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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다룬 <몰락>부터 히로히토 일본 천황 다룬 <태양>까지
제55회를 맞는 베를린영화제의 경쟁부문은 그 어떤 해보다도 화제작이 적었다. 베를린에서 화려하게 첫선을 보이리라던 <에비에이터>는 이미 개봉되어버렸고, 또 다른 할리우드영화 <하이츠>(Heights)는 경쟁부문에서 취소되기도 했다. 함께 영화제에 참석했던 남편과 나는 베를린에서 본 최고의 작품은 아파트에서 16인치 텔레비전으로 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볼 정도였다.
권력자를 인간으로 조명한 최초의 영화들
그러나 어떤 영화제든 적어도 한번은 참으로 기이한 영화가 숨어 있다 튀어나오는 마법상자 같은 면이 있게 마련이다. 올해에도 그랬다. 공교롭게도 나는 한달 동안 자그마치 네편이나 권력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하는 아주 유사한 영화들을 한국과 베를린에서 연이어 보게 되었다. 그것들은 환영처럼 최면처럼 역사의 순간들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총결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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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판 <쉰들러 리스트>
테리 조지 감독의 <호텔 르완다>
똑같은 르완다 인종청소를 다루고 있는 <4월 언젠가>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후투가 좋은 놈인가, 투치가 좋은 놈인가.” <호텔 르완다>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직까지 미국인 기자가 백악관 대변인에게 물어보는 질문의 수준에 멈춰 서 있었을 것이다. 르완다 인종청소는 불과 11년 전에, 단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100일 동안에 100만명이 몰살당한 비극이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투치족과 투치족을 도와준 후투족이 차디찬 길바닥 위에 시체로 쌓여갈 때 세계가 귀막고 눈감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큰 비극이 되었다. 테리 조지 감독은 아프리카의 쉰들러라 할 만한 호텔 매니저 폴 루세사바기나(돈 치들)의 실화를 장전해 세계인의 무관심을 겨냥해 쏘았고, 그것은 명중했다.
쉰들러는 유대인도 아니었고 약자도 아니었지만, 폴은 아내와 처가가 모두 투치족이라는 점에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총결산 [2] - 화제작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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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과 눈발 그리고 우박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리는 베를린의 먹먹한 날씨만큼이나 베를린영화제의 장래는 어두웠다. 베를린의 좌파 신문 <타게스슈피겔>은 평론가 얀 슐츠 오얄라의 입을 빌려 “규모만 늘려가는 영화제, 장래가 불안하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이런 먹구름은 일찍이 예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기성품 블록버스터를 만들던 롤랜드 에머리히 심사위원장, 할리우드 배우가 오지 않는다고 상영작을 뒤바꾸는 집행위원장 등이 맞물리며 어이없는 수상 결과를 낳았다. 코슬릭 위원장이 그토록 애원했던 할리우드 배우들조차 왕림을 거절하면서 베를린영화제의 깃발은 속절없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러나 숨어 있는 보석들마저 외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수상 결과를 정리하고 베를린영화제 가운데 우뚝 빛나는 작품들을 꼽아봤다. 차이밍량의 <떠다니는 구름>을 비롯한 다섯 작품과 감독의 인터뷰를 곁들였다. 그리고 평론가 심영섭은 권력자의 최후에 주목한 영화들에 관해, 그리고 주목할 만한 젊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총결산 [1] - 수상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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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표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많이 놀았다. 이렇게 놀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영화인이 됐다는 것에 너무 기분이 좋아서.”
2002년 여름,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으며 시작된 <죽어도 좋아>의 ‘심의 전쟁’은 겨울에야 일단락됐다. 그 사이 세 차례나 심의를 집어넣으면서 혹독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삭제가 아닌 색보정으로 개봉을 했으니 감독으로선 의도를 관철시킨 셈이다. 그래서 푹 놀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불쑥 나타난 그를 영화계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행히 사람들이 영화감독으로, 영화인으로 인정해줘서 좋았다. 꿈을 이룬 거다.” 더욱 ‘다행’인 건 “그 뒤에 좋은 영화를 만드는 많은 제작자들이 (차기작을 함께 해보자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고민은 많았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던 상황에서 저예산으로 만든 <죽어도 좋아>처럼 다음 작품을 하긴 곤란했다. “어떻게, 어떤 형식으로 영화를 만드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과 공감을 나누느냐가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6] - 박진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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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욱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갑자기 남자가 좋아졌다.”
