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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4일 월요일
세 거장의 공동작품 <티켓>
새로운 한주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는지 소복한 눈이 베를린을 뒤덮었다. 영화제 경쟁부문도 점차 알찬 작품들로 채워진다.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를 통해 관객에게 논쟁적인 화두를 어떻게 던질 것인가에 대해 지혜로운 비전을 보여준 <파라다이스 나우>(하니 아부-아사드 감독), 인간은 어떻게 연대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세 거장(에르만노 올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켄 로치)의 <티켓>, 그리고 늙는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한 성찰을 들려주는 <고 미테랑 대통령>(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은 잘 숙성된 영화의 그윽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평생 단짝인 칼레드와 사이드가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자리를 잃던 날, 그들은 자신들이 자살 폭탄조로 뽑혔음을 알게 된다. 다음날 아침 비디오에 부모에게 인사말을 남기고 결혼식 하객 차림으로 텔아비브를 향해 떠난다. 피 한 방울,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3] - 이종도 기자의 중간점검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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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2일 토요일
바이링, 팬서비스 한 번 확실하네
아침부터 비가 흩뿌린다. 프레스센터에서 메일박스를 열어봤더니 게이 시티 가이드 표지모델이 벌거벗은 채 내게 웃음을 던진다. 영화제의 섬세한 배려일까 아니면 베를린 게이 공동체의 압력일까. 베를린은 담배를 피우고, 음악을 사랑하며, 거기에 게이이기까지 한 사람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도시다. 구멍가게와 패스트푸드점에도 재떨이가 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20유로 안팎에 즐길 수 있고, 1992년 이후 훌륭한 게이영화에 대해 베를린영화제는 금곰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테디베어상을 수여해왔다. 허겁지겁 극장으로 달려가 만난 스테파노 모르디니 감독의 <소도시, 이탈리아>는 시사회장 곳곳이 빈자리다.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려는 젊은 부부를 늙은 사회가 훼방놓는다는 이야기는 뼈대가 앙상하다. 상영시간 절반이 지나도 이야기가 진척이 없자 성마른 기자들이 사방에서 벌떡 일어선다. 앙드레 테시네 감독의 <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2] - 이종도 기자의 중간점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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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도 기자가 살펴본 베를린 영화 기상도
“당신은 과거를 잊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 (아모스 오즈)
제55회 베를린국제영화제(2월10∼20일)는 머지않은 과거의 역사를 정치화한 영화제였다. 길게는 19세기 아프리카 식민지화부터(개막작 <맨투맨>) 가깝게는 나치에 저항한 백장미단 사건(<소피 숄-마지막 날들>)과 나치 수용소(<페이트리스>)에서 최근의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호텔 르완다> <4월 언젠가>)과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파라다이스 나우>)까지 과거를 거슬러올라가 현재적 의미를 되묻는 작품이 눈에 띄었다. 몇몇 뛰어난 정치성 짙은 영화들이 베를린영화제에 무게감을 실어주었으나 경쟁부문의 절반은 함량 미달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가 경쟁부문에 올라가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주었다. 임권택 감독은 명예 금곰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의 관록을 세계에 알렸다. 한국영화는 <여자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1] - 이종도 기자의 중간점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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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천재 소년
하워드 휴스는 엄청난 부자였으며 할리우드 톱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던 미남에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비행기를 허공에 띄우려 했던 몽상가였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상할 정도로 하워드 휴스와 닮았다. 10대 때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슈퍼모델과 같이 사는 미남에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영화에 출연했던 슈퍼스타와 하워드 휴스는 사춘기 소년처럼 불안정한 존재다. <에비에이터>는 그런 불안한 미숙함을 이용하는 영화다. 마틴 스코시즈는 디카프리오의 왜소한 가슴과 아이처럼 여린 뺨에 조명을 드리우며 소년의 모습을 강조한다. 8년 전 디카프리오가 하워드 휴스의 전기에 사로잡혔을 때, 그는 한번도 나락으로 빠져본 적 없는 영재배우이자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는 조숙한 아이였다. 시간이 흐르고 <타이타닉>의 거품이 가라앉자 디카프리오는 소년의 얼굴에 갇혀 지지부진한 세월을 보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세상의 모든 꿈들을 실현
