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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러셀의 밤
이단아 켄 러셀의 작품들은 정치적으로 도발적이고, 도덕적으로 부조리하며, 시각적으로 불편하다. 그는 어떠한 영화적 사조와도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영국 영화계가 낳은 가장 독창적이고 논쟁적인 작가로 지속적인 행보를 해왔다. D. H. 로렌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사랑하는 여인들>은 켄 러셀과 여배우 글렌다 잭슨을 세계 무대에 소개한 작품. 남성의 전면 누드가 등장한 본격적인 (거의 최초의) 상업영화로 악명이 높다. <악령들>은 컨 러셀의 악마적인 비주얼 감각이 절정에 달한 작품으로, 성적으로 뒤틀린 곱사등이 수녀를 중심으로 성직자들간의 권력다툼과 마녀사냥의 피비린내나는 잔혹극 속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데릭 저먼이 참여한 미술과 주연배우들(올리버 리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광적인 연기는 세월이 지날수록 힘을 얻는다. <토미>는 켄 러셀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화. 69년에 발매된 록밴드 더 후의 음반을 토대로 한 이
2005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6] - 불면의 3일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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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 원컷. 소마이 신지의 영화세계는 이 한마디로 설명된다. 영화평론가 요모타 이누히코의 말을 빌리자면 “한 장면을 촬영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컷을 넣지 않고 카메라를 여기저기 이동시키면서, 불투명한 소음으로 가득 찬 상상조차 못할 공간의 변화를 관객에게 보여주었다. 일본 영화계는 이런 폭력적이고 아나키스트적인 방법 속에 앙드레 바쟁이 30년 전에 정착시킨 ‘공간적 깊이에 의한 데쿠파주’라는 테제를 초월하는 새로운 원리가 구현되었다고 믿고, 그의 영화를 광신적으로 숭배했다.”
원신 원컷의 원칙
1980년 만화 원작을 각색한 <꿈꾸는 열다섯>으로 데뷔한 소마이 신지는, 첫 작품부터 일관된 원신 원컷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가장 실험적인 영화 <숀벤 라이더>의 7분40초간 지속되는 첫 장면은, 3대의 크레인을 이용하여 컷을 나누지 않고 수영장에서 운동장으로, 다시 교문으로 이어지는 긴 시공간을 하나의 호흡으로 끌어들여 전설이 되었다. 소마이 신지는 자
2005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5] - 소마이 신지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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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를 찾아서
피델 카스트로에 관한 첫 번째 다큐멘터리 <지휘관>(Comandante, 2002)에 이은 올리버 스톤의 두 번째 쿠바 잠입기. 2003년, 일단의 쿠바인들이 선박과 비행기를 납치해 미국으로의 불법적인 이민을 시도하려다 실패한다. 쿠바 정부는 이들에게 전례없이 가혹한 처벌을 내렸고, 미국을 위시한 서구세계는 쿠바의 인권문제를 또다시 도마 위에 올렸다. 올리버 스톤은 다시 한번 쿠바로 날아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고, 그와 처벌당한 수감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사회주의 국가 쿠바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짚어낸다. 논쟁적인 감독은 공격적이고 객관적인 질문을 수시로 퍼붓고, 여기에 고집스레 대항하는 피델 카스트로의 거만한 제스처는 금방이라도 관객의 눈앞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63분의 짧은 시간 동안 올리버 스톤은 과거의 다큐멘터리들로부터 가져온 자료화면과 현재의 쿠바, 피델 카스트로의 노쇠한 카리스마를 기가 막힌 편집으로 섞어서 흔든다.
