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정에 관한 두 가지 명상
단편집 <호출> 중 <거울에 대한 명상>,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중 <사진관 살인사건> 김영하 지음
영화 <주홍글씨> 변혁 감독
<주홍글씨>는 각각 다른 소설집에 실린 김영하의 단편소설 두편을 하나로 모은 영화다. 스릴러와 치정의 기록. 변혁 감독은 영역이 다른 이 소설들이 서로를 반사하는 거울과도 같다는 점에 주목했고, 그 안의 욕망을 건져내어, 한 남자가 겪는 두 가지 사건으로 각색했다. <사진관 살인사건>은 <주홍글씨>의 기훈이 수사하는 사건에 토대를 제공한 소설이다.
일요일 오후 사진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최초 목격자이자 용의자는 살해된 사진관 주인의 아내인 경희. 강력반 형사인 ‘나’는 남편보다 한참 어리고 육감적인 경희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고, 다른 남자가 있었던 자신의 아내를 떠올린다. 그녀는 권총으로 위협당한 애인
영화가 된 단편소설 [3]
-
애니메이션이 된 리얼리즘 비극
단편집 <반딧불의 묘> 중 <반딧불의 묘> 노사카 아키유키 지음
영화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
전쟁 고아가 된 오누이의 슬픈 죽음을 그린 노사카 아키유키의 단편 <반딧불의 묘>는, 으레 ‘꿈과 희망’이 연상되는 애니메이션의 소재로는 어울리지 않을 법하지만, ‘리얼리즘’에 주력해온 다카하다 이사오에게는 거부하기 힘든 매혹이었던 듯싶다. “전쟁 전체를 다루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오누이의 일상과 삶에 대한 리얼리즘”이라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올 여지가 있었던 셈이다.
<반딧불의 묘>는 행려 소년 세이타가 죽음을 맞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투성이인 소년의 옷에선 조그만 ‘드롭스’ 깡통 하나가 발견되고, 역원은 그 깡통을 풀숲으로 던져버린다. “깡통은 바닥에 내팽개쳐지며 뚜껑이 열렸고, 하얀 가루와 함께 조그만 뼛조각 세개가 굴러나왔다. 그때 풀 속에 잠들었던 무수한
영화가 된 단편소설 [2]
-
132분의 드라마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40쪽 분량의 단편소설에서 태어났다. <여자, 정혜>의 98분은 본디 20쪽 남짓한 단편 <정혜>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단편소설을 밑그림으로 삼은 장편영화들에서 우리는 장편소설을 2시간의 필름으로 옮긴 영화에서 흔히 느낄 수 없는 자율성과 여유를 맛보곤 한다. 놀랄 일도 아니다. 장편소설의 영화화가 문장과 에피소드의 숲을 솎아내는 불가피한 선택과 생략, 압축의 공정이라면, 단편소설의 각색은 대개 살을 붙이고 문장 사이에 입김을 불어넣어 공간을 만드는 작업인 까닭이다. 소설가 방현석은 <소설의 길, 영화의 길>에서 소설은 영화에 비해 여섯배에 가까운 서술 단위를 지니고 있기에, 영화에서 서술의 지속성과 빈도는 단편소설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쓰기도 했다.
