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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년 병자년 호란이 일어난다. 청의 대군에 막혀 미처 강화도로 파천하지 못한 조정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시작한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은 청나라와의 화친을 도모해 살 길을 열고자 한다. 뒤늦게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며 결사항전을 주장한다. 인조(박해일)가 사분오열된 대신들 사이를 부평초처럼 오가는 사이 시간은 흘러가고 청나라의 황제가 삼전도에 당도한다.
<남한산성>은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역사가 스포일러라는 농담처럼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 만큼 무엇을 전달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할지가 관건이다. 황동혁 감독은 일체의 재해석이나 변주 없이 소설의 건조하고 날선 문체를 있는 그대로 화면으로 옮기는 데 초점을 맞췄고 대체로 원하는 바를 달성한다. 이 영화는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클로즈업의 드라마가 아니라 시대의 풍경을 점점이 찍어낸 산수화, 김훈 소설을 빗대자면 ‘땅의
<남한산성> 오가는 말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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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팀 버튼 / 목소리 출연 위노나 라이더, 캐서린 오하라, 찰리 타한 / 제작연도 2012년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하셨다. 고향인 속초에 가면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작은 방이 있는데, 어릴 때는 한참씩 그 안에서 명패나 방송국 이름이 금박으로 박힌 티스푼 세트 같은 것들을 만져보고는 했다. 기자가 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나는 우리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자주색 베레모와 낡은 가죽점퍼,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나무로 만들었다는 고급스런 바둑판도 있었다. 모두가 할아버지의 것이었고, 이제는 대부분의 물건이 남아 있지 않다. 장례식 이후에 태워지거나 버려졌다.
<프랑켄위니>의 첫 장면에서는 초등학생 빅터가 자신의 개 스파키를 데리고 찍은 영화를 온 가족이 둘러앉아 관람한다. 엄마가 어릴 때부터 나를 영화관과 공연장에 데리고 다니셨지만, 사실 나에게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영화 관람’의 기억은 따로 있다. 할아버지와 소파에 나란히
박희아의 <프랑켄위니> 상실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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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42회를 맞는 캐나다 토론토국제영화제는 북미 최대 영화축제다. 상영작품 수도 많지만, 이듬해 초 오스카상으로 정점에 달하는 영화상 시즌 구도가 처음 감지되는 장소라 주목도가 높다. 기본적으로 비경쟁이지만 토론토국제영화제의 관객상 수상작은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빈번히 지명돼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슬럼독 밀리어네어> <킹스 스피치>처럼 수상까지 이른 작품도 있다. 조금 앞서 오붓하게 열리는 텔룰라이드영화제와 맨해튼 시네필들이 몰리는 뉴욕영화제를 택하는 화제작도 있지만, 규모와 미디어 주목도는 토론토가 앞선다. 올해 상영작은 장편 255편 단편 84편으로 지난해보다 20% 정도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매머드급. 지리적으로 미국과 가까워 할리우드 스타 영화인들의 방문이 많다는 특징도 쾌활하고 적극적인 관객 분위기와 맞물려 붐을 형성한다. 지난 9월 7일부터 17일까지, 선댄스영화제와 칸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들이 흘러들어오고
제42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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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도영화의 다양성이 빛을 발하는 중이다. 발리우드 외에도 다양한 지역 영화를 포괄하는 것이 인도영화 시장의 특징이지만 주류인 마살라 장르에 편향되지 않으려는 시도가 이어지며 소재 면에서도 신선함을 더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근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은 악샤이 쿠마르가 출연한 <토일렛: 에크 프렘 카타>다. 알 만한 사람들은 알지만 인도의 시골에는 화장실이 없다. 그만큼 환경이 낙후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전통적으로 화장실 자체가 집 안에 들이기에 불결한 장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장실 부족이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로 이어지며 최근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하는데, <토일렛: 에크 프렘 카타>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기발하게 풍자한 코미디극이다. 신부가 쓸 화장실을 마련하려는 늦깎이 신랑 케샤브(악샤이 쿠마르)가 이에 격렬히 반대하는 아버지와 대립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구습에 대한 재치 있는 항변이자 세련된 반항을 담는다. 더불어 인도영화의 다
