쟁물과 심지어 서부극과 뮤지컬까지 섭렵하며 오로지 관객만을 생각했던 그는 한국의 하워드 혹스라 불려 마땅한 장인이었지만, 기자가 직접 보았던 그의 영화는 <성춘향>과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두편뿐이었다. 생전의 고인을 인터뷰하는 영광 또한 누린 바 없다. 70년대생 영화기자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는 신상옥 감독이 주름잡았던 한국영화의 전성기와 그 시절 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너무 늦은 취재로 가능한 방식은 그리 많지 않다. 빈소와 장지를 찾은 지인들에게,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청했다. 지나친 무지와 게으름이 못내 부끄럽지만 이를 만회할 수 있는 것은 진심어린 관심뿐이었다.
장지에서 돌아와 신상옥 감독의 일대기가 한·미 합작으로 스크린에 옮겨진다는 뉴스를 접했다. 한국영화·현대사의 축소판과도 같았던 고인의 인생이었으니 어떤 상업영화
거장의 떠나는 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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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층> 역시 12층의 공공주택 아파트에 살고 있는 몇몇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하릴없이 커피숍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 남자들로부터, 살이 찐 딸에 대한 언어적 학대를 퍼붓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는 딸, 중국 출신의 아내와 문제를 겪고 있는 아구라는 남자 그리고 자살 이후에도 아파트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청년. 청년의 유령은 사람들의 일상에 개입하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등장해 그들에게 눈길을 준다. 그러나 유령론(hauntology)을 도입했다고 보기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죽은 남자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너무 없고, 또 자살을 생각하는 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일종의 만화경처럼 영화는 12층 아파트와 그 주변을 보여준다.
에릭 쿠의 위 영화 두편은 애도를 끝내지 못하고 시체애호증과 혼령에 빠져 있는 멜랑콜리아 상태의 사람들을 보여준다. 둘 다 죽음에 닿아 있고 삶의 활기에 개입하지는 못한다. 우울증
에릭 쿠의 작품세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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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있어줘>는 테레사 첸이라는, 청각장애를 이기고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 여인에게 헌정된 영화다. 그녀와 전혀 관계없는 여러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들이 테레사 첸의 이야기로 절묘하게 흘러간다. 감정의 결이 애잔하게, 쓸쓸하게 흘러가는 이 영화는 추락장면에 이르러 극적 순간을 맞는다. 압축 성장을 겪은 동아시아 도시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보여주는 추락의 이미지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에릭 쿠의 영화가 진단한 싱가포르는 어떤 증상을 앓고 있는 곳인가. 김소영 영상원 교수의 글을 통해 <내 곁에 있어줘>로 호평받은, 싱가포르의 영화적 페르소나로 인정받은 에릭 쿠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혹시 싱가포르에 가게 되면 DVD숍에 들러보라. 그리고 에릭 쿠 영화가 있는지 물어보라. 자부심에 찬 얼굴로 판매원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론 있지요. 박스 세트를 원하세요?” 그/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면로>(Mee Pok Man, 1995)와 <
에릭 쿠의 작품세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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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총, 칼-화끈한 그녀들의 무기
총기나 칼을 구하기 쉽다고 해서 언니들을 함부로 할 수 있다는 망상을 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킬 빌>을 보면 완력이나 기술에서 남자가 여자를 압도한다는 건 환상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자기보다 연약한 여자를 강간할 수 있다고 믿는 우매한 마초들은 생명보험에 가입할 것을 권한다. 밧줄로 묶은 뒤 자기 마음껏 남의 육체를 학대하는 취향을 가졌다면 더욱 그렇다. 예방 차원으로 우선 <몬스터>를 보기 바란다. 에이린은 신체의 다부짐, 빠른 조건반사, 가차 없는 확인사살 등 모든 부분에서 멍청한 마초들을 압도한다. 요즘 언니들은 특히, 자기보다 신분이 낮거나,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고 믿는 인격장애자들에게 매우 잔인하고 살벌하다. 에이린은 강간범이 품은 밧줄의 환상을 총알로 분쇄해버린다.