영화로 변모한 단편소설들은 성공한 각색이란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전통적으로, 문학작품을 각색한 시나리오들은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
영화가 된 단편소설 [1]
-
“강렬하되 우아하게, 원색적 빛과 어둠”
-왜 누아르를 선택했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내가 뭘 더 잘할 수 있는지, 뭐가 나에게 잘 맞는 것인지 몰라서 장르를 찾는다는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누아르라는 장르를 통해 어두운 열정에 사로잡힌 인간, 그리고 삶의 어두운 부분들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를, 그러니까 어떤 부조리함과 아이러니 같은 것을 영화적인 형식과 느낌으로 옮겨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장르적으로 내가 누아르를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다. 1940∼50년대 할리우드 누아르보다는 어렸을 때 봤던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나 자크 드레이의 아류 프렌치 누아르의 느낌들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내 영웅은 알랭 들롱과 스티브 매퀸이었는데, 매퀸이 잡초 같고 터프한 느낌이었다면 알랭 들롱은 굉장히 감성적이고 댄디하고 냉정한 느낌이다. 그런 남자가 나오는, 아주 정서적이면서 드라이하고 쿨한 영화를 하고 싶었다. 또 일종의 판타지라고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 비주얼 전략 [5] - 감독 인터뷰
-
-
복도
달콤한 인생과 쓰디쓴 지옥 사이의 통로
<달콤한 인생>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공간은 복도 또는 통로다. 이 좁은 길의 이미지는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하는 순간마다 등장한다. 초반부 스카이라운지에서 지하 룸살롱으로 향하는 선우의 모습을 따라가보자. 룸살롱에서 빠져나오면 차갑고 도회적인 느낌의 하얀 형광빛 복도가 등장한다(①). 선우는 익숙하다는 듯 이 형광빛을 즐기며 빠져나간다. 후반부에 그는 이 복도를 다시 이용하지만 그때가 되면 복도의 색조도 노란빛을 띠게 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쪽으로 와 식당 주방을 지나면 아주 낮은 천장의 복도가 나타난다(②). 드문드문 매달려 있는 형광등 불빛에 선우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룸살롱의 뒷문으로 이어지는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의 통로가 있다(③). 등불이 거의 없는 탓에 선우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④). 영화 전편의 이야기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이 시퀀스는 선우가 어둠 속으로 빨려들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 비주얼 전략 [4]
-
조명
빛과 어둠, 천국과 지옥의 콘트라스트
빛과 어둠은 ‘달콤한 인생’과 ‘쓰디쓴 나락’ 사이를 끊임없이 줄타기하는 선우의 모습을 드러낸다. 밝음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는 영화 곳곳에서 강렬하게 사용됐지만, 일정 수준을 넘지는 않았다. 되도록 지나친 과장을 피하려는 김지운 감독의 ‘우아르’ 전략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김지용 촬영감독은 “40년대 누아르의 콘트라스트가 하드한 느낌을 주는 건 당시 조명기술상 소프트 라이팅이 안 되고, 필름의 감도가 낮아 아주 강하게 조명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선우와 백 사장(황정민)이 맞대결을 펼치는 공간을 아이스링크로 삼은 것은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애초 촬영장소로 예정됐던 여의도공원이 추워지면서 볼품없어진 탓에 부득불 옮겨야 했는데, “별스럽고 기괴하며 유머러스한 면까지 갖추고 있는 황정민의 캐릭터를 고려했을 때 생뚱맞은 아이스링크가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김지운 감독은 설명한다. 정중앙 꼭대기에 강한 광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 비주얼 전략 [3]
-
공간
빛과 컨셉을 스스로 머금고 있도록
“공간을 디자인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빛이었다.” 세트뿐 아니라 공간 전반에 관한 컨셉 구상을 김지운 감독에 지시받았던 류성희 미술감독은 누아르영화답게 빛에 관한 고민이 가장 컸다고 말한다. 강렬하면서도 입체적인 콘트라스트는 조명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탓에 세트나 공간 자체가 빛을 머금게 하는 것이 주된 포인트였다.
