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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영화의 이상한 경향들
정성일 l 다른 해와 달리 올해 이런 이상한 경향, 증후가 있었구나라고 감지한 게 있다면.
김소영 l TV와 영화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일종의 망각술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 과거를 잊어버리고 과거의 사람을 새로운 정체성으로 만난다. 망각이 역사적으로 비정치화되는 거라고 볼 수 있는데.
허문영 l 상반기 좌담할 때 김소영 선생이 말한 한국영화의 세트에 대한 집착을 그 이후로 유심히 보게 됐다. 이를테면 여름 공포영화 대부분이 세트에서 촬영을 했던데 예컨대 어떤 학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외딴 곳에 세트를 지어놓고 공포를 만든다. <역도산>이나 <바람의 파이터>는 아예 무대를 일본으로 옮긴 경우에 해당하고. 괴담 유행의 시초였던 <여고괴담>은 그래도 의정부의 학교에서 직접 찍었다. 지금은 세트로 도피하거나 아예 무대를 딴 곳으로 옮겨간다. 이는 영화의 때깔을 높이려는 의도와 함께 제작비 규모의 상승과 밀접한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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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혼란스런 작가주의의 좌표
정성일 l 한국영화의 작가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중의적인 의미로 김기덕과 연관지어서 표현하자면 김기덕이 있기 때문에 홍상수가 덜 외롭고 박찬욱이 자기 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다. 올해 단편영화를 심사하고, 영화아카데미 입학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느낀 건 박찬욱의 영향력이었다. 많은 차세대 영화지망생들이 박찬욱의 자장권 안에서 장면을 카피하고 영감을 받고 있다. 작가주의 담론을 논하기 위해선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 옆에 그를 놓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칸이 주는 상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올드보이>는 공감하기 힘든 영화였다. 그냥 재미있는 상업영화였다. 그것도 많은 결함을 갖고 있는. 그런데 이제 그 영화가 많은 비평담론들에서 예술적으로 나아갈 좌표처럼 이야기되고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영화처럼 이야기될 때 대중성과 B급영화들이 가져야 할 자리와 예술성의 문제가 혼돈스러운 자리로 떨어져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됐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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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영화의 진화를 말한다
정성일 l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산업적으로 대중적으로 가장 기대된 영화가 <역도산>이라면, 올해의 감독은 누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걸로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김소영 l 한국영화에서 여자를 때리는 폭력적 남성은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부분적 현상이었지만, 일관된 주제는 주변화된 남성성이었고 그게 힘없는 아버지로, 또 그를 바라보는 아들로 나타났다. 문제는 주변화된 남성성이 자기 연민과 자기 구원을 위해 여성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게 한국 문화의 장치라는 점이다. 그 정점이 <서편제>였다. 여자의 눈, 딸의 눈을 멀게 하고 거기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는 장면이 민족적 미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 생긴 관심이 주변적 남성성이 여성을 학대, 착취하지 않고 어떻게 주체성을 확보해나가느냐였다. 액션영화에 대한 관심도 여기에 있었다. 남성성의 곤경이기도 하고 젠더의 곤경이기도 한 봉쇄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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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지도를 펴 드는 것은 대부분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다. 달리는 속도도 경치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일보다 여행에서 중요하지 않다. 2004년의 대단원을 맞은 <씨네21>도 그런 마음으로 세 편집위원을 한자리에 초대했다. 상반기를 결산하는 좌담 이후 6개월 만의 자리였다. 박스오피스와 국제영화제의 어마어마한 기록들이 부추기는 연말 자축연의 공기는 아랑곳없이, 이날의 주제어는 영화와 작가와 시장이 봉착한 ‘곤경’이었다. 가장 최근에 도착한 한국영화 <역도산>에 대한 소회로부터 거슬러올라간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정성일 영화평론가, 허문영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의 대화를 옮긴다. /편집자
<역도산>: 합작 영화에 대한 우려를 극복하다
정성일 l 가장 최근에 본 영화부터, 그러니까 엊그제 본 <역도산>부터 거꾸로 올라가면서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 한해 내내 사람들이 기다린 영화이고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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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째 홈런을 때릴 수 있을지 불안했다”
브래드 버드 감독은 3살 때부터 만화를 그렸다.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난 그는 동년배들처럼 토요일 오전 TV만화를 빼놓지 않았으며, 14살 때는 단편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이어서 픽사의 창조력을 이끄는 존 래스터, 팀 버튼 등과 함께 칼아츠에서 캐릭터애니메이션을 전공했으며, 졸업 뒤에는 <인어공주> 이전 ‘암흑기’의 디즈니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들었던 TV시리즈 <어메이징 스토리>에서 <패밀리 도그>라는 에피소드를 만들면서였다. 강아지의 시점에서 가족들을 바라보는 이 작품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의 다음 행보는 <심슨 가족>이었다. 그는 이 시리즈의 컨설턴트 역할을 하면서 에피소드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마이크 저지의 TV시리즈 애니메이션 <킹 오브 더 힐>에서 컨설턴트로 일한 뒤 그는 장편애니메이션 <아이언 자이언트&g
