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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자에서 스타일리스트로
내가 마테오 가로네(1968∼)라는 이름을 처음 본 것은 이탈리아 볼로냐의 어떤 궁전 뜰이었다. 거의 모든 시민들이 바캉스를 떠나버린 텅 빈 도시의 여름, 나처럼 도시에 남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볼로냐 시네마테크는 중세 궁전의 뜰을 빌려 밤마다 영화상영회를 한다. 그때 전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이탈리아 신예감독의 작품이 ‘감히’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 같은 걸작과 함께 프로그래밍돼 있었다. 그 영화는 바로 가로네의 장편 데뷔작 <수단의 땅>(Terra di mezzo, 1997)으로 신예감독들의 대결장인 토리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작품이다.
<수단의 땅>은 당시 불법입국자, 불법노동자 문제 등이 연일 신문의 1면을 장식할 때 발표돼, 관객의 반응은 아주 민감했다. 다큐드라마 형식인 이 영화는 외국인 불법이민자의 하루를 따라간다. 일을 찾아 새벽 노동시장으로 나간 한 알바니아 출신 10대 소년
거장 예감, 세계의 新星 감독 10인 [2] - 마테오 가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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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거장이라 불리는 영화감독들이 있다. 이들은 영화가 120분짜리 롤러코스터가 되어선 안 되며, 팝콘과 콜라를 먹기 위한 배경화면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의 영화에는 세계와 사람과 진실이 견고한 스타일에 녹아들어 있다. 물론 거장의 영화만으로 가득 찬 멀티플렉스를 상상할 수는 없다. 대다수의 관객에게 그건 불행한 일이다. ‘다행히도’ 현실의 멀티플레스는 즐겁고 행복한 영화로 대부분의 스크린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거장의 영화가, 세상과 인생과 진리를 말하는 작품이 사라진다면, 이 또한 불행한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홀로 앉은 어두운 객석 안에서 세상의 비정함과 인생의 쓴맛과 진리의 고통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 소개하는 10명의 감독은 아직 거장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그 반열에 이름을 올릴 세계 영화계의 샛별들이다. 이들은 노동계급의 현실에 주목하거나 인위성을 배제한 영화를 꿈꾸거나 외설을 통해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는 등 각각 추구
거장 예감, 세계의 新星 감독 10인 [1] - 가와세 나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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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탄(the Settlers of Catan)
보드게임계의 대명사라고 불릴 만큼 막강한 인기와 지명도를 가진 그야말로 ‘작품’이다. 카탄이라는 가상의 섬에 도착한 우리는 집과 길을 내면서, 목재, 곡물, 광물 등의 자원을 얻고 그것을 이용해 다시 집과 성을 만들어가며 정해진 점수를 먼저 얻어 승리하게 된다.
좋은 땅을 차지하고 그것을 통해 부를 넓혀가는 ‘부익부 빈익빈’ 게임의 성격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데, 부루마블이나 그 원형이 되는 모노폴리처럼 한번 발을 헛디디면 도저히 가난을 헤어날 수 없는 게임들과는 한 차원 다른 수준을 지니고 있다. 개발 카드를 통해 특수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고, 길을 넓혀가며 상대를 봉쇄하고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등의 다양한 전략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임 초반에 강자가 되었다고 절대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약자들이 연합해서 영토를 황폐화시키면 헛주사위만 굴리다 게임을 그르친다. 보드게임 중에는 카탄처럼 육각형의 타일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
<씨네21>의 추석 선물세트 [5] - 보드게임 명작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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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스 룸> Marvin’s Room