소년의 영혼을 가진 두 남자 이야기 [3]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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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편에서 걸어온 피터팬
마크 포스터는 <피터팬>의 작가 J. M. 배리가 다섯 번째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데이비스가의 네 형제를 사랑했던 배리는 그들로부터 성장을 거부한 소년 피터팬을 떠올렸지만, 데이비스 형제 중 하나인 피터가 말하듯, 그 자신이 열두살 즈음에 머무른 피터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네명의 소년 곁에 그림자처럼 존재했던, 어른이 되지 못한 다섯 번째 아이 제임스 매튜 배리. 포스터는 배리의 서글픈 모험담인 <네버랜드를 찾아서>를 위해 조니 뎁 말고 어떤 배우도 떠올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성숙한 육체 안에서 맑은 영혼을 찾아야 했던 그는 “조니 뎁의 내부에는 누구도 손대지 못한 어린아이가 도사리고 있다”고 믿었다. 아이처럼 천진하면서도 세상의 무정한 이치를 알고 있는 듯한 조니 뎁은 포스터가 믿은 것처럼 희곡 대신 연기를 선택한 J. M. 배리의 분신일지도 모르겠다. 머뭇거리면서 아내에게 산책을 청하다가 거절당하는, 매사에 서툰 배리,
소년의 영혼을 가진 두 남자 이야기 [2] - 조니 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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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그레이프> 이후 12년,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걸어온 길
93년작 <길버트 그레이프>는 길 위에서 끝이 난다. 서로를 감싸주고 상처입히며 살아가던 길버트(조니 뎁)와 어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우린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말하며 길을 떠난다. 길은 계속해서 뻗어 있는 것이다.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무한하게 뻗어 있는 길 위에 서서 이정표를 찾는 배우들이었다. 사람들은 두 젊고 재능있는 배우들의 앞날에 새로운 세대의 할리우드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다.
조니 뎁은 <길버트 그레이프> 이후 20여편의 작품들에 출연했고, 디카프리오는 14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길을 걸어갈수록 두 사람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조니 뎁은 그림자처럼 은둔하며 비범한 재능들과 손을 잡았다. 그는 팀 버튼의 페르소나가 되었고, 라세 할스트롬과 테리 길리엄의 세계에 속한 알 수 없는 남자가 되었다. 디카프리오는 달랐다. 어린
소년의 영혼을 가진 두 남자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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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웃음을 잊지말라!
한국계 프로듀서 지나 권의 두 영화:
<우리가 아는 나, 당신, 그리고 모두>와 <모텔>
올해 선댄스에서 가장 눈길을 끈 인물 중 하나는 한국계 프로듀서 지나 권일 것이다.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신인 프로듀서를 대상으로 한 마크 실버만 펠로십을 단독으로 수상하기도 했던 지나 권은 이번 영화제에 자신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두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미국 극영화 경쟁부문에 초청된 <우리가 아는 나, 당신, 그리고 모두와 아메리칸 스펙트럼 부문에서 상영된 <모텔>이 그것.
재능있는 감독의 차기작 시나리오에 대해 지원하는 선댄스/NHK상의 2003년 수상작이자 한국계 마이클 강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모텔>은 <필름 스레트>에 의해 “<모텔>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기대해도 좋다”고 평가를 받았다. 특히 <우리가 아는 나, 당신, 그리고 모두>는 감독인 미란다 줄라이의
2005 선댄스영화제 결산 [4] - 프로듀서 지나 권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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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해부
관객이 사랑한 영화: <허슬 & 플로>와 <형제>
올해 선댄스를 뜨겁게 달군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허슬 & 플로>였다. 파라마운트에 900만달러에 팔렸고, 이 영화의 프로듀서 존 싱글턴이 이후 만들 2편의 영화에 대한 투자를 확약받았다는 점 등이 대서특필되면서 <허슬 & 플로>는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또 이 영화는 관객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관객상을 받은 데 이어 촬영상까지 거머쥐는 등 영화제의 최고 스타임을 입증했다.