<델마와 루이스>에서 델마 대신 총을 겨눈 루이스도 에이린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강간범
마초 잡는 여인들의 맞춤 병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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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이 날로 살벌해지고 있다. 달콤한 줄만 알았던 언니들이 살벌해진다는 건 그저 세상이 변했다는 정도의 풍문이 아니다. 마초들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고 살벌하게 끝나고 있다. 단지 마초들이 반성문 정도로 끝낼 문제가 아니라, 아예 전향서를 써야 할 심각한 상황이 닥친 것이다. 평소 언니들을 무시해온 인류의 오랜 전통에 기대 편하게 살았다면 이 기회에 전향해야 한다. 언니들, 이제는 당하지 않고 복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초들이여, 더러운 성질 버리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 얻을 건 생명이요, 잃을 건 마초의 더러운 전통밖에 없다. (스포일러 지뢰밭이 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선 이 지뢰밭을 건너야 한다.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또 있겠느니.)
1. 쥐약, 독약-차분한 그녀들의 비상무기
마초들이 저지르는 잘못이 어디 한 둘로 그칠까마는, 특히 함부로 껄떡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잘못하면 ‘골’로 간다. 마초들의 생각은 늘 언제나 똑같다. 어
마초 잡는 여인들의 맞춤 병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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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랩먼트>와 <종횡사해>
연도/ 1999년과 1991년
피해자/ 모모 박물관들
피해물/ 중국 가면, 명화 <할렘의 여시종>
용의자/ 미술품 전문 도둑 로버트 맥두겔과 젊고 아름다운 신참도둑 버지니아 베이커, 역시 명화 전문 도둑 3인조(장국영, 주윤발, 종초홍)
사건경과/ 두 케이스 모두 비슷하다. 맥두겔-베이커 콤비와 중국인 3인조의 감쪽같은 도둑질은 모두 애크러바틱한 몸놀림 덕분이다. 섹시한 미녀 강도 버지니아 베이커는 중국 가면을 훔치기 위해 박물관의 보호 레이저 시스템과 똑같은 형태의 그물을 설치했고, 그것을 통과하는 피나는 연습을 통해 실망처럼 뻗어 있는 레이저 철조망을 귀신처럼 빠져나갔다. 중국인 3인조가 <할렘의 여시종>을 훔친 방법도 동일하다. 이들 역시 그림이 걸린 요새로 잠입해 레이저 경보 시스템이 허공에 그려놓은 레이저를 요리조리 넘어가버렸다. 명품 도둑질의 세계도 이제 늘씬한 몸짱들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클루조 경감의 사건 보고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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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클루조 경감. 위대한 프랑스의 지성을 물려받은 남자다. 마침 핑크 팬더 다이아몬드도 무사히 주인의 손에 돌려줬으니 당분간은 니스 해변에 발 담그고 바캉스나 즐기면 될 일. 그런데, 뉴욕 한가운데서 또다시 사건이 터졌다고 한다. 이번에 나를 부른 것은 번번히 사건을 미해결인 채 방치하는 무능력한 뉴욕경찰. 물론 살인마, 은행강도, 심지어 외계인이나 방사능에 오염된 거대 괴물 사건도 해결해야 하는 뉴욕의 경찰들로서는 위대한 프랑스의 지성이 필요할 법도 하다. 어쨌거나 이번 사건은 좀 흥미로운데가 있다. 자칭 ‘인사이드 맨’이라는 강도 일당이 월스트리트 한가운데 위치한 은행을 장악하고는 도망칠 점보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강도들이 인질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뉴욕 경찰로서는 누가 누군지 구분을 할 수도 없는 모양. 그런데 이거 참 이상하다. 냄새가 난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은행 금고의 돈이 아닐 것이라는 이상한 냄새 말이다. 어쨌거나 2시간 뒤면 뉴욕행 비행기가 출발할 예정이
클루조 경감의 사건 보고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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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MPING POINT_<워터보이즈> vs <가면 라이더 쿠우가>
