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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욱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갑자기 남자가 좋아졌다.”
오해하지 마시라. 커밍아웃 선언이 아니다. <나비>를 끝내고 규모가 큰 첩보영화를 준비하던 문승욱 감독은 자료조사만 마치고 멈춰섰다. “머리로 쓰는 이야기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내 피부에 와닿는 걸 쓰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나이 마흔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을 돌아본 것도 그때였다. “전엔 수다떠는 상대가 대개 여자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남자들로 바뀌어 있더라. 우정은 뭔가, 의리는 뭔가 하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이 무렵, 그는 후배들과 함께 술을 진탕 마시고 귀가하던 중 택시에서 흘러나온 신파조의 노래에 끌리기도 했다. “그래, 남자 이야길 해보자. 세상과 어울리지 못해 외로운 남자, 나잇값도 못하는 철부지 남자를 다뤄보자.” 결심은 그렇게 굳어졌다. 외로운 남자 이야기가 뜬금없는 건 아니었다. “언젠가 다시 만들고 싶은” 데뷔작 <이방인>도 세상과 격리되어 배회하는 남자에서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5] - 문승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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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이 영화가 원래는 데뷔작으로 하고 싶었던 영화다.”
박흥식 감독은 지난해 6월 말 <인어공주>를 개봉하고 딱 석달 쉬었다. 본래 “더 빨리 시작하려고 했다”는 그의 신작 <엄마 얼굴 예쁘네요> 시나리오는 감독이 <하루>의 조연출을 끝낸 뒤 쓰여졌다. 1979년 10월26일부터 1981년 한국 프로야구 개막까지, 유신정권의 끝에서 전두환 정권으로 넘어가는 약 3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중학교 1학년짜리 소년 광호의 짧은 성장기였다. 원고를 들고 싸이더스를 찾아갔다. 스타 캐스팅이 되는 연령도 아니요 보송한 아이를 써먹을 연령도 못 되는, 사춘기라는 애매한 나이의 주인공을 들어 제작사는 “캐스팅 각도가 안 보인다”는 표현을 썼다. 마음을 접고 싸이더스의 다른 프로젝트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데뷔하게 된 박흥식 감독은 <엄마 얼굴…>의 한 장면을 <나도 아내가…> 속에 슬쩍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4] - 박흥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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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동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그때, 혼자 남겨진 느낌이 묘했어요.”
민규동 감독은 3년 전 <씨네21>에 실린 ‘네 감독의 신작 프로젝트’ 기사를 그렇게 회상했다. 당시 그는, 몽골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아내를 찾아나선 바이올린 주자의 이야기 <솔롱고스>를 차기작으로 준비 중이었다. 같은 지면에 소개된 프로젝트는 뒷날 <바람난 가족>으로 제목이 바뀐 임상수 감독의 <마지막 연애의 상상>과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이었다. 세개의 기획은 고치를 벗고 스크린으로 보란 듯이 날아올랐지만, <솔롱고스>만은 종이 위에 외로이 남았다. 그뒤로도 오랫동안 민규동 감독은 많은 이야기를 썼다. 미처 계발되지 않은 자신을 탐색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김태용 감독과 공동연출한 기묘하게 아름다운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제작자를 만나는 그의 발목에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3] - 민규동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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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내 영화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2004년 6월 <아는 여자>가 개봉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장진 감독은 축지법을 구사하는 듯한 속도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크레딧은 자신의 연극을 각색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제작자. 한국전쟁의 포화에서 비껴나 있는 산골마을 동막골, 그곳에서 북한군과 국군과 연합군 병사들이 적의를 무너뜨리고 우정을 얻는 영화다. 장진 감독은 <묻지마 패밀리> 중에서 <내 나이키>를 연출했던 박광현 감독에게 이 영화를 맡기고 자신은 다소 규모가 큰 영화를 연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전에 쉬어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감독이 참여해 제각기 단편을 연출하는 환경영화와 인권영화 프로젝트, 연극 <택시 드리벌> 연출을 지나, 장진 감독은 “어느 정도는 대중적이고, 또 어느 정도는 실험적이어서, 다섯 번째 영화로 적당하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2] - 장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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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찍고 있습니까?
근황이 궁금했던 다섯 감독에게서 신작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민규동, 문승욱, 박진표, 박흥식, 장진. 소녀처럼 투명한 감성을 지닌 민규동 감독은, 맑고 예민한 소녀영화이자 낯선 공포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를 만들어 공동연출한 김태용 감독과 함께 기억할만한 데뷔작을 남긴 바 있다. 그는 3년 전 <씨네21>을 통해 밝힌 것과 다른 프로젝트로 캐스팅을 완료하고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6년 만에 찍게 되는 민 감독의 두 번째 영화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디지털카메라에 디스토피아적인 근미래와 영혼을 담은 데뷔작 <나비>(2001)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청동표범상을 수상한 문승욱 감독은 4년만에 신작을 공개한다. 영화 <사랑의 이름으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구원과 치유를 희망하는 뜨거운 영화다. 황혼기 사랑에서 삶의 찬란한 의미를 찾아내는 영화 <죽어도 좋아>로 비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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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동수는 어떤 인물인가?