“주인공 선우(이병헌)가 모든 것을 시작하고 다시 돌아와 끝을 맺는 자리이며, 다시 돌아왔을 때 파국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공간”인 탓에 가장 중요했던 스카이라운지를 디자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최후의 대결이 펼쳐질 이 공간이 남자 두명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것은 수평과 수직의 이미지로 구현됐다. 특히 바 앞을 가로지르는 공간에 패션쇼의 런웨이를 연상케 하는 수평의 흰 띠를 집어넣고(③) 그 안에 조명을 설치했으며, 스카이라운지 곳곳에도 밝은 조명등을 붙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 비주얼 전략 [2]
-
어둡고 차가운 도시를 배경으로 야수적 내면을 드러내는 남성들의 영화를, 우리는 필름누아르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 필름누아르는 음습한 범죄의 세계나 심리적으로 뒤틀린 인물의 내면 등을 통해 비정하기 짝이 없는 세상의 진실을 설파해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누아르에서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다. “스타일이 실체를 결정하고 분위기가 플롯을 압도하며 내러티브성(narrativity)이 내러티브로 등장하고 초점이 ‘무엇’에서 ‘어떻게’로 옮아가며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게 된다”는 영화학자 토마스 샤츠의 말처럼, 누아르에서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주인공 얼굴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어두운 내면을 표현하고, 건물 벽에 비친 커다란 그림자는 공포의 깊이를 보여주며, 극단적인 로키 조명은 이 세계의 치명적 그늘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누아르영화에서 양식화된 비주얼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풍부하게 하는 것을 넘어, 때때로 내러티브 그 자체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본격 누아르’ 또는 ‘누아르 액션’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 비주얼 전략 [1]
-
“자몽(JA夢)은 블록버스터 작업에 대한 경험이 많아서 영화의 규모에 맞는 힘있는 포스터를 잘 만든다. 그런가 하면 <천국의 아이들> 같은 예술영화에서도 영화 내부의 힘으로부터 비주얼을 제대로 뽑아낸다. 다들 손이 엄청 빠르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급작스럽게 진행되는 일도 믿음직스럽게 빨리 해내는 동시에 퀄리티도 출중하게 유지하는 팀이다.” (시네와이즈 김창아 팀장)
히스토리
자몽은 오래된 젊은 회사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몽 창립은 2001년이지만 두목 안태희(33) 실장의 경력은 15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극장 선전부장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충무로에 뛰어들었다. 오랜 경력을 살려 튜브커뮤니케이션에서 일하던 그가 2001년 말에 독립해서 꾸린 회사가 ‘자몽’이라고 읽히는 JA夢이다(회사명의 J와 A는 안태희 실장과 당시 공동창업자의 성에서 이니셜을 딴 것이다). 자몽이 처음으로 제 이름을 걸고 세상에 내보낸 것
영화 포스터를 만드는 사람들 [4] - 자몽(JA夢)
-
“디자인 업계의 관성이나 익숙함을 거부하는 게 좋았다. 한때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했던 김상만 실장을 비롯해서 팀 전체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
히스토리
스푸트닉(Sputnik)은 신생 업체다. 만들어진 지 고작 1년여다. 그렇다고 허투루 볼 수 없다. 김상만, 이관용, 스푸트닉호를 발진시킨 이들 두 사람의 만만찮은 영화판 경력 때문이다. 김상만 실장은 <해피엔드> <공동경비구역 JSA>의 미술감독으로 활동했고 <조용한 가족> <정사> 등의 포스터 작업을 했다. 만화가, 애니메이터, 일러스트레이터 등으로 활동했던 이관용 실장 또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고양이를 부탁해>의 포스터 작업을 진행했었다. 김상만 실장이 같은 과 후배인 이관용 실장의 “함께해요”라는 수차례의 제의를 일찌감치 받아들였다면 스푸트닉호의 발사는 앞당겨졌을지도 모를 일.