<허슬 & 플로>는 미국 남부 멤피스에서 힙합을 꿈꾸는 한 흑인의 분투를 격정적으로 그린다. 디제이(테렌스 하워드)는 라디오 채널 어디를 돌리나 컨트리음악, 블루스, 재즈만이 판치는 이곳에서 포주로 살아간다. 어느 날 손에 들어온 작은 키보드 한대는 잃어버렸던 그의 꿈을 자극한다. 그는 자신이 고용한 창녀, 아내 등과 함께 집에 만든 스튜디오에서 데모 테이프를
2005 선댄스영화제 결산 [3] - 화제작 <허슬 & 플로> 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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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초심을 잊은 적이 없다”
제프리 길모어 집행위원장 인터뷰
-1985년 시작된 선댄스는 올해 21회를 맞았다. 초기와 비교하면 변화도 많았을 것 같다.
=일단 규모가 커진 것은 틀림없다. 인디영화계가 예전보다 훨씬 복잡해지고 커졌기 때문이다. 인디영화라 하면 인디펜던트 스튜디오의 영화가 있고, 스튜디오의 인디영화도 있으며, 그냥 인디영화도 있고, 저예산영화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인디영화라는 스펙트럼을 이루는 구성요소다. 독립영화계와 선댄스는 함께 변화하며 성장하고 있다. 우리는 처음 시작했을 때의 정신을 버린 적이 없다. 이번 상영작 중 51편이 데뷔작이며, 상영작 중 절반은 50만달러 이하, 80%는 100만달러 이하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처음과 같은 기치를 걸고 새로운 영화와 감독을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다.
-90년대 초반 쿠엔틴 타란티노나 케빈 스미스, 리처드 링클레이터 등 슈퍼스타를 배출한 것에 비하면 요즘은 슈퍼스타가 부재한
2005 선댄스영화제 결산 [2] - 집행위원장, 프로그래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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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20일 시작된 2005 선댄스영화제가 1월30일 폐막했다. 한국영화 <녹색의자>와 <여자, 정혜>가 올해 신설된 세계 극영화 경쟁부문에 진출한 가운데, 총 202편의 장·단편영화가 관객과 스튜디오, 그리고 언론 앞에서 경합을 벌였다. 미국과 세계 인디영화의 현주소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던 올해 선댄스영화제를 총결산한다. 편집자
2005 선댄스영화제, 대상엔 <우울한 40개의 그늘>… 다큐멘터리 강세
“두 시간이라, 빌어먹을. 이깟 영화를 보려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단 말야?” 2005 선댄스영화제 미국 극영화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우울한 40개의 그늘>의 특별상영(영화제 조직위는 올해 처음으로 시상식 직후인 1월29일 밤 수상작들을 일반 대상으로 상영했다)이 끝난 뒤 셔틀버스에 탄 한 남자관객이 투덜거렸다. 친구와 휴대폰 통화를 하던 남자관객은 “음, X같이 훌륭한 영화라고, X발”이라며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비꼬았다.