물처럼 고정되지 않은 캐릭터
<극장전>은 홍상수 감독이 전작의 배우를 주인공으로 다시 기용하는 첫 번째 영화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가 배우였다면, 지금의 동수는 감독이다. 그런데 사람이 좀 특이하다. 종종, 연출을 하는 사람이나 연기를 하는 사람이나 서로 쳐다보며 어색하고 또 재밌다는 듯이 껄껄 웃을 때가 있는데, 김상경이 “머리에서 열이 나. 머리가 복잡한 것 같아”라고 하면, “원래 그런 거야. 그게 맞아. 네가 지금 머리가 복잡해”라고 홍 감독이 응수하고, “나같이 이성적인 사람이 이런 거 하려니까 진짜 미치겠네”라고 다시 김상경은 토로한다. 김형구 촬영감독이 <극장전> 동수하고, <생활의 발견> 경수하고 뭐가 다르냐고 농담처럼 묻자, 김상경은 “감독님이 그러는데요, 경수는 동수 형이고, 그 위로 (홍)상수도 있고, (<오! 수정>의) 영수도 있다는데요”라며 웃는다. 물론 농담이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 현장 스케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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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이 지난 2월7일 촬영을 마쳤다. <씨네21>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이어 다시 한번 현장을 방문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 그는 현장에서 많은 걸 결정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우리 자신들이 그렇게 신기한 동물이었나를 되돌아보게 하다가도, 문득 자의식을 지닌 영화형식이란 무엇인지 질문받는 듯한, 그 장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전작들과 다름없이, 구조는 알쏭달쏭하고, 인물들은 흥미롭다. 이제 남은 것은 개봉을 기다리는 일인데, 여기저기 빈구석을 상상으로 메워넣으며 <극장전>이 펼쳐지는 5월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영화의 모든 현장마다 기적처럼 일어나는 창조의 순간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래서 모든 영화현장이 다 궁금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은 머리로 마련한 구상을 현장에서의 인상과 감각으로 깨뜨려나가는 특이한 과정을 거쳐 영화를 완성한다.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 현장 스케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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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의 가장 큰 관심은 인간 자체다”
굳은 표정으로 직선주로를 달리는 단거리 주자 같은 인간 군상으로 필모그래피를 빽빽이 메워온 최양일 감독. 그의 신작 <피와 뼈>는 2004년 <마이니치> <닛칸스포츠> <키네마준보> 등 주요 영화제의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대부분 휩쓸며 지난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양석일이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써내려간 1500매가량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 수정만 20여번. 6년간 준비하여 최양일이 건져올린 <피와 뼈>는 그의 비정한 인류학 보고서의 결정판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하드보일드의 제1 명제를 <피와 뼈>는 빈틈없이 가혹하게 밀어붙인다.
눈 깜짝하지 않고 관객을 까무라치게 만드는 주인공 김준평(기타노 다케시)의 몸짓처럼. 그는 140분 러닝타임 동안 관객이 화면에서 얼굴을 돌리게 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폭력과
최양일의 <피와 뼈> [2] - 최양일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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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압적 아버지, 잔혹한 신화가 되다
소설 <피와 뼈>는 양석일에게 나오키상과 쌍벽을 이루는 야마모토 주고로상을 안겼다. 16년이 지나고, 스크린으로 귀환한 영화 <피와 뼈>는 최양일에게 일본영화제의 그랜드슬램에 가까운 업적과 평단의 찬사를 선사했다. 제주도에서 무당이 굿을 하며 되뇌는 “피는 어머니로부터 받고, 뼈는 아버지로부터 받는다”는 말에서 제목을 빌려온 <피와 뼈>는 최양일이라는 붓과 기타노 다케시라는 먹이 만나 터질 듯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괴력의 영화가 되었다. 140분 동안 눈을 떼지 못하도록 움직이는 김준평의 그악스러움과 그에게 짓밟히는 가족들의 처절함은 최양일식 현대 비극의 진수를 보여준다. 시대, 사회, 가족을 역류하는 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피와 뼈>에 관한 이야기.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를 보면서 연상되는 소설이 하나 있었다. 나카가미 겐지의 <고목탄>이라는 작품이다.
최양일의 <피와 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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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밤에 너의 영화를 보았다. 그것은 힘이 셌고 재미가 있었고 나는 흥분했다. 나는 너의 영화를 베를린영화제에 초청하고 싶다. 그것은 2월10일에 발생할 것이다.”
독일인 프로그래머가 부산영화제 마지막 날 내게 보내온 메일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좀 으스스했다(자동번역프로그램을 통해 한글로 번역해서 보낸 것. 내 시나리오도 자동번역기에 넣어 좀 공포스럽게 할 수 없을까?).
