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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8일 어버이날 방문한 파주 아트서비스의 <가발> 세트장. 공포영화 현장이라면 기본 반찬으로 상 위에 오를 강렬한 조명과 화려한 인테리어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메인조명은 배경을 어루만지듯 희미한 톤으로만 깔리고, 스포트라이트를 만들어내는 조명도 되도록 사절이다. 배우의 얼굴 윤곽과 암부를 잡아내는 것이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 “전형적인 장르 공포물을 만들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신연 감독의 출사표는 촬영 세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가발>은 “귀신을 기다리는 영화가 아니라 사람을 지켜보는” 인물의 변화에 집중하는 공포물이다. 따라서 컷의 과도한 분할이나 카메라의 급작스러운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전체 800여컷으로 이루어지는 <가발>은 느린 호흡을 통해 세심한 시선을 보여주는 화면 스타일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
세월의 흔적은 남기고, 인공성은 배제한 세트
흰색과 갈색이 주를 이루는 실내 거실. 목조로 이루어
<분홍신> vs <가발> [4] - <가발>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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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분홍신>_ 29켤레의 분홍신
영화 <분홍신>은 안데르센의 동화인 <분홍신>(The Red Shoes)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등장하는 신발은 말 그대로 ‘분홍색’이다. 장박하 미술감독은 개성을 확연히 드러내는 디자인을 생각했으나 김용균 감독은 “신발이 지나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싫다”는 입장이었다. 이야기 자체의 힘이 분홍신보다 더 돋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근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영화의 내용상 지나치게 고전적이어서도, 현대적이어서도 곤란했다. 그래서 시대를 타지 않는 형광빛이 도는 비단천으로 제작했다. 보여지지 않는 신비감을 주려했기에 반사율이 지나치게 많은 소재는 피했다”는 게 장박하 미술감독의 이야기. 구두는 총 29켤레가 제작되었다.
<가발>_ 1천만원짜리 가발
<가발>의 촬영현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광경은 분장팀이 채민서를 따르며 끊임없이 빗질을 하는 일. 극중에서도 지현이 수현의 머리를 빗겨주는 장면은
<분홍신> vs <가발> [3] - 다섯 가지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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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를 자르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죄를 회개할 수가 없어지잖아요. 분홍신을 신은 발을 잘라줘요.” 사형집행인은 분홍신이 신겨진 카렌의 발을 잘라냈다. 분홍신을 신은 조그마한 두 다리는 곧 뜰을 가로질러 깊은 숲속으로 춤을 추며 사라져버렸다. - 안데르센의 동화 <분홍신> 중에서
5월10일 오전 11시. 안산의 어느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 스탭들은 “화면의 간지를 위해” 바닥에 연신 물걸레질을 하고 있다. 김용균 감독은 언제나처럼 말없이 빈 종이컵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겨 있다. 폭풍 전야처럼 조용한 정적을 깨고 “감독님, 이 영화 벽지- 공포영화. 아니. 오피스텔- 공포영화예요?”라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몰래 방문했던 4월16일의 현장도 여의도 근처의 오피스텔 옥상이었고, <샤이닝>을 연상시키는 복도장면 역시 마포의 한 오피스텔에서 촬영되었다. 사실 한국의 오피스텔이라는 공간은 공포영화의 무대로서 더할 나위가 없다. 사각형 개인용 주거공간에서 사람들
<분홍신> vs <가발> [2] - <분홍신>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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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물건을 탐하지 말라!