영화 포스터를 만드는 사람들 [3] - 스푸트닉
-
“그림커뮤니케이션의 개성은 재기발랄함이다. 그래서 코미디류의 통통 튀는 영화가 그쪽 팀하고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기존의 전형적인 방법을 잘 쓰지 않는다. 키치적인 요소나 방법을 도입해 잘 활용한다. 그런 점이 많이 어필을 했던 팀인 것 같다. 그래서 특별히 포스터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걸 디자인적인 요소로 가장 커버를 잘하는 팀이다. 순발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김미희 좋은영화 대표)
히스토리
그림커뮤니케이션은 2000년 7월7일에 태어났다. 광고디자인사의 디자인팀장으로 이미 영화 포스터 작업을 해오던 배광호 실장은 그 팀의 해체와 함께 다른 지인들과 회사를 꾸렸다. 초기에는 멜로물 작업이 주를 이뤘고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미술관 옆 동물원>(1998), <와니와 준하>(2001) 등 그의 포스터들은 대부분 사진 자체의 감성을 살려 여백도 말을 하게 하는 서정적인 풍경화에 가까웠다. 최근 들어 이
영화 포스터를 만드는 사람들 [2] - 그림커뮤니케이션
-
이미지로 통하게 하라!
“잠깐 밥먹고 올 테니까 그동안 끝내라고.” 감독을 비롯한 스탭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포스터 촬영을 해야 했다는 한 사진작가의 회고는 까마득한 옛일이 아니다. 원치 않는 도둑촬영의 결과가 좋을 리 없다. 그때마다 뒷일은 언제나 포스터 디자이너들의 몫으로 남았다. 그랬으니 보수 적고 일 많은 영화쪽 일은 디자인 업계에서 기피하는 분야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버틴 이들이 있었고, 이들 덕에 지난 3, 4년 동안 영화 포스터 디자인은 “몰라보게 바뀌었네”라는 말을 충무로 안팎에서 들을 수 있었다. 여기 소개하는 이들은 지난 혹한기를 날밤 새워가며 버텨낸 주인공들이다. 이미지의 감흥을 말로 풀어내기 저어하는 이들을 붙잡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작업에 대해 물었다.
키포인트라면 파격도 서슴없다
“시나리오를 주면 항상 맘에 드는 표지를 만들어줬다. 매번 가져오는 시나리오 표지의 색감이나 글자 크기, 그리고 형태가 시나리오를 제대로
영화 포스터를 만드는 사람들 [1] - 꽃피는 봄이 오면
-
“형식상의 급진성과 내용상의 프로파간다”-김선
상영작 <자본장 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 필모그래피 <반변증법> <시간의식> <빛과 계급>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좋다.” 지난해 쌍둥이 형인 김곡 감독과 함께 <시간의식> <반변증법>을 들고 이미지포럼을 찾았던 김선 감독의 말이다. 독립영화가 정치적인 선언을 뒤로 감추고, 좀더 대중적인 화법을 구사하면서 충무로 제작자들에게 구애를 던지기 시작한 지도 오랜 일.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이른바 문화적 세례를 받아 탈정치화됐다는 90년대 후반 학번의 입에서 튀어나온 선언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착취는 반복되고, 욕망은 충족되지 못하며, 언제나 공급은 수요를 초과하여 공황을 부르는 악몽 같은 자본주의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자본당선언>은 그 숨막히는 순환의 구조를, 엄격한 영화적 형식에 적용해 완성했다. 김선 감독에게 가장 큰 아쉬움은, 지루한
일본에서 만난 한국 독립영화 [3]
-
“독립영화는 사회를 지킨다”-황철민
상영작 <프락치> 필모그래피 <퍽햄릿> <팔등신으로 고치라굽쇼?> <옥천전투>
“저렇게 때깔나는 실험영화가 있다니!” 황철민 감독이 이미지포럼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1985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이다. 독일 유학 무렵 그가 일했던 독립·실험영화 상영관 ‘라거할레’가, 이미지포럼에서 만들어진 일본 실험영화를 상영했던 것. 그러나 “일본의 독립영화는 최대한 유예시켜야 하는 우리의 미래”라고 말하는 그는, 더이상 일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70년대 이후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신변잡기 일색으로 흐르게 된 일본의 독립영화”는 그저 사회의 노후함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독립영화가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거의 없지만, 사회의 바로미터가 될 수는 있다”. 황철민 감독은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역동성을 예술의 유정(油井)에 비유한다. 네오리얼리즘
일본에서 만난 한국 독립영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