2001년, 그해 여름은 어느 때보다 유쾌했다. 뜨거운 햇살과 야외수영장, 그리고 파란색 삼각 수영복. 아찔한 패션의 이들은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고교 3학년 남학생들이지만, 수중발레와 마지막 여름방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아무한테도 뒤지지 않았다. “고교 시절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지금이 아니면 수중발레는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외치는 청춘의 목소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영화는 일본 내에서 크게 히트했고, 이후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쓰마부키 사토시는 이 영화로 확실한 ‘워터보이’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워터보이즈>로 ‘25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신인상과 우수 남우주연상을 차지했으며, <블랙잭에게 안부를>을 통해서는 TV드라마에서 첫 주연을 맡게 된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닌 그는 주로 순수한 열정을 지닌
쓰마부키 사토시 vs 오다기리 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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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사방이 꽃 천지다. 여의도엔 벚꽃이 만발하고, 뒷동산엔 개나리와 진달래가 노랗고 붉은색의 향연을 보여준다. 봄처녀의 마음이 싱숭생숭할 만도 하다. 게다가 올해는 유달리 극장가의 꽃구경이 볼만했다. <메종 드 히미코>의 게이청년 하루히코, <나나>의 기타리스트 노부, <오늘의 사건사고>의 영화감독 지망생 나카자와까지. 일류(日流)의 기운이 세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국적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귀차니즘에 꽃구경은 엄두도 내지 못할 당신을 위해 준비했다. 웃는 얼굴이 아름다운 쓰마부키 사토시와 어둠 속에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는 남자 오다기리 조. 두 미청년이 내뿜는 향연을 맘껏 즐기시기 바란다. 꽃보다 남자라 하지 않았던가.
START POINT_오락실 VS 영화관
쓰마부키 사토시의 출발은 로또 같다. 고등학생 무렵, 우연히 게임센터에 간 그는 오디션용 프로그램에 응시한다. ‘합격’이란 표시가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종이를 오
쓰마부키 사토시 vs 오다기리 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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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연의 생명이 꿈틀대는 아프리카는 환상과 마법의 땅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기가 죽으면 귀신 ‘아비쿠’의 소행이라 생각한다. 처음부터 아기는 없었다. 아비쿠가 인간을 상심시키려고 아기의 모습을 하고 태어나 죽어버린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에게 아비쿠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이런 상상은 자식의 죽음에서 오는 극렬한 통증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몸짓이다. 생명을 앗아가고 작물을 망쳐놓는 무심한 자연에 대한 일종의 방어인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프랑스 감독 미셸 오슬로는 자신의 첫 장편 <키리쿠와 마녀>를 통해 아프리카적 세계관과 객관적 사고방식을 사려깊게 섞어냈다. 아프리카 마을에 한뼘도 안 되는 아기가 태어난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말을 하더니 스스로 엄마 뱃속에서 나와 자신이 ‘키리쿠’라고 선언한다. 기개가 뛰어난 키리쿠는 마을에 불운을 가져오는 마녀 카라바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카라바는 왜 그렇게 못됐죠?” 사람들
아이들을 위해 준비된 옛날이야기, <키리쿠, 키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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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로케로케로. 타마타마타마. 도로도로도로. 이 요상한 반복음에 웃어젖힐 수 있다면 그건 <개구리 중사 케로로>의 팬이라는 뜻이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는 1999년 만화주간지에 연재되면서 700만부의 단행본을 팔아치우고, 2004년 <TV도쿄>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면서 일본의 문화현상이 된 애니메이션. 지구를 침략하러 왔다가 정착하게 된 외계 개구리들의 성공담은 <포케몬>이나 <유희왕>과는 조금 다르다. 보기와는 달리 만만치 않은 개그의 수준이 주요 타깃층인 아이들뿐만 아니라 열혈 성인 마니아들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 최종병기 키루루>는 TV시리즈의 설정을 관객이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시작한다. 케로로는 건프라(건담 프라모델)를 사서 돌아오는 중 괴상한 사당 안에 놓여 있는 단지를 깨뜨린다. 문제는 단지 속에 예로부터 전해져온 케론별의 최종병기 키루루가 봉인되어 있었다는 사실