[델리] 구습을 풍자하는 영화부터 여성 캐릭터가 빛나는 영화들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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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위안부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89)는 자상하면서 당당했다. 영화 <귀향>(2015)의 모델인 강 할머니를 뵌 건 몇해 전 일본 대학생들의 나눔의 집 방문을 취재하면서였다(경기 광주의 나눔의 집에는 현재 열분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머물고 있다). 일본인 학생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를 직접 듣고 나누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할머니들의 말씀에 귀기울였다. 강 할머니는 일본 젊은이들과 친절하게 마주하고 단호하게 할 말을 했다. 16살에 일본군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부대 밖에서 불에 태워지려던 와중에 조선 독립군의 도움으로 구출됐다. 기억을 꺼낼 때마다 상상조차 허락지 않을 고통이 떠오를 터였다. 일본에서 온 미래 세대와 대화하는 동안 할머니의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 표정이 무너지면서 얼굴에 경련이 일고 말을 잇지 못하게 된 건, 먼저 세상을 등진 동료 할머니들에 대해 말할 때였다. 서로 의지하던 할머니들이 사죄 한
<아이 캔 스피크> 혐오의 시대에 도착한 연대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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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에서 누군가가 “이모님”을 찾으면 왜 하필 이모일까 생각한다. 적당히 먼, 외가의 이모에게서 구하는 막연한 친근함 때문일까? 1979년 대구가 배경인 KBS <란제리 소녀시대>에서도 같은 집에 사는 식모가 이모라고 불린다. 정희(보나)는 자신을 다정하게 살피는 도화(박하나)를 “이모야”라고 부르고, 정희의 엄마(김선영)도 그녀를 이모라고 부른다. 어쨌거나 친근함과 편리함을 취하는 모두의 이모는 살림도 맡고, 정희네 메리야스 공장에서 미싱도 돌린다. 경계가 흐린 여성 노동을 굳이 감추지 않는 <란제리 소녀시대>는 과거를 향수하면서 불편하게 여길 요소들을 제거하거나 적극적으로 미화하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아류로 묶기엔 아까운 지점들이 있다.
빵집에서 미팅하고, 남학생과 교류하는 학교 연합 방송제를 고대하는 70년대 여고생의 생활상 곳곳에도 차별과 군사 문화의 영향을 지우지 않는다. 영화 <친구>(2001)의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이래로
[TVIEW] <란제리 소녀시대> 그녀들의 기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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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Mother!
감독 대런 애로노프스키 / 출연 제니퍼 로렌스, 하비에르 바르뎀, 에드 해리스, 미셸 파이퍼, 돔놀 글리슨 / 수입·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 개봉 10월 19일
“눈을 떴을 때, 이 영화가 내 안에서 솟구쳐나왔다.” 빈집에서 홀로 키보드를 앞에 둔 지 불과 닷새 만에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신열을 앓으며 <마더!>의 시나리오를 완성해냈다. 평화롭던 부부의 집,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의 방문. 난폭하게 변해가는 남편. 공포를 느끼던 아내는 급기야 손님의 짐에서 남편의 사진을 발견한다. 고립된 집 안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일의 정체는 무엇일까. 특정 이름을 부여받지 않은 채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애로노프스키는 이 사회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그리고 애로노프스키는 성경 속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생태계 파괴, 신앙 분쟁, 이민자 문제로 전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현재, 지구가 처한 비극적 운명을 모른체하고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엄중한
[Coming Soon] <마더!>, 평화롭던 부부의 집,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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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이목구비, 그중에서도 선한 눈빛이 주는 힘이 커서 김래원이 연기한 캐릭터엔 인간미가 흐른다. <해바라기>, <마이 리틀 히어로>(2012), <강남1970>(2014), <프리즌>(2016) 등에서 보여준 것처럼 능글맞거나 폭력적이거나 위악적인 순간에도 김래원의 연기엔 언제나 인간적 동의를 구하는 순간들이 있다. 철저히 감정을 절제하며 연기해야 했던 <희생부활자>에선 좀 다를지도 모르겠다.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죽은 엄마(김해숙)가 살아 돌아와 복수하려는 대상인 검사 아들 진홍은 김래원이 그간 연기해온 캐릭터들과 달리 차갑다. 그 새로운 캐릭터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기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김래원은 조심스레 단어를 골라 말했다.
-사진촬영하는 걸 지켜보니 김해숙 배우의 카리스마가 엄청나더라. 현장에서 그런 기운을 받으며 함께 연기하면 연기할 맛도 나고 긴장도 될 것 같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워낙 익숙해서
<희생부활자> 김래원 - 기존의 김래원을 배제하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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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숙이 연기하는 인물은 대부분 누군가의 엄마다. 하지만 그가 연기한 엄마들은 누구의 무엇이란 설정을 뛰어넘는 강력한 개성을 가진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엄마의 숫자만큼 매번 차별화되게 연기해야 한다”라는 배우의 믿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 <해바라기>와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 이어 <희생부활자>까지 김래원과 세번 모자 관계로 조우했지만 모성을 실현하는 방식은 양극단에 서 있다. 자신의 친아들을 죽인 양아치 오태식(김래원)을 용서하고 기꺼이 양아들로 거둬들이거나(<해바라기>),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연인을 둔 아들을 포용하던(<천일의 약속>) 그가 자식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기 어린 눈빛으로 살아 돌아왔다.
