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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해도 되죠?” <신라의 달밤>(2001) 개봉을 앞두고 김혜수를 인터뷰할 때였다. 사진 촬영을 끝낸 뒤 김혜수는 너무 피곤하다면서 누워서 인터뷰를 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했다. 인터뷰가 취조도 아니고 면접도 아닌데요, 그럼요, 라고 말하기 전에 김혜수는 이미 하이힐을 벗고 소파에 몸을 뉘였던 것 같다. 그때 무슨 질문을 하고 어떤 답변을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정신분석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편히 누워서 촬영장에서의 기억을 하나씩 토해내는 모습은 뇌리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그의 답변은 진실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졌다.
<오로라 공주>(2005)를 끝낸 뒤 문성근을 인터뷰할 때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스튜디오나 카페 대신 백범 김구기념관에서 만나자고 했다. 인터뷰 도중 잠깐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그 곳에서 있어서라고 했다. 기념관 회의실을 인터뷰 장소로 따로 구해야 하나 싶어 두리번거렸는데 문성근은 뭐하냐면서 그냥 풀밭에 앉아서 하
[에디토리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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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즈 다이어리] <더 웹툰: 예고살인> 그림 그리느라 힘들었지?
[헌즈 다이어리] <더 웹툰: 예고살인> 그림 그리느라 힘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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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고>에 이어 <론 레인저>로 또다시 웨스턴 장르를 택한 소감을 묻고 싶다. <랭고>가 <론 레인저>를 연출한 발단이었나.
=글쎄,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거꾸로 된 것 같지만 <론 레인저>가 진짜고, <랭고>는 재미있자고 만든 거였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존 포드, 세르지오 레오네 등의 웨스턴영화를 좋아했지만, 꼭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계획한 적은 없다. 그러다 내게 진짜 먼지가 가득한 사막에서 기차와 함께 뛰고 뒹굴 기회가 왔다. 물론 웨스턴영화를 만드는 일은 어렵다. 위험하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뿐 아니라 모든 웨스턴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그 영화에 참여한 스탭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영화가 톤토의 시각에서 보여준다는 점이 독특하다.
=라디오 쇼와 TV시리즈 <론 레인저>를 보면서 가장 끌린 점은 톤토와 론 레인저의 관계였다. 이전에는 다루지 않았지만, 영화에서 론 레인저는 톤토의 창
웃음 안에 눈물이, 눈물 안에 웃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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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멕시코주의 자그마하고 아름다운 도시 산타페를 다시 찾은 건 약 1년 만이었다. <론 레인저>를 한창 촬영 중이던 1년 전, 카니발의 기인들과 구경꾼과 창녀로 분장한 수백명의 보조출연자들로 뜨거웠던 촬영장의 열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동안 영화는 부지런히 촬영과 편집을 마치고 극장 개봉을 앞둔 상태에서 각국 기자들을 산타페로 또 한번 초청했다. 도시를 조금 벗어난 한적한 리조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는 조니 뎁, 아미 해머, 루스 윌슨, 윌리엄 피츠너 등 출연 배우들과 고어 버빈스키 감독, 제리 브룩하이머 제작자가 자리를 함께했다. 기자단이 던지는 질문의 95%가 조니 뎁을 향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일부러 편집하지 않아도, 조니 뎁 단독 인터뷰나 다름없었던 기자회견을 정리해 전한다. 함께 전하는 감독과 제작자의 인터뷰는 1년 전 촬영장에서 진행한 현장 인터뷰의 일부와 기자회견의 내용을 조합한 것이다.
-영화는 늙은 톤토(조니 뎁)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된
“인디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바로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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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장르 전통과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팀이 고안한 판타지 어드벤처 액션이 뒤섞인 <론 레인저>(2013)는 그냥 봐도 호탕하다. 놀이동산에서 스피디한 기구를 탈 때 느끼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그렇긴 하나 더 즐겁게 보기 위해 장르적인 혈연관계를 추적하고, 당대적인 메시지를 추론해보자. 이 영화는 고전적인 관습 안에 시의성을 녹여낸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웨스턴은 미국의 건국신화다. 서부 개척, 문명화의 영광과 그늘이 공존하는 스토리와 정의롭지만 외로운 남성 영웅은 웨스턴의 골간을 이룬다. <론 레인저>도 화소나 도상에서 이런 전통을 이어받고 있지만, 건국신화에 질문을 던진다. 고전적 장르로서 웨스턴 쇠퇴 이후 등장한 새로운 웨스턴들이 던진 질문과는 다르다. 흑인이나 여성 영웅이 등장하거나 백인이 인디언 문화에 동화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짐짓 전통의 수호자 같은 포즈를 취하며 한편으로는 한바탕 놀이인 척하며 웨스턴을 뒤흔들고 나아가 미국식
정의를 의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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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렇게 젊은 나이에 거장이 되었나요.