픽사의 여섯 번째 장편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에 대한 모든 것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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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 영화에 뒤지지 않는 정교한 액션 신
사실 <인크레더블>은 브래드 버드가 <아이언 자이언트>의 제작사 워너에 제안했다 거절당한 아이템이다. 말 안 통하는 상사를 벽에 메다꽂는 미스터 인크레더블처럼 할리우드에서 좌절을 거듭한 브래드 버드는 칼아츠 동기 존 래스터가 이끄는 픽사에서 12년 묵은 아이디어를 실현하게 되자 의욕과 조바심으로 꽤나 불타올랐던 모양이다. 늘어난 물량과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픽사의 전작과 비슷한 예산 1억4500만달러를 맞추겠다고 세밀한 준비에 몰두한 버드는, 연신 불안해했다. “그건 그렇고 높은 사람들은 내 아이디어 뜯어고치러 언제쯤 오나?”라고 묻는 경계 태세였던 그를 존 래스터는 이렇게 묘사한다. “버드는 무거운 쟁기에 묶인 경주마 같았다. 우리는 그를 풀어 언덕을 달리게 했는데 그는 자유인 줄 모르고 자꾸 쟁기 옆으로 가더라. 그러나 얼마 뒤 그는 어느 때보다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브래드 버드 감독의 열의에 호응한 픽사의
픽사의 여섯 번째 장편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에 대한 모든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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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원정대의 여정도 추억담이 된 쓸쓸한 올 겨울, 픽사의 여섯 번째 장편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12월15일 국내 개봉)이 공개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금욕주의자라고 부를 자격이 있다. 1990년대 여름마다 디즈니 장편애니메이션이 모았던 주목과 기대는 이제 고스란히 픽사에 옮아간 것이다. 2시간에 육박하는 상영시간, 픽사 최초의 PG등급을 받은 현란한 액션으로 별안간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스타일에 성큼 다가선 슈퍼히어로 가족드라마 <인크레더블>에서 브래드 버드 감독이 업그레이드한 픽사의 미덕은 무엇이며, 새롭게 드러낸 야심은 무엇일까? 또, 그 야심은 픽사의 충실한 팬들에게 어떤 우려를 자아내는가? 픽사의 ‘미션 인크레더블’을 분석해본다.
사상 최초의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만들겠다는 월트 디즈니에게 사람들은 말했다. “만화영화를 극장에서 1시간 넘게 보고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로부터 60년 뒤 최초의 장편 3
픽사의 여섯 번째 장편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에 대한 모든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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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의 호흡법-필이 꽂히는 명확한 컨셉 전달
<달콤한 인생>의 촬영현장은 치밀하고, 계속 논의를 해가며 진행된다.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 한컷을 제대로 카메라에 담기 위해 무한의 열정과 노력이 가해진다. “<달콤한 인생>은 선우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점점 강도가 세어진다. 폭력적이 되고,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간다. 거기에 따라서 어두운 공간, 빛의 디테일, 강도도 높아진다. 그 느낌의 강도를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다.” 영화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이미 전작들에서 확인되었다. 내러티브가 혼란스러웠던 <장화, 홍련>에서도, 소녀의 후회, 분노 등 모든 감정이 어떻게 회오리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아주 강렬하게. “내러티브만이 아니라 이미지, 텍스처, 표정, 뉘앙스 등으로 주제를 표현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 영화는 명확한, 강철 같은 내러티브가 있어서 어떻게 만들어도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섬세한 구조 안에서 다양한 요
<주먹이 운다>·<달콤한 인생> 현장 방문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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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럽지 않게, 아주 진정성 있게 안 들리게”
11월27일 저녁, 분당 미금역 앞에 위치한 오피스텔 8층에서는 <달콤한 인생>을 촬영하고 있다. 아직 마감이 덜 끝난 듯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좁은 오피스텔 안에 다 들어가지 못해 복도에 서 있는 촬영팀이 보인다. 호수를 찾을 필요도 없다. 좁은 현관, 사람들 틈을 헤치고 들어가니 리허설을 하는 액션스쿨 배우들이 보인다. 오늘 촬영분은 선우가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필리핀 갱에게 습격을 당하는 장면이다. 보스에게 인정받아 성공가도를 달리던 선우는, 이 장면을 기점으로 지옥에 떨어진다. 보스에게 버림받고, 업신여기던 동료에게 반대로 모멸을 당하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선우의 달콤한 인생은, 이 장면을 끝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급작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주인공은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악몽으로 들어가버린다. 시나리오 앞뒤의 톤이 바뀌는 것은, 그것이 주제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주먹이 운다>·<달콤한 인생> 현장 방문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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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태식과 20대 상환의 모든 것을 건 맞대결