1996년 l 제리 잭스 l 98분 l 1.85:1 비아나모픽 l DD 5.1 영어 l 한글, 영어 자막 l 스펙트럼
베시는 아버지와 고모를 모시면서 독신으로 살아왔다. 돌아가신 엄마처럼 백혈병에 걸린 그녀는 20년간 헤어져 살던 여동생 그리고 아이들과 재회한다. <마빈스 룸>에 등장하는 가족은 산산이 부서지고 초라할 뿐 새로 가족을 이루기엔 힘들어 보인다. 침대에서만 지내는 병든 아버지와 TV 속 세상에 빠진 철없는 고모,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아이들 앞에서 두 자매는 오랜 세월 미워하고 무관심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마주한다. 존재 그 자체로만 가족이 될 수는 없는가 보다. 현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기만 하는데, 힘들게 보낸 세월 속에 얻은 지혜와 사랑으로 그들을 묶으려는 베시의 노력이 아름답다. 베시의 아버지 마빈의 방에선 거울이 마법을 부린다. 영화의 마지막, 거울로 비춘 햇살을 좋아하는 아버지 옆으로 일가족이
<씨네21>의 추석 선물세트 [4] - ‘귀향’을 다룬 DVD타이틀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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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 <Please Please Me> 팔로폰/EMI,1963
이 음반은 비틀스의 이른바 4대 명반이 아니다. 그렇다고 위대한 팝/록밴드로서 비틀스를 예우한 결과도 아니다. 사실 당시 비틀스는 풋내기였다. 프로듀서 조지 마틴은 링고 스타의 드럼 실력을 신뢰하지 못해 스튜디오에 세션 드러머를 ‘5분 대기’시켜놓을 정도였다. 팝과 록을 예술적 경지에 올려놓았다는 비틀스 신화에 ‘눈먼’ 이에게 이 음반은 그저 화려한 맹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비틀스는 ‘될성부른 떡잎’ 이상이었다. “1! 2! 3! 4!” 하는 외침을 신호로 시종 거칠고 단순하게 전개되는 <I Saw Her Standing There>로 시작해 <Love Me Do>와 <Please Please Me>를 거쳐 존 레넌의 숨넘어갈 듯한 절규가 생생한 <Twist and Shout>로 끝나는 이 음반은 당대 청(소)년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바로 그 음악이었다
<씨네21>의 추석 선물세트 [3] - 베스트 데뷔앨범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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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는 생강차, 귀성길에는 만화책이다. 대한민국 명절 공식 종목 고스톱에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아랫목 체질들에게 명절음식을 쌓아둔 채 만화책을 보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을 터. 일본 만화 <올드보이>의 한국영화로의 변신합체는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나꿔채는 대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브라운관에서는 원수연의 <풀하우스>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바람의 파이터>의 성공과 함께 준비되고 있는 대작 후속타들도 즐비하다. <블루엔젤> <아일랜드> <오디션> 등등. 만화는 한국영화라는 두레박의 또 다른 우물로 깊어간다. 그리하여 영화 속 캐릭터나 스타일 혹은 이야기 방식 등에서 왠지 만화방에서 한세월 보냈을 듯한 감독 8명에게 열독만화를 물어봤다. 단순히 추천만화라면 심심할 것 같아 추천자들의 직업적 특성을 발휘하여 ‘영화로 만들고 싶은’이라는 단서도 달았다. 그들이 추천하는 스크린으로 옮기고 싶은
<씨네21>의 추석 선물세트 [2] - 영화로 만들고 싶은 만화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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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자서전> 버트런드 러셀 지음 l 송은경 옮김 l 사회평론 펴냄
한 사람의 삶과 생각을 살펴보는 것이 한 시대를 살펴보는 것과 같을 때, 그 사람을 사상가라 부르며 그 사람의 생각을 사상이라 일컫는다. 버트런드 러셀의 삶과 사상은 바로 그런 드문 경우, 즉 시대를 집약한 축도이자 시대를 감지하는 중추였다. 정직과 솔직함이라는 자서전의 필수 덕목을 완전에 가깝게 갖춘 이 책, 그래서 회고록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고추냉이 맛처럼 알싸한 러셀 특유의 표현과 위트를 감상하면서 20세기를 조감할 수 있다.