=1970년 6월20일생으로, 올해 그는 마흔세살입니다. 1996년 <리노의 도박사>로 젊은 나이에 데뷔했죠. 9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감독들(대런 애로노프스키, 크리스토퍼 놀란 등) 중에서도 단연 빼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남부의 샌페르난도밸리에서 나고 자란 그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 작가입니다. 할리우드의 변방이자 황폐한 도시 근교에서 자란 성장 배경이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그림자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유별난 재능의 토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지독한 영화광이라고 하던데요.
=<부기 나이트>를 통해 제2의 타란티노란 칭찬을 들을 만큼 잘 알려진 영화광입니다. <부기 나이트>는 실제로 극장용 포르노를 탐닉했던 그의 경험이 녹아 있기도 하죠. 1970년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주자인 로버트 알트먼, 마틴 스코시즈, 조너선 드미, 시드니 루멧 등이 자신의 영화적 양분이 된 감독들이
타협 따윈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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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의 안팎을 관통하는 화두는 시간여행이다. 코즈의 마스터인 랭카스터 도드는 사람들에게 시간여행을 제안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코즈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죽지 않는 혼이 있어 육체를 바꿔가며 긴 세월을 살아가고, 랭카스터만의 독특한 방식을 거치면 영혼이 지나온 과거를 되짚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스터>의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도 시간여행을 시도한다. 그는 관객을 영화의 무대가 되는 1950년대 미국으로 데려가 그 시대를 경험시키려 한다. 이는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현과는 차원이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이다. 여타 영화들이 지금 시점을 중심으로 과거를 대상화해 현재에 재현하려 애썼다면 <마스터>는 1950년대 관객이 영화관에서 경험했을 체험, 화면의 질감, 선명하다 못해 넘쳐날 지경의 색감 등을 스크린에 옮겨놓는다.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은 잭 피스크의 말처럼 그것은 “50년대를 본뜬 세트를
Back to the 5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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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앤더슨이 5년 만에 <마스터>로 돌아왔다. 그가 내놓은 ‘실물보다 큰’ 마음의 지도를 따라 헤매다, 그가 어떻게 1940∼50년대 미국을 복원해냈는지, 복원 과정에서 중요한 힌트로 삼은 것은 무엇인지, 그 모든 노력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할 이들을 위해 한 인터뷰를 여기에 옮긴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 2012년 12월호에 실렸던 인터뷰다.
-<마스터>를 시작할 때 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나.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 영화의 발단이 된 최초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는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을 무렵, 내가 정말 만들어보고 싶었던 건 자크 투르뇌르의 거친 영화들처럼 긴장감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저속해 보이는 B무비였다. 복고풍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충동이 일었던 건 기억이 난다. 그런 부
수수께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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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ster’라고 쓰인 타이틀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면, 카메라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방금 한척의 배가 자신을 가르고 지나간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바다. 눈부시게 새파란 수면 한가운데로 새하얀 거품이 어지럽게 모였다 흩어지는 광경이 지나치게 선명하다. 하지만 그 공기 방울을 낱낱이 포획하려던 카메라는 결국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멈춰 있다. 수시로 표정을 달리하는 파도는,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알처럼, 카메라의 시선을 빠져나간다. 그 물결이 어디서 흘러왔는지, 어디로 흘러갈지도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바다라는 사실, 거기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뿐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는 그 지표 없는 표면 위에서 시작한다. 끝내 그 심연을 벗어나지 못하리란 예감 속에 관객을 방치한 채로.
‘스토리텔링’보다 ‘비주얼텔링’
이어 영화는 마스터 숏 하나 없이 다짜고짜 과격한 캐릭터 묘사로 바로 들어가버린다. 신과 신 사이의 이동도 우
현대 미국의 정신적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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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모래 여인 옆에 한 남자가 찡그린 얼굴을 하고 앉아 있다. 아득한 수평선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채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길을 잃은 불쌍한 아이의 그것과도 같다. 이 특집은, 그 아이와 함께 <마스터>라는 영화의 망망대해에 뛰어들어 겨우 물 위에 떠 있는 시늉이라도 해보려 한 안간힘의 발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동시대 미국 감독 중 젊은 나이에 비해 괴력의 재능을 지닌 작가로 인정받아온 인물이다. 그가 전작 <데어 윌 비 블러드>를 통해 20세기 초 미국의 서부를 여행했을 때 우리는 그동안 그의 영화에서 무언가 잠재해 있던 것이 본격화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5년 뒤 그 짐작의 확증과도 같은 영화 <마스터>가 도착했다. 그 잠재해 있던 것이란 ‘미국의 정신사’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가 어떻게 전작에 흥건히 고여 있던 피를 닦아내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인들에 대한 심리적 보고서를 완성했는지 궁금할 이들에게,
마스터에게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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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대선 개입과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연일 매스컴이 시끄러운 요즘 많은 사람들은 과연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는 건지, 뭐가 잘못된 건지, 앞으로 잘될 수는 있을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입장이 서로 다른 정치인들이 자기가 옳다며 떠들긴 하는데 매스컴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는 너무나 산만하고 정확히 무엇이 본질인지 알기도 쉽지 않다.
