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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광’이라는 이랑 감독의 노트에는 영화의 신, 캐릭터 설정에 관한 정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기자의 질문에 틈틈이 메모를 살피고 보여주며 답을 이어나갔다. 그의 신작 <잘 봤다는 말 대신>은 독립예술영화 활성화를 위해 인디그라운드에서 마련한 ‘인디플렉스’ 캠페인 시즌4의 일환으로 제작된 단편영화다.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독립영화감독 김새벽과 공민정은 ‘영화 잘 봤다’는 상투적인 평을 대신할 적절한 말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했으나 이랑 감독은 영상과 글, 그림과 음악을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앨범 《늑대가 나타났다》로 지난해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상을 수상한 뒤 “이제 영화를 찍을 때”라고 느꼈다는 그에게 대화를 청했다.
- 캠페인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영화를 찍기 어려워 웹드라마 연출을 주로 했다. 그 밖에 예술 분야에서 입지를 잘 다지고 싶은 마음에 음악
[인터뷰] 이야기를 꺼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잘 봤다는 말 대신’ 이랑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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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던 타에코(기무라 후미노)에게 예기치 않은 비극이 닥친다. 아들 케이타, 남편 지로(나가야마 겐토)와 함께하던 시간이 무너지며 전에 없던 슬픔에 잠긴 타에코. 그때 홀연히 나타난 전남편 신지(수나다 아톰)로 인해 타에코는 충동적인 감정에 사로잡힌다. <러브 라이프>의 후카다 고지 감독은 선과 악의 얼굴을 겹쳐놓고, 빛과 그림자를 적확히 사용해 홀로 선 인간의 존재론에 대해 논한다. 2010년부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나란히 세계 평단의 주목을 받아온 후카다 고지 감독은 현재 일본영화계의 제작 환경 개선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러브 라이프>를 제작하게 된 배경은.
= 20대 초반에 접한 야노 아키코의 노래 <Love Life>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Love Life>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랑은 할 수 있어”라는 가사가 있다. 언뜻 보기에는 긍정적인 메시지로 들리는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멀리 떨
[인터뷰] 불가해한 타인을 만나는 영화적 체험을 위해, ‘러브 라이프’ 후카다 고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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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 촬영 당시로 돌아가보자고 했을 때 배우 안소요가 떠올린 풍경은 자신이 자유롭게 연기하는 모습이었다. 흡인력 있는 시나리오에 반한 뒤, 2번의 오디션 끝에 그가 얻은 역할은 자해 치료 모임에서 만난 문정(김서형)의 퍽퍽한 삶 속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3급 지적장애 여성 순남이다. 현장에서 그는 “어떤 것도 정해두지 않고 투명하게 가려고” 했다. 문정의 비밀을 들춰낼 수 있어 긴장을 안기는 순남의 예측 불가한 화법과 행동은 “김서형 배우가 주는 생생한 에너지를 따라갔다가도 튕겨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완성됐다. 사실 그는 실전에서 자유롭기 위해 철저한 사전 작업을 거쳤다. “시나리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뒤 흡수한 걸 의도적으로 지우는 시간을 가졌다. 다시 백지상태가 되고 나서야 내 식대로 하나하나 쌓아올렸다. 그래야 인물을 한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고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소요가 배우가 되는 과정에는 인생을 바꾼 작품 대신 “연기의 맛을 봤던
[WHO ARE YOU] ‘비닐하우스’ 안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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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만큼 디스토피아적인 소재가 있을까. 그런데 대다수의 재난영화는 사실 그다지 디스토피아적이지는 않다.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시종일관 디스토피아적인 상태의 불편함과 암울함을 견뎌줄 관객이 많지는 않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이들 영화가 다루는 재난은 주로 재난 자체의 기승전결 서사(敍事)를 갖는다. 임박한 파국을 예측해서 경고하는 소수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걸 무시하는 기존 시스템의 관성이 있다. 극의 초반기에는 답답하게도 후자의 힘이 압도적이지만, 결국 당도한 재난 앞에 전자의 예지와 역량이 빛을 발하고, 이들의 분투 덕에 재난은 ‘극적으로’ 그래서 ‘대충’ 극복되곤 한다.