<분홍신>과 <가발>은 한 다발의 기획서 뭉치가 잉태한 여름 한철용 공포영화다. 여자주인공이 ‘분홍신’과 ‘가발’을 주워오면서 공포가 시작된다는 설정도 비슷하다. 하지만 두 작품에서 기획영화 이상의 가능성을 본다면, 그건 김용균과 원신연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인물의 감정선을 정밀묘사하듯이 그려냈던 <와니와 준하>(2003)의 김용균 감독은 <분홍신>이라는 잔혹동화를 빚어내고 있고, 철로 위에서 죽음을 바라는 철도노동자의 삶을 담아낸 단편영화 <빵과 우유>(2003)의 원신연 감독은 슬픈 멜로 같은 괴기담 <가발>을 만들고 있다. 도통 공포영화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감독들이 낯선 장르에 뛰어들어 만들어가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현장에서 지켜본 김용균과 원신연의 도전은, 비슷한 동시에 대단히 상반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7월 개봉을 앞둔 두 편의 공포영화가 속삭여주는 비밀스러
<분홍신> vs <가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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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냥 정공법으로 합니다”
창간 10주년을 맞이한 <씨네21>이 ‘한국영화의 현재를 묻다’라는 주제로 7회에 걸친 특강을 준비했다. 감독, 제작자·배우로 구성된 7인의 강연자 모두는, 각자의 분야에서 일정한 업적을 남기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주인공들. 감독 중에선 박찬욱·홍상수·봉준호 감독이, 배우로는 백윤식과 문소리가, 제작자로서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와 MK픽처스 심재명 대표가 강단에 선다. 지난 5월11일 연세대 위당관에서 백윤식의 강연으로 시작된 이번 행사는 앞으로 3주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며, <씨네21>에는 이들 강연의 재구성본이 실리게 될 것이다. 다음주에는 배우 문소리와 감독 박찬욱의 강연이 이어진다.
지난 2년에 걸쳐 한국 영화계가 재발견한 중견배우와의 진솔하고도 조심스런 대화가 이루어진 곳은 축제의 열기로 들썩이는 연세대 한쪽에 마련된 강연장.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 진출작 <그때 그 사람들>의 임상수 감독
영화인 7인 특강 [1] - 백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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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뢰 PD
TV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연애의 기초> 다수의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섬세한 심리묘사와 자연의 풍광을 화폭에 담듯 미장센을 살린 연출로 몇 안 되는 ‘작가주의 PD’라는 찬사를 받았다
영화
<꽃을 든 남자> 1997년, 제작 MBC프로덕션 주연 김승우, 심혜진 제작비 15억원 서울관객 2만
MBC라는 방송사 자본에 방송 시절 콤비인 주찬옥 원작, 하재영 촬영 등은 온전한 영화라기보다는 드라마와 영화 어느 한 군데도 정확히 적을 두지 못하고 비교적 안전한 시작을 도모하려는 감독의 소심함의 결과로 보인다. 결국 <꽃을 든 남자>는 온전하지 않은 드라마와 어설픈 영화의 형상을 띠게 되었다. 황인뢰 본래의 전공에서 벗어난 스타일과 컴퓨터 그래픽이 가해진 로맨틱 코미디란 기획이 만든 불협화음은 소음으로 들릴 뿐이다.
이진석 PD
TV
<사랑을 그대 품안에> <호텔> <
영화로 간 PD들, 무엇이 문제인가 [3] - 영화로 간 PD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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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 전혀 다르더라”
지난 3일 (주)시네마 서비스의 강우석 감독과 (주)김종학 프로덕션의 김종학 PD는 방송과 영화간의 긴밀한 교류를 위한 전략적 제휴를 발표했다. 시네마 서비스가 자본을 유치, 투자해서 김종학 프로덕션과 영화뿐 아니라 TV 프로그램도 함께 제작해 나가겠다는 것이 골자다.
김종학 PD는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 굵직굵직한 대작들을 연출해 내면서 충무로가 탐내는 ‘1순위’ TV PD로 꼽혔지만 제이콤으로 독립하면서 기획한 창립작 <인샬라>가 모로코 올 로케이션과 15억원의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참패하면서 준비중이던 시나리오 <쿠테타>도 무기한 보류되었다. 또한 이어지는 TV 시리즈 <백야 3.98>과 <고스트> 등도 러시아 촬영과 특수효과 촬영이라는 새로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부진을 면치 못했다. 방송사의 품을 떠난 뒤 이어졌던 실패는 거액의 수업료를 지불한 훌륭
영화로 간 PD들, 무엇이 문제인가 [2] - 김종학 PD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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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한 지 10년, PD로 입봉한 지는 6년차 되는 드라마국 PD ‘예술하네’씨는 오늘도 출근을 했다. 하지만 별다른 일없이 책상 앞에 앉아있다보면 점심시간이 오고 이럭저럭 책이나 잡지를 뒤적이다가 퇴근을 한다. 1년에 만들어지는 드라마라고 해봐야 6개월 단위의 주말연속극 2편, 월·화 혹은 수·목 미니시리즈 4편씩, 일일드라마, 아침드라마, 단막극 통틀어 봐야 스무개도 안 되는 편수에 비해 들이미는 숟가락 수는 너무 많지, 그렇다고 어디 AD급으로 공동 연출하기에는 자존심 상하고, 설상가상으로 외주 비율이 높아지면서 그나마 몇편 안 되는 굵직 굵직한 것들은 어느새 밖으로 나간 유명세 있는 선배님들 차지고보니 1년 아니 2년 동안 연출 한번 못해보고 나이만 먹고 있는 것이다.