오해하지 마시라. 커밍아웃 선언이 아니다. <나비>를 끝내고 규모가 큰 첩보영화를 준비하던 문승욱 감독은 자료조사만 마치고 멈춰섰다. “머리로 쓰는 이야기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내 피부에 와닿는 걸 쓰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나이 마흔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을 돌아본 것도 그때였다. “전엔 수다떠는 상대가 대개 여자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남자들로 바뀌어 있더라. 우정은 뭔가, 의리는 뭔가 하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이 무렵, 그는 후배들과 함께 술을 진탕 마시고 귀가하던 중 택시에서 흘러나온 신파조의 노래에 끌리기도 했다. “그래, 남자 이야길 해보자. 세상과 어울리지 못해 외로운 남자, 나잇값도 못하는 철부지 남자를 다뤄보자.” 결심은 그렇게 굳어졌다. 외로운 남자 이야기가 뜬금없는 건 아니었다. “언젠가 다시 만들고 싶은” 데뷔작 <이방인>도 세상과 격리되어 배회하는 남자에서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5] - 문승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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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이 영화가 원래는 데뷔작으로 하고 싶었던 영화다.”
박흥식 감독은 지난해 6월 말 <인어공주>를 개봉하고 딱 석달 쉬었다. 본래 “더 빨리 시작하려고 했다”는 그의 신작 <엄마 얼굴 예쁘네요> 시나리오는 감독이 <하루>의 조연출을 끝낸 뒤 쓰여졌다. 1979년 10월26일부터 1981년 한국 프로야구 개막까지, 유신정권의 끝에서 전두환 정권으로 넘어가는 약 3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중학교 1학년짜리 소년 광호의 짧은 성장기였다. 원고를 들고 싸이더스를 찾아갔다. 스타 캐스팅이 되는 연령도 아니요 보송한 아이를 써먹을 연령도 못 되는, 사춘기라는 애매한 나이의 주인공을 들어 제작사는 “캐스팅 각도가 안 보인다”는 표현을 썼다. 마음을 접고 싸이더스의 다른 프로젝트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데뷔하게 된 박흥식 감독은 <엄마 얼굴…>의 한 장면을 <나도 아내가…> 속에 슬쩍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4] - 박흥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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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동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그때, 혼자 남겨진 느낌이 묘했어요.”
민규동 감독은 3년 전 <씨네21>에 실린 ‘네 감독의 신작 프로젝트’ 기사를 그렇게 회상했다. 당시 그는, 몽골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아내를 찾아나선 바이올린 주자의 이야기 <솔롱고스>를 차기작으로 준비 중이었다. 같은 지면에 소개된 프로젝트는 뒷날 <바람난 가족>으로 제목이 바뀐 임상수 감독의 <마지막 연애의 상상>과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이었다. 세개의 기획은 고치를 벗고 스크린으로 보란 듯이 날아올랐지만, <솔롱고스>만은 종이 위에 외로이 남았다. 그뒤로도 오랫동안 민규동 감독은 많은 이야기를 썼다. 미처 계발되지 않은 자신을 탐색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김태용 감독과 공동연출한 기묘하게 아름다운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제작자를 만나는 그의 발목에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3] - 민규동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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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내 영화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2004년 6월 <아는 여자>가 개봉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장진 감독은 축지법을 구사하는 듯한 속도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크레딧은 자신의 연극을 각색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제작자. 한국전쟁의 포화에서 비껴나 있는 산골마을 동막골, 그곳에서 북한군과 국군과 연합군 병사들이 적의를 무너뜨리고 우정을 얻는 영화다. 장진 감독은 <묻지마 패밀리> 중에서 <내 나이키>를 연출했던 박광현 감독에게 이 영화를 맡기고 자신은 다소 규모가 큰 영화를 연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전에 쉬어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감독이 참여해 제각기 단편을 연출하는 환경영화와 인권영화 프로젝트, 연극 <택시 드리벌> 연출을 지나, 장진 감독은 “어느 정도는 대중적이고, 또 어느 정도는 실험적이어서, 다섯 번째 영화로 적당하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2] - 장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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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찍고 있습니까?
근황이 궁금했던 다섯 감독에게서 신작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민규동, 문승욱, 박진표, 박흥식, 장진. 소녀처럼 투명한 감성을 지닌 민규동 감독은, 맑고 예민한 소녀영화이자 낯선 공포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를 만들어 공동연출한 김태용 감독과 함께 기억할만한 데뷔작을 남긴 바 있다. 그는 3년 전 <씨네21>을 통해 밝힌 것과 다른 프로젝트로 캐스팅을 완료하고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6년 만에 찍게 되는 민 감독의 두 번째 영화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디지털카메라에 디스토피아적인 근미래와 영혼을 담은 데뷔작 <나비>(2001)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청동표범상을 수상한 문승욱 감독은 4년만에 신작을 공개한다. 영화 <사랑의 이름으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구원과 치유를 희망하는 뜨거운 영화다. 황혼기 사랑에서 삶의 찬란한 의미를 찾아내는 영화 <죽어도 좋아>로 비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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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동수는 어떤 인물인가?