이와는 다른 디스토피아적 영화의 서사는 주로 ‘재난 이후’를 소재로 삼는다. 인간이 멍청해서든 무력해서든 회복할 수 없는 재난의 결과로 펼쳐진 지옥도 위에서, 또 인간은 분투한다. 마치 재난이 소재인 듯하나 실제로는 정치가 내러티브의 핵심이다. 이 새로운 ‘자연상태’에 대한 해석은 영화마다 조금씩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재난의 서사(敍事, 序詞, 署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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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리멘탈>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6월14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24일째인 7월8일 토요일에 자신의 일일 최다 관객수(33만명)를 경신했다. 종전의 기록은 7월1일(개봉 17일차)의 28만명이었는데, 이 수치는 개봉 후 주말마다 우상향하는 중이었다. 개봉 31일차인 7월15일 토요일엔 그 기세가 26만명으로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이는 여전히 개봉 첫주 토요일의 수치(17만명)보다 높다. 이 숫자들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엘리멘탈>은 지금 역주행 중이다.
<엘리멘탈>과 관련해 두 번째 흥미로운 사실은 개봉 한달이 지난 시점에 새롭게 열린 특별 상영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극공감에프(F)관’이다. 이는 CGV에서 마련한 특별 상영으로, 7월15일과 16일 이틀간 수도권 5개 관에서 하루 1~2회차씩 진행됐다. 이 기획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MBTI 성격 유형 검사에 익숙한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것으로, 예매 진행 시 안내되는
[비평] ‘엘리멘탈’의 흥행 역주행에 대하여(feat. MB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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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되더라.” 새로 팀에 합류한 그레이스(헤일리 앳웰)가 상식을 벗어난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묻자 벤지(사이먼 페그)는 농담처럼 답한다. 실은 그 농담 같은 진심이야말로 불가능한 작전을 수행해온 팀의 비결이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CG가 점령한 스크린에 저항해온 방식이다. 에단(톰 크루즈)은 달리는 기차에 침입하기 위한 작전을 짠다. 나름 정교한 작전을 짠다고 하지만 늘 그렇듯 계획은 틀어지고 결국 바이크를 탄 채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할 상황에 직면한다. 너무 위험해서 제일 먼저 찍었다고 하는 절벽의 활강 장면은 아찔하면서도 이상하다. 에단의 멋들어진 질주와 스피드 플라잉을 생생한 각도로 찍은 장면은 최근 CG가 잃어버린 중력의 존재감과 진짜 같은 생동감을 전한다.
문제는 이어지는 장면이다. 에단의 낙하와 활강을 멋지게 찍은 카메라는 정작 중요한 기차로의 돌진 과정을 건너뛴다. 그레이스가 위기에 빠진 절체절명의 순간, 에단은 마치 달리는 옆 차량에서
[비평] 몸으로 저항하고 규모로 버티는 스펙터클의 고향,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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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홀리데이> 신간을 보았다.
