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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에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면 좋겠다는 상상을 종종 한다. 세계 4대 쓸데없는 고민임을 알면서도 좀처럼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어려운 게 있다면 수지 닮은 외모로 태어날까, 설리 닮은 외모로 태어날까 하는 거고, 또 하나의 고민은 만화 잘 그리는 사람으로 태어날까, 춤 잘 추는 사람으로 태어날까 하는 거다. 사실 예쁜 외모로 주목받고 싶다거나 내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싶은 마음과 달리 춤을 잘 추고 싶다는 건 굳이 남에게 보여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행복할 것 같은, 오롯이 자기만족을 위한 바람이기도 하다. 내 몸이 내 의지대로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멋진 동작을 만들어내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유치원에서 나비춤을 배울 때도 선생님에게 왜 그렇게 움직임이 뻣뻣하냐는 타박을 들었고, 초등학생 때 ‘앞으로 가!’라는 구령에 오른발과 오른팔이, 왼발과 왼팔이 한꺼번에 나가서 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을 만큼 태생적 몸치에게 춤이란 영원한 미지의 영역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지은의 TVIEW] 몸으로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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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지역에 가게 되었다고 메신저에서 울고 있던 신문기자 선배가 모임에 나타났다.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선배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여권 유효기간이 다 되어서 공항에서 돌아왔노라고. 덕분에 회사에서 모진 구박을 받으며 온갖 막노동을 떠맡게 되었지만 선배는 행복해했다. 우리도 모두 축하했다. 그래,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최고야, 그러다 가늘고 짧게 사는 수도 있겠지만.
선배가 일부러 그랬을 거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대학 시절, 카투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헤어지겠다고 협박하는 여자친구 때문에 맹렬하게 시험 공부를 하고선 주민등록증을 놓고 시험 보러 갔던 사람이니까. 군대는 결국 현역으로 갔고, 여자친구에게 차였다.
그 뒤 몇년이 지난 주말, <더 테러 라이브>를 보면서 반성했다. 우리는 안전지대 안에서만 머무는 분쟁 지역 취재도 무섭다며 징징거리는데, SNC 이지수 기자는 용감하기도 하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다리를 떠나지 않다니. 그러고
[김정원의 피카추] 이렇게 다 용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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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거주하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 10년 전쯤일까, 고학생이던 그는 공원 등지의 쓰레기통에 쌓인 빈 캔과 병들에 눈이 갔다. 자원 재활용 강국인 독일에서는 당시에도 이런 것들에 적지 않은 값을 쳐줬는데, 부지런히 움직이면 생계에 큰 도움이 됐다. 그러던 어느 한여름, 깡통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더 일찍 나가봤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의 ‘작업’을 눈여겨보던 노숙자들이 너도나도 뛰어든 것이다. 새벽같이 나가야겠다 다짐하다가 문득 먹고살기 힘든 노인들 벌이를 빼앗는 것 같아 관두었단다.
일개 고학생의 마음도 이럴진대 고물 주워 생계 잇는 이들의 생업을 하루아침에 빼앗는 일이 정부 주도로 벌어졌다. 일정 부지 규모(2천㎡, 특별/광역시는 1천 ㎡) 이상의 고물상은 폐기물 처리 신고를 의무적으로 하고, 분뇨나 쓰레기 처리 시설을 둘 수 있는 잡종지에서만 고물상을 할 수 있도록 한 개정 폐기물관리법이 지난 7월24일부터 시행되었다. ‘고물상 재벌’ 만들려는 게 아니
[김소희의 오마이 이슈] 리어카 끌고 순환도로 탈 순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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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 전문가 남궁민수(송강호)와 반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마침내 설국열차의 지배자 윌포드(에드 해리스)와 기차의 엔진이 거처한 최전방 칸의 문 앞에 이르렀다. 커티스는 자신의 치욕스런 과거를 고백하고 참회한 뒤, 남궁민수에게 빨리 마지막 문을 열라고 재촉한다. 남궁민수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다른) 문을 열고 싶어. (열차의 벽면에 난 문을 가리키며) 워낙 오래 갇혀 살아서 저걸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좆도 문이란 말이지.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잔 말이지….”
이 대목에서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건 봉준호의 대사가 아니다. 물론 이 대사는, 그 서민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지적이며 급진적이다. 그는 지금 하층민의 봉기에 의한 권력 교체만을 생각해온 커티스에게 체제의 변혁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체제의 바깥을 꿈꾸는 형이상학적 결단을 제안하고 있는 중이다. 마침내 그의 딸 요나(고아성)에 의해 기차의 벽은 폭파되고 연이어 기차 전체가 붕괴된다.