-7년 전에 사망했다가 부활하는 비현실적인 인물을 연기했다. 시나리오에서 “신진대사가 없는 코마 상태”라거나 “원망과 복수만 남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묘사된다. 이런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나
<희생부활자> 김해숙, "엄마는 엄마다"라는 말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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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멋진 투숏이라니. 김해숙이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분위기를 리드하면 김래원은 차분히 보조를 맞춘다. 서로의 에너지가 조화로우니 어떤 포즈를 취해도 어색함이 없다. <해바라기>(2006), 드라마 <천일의 약속>(2011), <희생부활자>(2017)까지 세 번째 모자 관계로 호흡을 맞춰온 터라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한없이 가볍고 따뜻하다. 그러나 곽경택 감독의 <희생부활자>에선 이들의 모자 관계가 초현실적 상황 속에서 복잡하게 꼬인다. <희생부활자>는 아들(김래원) 하나만 바라보며 희생적 삶을 살아온 엄마(김해숙)가 그 아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 돌아오는 이야기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와 냉철한 태도로 엄마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려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희생부활자> 김해숙·김래원 - 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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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고코로> ユリゴコロ
감독 구마자와 나오토 / 출연 요시타카 유리코, 마쓰자카 도리, 마쓰야마 겐이치
반려동물 숍을 운영하는 료스케(마쓰자카 도리)에게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친다. 약혼자는 실종되고 아버지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투병 중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집에 간 료스케는 서재에서 ‘유리고코로’라는 제목의 공책 한권을 발견한다. 공책의 주인은 자신이 미사코(요시타카 유리코)이며, 지금까지 살인을 통해 마음을 다스려 왔다고 고백한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미스터리물이다.
[해외 박스오피스] 일본 2017.9.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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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루스벨트>에 합류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기영화다. 제작 계획이 공개된 2005년부터 캐스팅 물망에 올랐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로써 마틴 스코시즈와 여섯편의 작품을 함께하게 됐다.
-브라이언 싱어가 연출하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주요 캐스팅 라인업이 추가 확정됐다.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이야기를 다룬다. 라미 말렉이 프레디 머큐리를, 벤 하디가 로저 테일러를, 그윌림 리가 브라이언 메이를, 조셉 마젤로가 존 디콘을, 이번에 합류가 알려진 이단 길렌과 톰 홀랜더가 퀸의 매니저를 연기한다.
-J. J. 에이브럼스가 <너의 이름은.> 실사영화 판권을 획득했다.
할리우드판 <너의 이름은.>은 제작사 도호와 파라마운트 픽처스, 배드 로봇 3사가 공동 개발하며 <컨택트>의 각색자 에릭 헤이저러가 각본을 맡을 예정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루스벨트>에 합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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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베이비 드라이버> 일마 이기 운전은 또 기똥차게 잘한다
[정훈이 만화] <베이비 드라이버> 일마 이기 운전은 또 기똥차게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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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를 쓴 J. D. 밴스는 내 친구의 남편과 몹시 비슷한 이력을 갖고 있다. 백인, 미국인. 집안에서 유일한 대졸자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 중 한곳의 로스쿨을 나왔다. 학력만 다른 가족과 다른 게 아니다. 친구의 남편은 그 집안에서 몇 안 되는 전과 기록이 없는 사람이다. 남편 말고도 전과 기록이 없는 삼촌이 한명 더 있는데, 웃지 못할 일은, 그 삼촌이야말로 직업적인 범죄자이며 가장 심각한 위법을 많이 저지르는 데다 가장 매너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가친척 다들 이런저런 전과를 갖고 있는데 “사람들은 참 좋다”고 한다. <힐빌리의 노래>로 그 ‘참 좋음’의 뜻을 배웠다.
이 책에 대해 말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는 이것이다. 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까? 이번 미국 대선 결과를 분석할 때 유난히 많이 등장했던 단어들- 러스트벨트, 레드넥, 화이트 트레시- 이 왜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가난한 백인들의 역사를 보여주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힐빌리의 노래>, 그들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