과거에도, 지금도 <홀리데이> 매거진은 지역과 여행을 다룬 잡지로 세계에서 유명한 잡지 중 하나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이 잡지도 사연이 있다. 1946년에 창간한 <홀리데이> 매거진과 현재의 <홀리데이> 매거진은 큰 차이가 있다. 1946년과 1977년 사이 뉴욕에서 만들어지던 <홀리데이>는 작가와 사진가에게 원고 길이도, 여행 경비도 제약 없이 전세계 곳곳의 지역과 여행의 본질을 탐구하기를 원했다. 헤밍웨이, 잭 케루악 같은 작가들은 <홀리데이>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판형도, 분량도 적어지던 <홀리데이>는 갑자기 폐간을 알린다. 모든 것은 끝난다는 듯이.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홀리데이>는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그때의 <홀리데이>와 지금의 <홀리데이>는 큰 차이가 있다. 37년 만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지역과 여행 섹션 -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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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바다를 낀 군천 지역의 해녀들은 근방에 들어선 화학공장으로 인해 바다가 오염되자 해산물 채취만으로 생계가 곤란해진다. 브로커 삼촌(김원해)은 이들에게 바다에 던져진 밀수품을 건져내기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솔깃한 제안을 건넨다.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아)을 필두로 한 군천의 해녀들은 밀수 운반 범죄에 가담하고, 이로 인해 잠시 호황을 누린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밀수품을 건지는 데 여념 없던 해녀들의 작업 현장을 세관 계장 이장춘(김종수)이 급습한다. 체포가 이루어지던 날 진숙의 가족들은 바다 위에서 목숨을 잃고, 춘자는 배에서 몰래 탈출해 종적을 감춘다. 2년 후, 춘자는 서울에서 전국구 밀수왕 권 상사(조인성)를 만나 함께 밀수판을 점령하러 다시 군천에 내려온다. 징역살이 후 처지가 곤궁해진 진숙은 해녀들을 배신한 춘자의 귀환이 달갑지 않지만 밀수판에 재합류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몇년 새 군천의 순박한 청년에서 해운사업가가 된 장도리(박정민)와
[리뷰] ‘밀수’, 영화에 돛을 다는 고민시와 닻을 내리는 염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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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바비 인형들과 바비의 짝 켄 인형들이 사는 바비랜드는 매일 핑크빛 행복으로 가득하다. 이곳에 사는 수많은 바비 인형 중 하나인 전형적 바비(마고 로비)의 삶 또한 그렇다. 하루하루 놀이와 파티 속에 살던 바비는 문득 생의 유한함에 관해 고민한다. 죽음에 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던 바비는 어느 날 이상함을 느낀다. 구취와 피로를 느끼고, 힐에 최적화되어 있던 발도 형태가 변한다. 바비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딴 성에 사는 이상한 바비(케이트 매키넌)를 찾아가고, 이상한 바비는 문제 해결을 위해 바비에게 현실 세계에 사는 인간 주인을 찾아가보라고 조언한다.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바비의 여정에는 언제나 바비와 짝으로 붙어다니는 켄(라이언 고슬링)이 함께한다. 바비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주인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를 만남과 동시에, 바비랜드와 달리 현실의 인간 여성이 처한 불평등한 현실을 체감한다. 한편 켄은 현실 세계에선 남성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권력
[리뷰] ‘바비’, 남성성의 폐단을 전복하는 여성들의 명징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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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비닐하우스에 머무는 돌봄 노동자 문정(김서형)은 종종 자신의 뺨을 후려갈긴다. 왜 그는 이런 기행을 벌이는 걸까. 무채색의 고요에 감싸인 서사에 발작적인 소음을 불어넣는 이 자해 행위의 원인은 오래지 않아 명확해진다.
문정이 돌봄 노동을 하며 마주치는 존재는 문정의 선의와 헌신을 감사 대신 불가해한 행동으로 되돌려주는 요령부득의 타자이며, 노동과 일상에서 겪는 소외를 공동체의 차원에서 해결할 가능성도 요원해 보인다. 불모에 처한 구조적 조건을 문제시할 도덕적 자의식도 소진된 상황에서, 문정은 여전히 몸을 일으켜 오늘을 살아야만 한다. 소년원에서 출소를 앞둔 아들과 동거할 자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선택지는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며 감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결여를 개의치 않고 지속되는 악몽 같은 현재를 견디기 위한 가학적인 자기암시의 몸짓일 뿐이다.