[신 전영객잔] 봉준호 바깥의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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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혁은 착한데 잘생기기까지 한 동네 형 같은 사람”이라고 김성수 감독은 말했다. 오지랖 넓게 굴지 말고 자기 몸이나 잘 챙기라고 타박하고 싶을 정도로 “이타적인” <감기>의 구조대원 지구도 그렇다. 장혁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인 양 지구는 장혁에게 꼭 들어맞는다. 비번인 날 우연히 재난에 휩쓸린 지구는 아무도 그가 구조대원인 걸 모르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다. 인해(수애)가 도망칠 길을 확보했다며 얼른 가자고 채근하는데도 지구는 사람 좋게 웃으며 제 발로 재난 상황에 뛰어드는 사람이다. “내가 구조대원이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알잖아요. 내가”란 대사로 그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장장 126일에 걸친 촬영 기간 동안 장혁을 가장 힘들게 한 건 “폭염 속의 험난한 촬영”도, “어깨 부상으로 인해 재활치료를 병행”하며 분투했던 액션도, 300여명의 연기자들과 부대끼는 일도 아니었다. “너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라”는 감독의
[장혁] 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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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애는 이번에도 독하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외모에 무슨 힘이라도 있을까 싶지만, 의사 인해(수애)는 하나뿐인 딸을 살려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사실상 그것 외에는 시쳇말로 눈에 뵈는 게 없다. 영화 속 상대역 지구(장혁)의 말마따나 ‘이기적인 여자’이기도 하다. 정치가도 군인도 하다못해 병원의 동료들마저 그녀를 막지 못한다. 남편(엄태웅)을 찾으러 홀로 베트남으로 떠나는 <님은 먼 곳에>(2008)의 여인이나, 목숨이 위태로운 걸 알면서도 묵묵히 궁궐로 들어가는 <불꽃처럼 나비처럼>(2009)의 여인이나, 언제나 수애는 불가능한 상황과 마주하며 최대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실존’의 배우였다. 늘 고독하게 자신의 운명과 싸웠던 여자랄까.
얼핏 보면 역시 싱글맘으로 출연한 전작 <심야의 FM>(2010)의 DJ 선영과도 닮아 보인다(그러고 보니 <감기>는 TV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 <천일의 약속>
[수애] 교차점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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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끔한 차림새로 포즈를 취한 장혁과 수애를 보고 있자니, 치사율 100%의 유례없는 최악의 바이러스가 창궐한 <감기>의 무대에 있었던 사람들이 맞나 싶다. 오랜 촬영기간 내내 장혁은 계속 얼굴에 흙먼지와 기름때를 뒤집어쓴 채 살았고, 수애도 땀에 전 의사 가운 하나로 버텼다. 말하자면 <감기>는 그들의 스타 이미지를 제로 상태로 초기화하며 시작한 작품이다. 김성수 감독이 보기에 그들은 ‘진짜를 진짜 그대로 보이게 만드는 재주’를 지닌 배우들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영화와 TV를 통해 쌓아온 경험을 이제 ‘관록’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에 올라선 배우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감기>라는 작품이 각자의 어떤 ‘방점’으로 남길 기대했다.
[감기] 방점을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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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사진처럼 포착된 사물의 배치와 일상적 질서에 깃든 서정성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특징이다. 때론 그 먹먹하게 아름답고 감상적인 세계가 개인의 내면에 폐칩된 듯도 했다. 전작의 주인공들과 달리, <언어의 정원>의 다카오와 유키노는 얻어맞고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세상과 맞설 힘과 용기를 품었다. 송알송알 내리는 빗방울과 풀빛으로 물든 장마철의 공기가 작품에 가득하다. 아마도 가장 행복했을 한순간, 함께 있는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은 포근하다. 소슬하게 깔리는 소년의 내레이션도, 먼 하늘을 배경으로 엔딩을 휘감는 백그라운드 뮤직도 여전하다. 네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인 <언어의 정원>을 들고, 8월14일 국내 개봉에 앞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먼저 찾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만났다.
-한국에 당신의 팬이 많다. 이번이 몇 번째 한국 방문인가.
