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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와 남자친구에 둘러싸인 할리우드의 명랑한 십대 소녀들, 획일적인 교복 문화 속에서 낭만적인 로맨스를 꿈꾸는 한국영화 속의 소녀들 대부분은 부유한 이성애자들이었다. 20대의 문턱에 선 그녀들의 언어와 행동은 어른의 세계가 정해준 동일한 틀 안에서 잠시 흔들리다 결국 안정적인 깨달음과 함께 기성세대에 들어서곤 했다. 현실 속 소녀들은 순정만화와 첫사랑에 열병을 앓기보다는 사랑을 하고, 성을 말하고, 임신을 하고, 독립을 말함에도 영화 속 소녀들은 겉모습만 화려해질 뿐,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그녀들은 점점 비대해지는 외연과 점점 비어가는 내면의 불균형 속에서 상품이 되어가고 있다.
제7회 여성영화제 영 페미니스트 포럼 섹션에서는 이러한 경향에 반기를 들고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한 각국의 영화들 11편을 선보인다. 기존의 영화들에서 볼 수 없었던 관계를 사고하는 우울한 소녀들, 가난하고 여자를 사랑하고 소통을 갈망하고 끝나지 않는 고민을 짊어진 현실의 소녀들을 만
제7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4] - 영페미니스트 추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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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브라 윙거를 찾아서
Searching for Debra Winger·로잔나 아퀘트·미국·2002년·97분·새로운 물결
여배우 로잔나 아퀘트가 만든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20대 전성기에 할리우드에서 모습을 감춰버린 여배우 데브라 윙거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아퀘트는 한적한 교외에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고 있는 데브라 윙거를 만나, 한창때 은퇴를 결심한 배경에 귀기울인다. 동시에 이 다큐멘터리는 ‘여배우’라는 이름으로 스크린 속에서 살아가는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육체로 끌어내리는 작업이다. 기네스 팰트로, 다이앤 레인, 샤론 스톤, 홀리 헌터, 멕 라이언, 샬롯 램플링, 제인 폰다, 우피 골드버그, 샐마 헤이엑 등 할리우드의 현역 고급 인사들은 동료 여배우의 카메라 앞에서 여배우로 살아간다는 것, 여배우로서 40대를 맞이한다는 것, 엄마가 된다는 것의 무게와 고민을 토로한다. 아퀘트는 이 육성들이 <데브라 윙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개
제7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3] - 다큐멘터리 추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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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자르
Hejar·한단 이펙치·터키·2001년·120분·터키영화 특별전
<헤자르>는 어린 소녀와 노인 사이에서 싹트는 우정을 관찰하는 영화다. 반터키정부 활동을 벌이던 쿠르드족 게릴라 부모를 갑작스럽게 잃고 고아가 된 헤자르는, 판사직을 은퇴하고 혼자 사는 옆집 노인 리팟과 그 집 가정부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쿠르드어만 할 줄 아는 헤자르와 터키어만 아는 리팟은 서로의 언어를 고집하는 탓에 한집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 <헤자르>는 서로에게 장벽과 오해를 쌓은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익숙한 패턴으로 그린 영화다. 극을 받쳐주는 힘이라면 인물들에게 불어넣어진 섬세한 생명력이다. 어린 헤자르의 침묵을 이해하는 리팟의 가정부 사키네, 리팟과 솔메이트가 되기를 자청하는 이웃, 무엇보다 헤자르를 대하는 리팟의 작은 변화들로부터 크게는 유사가족, 작게는 긍정적 삶의 징후를 감지할 수 있다.
CQ2
CQ2·감독 캐롤 로·
제7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2] - 극영화 추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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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8일부터 열리는 제7회 서울여성영화제, 솔직한 다큐와 변방의 여성영화 눈길 끌어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라는 큰 주제 아래 해마다 열리는 서울여성영화제가 오는 4월8일부터 15일까지 일곱 번째 영화축제를 마련한다. 이미 여성의 눈을 가진 당신에게 이 영화제가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여성들의 다양한 시각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남성의 눈을 가진 관객들에겐 평소 발견한 적 없는 세상의 이면을 대할 수 있는 기회다.