<주먹이 운다>에는 핸드헬드가 많이 나온다. 현장에서는 두대의 카메라가 계속해서 연기자를 쫓아간다. 핸드헬드는 연기자의 동선을 쫓거나, 감정을 좇아간다. 동선을 쫓다가 배우가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금기이지만, <주먹이 운다>에서는 설사 그런 일이 벌어져도 큰 문제가 없다. 프레임 안에 그들이 없어도, 여전히 그들의 감정은 남아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이 그렇듯이, 우리의 시선과 동선이 그렇듯이, 잠시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버려도, 가끔은 인생의 큰길에서 어긋나버려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진짜라면, 진심이라면. <주먹이 운다>에는 류승완 감독 개인의 경험도 약간 녹아 있고, 실제 인물이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최민식과 류승범의 마음을 따라가며 보여줄 생각이다. “예전과는 다르게,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를테면 내 복제품의 인생이 될 텐데. 나는 내 아이들에게
<주먹이 운다>·<달콤한 인생> 현장 방문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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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테크닉이 아니라 감정에 집중한다”
11월24일 오후 3시, 분당 서현역 앞 옥외주차장 5층.오늘 촬영분이라며 받은, 달랑 3쪽짜리 <주먹이 운다>의 시나리오에는, 시간배경이 분명 밤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낮이다.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해 터벅터벅 5층까지 걸어 올라가니,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30여명의 촬영진이 한참 열을 올리고 있다. 가죽점퍼를 입은 최민식이 누군가를 때리고 있다. 두대의 헨드헬드 카메라가 바쁘게 움직이며, 그 모습을 찍고 있다. 태식(최민식)의 후배이며 한때 같은 체급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용대. 43살의 태식은 거리에서 매를 맞아가며 돈을 벌고, 마지막 승부라 생각하며 뒤늦게 프로 신인왕전에 뛰어들었다. 반면 용대는 밤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건달이다. 졸개들을 거느리고 건들거리던 용대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태식의 주먹에 맞고 쓰러진다. 그런데 이미 받은 시나리오에서는, 이 장면이 용대가 태식을 때리는 것이었다. 이미 바
<주먹이 운다>·<달콤한 인생> 현장 방문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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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선택, 그것이 궁금하다
술자리에서 제안을 받았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과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의 촬영현장을 찾아보고, 인터뷰를 한 뒤에 기사를 쓰지 않겠냐고. 아마도 이유는, 개인적으로 두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장르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김지운과 류승완의 영화는 언제나 환영이다. 게으른 탓에 현장에 잘 다니지는 않지만, 미리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중에 영화를 보며 ‘목적’과 비교하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런 개인적인 이유로, 현장에 갔다.
사실 어떤 영화의 현장을 찾아 그 느낌을 표현하려면, 한번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적어도 5, 6번 아니 10번 정도는 현장을 찾아 분위기를 살피고, 이야기를 듣고, 꼼꼼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니 이 글은 절대로 현장취재가 아니다. 그저 현장을 찾아 감독과 인사를 나누고, 한 장면의 인상을 얻고, 감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에 대한 인상기
<주먹이 운다>·<달콤한 인생> 현장 방문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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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글을 써보고 싶더라고
조선희 l 이창동 선배는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고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해 애정있고 낙관적인 데가 있어요. 김영호가 고통받고 망가지는 것도 그 사람에게 어떤 맑은 심성이 있었기 때문이고, 홍종두도 그렇고. 지금까지는 굉장히 비극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를 즐겨왔지만 결국은 밝고 낙관적인 영화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창동 l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낙관하지. 인간에 대해. 한국사회도 긍정적으로 나아갈 거라고 봐요. 사람들 하나하나의 내면은 뭔가 이해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긍정하지만 그걸 위해서는 어떤 어두운 걸 통과해야 해요. 어둠을 통해서 빛을 본다고 할까. 그게 예술체험의 과정이랄까. 아까 분열을 말했는데 작가는 기본적으로 속에 분열을 갖고 있다고 봐요. 영화감독도 굉장히 많은 다중인격적인 게 있어야 돼. 그러니 분열을 받아들이세요. (웃음) 나는 장관도 내 역할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속에 그런 것도 있을 테니까.
독점인터뷰[6] 돌아온 이창동 감독, 갑자기 글을 써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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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영화로 이어진 힘
조선희 l 무엇이 이창동 감독을 작가로 만들었을까요.
이창동 l 아, 이건 어려운 단답형 질문이다. 외로움 같아. 외로움. 십대 초반에 이미, 나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했거든. 그때 소설도 썼어요. <삼국지>도 썼고. 촉나라 오나라 위나라 그림도 그려가면서 내 나름대로 쓴 거예요. 누구한테 보여준 적은 없지만 내가 그 무엇과 통신하는 방법이야. 외로우니까, 현실하고 소통이 안 되니까 그랬던 거 같아요. 지금도 그 정서나 심리상태가 거의 변하지 않은 거 같아요.
조선희 l 소설 쓰다가, 아 이거 못해먹겠다 해서 딴 데로 간 게 또 다른 작가의 길이었잖아요.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소설로, 영화로 끌고 온 힘이 뭘까요.
이창동 l 글쎄요, 힘이 있었나? 그냥 흘러오다보니까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데. 조선희씨가 잘 알겠지만 그건 있었어요. 이른바 80년대에 내가 글을 썼잖아. 우린 20대 때엔 인문학적 감수성이었거든. 그런데 80년대는 인문학
독점인터뷰[5] 이창동 감독을 작가로 만든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