=한국에는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초속 5센티미터> <별을 쫓는 아이>의 개봉
[신카이 마코토] 세상의 비밀, 사랑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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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사진인가요? 이런, 역기능 가족 같으니!” 사진기자의 셔터가 콩 볶는 소리를 내는 표지 촬영 현장에 봉준호 감독, 송강호, 크리스 에반스와 나란히 선 틸다 스윈튼이 유쾌하게 속삭였다. 그가 쓰는 가족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내 편, 우리 식구’ 같은 배타적인 의리의 느낌과는 다르다. 틸다 스윈튼에게 시네마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사랑에서 비롯된 노동이고, 영화는 집단 창작 과정을 통해 혈연과 국적, 활동 부문을 뛰어넘어 비전의 공동체를 짓는 작업이다. 방한 이틀째 레드 카펫 시사회를 마친 틸다 스윈튼은 새벽 1시를 넘긴 시각임에도 강남에서 따로 모인 <설국열차> 스탭들의 뒤풀이 자리를 찾아가기도 했다. 기자가 스윈튼을 스크린 밖에서 처음 본 것은 뒷날 <아이 엠 러브>를 연출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단편 다큐멘터리가 상영된 2002년 베니스영화제에서였다. 출품작의 제목은 <틸다 스윈튼: 러브 팩토리>. 이 배우를 알아갈수록 절묘하다고 탄복하게
[틸다 스윈튼] 연대의 체험 예술가의 창작 과정에서 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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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 모니터 시사에서 생긴 일이다. 극중 성수(손현주)와 민지(전미선)의 아들과 딸이 지하주차장의 차 뒷좌석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장면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자 오빠가 여동생에게 묻는다. “(엄마한테) 전화해볼까?” 그러자 학생으로 추정되는 관객이 일제히 “안돼! 하지마!”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소리를 지른 사람들도 웃고, 그 소리를 들은 나와 일행도 웃었다. 무서운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공포영화라는 장르를 ‘학습’해온 사람이라면 특정 장면이나 설정이 갖는 상징성에 민감해진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링컨: 뱀파이어 헌터>를 쓴 작가이자 팀 버튼의 <다크 나이트>의 각본가 중 하나였던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가 이런 공포영화의 클리셰에 대한 소사전을 펴냈다.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에는 당신이 공포영화의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살아남을지 친절하게 소개해준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이 한 세기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살고 싶다면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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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네 번째 소설집. 2010년부터 2013년 현재까지 발표한 단편을 묶었다. 재산을 모두 축낸 아들 탓에 철거를 앞둔 아파트에서 불편한 몸으로 외로이 삶을 연명하는 노년의 여인, 오점 없는 삶을 단번에 파괴할 만한 비밀을 안고 살아야만 하는 중년의 남자, 말년을 함께하자며 찾아온 여동생을 요양원에 보내면서까지 노년의 허허로운 일상을 지키고자 하는 노인 등 여덟명의 주인공은 서로 다른 고독의 빛깔을 품고 있다.
[도서] 서로 다른 고독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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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마케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이성으로는 좀처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해석하기 위해 팬덤(fandom)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팬덤은 화장실 휴지에서부터 자동차 구매, 문화 현상에서 심지어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정보화시대의 대중은 정보들을 삭제하고 편집하며, 구미에 맞는 정보만을 수용, 새로운 ‘사실’을 창조한다. 팬덤은 네트워크 세상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도서] 감성마케팅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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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를 읽는 주요 키워드인 ‘아파트 공화국’을 ‘단지 공화국’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박인석의 책. 아파트 단지를 읽으면 한국사회가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단지화 전략’과 ‘사교육 전략’을 견주며 한쪽에서는 아파트 단지 내 내 집 마련을 위해, 다른 한쪽에서는 내 자식 대학입시를 위해서 온 국민이 소득의 몇십 퍼센트씩을 스스로 지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덕에 건설산업과 사교육산업이 육성되고 있는 것도 공통점.
[도서] 아파트 단지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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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백색의 회벽으로 된 외관이 아름다워 백로 성이라고도 불리는 일본 효고현 히메지성에 가면 오키쿠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사라야시키’라는 괴담의 무대로 유명하다. 괴담의 기승전까지는 몇 가지 버전이 있으나, 결은 하나다. 오키쿠라는 시녀가 있었다. 오키쿠는 주인마님에 의해 열장 이 되어야 하는 귀한 접시 중 한장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갇힌다. 그녀가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졌다고도 하고, (히메지성의 우물 앞 표지판 설명에 따르면) 매질당 해 죽은 뒤 시신이 우물에 던져졌다고도 하는데 그날 이후 밤마다 우물가에서 접 시 세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장, 두장, 세장… 한장이 모자라. 다시 세봐야 지. 한장, 두장….” 유사한 이야기가 일본 각지에서 발견된다고 하는데, 에도시대에 는 가부키로 각색되어 공연되기도 한 인기있는 괴담이었다. 이노우에 히로미와 박 지선이 엮은 <일본기담>을 읽고 있자면 요괴전문가이자 소설가인 교고쿠 나쓰히 코
[도서] 슬프고 무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