메인 섹션인 새로운 물결을 비롯해 감독특별전, 아시아 단편경선 등 총 7개 부문에 걸쳐 27개국의 90여편 영화를 상영하는 제7회 서울여성영화제의 가장 큰 특징은 다큐멘터리 및 세계 변방에서 태어난 여성영화들의 강세다. 올해 오스카상 수상작이기도 한 인도의 다큐멘터리 <꿈꾸는 카메라: 사창가에서 태어나>, 할리우드 여배우 로잔나 아퀘트가 만든, 여배우들에 대한 여배우들의 이야기 <데브라 윙거를 찾아서>, 남아프리
제7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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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순은 조용한 남자다. <가족>에 독하고 독한 깡패 창원으로 출연했던 그는 동정이라고는 모르는 사나운 눈빛과 마음속까지 칼날을 박는 야비한 말투를 걷어내고선 말없이 땅만 보고 있었다. <보스상륙작전> <가족> <귀여워>가 하나같이 깡패 역할만 내밀었던 배우, 그러면서도 인터뷰를 위해 모여 거친 호르몬을 내뿜는 배우들 틈에서 홀로 연못처럼 고요하던 배우. “어릴 적부터 내성적이었고, 양면성이 있다”고 말하는 박희순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반사각 중에서 지금껏 아주 작은 부분만 내비쳤는지도 모르겠다.
눈이 나빠 군대 면제 판정을 받은 박희순은 남들보다 어린 나이에 극단 목화에 들어가 몇년을 줄줄이 선배들만 맞았다. 덕분에 유독 오랫동안 마루를 닦아야 했고, 걸레질하는 손길에 맞추어 “두고 보자, 두고 보자”고 이를 악물어야 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끝끝내 버티게 해준 의지를 얻었다. 건달 특유의 두꺼운 근육과는 한참 거리가 먼
성격파 남자조연 5인 [6] - 박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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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의 <사계>의 격렬한 폭풍 같은 악장과 맞물려 최민식이 오달수의 이를 장도리로 뽑는 액션은 배우 오달수를 세상에 알리는 서곡과 같았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10년 저편 세월부터 유달리 크고 길며(그래서 카메라로 잡아내는 데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듯한) 표현력이 뛰어난, 그리고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을 연극 무대에서부터 떠올린다. 연극쪽의 출세작인 <남자충동>의 건달로, <인류최초의 키스>의 죄수로, <흉가에 볕들어라>의 실성한 사람으로 그는 진작부터 관객에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달콤한 인생>에서 무기 밀매상으로 나온 그의 모습은 앞서 나열한 이 모든 명장면을 무색하게 하며 당분간 배우 오달수를 떠오르게 하는 키워드 노릇을 하게 될 것 같다. 바람 부는 휑한 공터에서 그가 얼굴을 들이밀 때부터 전조가 이상하다. 이병헌과 무기 거래를 하기 위해 차창을 여는 순간부터 다리를 오므리고 기괴하게
성격파 남자조연 5인 [5] - 오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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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뢰하의 첫인상은 무섭다. 얼굴에 빛이 드리워 유난히 굵은 주름 사이로 그림자가 맺히면 그의 사내다운 풍모는 더욱 강해진다. 그런 탓인지 그는 10편 남짓한 영화 속에서 항상 강한 남성 역만을 맡아왔다. 굳이 그의 대표작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플란다스의 개>의 부랑자, <정글쥬스>와 <맹부삼천지교>의 조직폭력배 등의 역할은 그를 흉포한 남성성의 소유자로 인식하게 했다.
그의 신작 <달콤한 인생>에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김뢰하가 이 영화에서 맡은 캐릭터 문석은 조직의 2인자 자리를 놓고 선우(이병헌)와 격하게 갈등하는 인물이다. 그는 달콤한 인생을 즐기던 선우를 지옥의 불구덩이로 쫓아내기 위해 야비한 짓을 서슴지 않는 전형적인 악당이다. 김지운 감독에 의해 “누아르의 얼굴”이라 불렸던 김뢰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조명 아래서 비열하고 악랄한 내면을 드러낸다.