복잡할수록 정도를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또 훌륭한 답은 반드시 훌륭한 질문으로부터 가능하다는 말도 있다. 만약 지금 이 상황이 무척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바로 지금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적기인 셈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던져야 할 질문은 쉽게 떠오른다. 즉 ‘국가기관이 선거에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는 걸 인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국가기관이 선거에 어떠한 형태로든 개입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아마 전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게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외부인 출입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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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로맨스에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원체 감수성이 메마른 성정이기도 하거니와, 사람끼리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스토리가 사랑에 빠지도록 캐릭터의 등을 떠미는 티가 나는 작품이면 아무리 절절한 로맨스가 펼쳐져도 멀뚱한 구경꾼이 되는 기분이다. 굳이 부모의 원수의 자식과, 또 굳이 어린 시절 잠시 스쳤던 그 아이와 사랑에 빠져야 한다는 주문에라도 걸린 듯 마주치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러브 미션의 단계를 밟아나가는 캐릭터들에게서는 연애의 설렘보다는 비장한 의무감이 먼저 느껴질 정도다. 예쁜 건 기본이라 쳐도 밝고 순수하거나 청순하거나, 하다못해 너무 열심히 살기라도 해서 단점을 찾기 힘든 여주인공들도 딴 세상 사람들만 같다.
그런데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장혜성(이보영)이 나타났다. 고등학생 때 엄마(김해숙)가 가정부로 일하던 판사 집 딸 서도연(이다희)의 한쪽 눈을 실명시킬 뻔했다는 누명을 쓴 뒤 퇴학까지 당해 인생이 단단히 꼬
[최지은의 TVIEW] 세상 끝에 홀로 버려진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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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오드랑은 클로드 샤브롤의 <착한 여자들>(1960)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파리의 양품점에서 일하는 네명의 ‘착한’ 여성 혹은 ‘착해 보여야 하는’ 여성들의 서로 다른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여기서 오드랑은 비밀이 많아 늘 따로 행동하는 의심스러운 여성으로 나온다. 첫눈에 별로 착한 것 같지 않고, 퇴근 이후에 무슨 엉큼한 짓을 하는지 한껏 상상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 곧 일반적으로 여성성으로 인지하는 착해 보이는 것과 사뭇 다른 게 오드랑의 개성인데, 그럼에도 그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배우이자 나아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스타로 성장했다.
남녀 관계 주도, 착한 역할 거부
할리우드영화에 비하면 스크린 속 유럽 여배우들의 위치가 남성 시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는 하지만, 그런 자유가 대중적인 사랑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배우는 전통적인 위치, 곧 로라 멀비의 용어를 빌리면 ‘남성 시선의
[한창호의 오! 마돈나] 성 역할 부정한 암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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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상대에게 어떤 이유로든 크게 실망했을 때 영혼에 스크래치가 나는 기분이다. 반복되면 무덤덤해지기도 하련만, 그렇지가 않다. 더 아리게 파이는 느낌이다. 영혼은 왠지 말랑할 것 같은데 그 말랑한 것에 굳은 상처가 팬다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그렇다. 나쁜 놈이 나쁜 짓 한 것에는 그리 크게 상처 입지 않는다. 하지만 의무와 권리, 책임을 진 자가 합당한 처신을 하지 못하는 꼴을 보는 건 참으로 힘겹다. 최근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포함한 자료 일체를 여야 공히 공개하자고 결정한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혔다. 민주당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위험천만한 위법 행위에 동조하고 나선 것일까. 외교적으로도, 남북관계에도 대단히 나쁜 선례이다. 마구잡이로 빨간물 뿌려대는 호스를 틀어막거나 잠글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제 몸에 묻은 빨간칠이 싫다고 그것만 닦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제1야당으로 있으니, 때아니게 안철수의 생각이 엄청 궁금해질 정도다.
[김소희의 오마이 이슈] 불능 민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