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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매체를 가지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누군가가 듣고 읽는다는 것은,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관심의 총량을 뛰어넘는 말과 글이 쏟아지는 시대에 누릴 수 있는 큰 행운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할 수 있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을 설득할 수 있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이 행운에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나의 말과 글을 듣는 의사소통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는 책임이다.
3년이 조금 넘게 이 지면에 글을 쓰면서 매번 부딪혔던 것은 (기술적 부족함도 있지만) 소시민적 두려움이었다. 이 말을 해도 될까, 이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 그런 것들. 글을 쓰는 내내 공론장에 진입하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돌이켜보면 이 지면을 수락한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유튜브를 시작한 때부터 나는 이미 대중에게 공개된 공론장의 일원이었다. 그 사실을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글을 쓰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길게 아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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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의 클래식이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모스카레토 작가가 쓴 동명의 인기 웹소설, 웹툰을 바탕으로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메이드 인 루프탑>의 김조광수 감독이 재해석한 왓챠 익스클루시브 공개작 <신입사원>이다. 김조광수 감독의 첫 BL 시리즈물 연출에 불을 지핀 존재는 현실에서부터 이미 달라도 너무 다른 두명의 신인배우, 권혁과 문지용이었다. 두 사람은 2022년 1월, 서울의 한 막걸릿집에서 감독의 주선하에 처음 만났다. 권혁은 “문지용의 날렵한 턱선과 너무 잘생긴 외모에 충격을 받았고”, 문지용은 “권혁의 엄청나게 큰 키와 찰랑거리는 장발을 보고” 의외의 감탄사를 뱉었다. 유능한 광고회사 파트장으로 냉철한 첫인상을 뽐내는 상사‘공’ 김종찬 역의 권혁은 특히 실제 이미지와 캐릭터간 거리가 큰 쪽이다. “막상 형과 대화해보니 순둥순둥, 몽글몽글 그 자체여서 처음엔 어떻게 김종찬이 될 수 있을까 염려될 지경이었는데, 결국 완벽하게 해냈다.
[WHO ARE YOU] '신입사원' 권혁, 문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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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돌아왔다. 전국 고교 농구대회에서 북산고 농구부는 전국 최강인 산왕공고와 맞붙는다. 가드 송태섭(엄상현)은 팀의 사령탑으로서 경기를 조율하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어린 시절 송태섭은 형에게서 농구를 배운다. “넘어진 다음이 중요해. 피하지 마”라며 어깨를 다독여주던 형은 어느 날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농구 유망주로 이름을 날렸던 형의 빈자리는 송태섭을 비롯한 가족 모두에게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다. 다시 시간은 현재, 북산고는 초반에 각자의 장기를 발휘해 최강 산왕공고를 몰아붙인다. 하지만 왕자 산왕은 후반 들어 진면목을 발휘하고 어느덧 후반전 들어 20여점 차로 뒤처진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북산고 멤버들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최후의 투지를 발휘한다.
1996년 연재 종료한 <슬램덩크>가 무려 26년 만에 극장판을 선보인다.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각본과 연출을 맡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제목 그대로 ‘처음’에 도전하는 작품이다. 그간 영
[리뷰] ‘더 퍼스트 슬램덩크’, 꺾이지 않는 마음, 변하지 않는 감동. 움직이는 만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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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초로 대만이 동성결혼을 법제화한 이후, 레즈비언 결혼식이 거행되던 한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밍(임진희)과 팅팅(정여희)은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에 동승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만남은 학창 시절을 상기시키고, 오랫동안 묻어둔 기억을 끄집어낸다.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고등학교 시절, 이밍은 배구 선수로 활약하며 많은 관중의 환호를 받는다. 활기찬 이밍을 보고 한눈에 반한 팅팅은 함께 배구부 활동을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힘겨운 연습이 끝난 뒤 하교를 같이하며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미묘한 감정선에 진입하게 된다. 서로의 간격이 완전히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 모순적이게도 둘은 가장 멀어진다. 자신의 열망과 감정을 수용하는 법을 배운 적 없는 10대의 선택이었다.
청소년기의 서툴고 풋풋한 첫사랑을 회자하는 공식을 따른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은 한때 가장 의지하고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 일상의 균열
[리뷰]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 구태여 돌담을 세워도 범람하는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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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남편을 여읜 에이미(나오미 왓츠)는 중학생 아들 노아(콜튼 고보)와 초등학생 딸 에밀리(시에라 말트비)와 교외에서 살아간다. 어느 날 노아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며 에이미에게 반항하고 에이미는 방 안의 노아를 뒤로한 채 조깅에 나선다. 에이미는 홀로 운동하는 중에도 회사 업무, 부모의 연락 등 신경 쓸 일들이 많다. 신경증적 사건이 다발하던 에이미의 휴대전화에 이내 충격적인 내용을 담은 긴급 경보 문자가 발송된다. 노아가 다니는 중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고 용의자가 학생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몇분 지나지 않아 에이미는 자신이 집을 나선 사이 노아가 등교했고, 총기 테러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음을 알게 된다. 에이미는 오로지 휴대전화 한대에 의지한 채 산간을 가로지르고 협곡을 건너며 노아를 향해 달린다.