관객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허용하
성격파 남자조연 5인 [4] - 김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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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아톤>은 초원(조승우)의 이야기를 남김없이 풀어냈지만 코치 정욱에 대해선 많은 호기심을 남겨두었다. 창창했던 마라토너의 미래가 꺾인 뒤 술과 담배로 무기력한 시간을 위안하며 살아온 정욱은 초원과의 만남에서 어떤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을까. 초원을 만나기 전에 어떤 과거를 가졌던 사람일까. 정욱을 연기한 이기영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궁금증은 갈수록 더해간다. 알 수 없는 배타심으로 초원과 초원의 엄마를 냉대할 때 정욱의 눈빛에서는 사연이 읽힌다. 개봉을 앞둔 <달콤한 인생>의 백상파 킬러 오무성도 그렇다.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뿔테 안경을 써 눈동자를 감춘 오무성은 평소엔 그저 시장바닥의 장사치다. 그러나 주차장에서 선우(이병헌)에게 경고를 날릴 때, 사람을 천장에 매달아두고 곁에서 커다란 칼을 갈고 있을 때, 무성의 그늘진 얼굴과 뒷모습은 전말이 궁금한 사연을 담고 있다. 이기영은, 영화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에도 호기심이 일어나게끔 캐릭터를 연기
성격파 남자조연 5인 [3] - 이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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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록은 여백이다. 조연배우가 여백을 채우는 사람이라 믿는 사람들에게는 낯설 테지만, 오광록은 터질 듯한 긴장 속에 거꾸로 여백을 만들어 넣는다. 송강호의 가슴에 무심하게 칼을 쑤셔넣는 무정부주의자(<복수는 나의 것>)와 개를 안고 자살하는 남자(<올드보이>), 허허실실한 문화재 도굴꾼(<마지막 늑대>). 쉬이 손에 잡히지 않는 캐릭터와 골도에서 공명해 나오는 듯 독특한 음색은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오랜 연극무대의 삶을 즐기면서도 상업영화와 작가영화의 경계에서 작업해온 오광록은 <잠복근무>에서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닌 조폭 두목을 연기했다. 친구들을 ‘동지’라 부를 만큼 투철한 철학을 지닌 그에게 상업영화의 희화화된 캐릭터는 조금 이질적이기도 하다. “고민이 꽤 많았다. 하지만 <잠복근무>는 리얼리즘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나는 일루전(Illusion: 환상)을 관객에게 심고 싶었다. 현실과 환상 사
성격파 남자조연 5인 [2] - 오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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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스타일리스트들이 사랑한 남자배우 5인
오광록, 이기영, 김뢰하, 오달수, 박희순
맏형 격인 <잠복근무>의 오광록부터 <말아톤>의 이기영, <달콤한 인생>의 김뢰하, <달콤한 인생>과 <주먹이 운다>의 오달수 그리고 <귀여워>와 <남극일기>의 박희순까지 한자리에 모여 서니 격한 기운이 뻗어나왔다. 최근 충무로의 큰 영화들 가운데 이들만큼 돋보이는 조력자들은 또 없는 듯하다. 수컷다운 매력을 발산하는가 하면, 툭툭 털어내면 저잣거리의 먼지들이 자욱할 것 같은 리얼리티가 뿜어나오고, 어딘가에 암흑가의 비정한 생리도 숨겨두었을 듯한 다섯 사내들. 박찬욱이나 김지운, 류승완 등 스타일리스트뿐 아니라 관객이 이들을 즐겨 찾게 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얼굴엔 이야기가 쓰여 있다.
다섯명이 촬영을 위해 각기 다른 동작을 취할 때마다 다른 이야기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성격파 남자조연 5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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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술가처럼 찍고, 장사꾼처럼 편집한 걸까?”
-제목을 <달콤한 인생>이라고 지은 이유가 있는지.