케인스, G. E. 무어, 비트겐슈타인, D. H. 로렌스, 조지프 콘래드, A. N. 화이트헤드, T. S. 엘리엇, 아인슈타인 등 많은 거장들과 교유했던 내용도 놓칠 수 없다. 그는 20세기 영국 지성계 네트워크의 명실상부한 허브였다. 백작, 철학자, 논리학자, 수학자, 문필가, 반전운동가, 스캔들 메이커, 노벨문학상 수상자. 러셀의 삶은 가로지
<씨네21>의 추석 선물세트 [1] - 국내외 전기소설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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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 고수희, 윤제문, 엄효섭 등 길러낸 연극연출가 박근형
그의 연극에는 _ 돌발적인 상상력과 웃음이 있다
4년 전 연극연출가 박근형(41)이 들려준 일화. 집에서 전화를 하고 있던 그는 왼손으로 수화기를 받고 오른손으로는 무심코 앞에 있는 무엇인가를 계속 돌렸다. 그것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어머니의 젖꼭지였다.
박근형의 연극은 뒷골목과 일상의 어두운 그늘, 가족의 신화 뒤에 숨어 있는 애증을 우습고도 슬프게 담아낸다. 위의 일화는 그의 연극이 갖는 놀라운 폭발력과 웃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임순례, 봉준호, 김지운, 박찬욱 감독 등이 그의 공연 때마다 슬그머니 뒷자리를 차지하고 배우들을 눈여겨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듯한 눈빛, 정식 연극 교육에서 닦은 세련된 화술과는 거리가 먼 시장 좌판의 언어들, 신문 사회면에서나 봤음직한 우스꽝스럽고 전도된 가족 관계를 태연히 보여주는 꾸밈없는 연기…. 그의 연극은 영화계에서는 주목받는 또래 연출가 집단 가운데서 가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6] - 박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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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사에는 _ 한국어의 질박하면서도 찰진 호흡이 있다
연기 못지 않게 오태석이 강조하는 것은 호흡과 대사다. 극단 목화 배우들은 가장 편하고 정확하게 한국어를 발음한다는 평가를 듣는다. 정은표는 “배우로 하여금 숨을 제대로 쉬게 하고, 따라서 우리말 고유의 리듬이 잘 살아난다. 목화 배우들의 공통점이라면 제대로 말을 잘 하는 법을 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태석 연극의 무한한 상상력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무대도 배우에겐 큰 가르침이자 도전으로 다가온다. 관객은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지만 배우들은 허겁지겁 그 엄청난 사유의 공간을 자신의 연기로 메꿔야 한다. “그만한 상상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역량이 동원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상상력과 분석력이 없으면 도태된다. 독종이 될수밖에 없고 영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정원중의 지적이다.
그러나 허리라고 부를 만한 중견배우들이 하나둘 TV, 영화로 빠져나가고 연극학도들이 연극보다는 영화와 방송 쪽에 더 많은 관심을 보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5] - 오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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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손병호, 성지루, 임원희 등 길러낸 연극연출가 오태석
“임 형(임상수 감독)이 (영화에 극단 목화레퍼터리컴퍼니 배우들을) 많이 데려가서 써서 그런지 밖에서 평가가 좋아.”
“저야… 죄송할 따름이죠. 목화 배우들은 TV든 영화든 어딜 가서도 유연해요.”