<패닉 런>은 84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쉴 새 없이 관객을 몰아세우길 시도한다. 와중에 에이미는 아들을 구하려는 어머니 역할과
[리뷰] ‘패닉 런’, 영화가 전속력으로 달릴수록 관객은 심드렁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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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대도 ‘장화신은 고양이’(안토니오 반데라스)는 거인과 결투를 벌이던 중 사망하지만 이내 다시 부활한다. 고양이에겐 9개의 목숨이 있기 때문이다. 여분의 목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장화신은 고양이는 8개의 목숨이 전부 소진돼 단 하나의 목숨만 남았음을 알게 된다. 죽음의 공포는 끊임없이 장화신은 고양이를 엄습해오고 남은 하나의 목숨이라도 부지하고자 그는 인간 가정의 반려묘로 여생을 살기로 한다. 반려묘 생활에 적응할 무렵 장화신은 고양이는 입양 가정에서 고양이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강아지 페로(하비 기옌)를 만나고, 과거의 연적 키티 말랑손(살마 아예크)과 재회한다. 이들은 소원을 들어주는 소원별의 존재를 알게 되고 각자의 소원 성취를 위해 어둠의 숲으로 모험을 떠난다. 그러나 소원별을 노리는 것은 장화신은 고양이 일행뿐만이 아니다. 골디락스(플로렌스 퓨)와 곰 세 마리, 리틀 잭 호너(존 멀레이니) 등 동화 속 다른 주인공들도 소원별을 노리며 어둠의 숲으로
[리뷰] ‘장화 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 묘생 9회차 고양이의 호쾌한 메멘토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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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배우이자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의 기삿거리가 되는 슈퍼스타 박강(권상우)의 하루는 오늘도 다이내믹하다. 가장 큰 문제는 박강의 잃어버린 초심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박강의 거리낌 없는 행동은 자연스레 촬영장에서 스탭들을 향한 갑질로 이어진다. 물론 이를 수습하는 것은 과거엔 절친한 동료 연극 배우였으나 현재는 박강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조윤(오정세)의 몫이다. 조윤의 고충과 상관없이 박강은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박강은 외롭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열린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첫사랑 수현(이민정)을 떠올린다. ‘그때 나를 출세하게 해준 작품을 선택하는 대신 수현을 잡았더라면.’ 그런 생각으로 잠이 든 박강에게 다음날 아침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잠들기 전 했던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이다. 수현은 아내가 되어 있고 처음 보는 두 아이가 자신을 아빠라고 부른다. 더 황당한 것은 자신이 아무도 모르는 무명배우라는 것과 친구 조윤은 톱스타
[리뷰] ‘스위치’, 웰메이드 가족영화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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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학자 알리시아(틸다 스윈튼)는 인류의 모든 이야기에 관심이 있지만 정작 이야기 외엔 무관심한 사람이다. 가족도 욕망도 없이 홀로 지내는 삶에 적당히 만족감을 느끼는 알리시아는 이스탄불의 골동품 상점에서 신비로운 유리병을 발견한다. 호텔 스위트룸에서 유리병을 닦던 알리시아 앞에 거대한 몸집의 정령 지니(이드리스 엘바)가 나타난다. 유리병의 정령 지니는 알리시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빌라고 제안하지만 신중한 서사학자는 우연한 행운으로 소원을 비는 이야기들의 결말이 대부분 비극적이었다는 걸 기억해낸다. 주인의 세 가지 소원을 이뤄야만 자유의 몸이 되는 지니는 알리시아에게 소원을 보챈다. 깊은 사랑과 어리석은 갈망 때문에 두번이나 유리병에 갇히고 3000년 만에 세 번째 주인을 만난 지니는 알리시아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지 밀러 감독의 7년 만의 신작 <3000년의 기다림>은 A. S. 바이엇의 단편소설 <나이팅게일 눈 속의 정령>을
[리뷰] ‘3000년의 기다림’, 과장되고 화려하다. 욕망의 서사로 재구성한 천일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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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좋아. 근데 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영화 안에서 가장 마음에 든 대사를 묻자 배우 정여희가 꼽은 말이다. 저 두 마디가 몹시 강인하지만 동시에 나약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덧붙였다. 자신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명확히 알고 확신하는 것과 상대방도 나와 같길 바라며 공격적으로 의중을 살피는 치졸함 사이에 어떤 간극이 있는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다. 이렇게 영화에서 팅팅이 되기까지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서면으로 건넸다. 그리고 빽빽하게 채워진 회신을 받았을 때 이 인터뷰가 두 사람을 향한 배우 정여희의 애틋한 서신이란 걸 알았다.