물처럼 고정되지 않은 캐릭터
<극장전>은 홍상수 감독이 전작의 배우를 주인공으로 다시 기용하는 첫 번째 영화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가 배우였다면, 지금의 동수는 감독이다. 그런데 사람이 좀 특이하다. 종종, 연출을 하는 사람이나 연기를 하는 사람이나 서로 쳐다보며 어색하고 또 재밌다는 듯이 껄껄 웃을 때가 있는데, 김상경이 “머리에서 열이 나. 머리가 복잡한 것 같아”라고 하면, “원래 그런 거야. 그게 맞아. 네가 지금 머리가 복잡해”라고 홍 감독이 응수하고, “나같이 이성적인 사람이 이런 거 하려니까 진짜 미치겠네”라고 다시 김상경은 토로한다. 김형구 촬영감독이 <극장전> 동수하고, <생활의 발견> 경수하고 뭐가 다르냐고 농담처럼 묻자, 김상경은 “감독님이 그러는데요, 경수는 동수 형이고, 그 위로 (홍)상수도 있고, (<오! 수정>의) 영수도 있다는데요”라며 웃는다. 물론 농담이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 현장 스케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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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이 지난 2월7일 촬영을 마쳤다. <씨네21>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이어 다시 한번 현장을 방문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 그는 현장에서 많은 걸 결정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우리 자신들이 그렇게 신기한 동물이었나를 되돌아보게 하다가도, 문득 자의식을 지닌 영화형식이란 무엇인지 질문받는 듯한, 그 장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전작들과 다름없이, 구조는 알쏭달쏭하고, 인물들은 흥미롭다. 이제 남은 것은 개봉을 기다리는 일인데, 여기저기 빈구석을 상상으로 메워넣으며 <극장전>이 펼쳐지는 5월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영화의 모든 현장마다 기적처럼 일어나는 창조의 순간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래서 모든 영화현장이 다 궁금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은 머리로 마련한 구상을 현장에서의 인상과 감각으로 깨뜨려나가는 특이한 과정을 거쳐 영화를 완성한다.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 현장 스케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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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의 가장 큰 관심은 인간 자체다”
굳은 표정으로 직선주로를 달리는 단거리 주자 같은 인간 군상으로 필모그래피를 빽빽이 메워온 최양일 감독. 그의 신작 <피와 뼈>는 2004년 <마이니치> <닛칸스포츠> <키네마준보> 등 주요 영화제의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대부분 휩쓸며 지난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양석일이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써내려간 1500매가량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 수정만 20여번. 6년간 준비하여 최양일이 건져올린 <피와 뼈>는 그의 비정한 인류학 보고서의 결정판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하드보일드의 제1 명제를 <피와 뼈>는 빈틈없이 가혹하게 밀어붙인다.
눈 깜짝하지 않고 관객을 까무라치게 만드는 주인공 김준평(기타노 다케시)의 몸짓처럼. 그는 140분 러닝타임 동안 관객이 화면에서 얼굴을 돌리게 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폭력과
최양일의 <피와 뼈> [2] - 최양일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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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압적 아버지, 잔혹한 신화가 되다
소설 <피와 뼈>는 양석일에게 나오키상과 쌍벽을 이루는 야마모토 주고로상을 안겼다. 16년이 지나고, 스크린으로 귀환한 영화 <피와 뼈>는 최양일에게 일본영화제의 그랜드슬램에 가까운 업적과 평단의 찬사를 선사했다. 제주도에서 무당이 굿을 하며 되뇌는 “피는 어머니로부터 받고, 뼈는 아버지로부터 받는다”는 말에서 제목을 빌려온 <피와 뼈>는 최양일이라는 붓과 기타노 다케시라는 먹이 만나 터질 듯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괴력의 영화가 되었다. 140분 동안 눈을 떼지 못하도록 움직이는 김준평의 그악스러움과 그에게 짓밟히는 가족들의 처절함은 최양일식 현대 비극의 진수를 보여준다. 시대, 사회, 가족을 역류하는 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피와 뼈>에 관한 이야기.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를 보면서 연상되는 소설이 하나 있었다. 나카가미 겐지의 <고목탄>이라는 작품이다.
최양일의 <피와 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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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밤에 너의 영화를 보았다. 그것은 힘이 셌고 재미가 있었고 나는 흥분했다. 나는 너의 영화를 베를린영화제에 초청하고 싶다. 그것은 2월10일에 발생할 것이다.”
독일인 프로그래머가 부산영화제 마지막 날 내게 보내온 메일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좀 으스스했다(자동번역프로그램을 통해 한글로 번역해서 보낸 것. 내 시나리오도 자동번역기에 넣어 좀 공포스럽게 할 수 없을까?).
<신성일의 행방불명>이 베를린영화제에 가게 됐다고 자랑하자 최모 선배는 물었다. “베를린인디영화제?” 강모 후배는 물었다. “베를린단편영화제요?”
“베를린영화제, 부산영화제보다 후지대.” 김모는 말했다.
이들이 이러는 걸 보면 대단한 영화제인 게 분명해. 느낌이 좋은 게 왠지 가서 상을 받을 거 같다. 그럼 시상식 단상에 올라가 트로피를 받고 소감을 밝히는 거야. “이 순간을 고대했습니다. (중략) 수상거부를 하면 재밌겠다고 심심할 때 가끔 생각했거든요. 제게 상을 주시니 영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4] - 신재인 감독의 베를린 탐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