9월3일 막 오른 극단 목화의 <백마강 달밤에>가 끝난 뒤 대학로의 카페 장. 극단 목화의 수장 오태석(64) 과 임상수 감독이 맥주 잔을 두고 마주 앉아서 나눈 말의 일부다. 대학생 때부터 오태석 연극의 골수팬이 된 임상수 감독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태석을 ‘한국 공연예술계가 낳은 5대 천재’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의 연극에 나온 정진각, 정원중, 성지루 등을 일찌감치 자신의 영화에 쓸 배우로 눈여겨봐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오태석, 1962년 데뷔 뒤 어느덧 42년의 연극 인생이다. <태> <춘풍의 처> <부자유친> <비닐하우스> 등 대표작만 꼽아도 두손이 모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4] - 오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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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이 최형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은 ‘정확성’. 직면한 문제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구체적인 답을 주는 교습이 그렇고, 언제나 ‘왜’를 질문하면서 연기의 동기를 찾아가는 연출이 그렇다. 그가 어느 정도 기본이 된 배우에게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작가가 대본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다. 위대한 작품은 인간과 인생을 꿰뚫는 작가가 며칠 밤을 새워서 모든 장면을 공들여 쓴 것들이고, 그 자체가 엄청난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등장하는 인물의 과거나 행동의 동기는 대본 안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동기는 희미해선 안 된다. 악착같이 그것을 이루려는 힘이 좋은 연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남자가 여자를 왜 원하느냐에 따라 연기는 달라진다. 돈 때문인지, 외모 때문인지, 그 원인에 따라 그가 취하는 방법도 달라지는 것 아닌가. 정답은 대본에서 언제나 찾을 수 있다. 이 인간이 왜 이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3] - 최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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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 배두나, 이영애, 임은경 등 길러낸 연기전문가 최형인
아트(art)는 본래 기술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은 창조력의 위대함이 아니라, 부단히 갈고닦아야 하는 정진(精進)의 어려움을 뜻하는 말이다. 배우고 연마해야 하는 기술은 일면, 예술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신비로움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가라 부르는 사람들, 순간의 상상과 우연한 감성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어떤 경지에 오르기까지 취해야 하는 끊임없는 노력은 기술과 예술이 배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연기 또한 마찬가지. 배우들은 꾸준한 훈련을 통해 숱한 자세를 갖춰야 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 더군다나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아의 장벽’을 허무는 것인데, 이것은 단언컨대 세심하게 단련된 기술이 필요한 과정이다.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연기라는 마술은, 전적으로 배우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2] - 최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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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를 만드는 사람들, 최형인, 오태석, 박근형을 만나다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를 거쳐 미국의 리 스트라스버그와 엘리아 카잔 감독의 액터즈 스튜디오에서 만개한 배우 연기술의 계보는 듣기만 해도 황홀하다. 말론 브랜도부터 폴 뉴먼,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로 이어지는 빛나는 이름들. 오늘도 많은 배우지망생들과 스타들이 연기에 대한 목마름으로 액터즈 스튜디오를 찾는다.
한국에도 액터즈 스튜디오 못지않은 연기학교가 있다. 따로 간판을 내건 학교는 아니지만 이 연기학교의 교장은 배우 교육의 전문가 최형인(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겸 한양레퍼토리 대표)이다. 설경구를 비롯 숱한 충무로 배우를 길렀고, 이영애 등 스타급 배우들이 그를 찾아 연기의 숨결을 다시 배운다. 최형인 못지 않게 뛰어난 연기 스승들이 있으니 이들은 대학로를 온몸으로 버티고 서있는 연극연출가들이다. 42년 간 파격의 상상력과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로 자신만의 연극세계를 만든 오태석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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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시부야의 미니시어터를 대표하는 ‘유로 스페이스’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상영하고 있었다. 유로 스페이스는 상영뿐 아니라 영화의 제작, 배급 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어서 사무실 한켠에는 갖가지 영화들의 영상자료로 빼곡히 차 있다.
도쿄 시부야는 대중문화의 요람이다. 대중음악의 든든한 저변을 이루는 시설 좋은 라이브 클럽들이 몰려 있고, 시네마테크와 미니시어터가 집중해 있다. 도쿄의 시네마테크가 10여곳이라면, 미니시어터는 29개 극장 40개 스크린에 이르고 있는데 그중 상당수가 시부야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시부야역을 바라보고 있는 ‘유로 스페이스’는 멀티플렉스가 아직 점령하지 못한 도쿄를 사수하고 있는 미니시어터의 대표주자다. 2개 상영관 중 한곳에서 <고양이를 부탁해>가 상영되고 있었다. 지배인 마사토 호조가 “시네마테크 부산의 사무국장 등 2명이 극장 프로그래밍을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 보고 싶다고 조금 전 다녀갔다”며 반갑게 맞이한다. 지배인은
파리와 도쿄의 시네마테크 탐방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