=최종 제목으로 떠오른 후보들이 모두 기존에 있던 영화제목들이었다. <의리없는 전쟁> <트루 로맨스> <돌이킬 수 없는> 이런 식으로. 사실 다 제목으로 써도 어울릴 만한 것들이긴 하다. 그중 하나가 <달콤한 인생>이었다. 나는 공교롭게도 펠리니의 이 영화를 아직 못 봤다. 하지만 영화적 분위기와 뉘앙스가 가장 잘 살아날 수 있는 제목은 이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달콤한 자기 내부의 욕망에 의해서 달콤한 꿈을 꾸고, 달콤한 상상을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시사회장에서 “액션이 가미된 누아르풍의 피범벅 러브스토리”라고 했는데 그게 맞는 것 같다. 누아르 장르를 하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액션의 볼거리를 보여줄 수 있는 누아르, 거기다 하드
<달콤한 인생> [2] - 김지운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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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의 네 번째 장편영화 <달콤한 인생>이 4월1일 개봉한다. <달콤한 인생>은 높은 가격으로 완성 전 일본에 수출되는 것으로도 관심을 모았었다. 마침내 뚜껑을 연 <달콤한 인생>에는 장점과 단점이 같이 있다. 김지운이 그려내는 그 누아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달콤한 인생>에 대한 소개글과 인터뷰를 같이 싣는다.
쿨한 카오스에 온 걸 환영합니다!
김지운의 네 번째 장편영화 <달콤한 인생>이 표방하는 구심점은 누아르다. 장르, 스타일, 양식, 사조, 경향, 현상, 운동, 톤, 더러는 아무것도 아닌 비평적 사기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누아르는 이미 영화적 규정의 느슨함에 다다른 개념이다. 누아르라고 불리기보다 언제나 다른 무엇과 함께 말해져야 성립이 가능하거나 또는 누아르적인(noirish), 누아르성(noirness)이라는 애매한 말로 불리는 것이 더 옳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누아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
<달콤한 인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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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계속 영화를 만들었으면…”, 스탭·배우들 합심
하지만 길벗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여정이었다. 박광수 감독의 소개로 지난해 여균동 감독과 <숨바꼭질> 프로젝트를 준비했던 주요 스탭들이 흔쾌히 결합하지 않았던들 3억원 안팎의 저예산영화 <비단구두…>가 지금까지 순항할 수 있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제창규 촬영감독, 배현종 조명감독, 배영환 미술감독 등 주요 스탭들이 <비단구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좋아하는 선배 감독이 계속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 빠듯한 예산 때문에 발전차도 대기시키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서 그들이 믿는 것은 ‘발상의 전환과 끊임없는 아이디어 개발’. 이날 저녁 촬영 때도 배현종 조명감독은 “1kW조차 사용할 수 없는” 한계조건 아래서 빛을 모으느라 정신없었다.
극단 차이무 출신 배우들의 헌신적인 참여도 <비단구두…>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줬다. 촬영 직전 한달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촬영현장 [2] -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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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짜리 그러나 열정은 30억 영화
봄의 전령이 험한 미시령은 잊고 지나친 걸까. 얼마 전 폭설 때 제설기가 한쪽으로 힘겹게 밀어놓은 눈들이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다. 잠시 내려선 미시령 정상.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한숨 돌리려고 했더니 시시때때 방향을 바꾸어 불어대는 강풍이 몸조차 가누기 어렵게 만든다. 막바지 촬영에 몰두하고 있는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제작진이 카메라를 펼친 미시령 중턱의 원터라는 곳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꾸불꾸불 비포장 도로를 1km 넘게 들어가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개인 사유지에 차려진 캠프. 낮은 곳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은 봄이 왔다고 끊임없이 조잘댔지만, 고개를 들면 아직 분기탱천한 겨울 바람에 제작진은 혼쭐이 나고 있었다.
감독은 땅바닥에 앉아서, 배우는 반사판 들고
겨울을 길에서 났기 때문일까. 여균동 감독의 얼굴 또한 새까맣게 말라 있었다. “여러분이 달리는 순간 다이너마이트가 터져요. 위험하진 않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촬영현장 [1] - 캐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