아! 한때 그는 얼마나 잘 나갔던가? 어릴 땐 신동소리 들으며 크고, 좋은 대학 들어가 주위의 부러움을 사면서 그 힘든 ‘언론고시’에 합격했을 때만 해도 그의 미래의 청사진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일상에
영화로 간 PD들, 무엇이 문제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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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잔혹이야기>(菁春殘酷物語)1960년
부모를 버린 청춘남녀의 파멸기를 파격적이고도 역동적인 형식에 담아낸 오시마의 출세작. 오시마 자신이 뽑은 대표작으로, 젊음·폭력·섹스라는 오시마 평생의 소재 속에 정치적 근본주의가 은밀히 잠복해 있다. 50년대의 열혈 학생운동가였고 지금은 불법 낙태수술로 먹고사는 선배 의사의 더러운 산부인과 병원. 낙태수술을 받고 탈진해 누워 있는 여주인공 옆에서 남자주인공은 사과를 질겅대고 있는데, 그의 눈에는 눈물이 번진다. 이 한 시퀀스만으로도, 오시마는 전후 일본사회의 불모성과 일본공산당이 주도한 50년대 좌파운동의 실패, 살부(殺父)를 감행한 청춘남녀의 불안과 비애를 단숨에 드러낸다.
<일본의 밤과 안개>(日本の夜と霧)1960년
정치노선에 관한 격론이 이야기를 대체한 진귀한 정치영화. 스탈리니즘에 사로잡힌 50년대 학생운동과 일본공산당의 몽매성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오시마의 신좌파 정치노선이 전경화한다. 더욱 놀라운
오시마 나기사 [2] - 대표작 5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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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뭐란 말인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기껏 일찍 죽는 것 정도가 아닐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뉴웨이브는 아비의 집을 불태우고 거리에 나선 아이들의 몫이었다. 악동 프랑수아 트뤼포가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치는 묘굴꾼’이란 비난 속에 프랑스 평단을 들쑤셔 놓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젊은 감독들은 아버지의 영화의 죽음을 고한 ‘오버하우젠 선언’을 내놓았다. 전후 일본영화계 최대의 문제아 오시마 나기사(1932∼ )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27살의 나이에 데뷔하는 진기록을 세우더니 “일본영화는 없다”는 도발적 발언으로 일본영화계를 뒤집어 놓았다. 오시마도 아비에 대한 저주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그가 1973년에 쓴 에세이 <내 아버지의 부재-내 실존의 결정적 요소>는 이렇게 이어진다.