이솔희 감독의 <비닐하우스>는 더 나은 대안과 연대를 도모하는
[리뷰] ‘비닐하우스’, 명확한 주제의식으로 그려내는 웰메이드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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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연기 경력 10년에 이른 배우 도경수. 20대의 온종일을 노래와 연기로 채웠던 그가 <더 문>으로 돌아왔다. 아이돌 그룹 엑소의 멤버로 활동하며 2014년 영화 <카트>,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로 이름을 알린 이래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와 <스윙키즈>로 배우의 입지를 공고화했던 그가 군 공백기 이후 5년 만에 극장가를 찾은 것이다. 무대와 스크린에서 보여줬던 강직하되 청아한, 아주 큰 눈망울은 변함이 없다. 마침내 이 눈빛은 달에 홀로 고립된 우주비행사 황선우의 외로움과 흔들림, 그리고 이것들을 이겨내는 강직함까지 두루 섞어낸 최적의 무기로 거듭났다. 그는 “지금까지의 배우 경력 중 감정의 크기와 폭이 가장 크고 넓은 인물을 연기했다”라며 촬영 당시의 설렘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눈은 향후 10년의 세월을 또다시 거뜬하게 빛낼 만큼 영롱했다.
- 영화로 관객을 만나는 건 대략 5년 만이다.
= 너무 떨
[인터뷰] 가장 크고 깊은 감정으로, ‘더 문’ 도경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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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의 재국은 실패를 직시하기보다 숨어버리기를 택한 비겁한 남자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유인 달 탐사선 나래호 프로젝트가 예상치 못한 엔진 결함으로 공중에서 폭발했을 때 우주센터장에서 물러나 잠적해버린다. 두 번째 도전에 나선 우리호가 또 한번 사고로 대원들을 잃자, 정부는 유일한 생존자 선우(도경수)의 귀환을 위해 사령선을 가장 잘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을 소환한다. 소백산 천문대에 은둔하던 재국은 우주센터로 돌아온 후에도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미성숙함을 보인다. 그랬던 재국이 과거를 반추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그려낸 <더 문>은 어떤 의미에서 재국의 성장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 의외로 김용화 감독과는 첫 작업이다.
= 30년 동안 연기하면서 같이 작품을 한 적이 없는 배우도 많고, 같이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감독님은 더 많다. 감사하게도 김용화 감독님이 다른 작품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로 내 이름을 얘기
[인터뷰] 현장의 에너지와 직면하며, ‘더 문’ 설경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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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도 높은 팬덤을 가진 두 배우가 만났다. 장르가 퍽 달라서 더 흥미로운 조합이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이후 탄탄한 팬덤을 구축한 설경구, 최근 4년 만의 엑소 컴백도 예능 프로그램의 화제성도 고르게 챙기다 드디어 영화로 돌아온 도경수가 <더 문>으로 조우했다. 2029년, 대한민국의 달 탐사선 우리호가 사고를 당한 후 황선우 대원(도경수)은 홀로 달에 남겨진다. 그의 무사 귀환을 위해 5년 전 폭발 사고가 났던 나래호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이자 지금은 산속에 은둔 중인 전임 센터장 재국(설경구)이 다시 소환된다. 설정상 두 배우가 직접 만나는 장면은 없지만 지구와 달, 떨어져 있는 공간에서 생사를 두고 소통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은 오히려 두 캐릭터의 감정적 진폭을 극적으로 요동치게 한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배우 설경구, 도경수와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커버] 전설이 될 귀환, ‘더 문’ 설경구, 도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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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조의석, 김병서 감독의 <감시자들>에서 다람쥐 역을 맡았던 2PM의 멤버이자 배우 이준호. 이때만 해도 가수 출신의 배우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 않나. <옷소매 붉은 끝동>에 이어 <킹더랜드>까지, 연속 홈런을 날린 그에겐 이제 ‘배우’라는 단어가 전혀 낯설지 않다.
[ARCHIVE] 이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