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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술가처럼 찍고, 장사꾼처럼 편집한 걸까?”
-제목을 <달콤한 인생>이라고 지은 이유가 있는지.
=최종 제목으로 떠오른 후보들이 모두 기존에 있던 영화제목들이었다. <의리없는 전쟁> <트루 로맨스> <돌이킬 수 없는> 이런 식으로. 사실 다 제목으로 써도 어울릴 만한 것들이긴 하다. 그중 하나가 <달콤한 인생>이었다. 나는 공교롭게도 펠리니의 이 영화를 아직 못 봤다. 하지만 영화적 분위기와 뉘앙스가 가장 잘 살아날 수 있는 제목은 이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달콤한 자기 내부의 욕망에 의해서 달콤한 꿈을 꾸고, 달콤한 상상을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시사회장에서 “액션이 가미된 누아르풍의 피범벅 러브스토리”라고 했는데 그게 맞는 것 같다. 누아르 장르를 하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액션의 볼거리를 보여줄 수 있는 누아르, 거기다 하드
<달콤한 인생> [2] - 김지운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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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의 네 번째 장편영화 <달콤한 인생>이 4월1일 개봉한다. <달콤한 인생>은 높은 가격으로 완성 전 일본에 수출되는 것으로도 관심을 모았었다. 마침내 뚜껑을 연 <달콤한 인생>에는 장점과 단점이 같이 있다. 김지운이 그려내는 그 누아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달콤한 인생>에 대한 소개글과 인터뷰를 같이 싣는다.
쿨한 카오스에 온 걸 환영합니다!
김지운의 네 번째 장편영화 <달콤한 인생>이 표방하는 구심점은 누아르다. 장르, 스타일, 양식, 사조, 경향, 현상, 운동, 톤, 더러는 아무것도 아닌 비평적 사기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누아르는 이미 영화적 규정의 느슨함에 다다른 개념이다. 누아르라고 불리기보다 언제나 다른 무엇과 함께 말해져야 성립이 가능하거나 또는 누아르적인(noirish), 누아르성(noirness)이라는 애매한 말로 불리는 것이 더 옳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누아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
<달콤한 인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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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계속 영화를 만들었으면…”, 스탭·배우들 합심
하지만 길벗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여정이었다. 박광수 감독의 소개로 지난해 여균동 감독과 <숨바꼭질> 프로젝트를 준비했던 주요 스탭들이 흔쾌히 결합하지 않았던들 3억원 안팎의 저예산영화 <비단구두…>가 지금까지 순항할 수 있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제창규 촬영감독, 배현종 조명감독, 배영환 미술감독 등 주요 스탭들이 <비단구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좋아하는 선배 감독이 계속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 빠듯한 예산 때문에 발전차도 대기시키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서 그들이 믿는 것은 ‘발상의 전환과 끊임없는 아이디어 개발’. 이날 저녁 촬영 때도 배현종 조명감독은 “1kW조차 사용할 수 없는” 한계조건 아래서 빛을 모으느라 정신없었다.
극단 차이무 출신 배우들의 헌신적인 참여도 <비단구두…>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줬다. 촬영 직전 한달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촬영현장 [2] -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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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짜리 그러나 열정은 30억 영화
봄의 전령이 험한 미시령은 잊고 지나친 걸까. 얼마 전 폭설 때 제설기가 한쪽으로 힘겹게 밀어놓은 눈들이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다. 잠시 내려선 미시령 정상.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한숨 돌리려고 했더니 시시때때 방향을 바꾸어 불어대는 강풍이 몸조차 가누기 어렵게 만든다. 막바지 촬영에 몰두하고 있는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제작진이 카메라를 펼친 미시령 중턱의 원터라는 곳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꾸불꾸불 비포장 도로를 1km 넘게 들어가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개인 사유지에 차려진 캠프. 낮은 곳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은 봄이 왔다고 끊임없이 조잘댔지만, 고개를 들면 아직 분기탱천한 겨울 바람에 제작진은 혼쭐이 나고 있었다.
감독은 땅바닥에 앉아서, 배우는 반사판 들고
겨울을 길에서 났기 때문일까. 여균동 감독의 얼굴 또한 새까맣게 말라 있었다. “여러분이 달리는 순간 다이너마이트가 터져요. 위험하진 않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촬영현장 [1] - 캐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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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환기하는 리얼리티, 일상과 자연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사소한 일상이나 자연 풍광을 유난히 물끄러미, 뜬금없다고 느껴질 만큼 자주 응시하곤 한다. 영화를 보는 것이 시각과 청각에 제한된 경험이긴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후각과 촉각과 미각을 환기하는 일도 잦다. 그는 그렇게 관객의 오감을 자극하려고 든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이 집나간 엄마를 추억하는 순간은 방바닥에 들러붙은 빨간 매니큐어 흔적을 손으로 더듬거나 벽장 가득 채워진 엄마 옷의 냄새를 맡을 때다. 이들은 아마도 아폴로 초콜릿을 먹거나, 모노레일의 덜컹거리는 소음을 들을 때마다 막내를 떠올릴 것이다.