진정한 키덜트 시대의 아이콘, <개구리 중사 케로로: 최종병기 키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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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매력은 단순하다. ‘불가능한 임무’라는 제목 그대로, 이단 헌트가 처한 상황은 언제나 극한이다. 스파이 업무가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단 헌트의 상황은 제임스 본드처럼 여유롭지 않다. 007 시리즈가 낭만적인 스파이영화라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일종의 스파이 극기훈련 코스다. 함정에 들어가거나 이중간첩으로 몰리는 것 정도는 익숙한 일이고, <미션 임파서블3>에서는 일상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한다. ‘누구나 가정과 일의 균형을 맞추는 큰 도전과 맞닥뜨린다.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는 톰 크루즈의 말처럼, <미션 임파서블3>에서는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극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한 인간에게 닥친 ‘위기’라는 점에서 본다면, <미션 임파서블3>는 최고의 난이도라 할 수 있다.
약혼녀 줄리아(미셸 모나한)와 결혼을 앞둔 이단(톰 크루즈)은
한 인간에게 닥친 최고난이도의 ‘위기’, <미션 임파서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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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다양하다. 네덜란드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의 멜라니(레이첼 블레이크)는 그저 그런 데이트와 따분한 식당일로 일상을 반복하며 사는 중년 여성이다. 그녀는 여느 날 밤처럼 친구들과 바에 놀러갔다가 알 수 없는 눈빛을 지닌 매력적인 남자(샘 닐)와 조우한다. 멜라니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그가 사는 외딴섬까지 간다. 고립된 곳에서 남자는 멜라니에게 대번에 사랑한다고 말한다. 결혼하고 싶다고 한다. 멜라니가 웃자, 남자는 내 말이 우습냐며 그녀를 거세게 잡아 때려눕힌다. 샘 닐이 연기한 ‘남자’는 극중에서 끝끝내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완전한 이방인’이다. 나를 몰래 관찰하며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키워온 무서운 이방인과 순진한 여자. 감금자와 탈출자의 구도. <퍼펙트 스트레인저>의 초반부는 쉽게 <미저리>를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정작 광기를 보여주는 인물은 멜라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역전된 뒤 멜
광기어린 사랑의 테마, <퍼펙트 스트레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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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섹스를 알고 원하는 걸 얻는다.’ 라일라(로렌 리 스미스)는 자기 말대로 자신의 욕망을 구체적으로 알고, 그걸 어디에서 언제쯤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안다. 술집에서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고, 남자들로부터는 선망을 여자들로부터는 질투를 얻으며, 그걸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해 그는 숙련자다. 라일라는 자신의 복잡한 판타지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도 노련하다. 이를테면, 자신이 술집에서 고른 남자 데이비드가 애인과 함께 은밀하게 훔쳐보고 있는데 노상에서 즐기며 섹스를 하는 것이다. 이때 라일라와 섹스하는 남자는 라일라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 ‘사정하지 마’, ‘만지지 마’ 같은 명령을 내리고 그걸 관철시킬 정도로 라일라는 매력적이며 일방통행이다.
그런데 라일라도, 라일라를 훔쳐보는 우리도 모르는 게 있다. 욕망이 이성의 통제를 거부한다는 것, 타인의 욕망은 더더군다나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를 만족시켰는가 싶으면 어느새 상대가 도망가고, 내가 만족했다 싶으면 내
쾌락을 찾을 것인가, 사랑을 지킬 것인가, <라이 위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