“내 아버지는 내가 6살에 돌아가셨다. 난 어머니라는 존재의 보호막이 싫었다. 그게 내 삶을 평범하게 만들었다. 내
오시마 나기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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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사탄의 치명적 유혹
악마가 탐내는 남자의 몸이 그리스 조각상 같은 완벽한 신체는 아니다. 뭇 여성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화려한 외모나 싱그러운 향기 물씬 피어나는 젊음은 사탄의 노리갯감으론 적당해도 어둠의 마력을 보여주기엔 부족하다. <이스트윅의 악녀들>의 잭 니콜슨, <데블스 에드버킷>의 알 파치노를 떠올린다면 <엔드 오브 데이즈>의 사탄으로 가브리엘 번을 택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의 귀족다운 우아한 옷차림과 당당함에 험한 과거가 새겨 있는 이마의 주름, 이지적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그의 마음에 연옥이 머물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는 상처입은 짐승처럼 날뛰지 않고도 분노와 격정을 보여주는 드문 배우다. 미국에서 찍은 첫 영화 <밀러스 크로싱>은 이후 그가 보여줄 연기의 스펙트럼을 하나의 프리즘처럼 보여준다. 갱스터와 필름누아르의 시공간에서 가브리엘 번은 보스의 정부와 치명적 관계를 맺는다. 걷잡을 수 없는 운명
할리우드 누아르의 새 별들 [5] - 가브리엘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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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악취를 맡아볼래?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성장이란 어떤 의미일까. 모르는 척 눈감아버리는 타협? 아니면 지배하는 자들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진입하려는 욕망? 이 두 가지 선택을 모두 거부한다면 영원히 자라지 않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을 날겠다는 피터팬의 순진무구한 꿈이 아니다. 오히려 어른들에 대한 환멸 때문에 자신의 키를 어린아이의 그것으로 고정시킨 <양철북>의 난쟁이, 절망하는 오스카에 가깝다. 세살 때 계단에서 굴러떨어짐으로써 스스로 성장을 포기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른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던 오스카. 젊은 시절, 난폭하기로 이름 높았던 숀 펜(39)의 거친 기질이나 기존의 질서를 거스르면서 나가는 그의 영화 속 캐릭터들은 그 오스카를 연상시킨다. 숀 펜은 피터팬처럼 아버지들의 세계를 떠나버리지 않는다. 그는 오스카처럼 알 것 다 안다는 표정으로 아버지의 땅, 미국을 응시한다. 그의 눈에 비친 세계. 권력과 이해관계, 소
할리우드 누아르의 새 별들 [4] - 숀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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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함이 그들 정의로 몰아넣었다
<LA컨피덴셜>은 흐트러진 미궁의 세계를 그려내는 영화다. 하나의 죽음은 또다른 죽음과 맞물리고, 조각난 사건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타락을 각기 다른 형태로 반사한다. 길을 찾으려 애써 보아야 소용없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환한 햇살이 어떤 어둠의 흔적도 지워 버리는, 이곳은 천사들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어둠만이 존재하는 고담시의 지배자 잭 니콜슨(<배트맨>)도 이 눈부신 도시에서는 질척거리는 욕정과 끈끈한 먹이사슬의 고리 속에 통로를 놓치고 만다(<차이나타운>). 알 수 없는 LA의 마력은 야수 같은 니콜슨의 본능조차 흡수해 버린다.
형사 버드 화이트(러셀 크로)가 음모에 휘말린 곳은 하필이면 이런 도시다. 모든 퍼즐에는 해답이 있고 모든 미로에는 출구가 있다지만, LA에서는 그런 원칙이 통하질 않는다. 그저 몸을 내맡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여배우 베로니카 레이크를 닮은 금발의 창녀와 마약에
할리우드 누아르의 새 별들 [3] - 러셀 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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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복기를 거치고 바이러스가 눈을 뜬다
죄악의 땅. 그늘과 습기로 가득 찬 이곳에 희망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다. 아이를 낳는 일마저 또 하나의 형벌이 될 뿐인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주 가까운 어느 미래의 묵시록처럼 보이는 영화 <쎄븐>은 이 질문에 ‘정화’(淨化)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살인을 통한 정화가 시작된다. 세상을 파멸시킬 일곱 가지 죄악에 차례로 징벌을 가하는 살인자. 그가 바로 케빈 스페이시(40)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얼굴로 도시의 폐부에 은밀하게 스며들고 끝내 그 자신마저 제물로 삼아 도시를 청소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냉혹함보다 섬뜩한 것은 끝내 흔들리지 않는 표정없는 얼굴이었다. 모든 감정이 지워진 스페이시의 눈동자만큼 불가해한 악(惡)이 또 있었을까. 경찰청에 들어섰을 때는 누구도 그 살인의 그림자를 알아 보지 못했지만, 자신이 살인자라는 단 한마디 외침으로 그는 죽음의 냉기와 동일한 존재가
할리우드 누아르의 새 별들 [2] - 케빈 스페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