<원더풀 라이프>에서 사자들이 고르는 생전의 행복한 기억들도, 거창한 사건사고가 아니라 감각과 관련된 소소한 추억들이다. 무릎에 누이고 귀를 파주던 엄마의 살냄새, 더운 여름날 전차 속으로 불어들어오던 시원한 바람, 첫 비행에서 창 밖으로 보이던 솜털구름, 대나무 숲에서
<아무도 모른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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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려깊은 감독의 생에 대한 감각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느리다. 그를 직접 대면해 인터뷰한 기자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하며,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흐르는 긴 침묵을 견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는 섣불리 단정하거나 선언하는 법이 없다. 영화를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로 느리고 신중한 편이어서, 1995년 <환상의 빛>으로 데뷔한 이래 10년 동안 세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그의 소신 때문일 것이다. 배우와 창작의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만들어가는 다큐멘터리적 작업 방식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냉소하거나 비관하지 않는 그의 태도와 잘 어우러진다. 아동 방치의 실화를 정적인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재구성한 성장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는 그런 감독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첫
<아무도 모른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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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찾아 삼만리”
<아리랑>을 둘러싼 오랜 추격전
영상자료원 이사장 D씨가 <아리랑>을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진 기이한 수집가, 아베 요시시게를 방문하여 설득에 나섰다. 필름을 넘겨달라 말하면 “남북한이 통일되는 그날 반환한다”는 대답이 돌아오고, 필름을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면 소장 필름이 너무 많아 불가능하다, 5만편에 달한다는 그 소장 필름을 대신 정리해주겠다고 나서면 소장 장소가 4군데에 걸쳐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 과연 개인이 그렇게 많은 필름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허술해 보이는 그의 소장필름 리스트는 믿어도 좋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온갖 필름 캔들이 집안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을 봤을 때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보존 상태는 신뢰할 수 없어 보인다. 일단 소득없이 귀국할 수밖에. 94년부터 갑자기 방송 3사를 비롯해서 여러 민족주의자 단체들이 <아리랑>을 찾아 아베를 찾았다
한국영상자료원 X-파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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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영화를 다시 만나기까지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것도 아니고,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만들어진 영화를 홍보해서 극장에 걸고 싶은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흘러 버려지고, 잊혀지고, 사라진 영화에 온 정성을 쏟는 이들은, 한국영상자료원 사람들. “한편의 영화는 저작권자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보호하고 전수해야 할 문화환경”이라고 믿는 이들은 그 소중한 환경을 보존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영상자료원의 일상은 언뜻 두터운 시간의 지층 아래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옛것들을 찾아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만신창이로 발견된 옛날 자료들을 일일이 손보고, 정성스럽게 복원한 영화들을 꾸준히 상영하느라 언제나 분주한 영상자료원을 둘러싼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이 일화들은 멀게는 20여년 전, 가깝게는 최근까지 다양한 시기에 걸쳐 일어났던 일들이다. 민감한 부분이
한국영상자료원 X-파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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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연 거장인가?
베르톨루치가 처음부터 강건한 마르크시스트 사상가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때부터 현명한 예술가의 자질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베루톨루치는 애초에 자기 재능보다 더 많은 격려를 받았던 감독인 것 같다. 그가 초기에 집중했던 것은 고다르를 따라잡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1968년 5월혁명이 일어나던 그해 만들었던 <파트너>는 고다르의 영역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러고나서 만든 <거미의 계략>(1970)과 <순응자>(1970)에는 그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의식적 몸짓이 있다. <거미의 계략>에서 보여준 우아한 미장센과 알레고리는 일종의 베르톨루치식 변용의 성공담이다. 그러고나서 만든 영화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라는 과찬의 영화였고, 베르톨루치의 진정한 걸작 <1900>은 1976년에 만들어졌다.
베르톨루치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에는 일종
베르톨루치의 몰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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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영화와 섹스하지 말라!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신작 <몽상가들>이 찾아왔다. 한국 관객과 만나기로는 <스틸링 뷰티> 이후 근 7년 만이다. 젊은 시네필 세명이 68혁명의 열기 속에서 영화애와 섹스로 몇주 밤낮을 보내는 이야기다. 격렬한 사상가이고, 열렬한 영화광이기도 한 베르톨루치가 젊은 시절에 스친 열망과 열정을 자성적으로 보듬는다는 것 자체가 <몽상가들>에 관한 무성한 소문을 낳았다. 그러나 영화는 소문만큼 풍성하지도, 명성만큼 훌륭하지도 않다. <몽상가들>은 과연 어떤 영화인가?