-작품에 합류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먼저 덩이한 감독님이 두 학생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진부하지 않게 풀어낸 점에 이끌렸다. 감독님은 관객이 예상할 수 있는 흔한 설정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배우들이 창의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화학작용을 만들어내도록 노력하셨다. 또 나의 외모나 지금까지 연기해온 이력에
[인터뷰]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 배우 정여희, “주체적인 사랑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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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대만에서 6부작 미니시리즈로 처음 공개된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은 섬세한 감정선과 주연배우의 완벽한 호흡으로 대중적인 관심을 모으면서 2022 금종상 시상식에서 각본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BL(Boy’s Love)의 높은 수요와 함께 GL(Girl’s Love)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콘텐츠 시장을 겨냥한 다양한 작품이 나오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2015년만 해도 퀴어 콘텐츠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JTBC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의 경우, 여고생간 키스 장면을 송출한 이후 방송심의위원회를 통해 경고 조치를 받기도 했다. 이 법정 제재는 시청자의 민원으로 소위원회가 접수되고,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27조(품위 유지) 제5호, 제43조(어린이 및 청소년의 정서함양) 제1항을 위반한 근거로 의결됐다. 8년여 전만 해도 많은 이들에게 퀴어 콘텐츠는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인 소재였다.
한국 콘텐츠 시장에서 GL의 위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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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간의 사랑을 말하는 GL(Girl’s Love)은 ‘백합물’이라 불리기도 한다. 명칭에 대한 다양한 유래와 정의가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그중 가장 눈여겨볼 점은 많은 물성 중 왜 ‘백합’이라는 꽃을 선택했느냐다. 불투명한 시점부터 상대방에게 시나브로 빠져버려서는, 나 자신부터 상대방까지 부정하고 의심하다가 결국 인정에 다다르는 GL의 기본 스토리 구조를 생각하면 은은하게 몸에 배는 꽃향기를 장르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메타포로 이해할 수 있다. 학창 시절 배구부 선후배 사이였던 이밍(임진희)과 팅팅(정여희)은 우연한 재회를 빌미로 15년 전 감춰두었던 비밀을 다시 꺼내든다. 그 비밀에는 어떤 꽃향기가 배어 있을까.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이 만든 조각들을 그러모았다.
지인의 결혼식을 방문한 이밍(임진희)은 같은 식장에서 레즈비언 결혼식을 우연히 보게 된다. 2019년 아시아 최초로 대만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이후, 여전히 흔하진 않지만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랑은 은은한 꽃향기를 타고 : 대만 퀴어 로맨스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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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는 한여름처럼 보이는 이 사진은 2009년 12월28일, 한겨울의 경기도 어느 펜션에서 촬영했던 영화 <마음이2>의 한 장면이다. 극중 동욱을 연기한 송중기와 마음이 역을 맡은 달이, 짜오밍 역을 맡은 중국 배우 장한의 커플 선글라스가 돋보이는 근사한 장면이지만, 실제로는 펜션 앞마당에 전날 내린 눈이 쌓여 있을 정도로 추웠다.
[ARCHIVE] 송중기의 계절은 뜨거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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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드라마 <시그널>
<슈룹>을 함께한 김혜수 선배와 김다영 편집감독님이 작업한 작품이라 다시 보고 있다. 김다영 감독님에게 <시그널>을 보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블루레이를 선물하겠다고 하셨다. 사인까지 함께 받을 예정이다. <시그널>의 가슴 미어지는 스토리라인이 무척 좋았다.
유튜브 채널 <tvN drama>
<슈룹> 메이킹 영상을 종종 찾아본다. 현장에서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제스처를 취하는지 알 수 없는데 메이킹 영상을 보면 인지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가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무의식적인 모습을 보기도 한다. (웃음) 그래도 23살 문상민을 느낄 수 있어 촬영장에서 더 편히 있을 수 있게 됐다.
영화 <플립>
[LIST] 배우 문상민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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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도 극장가에 부는 지역영화의 흥행 바람은 리샤브 쉐티 감독, 각본, 주연의 칸나다어 영화 <칸타라>가 이끄는 중이다. 발리우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제이 데븐 주연의 범죄 스릴러 <드리샴2>가 지역영화의 흥행에 화답하며 발리우드의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악샤이 쿠마르와 함께 개근상을 받아야 할 대표적인 배우라면 어제이 데븐을 빼놓을 수 없는데, 텔루구어 영화로 올해의 흥행작 중 하나인 <RRR: 라이즈 로어 리볼트>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던 그는 <드리샴2>로 발리우드의 자존심을 지켰다. 영화는 전작에 이어 뜻하지 않게 범죄에 연루된 가족을 지키는 아버지의 분투를 그린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영화가 지역영화의 발리우드 리메이크작이라는 점이다. 2013년 동명의 말라얄람어 영화를 리메이크한 <드리샴>(2015)과 마찬가지로, <드리샴2>는 2021년 말라얄람어 속편을 리메이크했다. 2013년 지역영화
[델리] 발리우드의 카운터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