세계
2005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4] - 거장의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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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 봉봉
사람 좋은 중년 남자 후안 ‘코코’는 이십년 동안 일했던 주유소가 팔리는 바람에 실직자가 된다. 그는 나무로 나이프 손잡이를 깎아 팔아보지만 신통치 않고, 직장을 구하려 해도 경기침체 때문에 자리가 없다. 막막한 심정을 헛웃음으로 감추는 코코. 그는 도로변에 고장난 차를 세워두고 있던 여자를 도와주었다가 죽은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도고 아르젠티노종 개 한 마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삶이 변한다. <나의 개 봉봉>은 별다른 사건이 없는 영화다. 초라한 남자의 일상이 계속되다가 크고 하얀 개 한 마리가 나타나고 그 둘이 동무가 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코코와 봉봉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한 사람과 한 마리는 그들 나름대로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딱 한 가지가 부족했던 봉봉이 마침내 완벽한 개로 태어나는 순간, 코코의 조용한 환희는 잔물결처럼 공기를 흔들며 이상하도록 선명한 아르헨티나의 햇빛을 받아 반사광을 내뿜는다. 자신의 이름 그
2005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3] - 강추! 리스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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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과 막스 오필스의 동명영화로 익숙한 이야기다. 생일마다 낯선 사람으로부터 하얀 장미를 선물받아온 남자가 어느 해 장미 대신 편지를 받는다. 그 편지엔, 18년 동안 그를 사랑했고, 이제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옆집에 이사온 남자를 처음 보았던 순간부터 사랑을 시작해서 언제나 그의 곁을 맴돌았고 하룻밤 사랑 끝에 그의 아이까지 낳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끝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주연과 감독을 겸한 쉬징레이는 1900년대 비엔나를 1930, 40년대 베이징으로 옮겨 귀부인의 밀실처럼 우아한 향기를 불어넣었다. 남자가 건넨 흰장미, 전후 베이징의 퇴폐적인 댄스홀, 응고된 사랑이 새겨진 여인의 표정은 단순한 스토리를 애틋하고 섬세한 손길로 매만진 흔적. <귀신이 온다>의 장원이 무심한 플레이보이를 연기했다.
퀼
옆구리에
2005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2] - 강추! 리스트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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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가 벌써 여섯 번째 해를 맞았다. 메가박스를 주요 상영관으로 삼아 공간의 집중도를 높인 전주영화제는 디지털과 대안영화라는 컨셉을 유지하면서도 대중과 격차를 좁히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그 때문에 상영하는 영화의 편수도 100여편 가까이 줄었다. 정성 들여 고른 영화를 여러 번 상영해 관객과 좀더 자주 만나겠다는 것이다. 올해 전주를 찾는 영화는 170여편. 지난해 신설된 비디오 아트 섹션 ‘영화보다 낯선’ 또한 20여편만을 상영하는 대신 강의와 세미나를 보완해 관객이 수월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눈에 띄는 프로그램은 <바람꽃> <세라복과 기관총>으로 유명한 일본 독립영화감독 소마이 신지의 회고전과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마그렙(모로코와 튀니지, 알제리, 리비아가 있는 아프리카 북서부 지역의 총칭) 영화를 소개하는 특별전이다. 이 밖에도 가장 대중적이라 할 수 있는 ‘영화궁전’과 낯익은 작가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시네마스케이프’가 비
2005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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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 없는 제작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장르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라는 기획이 구체화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나리오 작업에만 3년 가까운 시간을 들인 <혈의 누>는 지난해 6월28일 고대하던 첫 촬영을 개시했지만, 북상한 장마전선 때문에 크랭크인을 한 뒤 곧바로 한달 가까이 쉬어야 했다. 이후에는 찌는 듯한 무더위와 싸워야 했고, 이들의 고난의 사투는 올해 2월이 되어서야 끝을 봤다. 제작진의 대장정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 어디 변덕스런 기상뿐이었을까. 남도의 바닷가를 돌며 피를 뿌리고, 눈물을 뿌리던 제작진의 하소연을, 여기 모아 담았다.