<마지막 황제>(1987) 이후 범작과 졸작으로 허장성세를 부리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1968년 혁명의 전조 가득 찬 파리로 영화의 시계를 돌린다는 것은, 게다가 영화사의 중요한 일화로 기록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설립자 앙리 랑글루아 해임 사건이 벌어진 2월에서 5월 혁명의 불길이 붙는 그 시기까지를 영화의 시간으로 다룬다는
베르톨루치의 몰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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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길, 놓은 것이 아니다
방은진의 감독 데뷔 선언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럼, 이제 연기는 그만두게 되는 건가? “이 길을 택한 건 암암리에 내가 쓰고 주연하고 감독하는 영화를 하겠다는 막연한 꿈 때문이지만, 배우냐, 감독이냐 하는 구분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영화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영역을 확장해간다는 느낌으로 봐주면 좋겠다.” 아닌 게 아니라, 방은진을 배우로서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면, 그건 무척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박철수 감독은 방은진을 가리켜 “여건만 조성된다면, 홀리 헌터 이상의 훌륭한 배우가 될 재목”이라고 칭한다. 실제로 방은진은 <301·302>에서 고독과 소외 속에서 음식과 성에 대한 욕구가 비대해지는 301호 여자가 되었을 때도, <수취인불명>에서 혼혈 아들과 함께 반실성한 채로 살아가는 기지촌 여성의 비극을 체현했을 때도, 그 용감한 선택에 토를 달 수 없을 빼어난 해석을 보여주었더랬다
감독데뷔, 방은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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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감독하러 갑니다
배우의 감독 선언을 접한 게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최은희, 하명중 시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가게 된다. 물론 유지태가 단편을 만들었고, 정우성이 뮤직비디오를 찍었고, 김인권이 독립 장편을 내놓았지만, 극장에 걸고 관객을 맞이한 작품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달라진다. 언젠가부터 배우 방은진이 감독으로 데뷔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소문으로만 그친 게 아니었다. 실제로 두어편 프로덕션이 진행된 일이 있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취소되거나 유보됐다. 그리고 올해 초, 방은진이 <오로라 공주>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로 드디어 데뷔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떤 갈망과 열정이, 그를 배우에서 감독으로 발을 돌리게 한 걸까. <오로라 공주>의 고사가 있던 오후, 약간의 피로와 긴장을 머금은 방은진 감독을 만나보았다.
3월 둘쨋주 어느 밤, <오로라 공주>의 테스트 촬영을 준비하던 방은진 감독은 적잖이 당황했다
감독데뷔, 방은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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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클럽
2004. 8. 22 지루 촬영에 조루 액션!
어느덧 촬영도 8회차를 가고 있다.
서울의 모 호텔 나이트.
선우와 늦은 시간 나이트클럽 룸에 들어와 강짜를 부리는 백 사장(황정민)파 똘마니들간의 액션신을 찍는 날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가볍고 쿨하게 설계된 액션이다.
가볍고 쿨한 액션 설계지만 나름대로 40여컷. 이틀 동안 나이트 영업에 방해되지 않고 끝내려면 10시간 안에 20여컷을 끝내야 한다.
계산해보면 1시간에 2컷을 쳐나가야 한다. 류승완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간 선우가 천장에 붙은 샹들리에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두명의 똘마니를 가볍게 처치해야 한다. 테이블은 삐걱거리고 소파와 테이블이 워낙 커 카메라 동선은 안 나오고 천장은 왜 이렇게 낮고 샹들리에는 왜 이렇게 큰지. 테이크 한번 가면 깨진 유리잔이며 테이블 세트하는 데 20여분 소요. 아… 오만 가지가 속을 태운다.
결국 7컷 찍고 끝났다.
김지운 감독이 직접 쓴 <달콤한 인생> 제작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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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일간의 달콤한 악몽
절친한 사이인 김지운 감독과 류승완 감독이 4월1일 ‘격돌’한다. <달콤한 인생> 대 <주먹이 운다>. 물론 두 감독이 원했던 일은 아니겠으나 배급 등의 조건으로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오죽했으면 김지운 감독의 꿈에 이를 걱정하는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등장하기까지 했을까.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박찬욱 감독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지” 하며 먼저 시사회를 연 <주먹이 운다>의 반응을 수소문하기도 했다. <주먹이 운다>의 시사회 다음날 아침 8시, 김지운 감독은 약속된 <달콤한 인생> 제작기를 보내주는 대신 “지금 최종 믹싱 끝났어요”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또 밤을 샜지만 마감을 더 늦출 수는 없는 일, “고생하시네요. 좀더 고생해주세요”라고 할밖에. 밤낮을 거꾸로 살며 노심초사해온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회고록’은 이렇게 또 날밤 새며 작성됐다.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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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이 직접 쓴 <달콤한 인생> 제작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