<신성일의 행방불명>이 베를린영화제에 가게 됐다고 자랑하자 최모 선배는 물었다. “베를린인디영화제?” 강모 후배는 물었다. “베를린단편영화제요?”
“베를린영화제, 부산영화제보다 후지대.” 김모는 말했다.
이들이 이러는 걸 보면 대단한 영화제인 게 분명해. 느낌이 좋은 게 왠지 가서 상을 받을 거 같다. 그럼 시상식 단상에 올라가 트로피를 받고 소감을 밝히는 거야. “이 순간을 고대했습니다. (중략) 수상거부를 하면 재밌겠다고 심심할 때 가끔 생각했거든요. 제게 상을 주시니 영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4] - 신재인 감독의 베를린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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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4일 월요일
세 거장의 공동작품 <티켓>
새로운 한주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는지 소복한 눈이 베를린을 뒤덮었다. 영화제 경쟁부문도 점차 알찬 작품들로 채워진다.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를 통해 관객에게 논쟁적인 화두를 어떻게 던질 것인가에 대해 지혜로운 비전을 보여준 <파라다이스 나우>(하니 아부-아사드 감독), 인간은 어떻게 연대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세 거장(에르만노 올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켄 로치)의 <티켓>, 그리고 늙는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한 성찰을 들려주는 <고 미테랑 대통령>(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은 잘 숙성된 영화의 그윽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평생 단짝인 칼레드와 사이드가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자리를 잃던 날, 그들은 자신들이 자살 폭탄조로 뽑혔음을 알게 된다. 다음날 아침 비디오에 부모에게 인사말을 남기고 결혼식 하객 차림으로 텔아비브를 향해 떠난다. 피 한 방울,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3] - 이종도 기자의 중간점검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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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2일 토요일
바이링, 팬서비스 한 번 확실하네
아침부터 비가 흩뿌린다. 프레스센터에서 메일박스를 열어봤더니 게이 시티 가이드 표지모델이 벌거벗은 채 내게 웃음을 던진다. 영화제의 섬세한 배려일까 아니면 베를린 게이 공동체의 압력일까. 베를린은 담배를 피우고, 음악을 사랑하며, 거기에 게이이기까지 한 사람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도시다. 구멍가게와 패스트푸드점에도 재떨이가 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20유로 안팎에 즐길 수 있고, 1992년 이후 훌륭한 게이영화에 대해 베를린영화제는 금곰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테디베어상을 수여해왔다. 허겁지겁 극장으로 달려가 만난 스테파노 모르디니 감독의 <소도시, 이탈리아>는 시사회장 곳곳이 빈자리다.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려는 젊은 부부를 늙은 사회가 훼방놓는다는 이야기는 뼈대가 앙상하다. 상영시간 절반이 지나도 이야기가 진척이 없자 성마른 기자들이 사방에서 벌떡 일어선다. 앙드레 테시네 감독의 <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2] - 이종도 기자의 중간점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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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도 기자가 살펴본 베를린 영화 기상도
“당신은 과거를 잊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 (아모스 오즈)
제55회 베를린국제영화제(2월10∼20일)는 머지않은 과거의 역사를 정치화한 영화제였다. 길게는 19세기 아프리카 식민지화부터(개막작 <맨투맨>) 가깝게는 나치에 저항한 백장미단 사건(<소피 숄-마지막 날들>)과 나치 수용소(<페이트리스>)에서 최근의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호텔 르완다> <4월 언젠가>)과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파라다이스 나우>)까지 과거를 거슬러올라가 현재적 의미를 되묻는 작품이 눈에 띄었다. 몇몇 뛰어난 정치성 짙은 영화들이 베를린영화제에 무게감을 실어주었으나 경쟁부문의 절반은 함량 미달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가 경쟁부문에 올라가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주었다. 임권택 감독은 명예 금곰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의 관록을 세계에 알렸다. 한국영화는 <여자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1] - 이종도 기자의 중간점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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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천재 소년
하워드 휴스는 엄청난 부자였으며 할리우드 톱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던 미남에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비행기를 허공에 띄우려 했던 몽상가였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상할 정도로 하워드 휴스와 닮았다. 10대 때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슈퍼모델과 같이 사는 미남에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영화에 출연했던 슈퍼스타와 하워드 휴스는 사춘기 소년처럼 불안정한 존재다. <에비에이터>는 그런 불안한 미숙함을 이용하는 영화다. 마틴 스코시즈는 디카프리오의 왜소한 가슴과 아이처럼 여린 뺨에 조명을 드리우며 소년의 모습을 강조한다. 8년 전 디카프리오가 하워드 휴스의 전기에 사로잡혔을 때, 그는 한번도 나락으로 빠져본 적 없는 영재배우이자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는 조숙한 아이였다. 시간이 흐르고 <타이타닉>의 거품이 가라앉자 디카프리오는 소년의 얼굴에 갇혀 지지부진한 세월을 보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세상의 모든 꿈들을 실현
소년의 영혼을 가진 두 남자 이야기 [3]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