“양반 되기는 글렀군”
예를 갖추려면 몸가짐부터 바로 해야 한다 했겠다. 차승원, 윤세아, 박용우, 3인의 배우 또한 촬영 전 한달 동안 삼청각(三淸閣)을 드나들며 절하고 차 마시는 기본 예법을 숙지해야 했다. “옛 양반들의 놀이문화라는 게 상놈들이 따라하지 못하도록 비틀고 비튼 것이더군.” 차승원
<혈의 누> [3] -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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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없는 자들의 지옥을 보여주고 싶었다”
새벽까지 믹싱 작업을 하고 왔다지만 피곤한 기색은 없었다. “프린트 나오면 감독이 할 수 있는 건 없잖아요.” 개봉을 3주 앞두고 막바지 후반작업에 진력하고 있는 김대승 감독은 겉은 몰라도 요즘 “피가 마를 지경”이라고 말한다. 2년 가깝게 <혈의 누>와 씨름했던 그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자신의 영화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복기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편집본을 보니 촬영장소 헌팅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전봇대야 어디든 꽂혀 있을 거라 예상했었지만 대부분의 바다에 양식장이 있어서 힘들었다. 포구마을 세트 부지도 알아봤는데 오목하게 들어간 적당한 곳은 이미 현대식 건물들이 다 들어서 있었다. 발품 팔아서 찾아낸 공간들을 영화의 전체 톤에 맞게 통일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장마와 배우 스케줄 때문에 한달 정도 촬영이 멈춘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쫓기는 심정으로 헌팅했다.
<혈의 누> [2] - 김대승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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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근대, 그 핏빛 미궁 속으로
숨기려 들면 더 궁금한 법이다. 조선시대 역사 추리극 <혈의 누>는 제작기간이 3년이나 되지만, 제작진이 약속하고 입을 봉한 탓에 좀처럼 얼개가 드러나지 않았던 영화.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이를 과학적인 수사방법으로 뒤쫓는 조선시대 수사관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저 <장미의 이름> 같은 모양새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할 뿐이었다. 하지만 5월4일 개봉을 앞두고, 슬쩍 들여다본 <혈의 누> 판본은 그런 추측이 완전히 틀렸음을 말해줬다. CG, 믹싱, 색보정이 마무리되지 않은, 게다가 VHS로 본 불완전한 판본이었지만, 피 묻은 칼자루를 쥔 자가 누구인지 묻는 데만 영화가 진력하지 않았음을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았다. 봉건의 썰물과 근대의 밀물이 빠르게 교차하는 시대를 상상으로 불러들인 제작진은 피비린내 진동하는 연쇄살인극 아래 무엇을 숨겨둔 것일까. 직접 눈과 귀로 확인하는 것이 호기심을 달랠 최선의 방법이겠지만, 그
<혈의 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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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을 통한 역사만화 해보고 싶다
-종이만화 외에 멀티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만화가로 안다. 잠시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도나스’라는 이름의 회사였는데 인터넷 사업 기획에 뛰어들지 않으면 뭔가 큰 기회를 놓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골드러시의 시기였다. 24시간 365일 열려 있는 남기남의 사이버 마을 같은 것을 꿈꾸었다. 밖에서 비가 오면 그 마을에도 비가 내리고, 꽃가게에 들어가면 기남이가 주문을 받고 극장에 가면 영화를 볼 수 있는 <트루먼쇼> 같은 세계를 신나게 구상했는데, 유기적으로 관리할 통제시스템 비용이 수익성에 맞지 않았다. 지금도 아이디어는 많다. 영화의 세트처럼 3D 세상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만화를 그리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어울리는 친구들이 궁금하다.