2005 선댄스영화제 결산 [1] - 2005 선댄스영화제 수상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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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소중한 친구들의 이야기”
<샌프란시스코 블루스>의 허인 감독 인터뷰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 시절 졸업 작품 <Laundromat Queen>과 영상원 전문사 과정 실습 작품 <여름고백> 등에서 남장 여자와 이민자, 장애인 등 소수자를 따스한 시선으로 보듬어 안았던 허인 감독. 생생한 캐릭터가 빛나는 <샌프란시스코 블루스>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팍팍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소중한 희망을 잃지 않는 인물들이다. 쉽지 않은 낙관을 통해 거친 현실을 개척하려는 태도가 미덕인 이 영화는 감독 주변의 소중한 친구들에게서 비롯됐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적 ‘즐거움’으로, 이는 영화제작의 구체적인 환경뿐 아니라 만들어진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까지도 고려한 것이다. 연출했던 모든 영화현장을 기꺼이 즐거웠다고 회고하는 그는, <샌프란시스코 블루스>의 제작 역시 마음에 맞는 배우, 스탭과
제8회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발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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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만 코닥 단편영화 제작지원 <마스크 속, 은밀한 자부심> <샌프란시스코 블루스> <처용의 다도> 당선
<씨네21>과 한국 코닥, 부산국제영화제가 주최하는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제도’가 8번째 당선작을 발표했다. 49편의 응모작 중 선정된 세편은 허인 감독의 <샌프란시스코 블루스>, 정용주 감독의 <처용의 다도>, 그리고 노덕 감독의 <마스크 속, 은밀한 자부심>. 심사위원으로는 변영주(영화감독), 홍효숙(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프로그래머), 김광수(청년필름 대표), 이성욱(<씨네21> 기자) 등 네명이 참여했다. 심사는 29분 이내의 단편 시나리오들을 제작기획서와 일정표, 포트폴리오와 함께 검토하는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 진행됐다. 한국코닥으로부터 35mm 필름 1만 피트를 제공받고, 무료 현상 및 인화, 카메라 장비 대여, 편집 작업료 할인 등의 지원을 받게 될 이 작품들은
제8회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발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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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미국을 관찰하는 다큐멘터리스트
스파이크 존즈, 데이비드 O. 러셀, 폴 토머스 앤더슨 등과 ‘한묶음’의 유망주로 소개됐던 알렉산더 페인에게 그들과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묻지 말자. “1999년은 <일렉션> <존 말코비치 되기> <쓰리 킹즈> <매그놀리아>가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던 해다. 그래서 비교가 되는 것 같다. 공통점? 모두 35mm필름, 1초에 24프레임의 컬러 스테레오 영화를 만든다. 나이도 비슷하고.” 이렇게 면박에 다름 아닌 대답이 돌아올 테니까. 그러고보면, 알렉산더 페인은 그중에서 가장 부지런히 활동해왔고, 미국사회와 미국인의 ‘리얼리티’에 천착한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알렉산더 페인을 대면한 누군가는 그에게 상대가 불편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있고, 대답하기보다는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알렉산더 페인의 아내인 배우 샌드라 오도 거든다. “그는 늘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캐내고 싶어
<사이드웨이>와 알렉산더 페인 [2] - 독립영화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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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웨이>의 알렉산더 페인, 그가 인디영화 감독으로 성공한 비결
2004년은 <사이드웨이>와 알렉산더 페인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난 10월 미국의 4개 극장에서 조용히 개봉한 <사이드웨이>는 상영관을 점차 늘려가는가 싶더니,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중년 남자들의 와인 여행을 다룬 이 영화에서 ‘최고’ 또는 ‘최악’으로 언급된 와인의 판매량이 영화의 파장을 따라 요동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평단의 반응은 ‘열광’ 그 자체였다. <필름 코멘트>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를 비롯한 각종 영화지가 <사이드웨이>를 ‘2004년 최고의 영화’로 꼽았고, 뉴욕과 LA, 샌프란시스코와 보스턴의 비평가들도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영화 속에서 최고의 와인으로 칭송하는 ‘피노 누아’처럼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세계가 깊고 풍부하게 무르익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피노 누아’가 좋은 환경에서 꾸준한
<사이드웨이>와 알렉산더 페인 [1] - 알렉산더 페인의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