=만화와 전혀 관련없는 일을 하고 내 만화를 열심히 읽지도 않는 친구들이다. 만화가끼리는 어쩌다 만나면 모임을 발족하자고 말만 해놓고 다시 각자
만화가 정훈이를 만나다 [2] - 정훈이가 뽑은 만화 BEST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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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한결같이, <씨네21>의 골키퍼, 정훈이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고 소설도 있지만, 바람 잦은 인생에서 마지막 춤 따위를 감히 누구와 기약할 수 있으랴. 그래도 <씨네21> 열살 생일 축하파티의 첫 번째 춤만큼은 꼭 이 남자와 추고 싶었다. 편집장이 네번 바뀌는 동안에도 두 페이지의 텃밭을 한결같이 장악해온 행복한 영주, 그의 만화 때문에 잡지를 산다는 독자들의 쇄도하는 고백에 어느 감독이나 평론가보다 <씨네21> 기자들이 질투하는 만화가 정훈이가 그 사람이다. 1995년 <영챔프>가 주관하는 제2회 신인만화 공모전에서 수상해 <씨네21> 제9호에 인터뷰가 실린 것을 인연으로, 정훈이 작가는 <씨네21>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1996년 초 본격적인 매주 연재에 돌입해 500호를 눈앞에 두고 있다. 24장의 프레임으로 1초를 이루는 영화를 닮았는지, 스물세칸 내지 스물다섯칸에 걸쳐
만화가 정훈이를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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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공간에서 도덕적 타락이 일어난다”
심영섭 | 당신의 영화에서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이 갖는 의미가 궁금하다. 계급이나 인종문제도 포괄하고 있는데.
루크레시아 마르텔 | 내가 태어나서 19년 동안 산 곳이고, 아르헨티나 문화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다. 문화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이고, 가톨릭 색채가 강하다. 계급 격차라는 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빈민층은 지역 원주민이고, 부유층은 유럽 이주민들이라는 구분도 유사하다. 미국을 잘 아는 사람들은 아르헨티나 북부가 미국 남부와 비슷하다고들 한다.
심영섭 | 두 작품에 모두 백인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이 섞여 있고, 그것이 가족문제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인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내가 보기에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하는 모든 악의 근원은 중산층에 있다. 물론 중산층보다 도덕적으로 더 많이 타락한 고위층들이 있지만, 중산층은 정치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많은 심각한 문제들을 낳고 있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2]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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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나요? 당신의 삶이 부식되는 소리가
루크레시아 마르텔이라는 이름은 아직 생소하다. 지구 정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 이제 두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놓았을 뿐인 이 여성감독은 그러나, 칸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앞다퉈 초청장을 보내는 유력한 감독이 되었다. 데뷔작 <늪>에 이어, 고향인 아르헨티나 북부에서 촬영한 두 번째 영화 <홀리 걸>은 사회와 가정, 소통과 욕망의 문제를 차갑고 건조한 영상에 담아낸 수작이다. 서울여성영화제에서 <홀리 걸>을 개막작으로 선보이며 방한한 루크레시아 마르텔을 영화평론가 심영섭씨가 만났다. 남아메리카영화와 여성영화에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둬왔던 심영섭씨는 이 둘의 교집합격인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영화세계를 주목했고, 지난해 가을 <씨네21>의 특집 기사 ‘거장 예감, 세계의 신성 감독’ 편에 마르텔을 추천하며 열렬한 지지의 변을 전한 바 있다. 1966년 말띠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은 ‘여성
루크레시아 마르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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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따뜻하고, 이미 완전한 오즈의 세계
오즈 야스지로의 <태어나기는 했지만>
오즈 야스지로는 1903년 12월12일 태어났다. 그리고는 1963년 12월12일 60살 되던 생일날 세상을 등졌다. 습관처럼 오즈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나면, 우연이든 운명이든 시작과 끝을 일치시켜 삶을 살다간 그의 윤회 과정에 언제나 소름이 돋는다. 2003년 겨울, 도쿄 외곽 사원에 있는 그의 묘지를 찾았을 때 그는 다른 이웃들과 거기 그렇게 조용히 묻혀 있었다. <태어나기는 했지만>이라는 제목을 중얼거리는 순간 그 묘지의 차갑고도 평온한 풍경이 떠오른다. 태어남과 죽음이 같은 의미로 공존하는 오즈의 영화이어야만 가능한 연상일 것이라고 믿는다.
오즈가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작가가 된 것은 친구 야마나카 사다오를 경쟁자로 삼아 형식을 고민하고, 미국영화를 무척이나 즐기면서 보냈던 그 전전 초창기 시절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오즈적인
<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8] - 아시아영화 베스트 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