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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한결같이, <씨네21>의 골키퍼, 정훈이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고 소설도 있지만, 바람 잦은 인생에서 마지막 춤 따위를 감히 누구와 기약할 수 있으랴. 그래도 <씨네21> 열살 생일 축하파티의 첫 번째 춤만큼은 꼭 이 남자와 추고 싶었다. 편집장이 네번 바뀌는 동안에도 두 페이지의 텃밭을 한결같이 장악해온 행복한 영주, 그의 만화 때문에 잡지를 산다는 독자들의 쇄도하는 고백에 어느 감독이나 평론가보다 <씨네21> 기자들이 질투하는 만화가 정훈이가 그 사람이다. 1995년 <영챔프>가 주관하는 제2회 신인만화 공모전에서 수상해 <씨네21> 제9호에 인터뷰가 실린 것을 인연으로, 정훈이 작가는 <씨네21>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1996년 초 본격적인 매주 연재에 돌입해 500호를 눈앞에 두고 있다. 24장의 프레임으로 1초를 이루는 영화를 닮았는지, 스물세칸 내지 스물다섯칸에 걸쳐
만화가 정훈이를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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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공간에서 도덕적 타락이 일어난다”
심영섭 | 당신의 영화에서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이 갖는 의미가 궁금하다. 계급이나 인종문제도 포괄하고 있는데.
루크레시아 마르텔 | 내가 태어나서 19년 동안 산 곳이고, 아르헨티나 문화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다. 문화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이고, 가톨릭 색채가 강하다. 계급 격차라는 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빈민층은 지역 원주민이고, 부유층은 유럽 이주민들이라는 구분도 유사하다. 미국을 잘 아는 사람들은 아르헨티나 북부가 미국 남부와 비슷하다고들 한다.
심영섭 | 두 작품에 모두 백인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이 섞여 있고, 그것이 가족문제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인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내가 보기에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하는 모든 악의 근원은 중산층에 있다. 물론 중산층보다 도덕적으로 더 많이 타락한 고위층들이 있지만, 중산층은 정치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많은 심각한 문제들을 낳고 있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2]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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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나요? 당신의 삶이 부식되는 소리가
루크레시아 마르텔이라는 이름은 아직 생소하다. 지구 정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 이제 두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놓았을 뿐인 이 여성감독은 그러나, 칸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앞다퉈 초청장을 보내는 유력한 감독이 되었다. 데뷔작 <늪>에 이어, 고향인 아르헨티나 북부에서 촬영한 두 번째 영화 <홀리 걸>은 사회와 가정, 소통과 욕망의 문제를 차갑고 건조한 영상에 담아낸 수작이다. 서울여성영화제에서 <홀리 걸>을 개막작으로 선보이며 방한한 루크레시아 마르텔을 영화평론가 심영섭씨가 만났다. 남아메리카영화와 여성영화에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둬왔던 심영섭씨는 이 둘의 교집합격인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영화세계를 주목했고, 지난해 가을 <씨네21>의 특집 기사 ‘거장 예감, 세계의 신성 감독’ 편에 마르텔을 추천하며 열렬한 지지의 변을 전한 바 있다. 1966년 말띠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은 ‘여성
루크레시아 마르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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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따뜻하고, 이미 완전한 오즈의 세계
오즈 야스지로의 <태어나기는 했지만>
오즈 야스지로는 1903년 12월12일 태어났다. 그리고는 1963년 12월12일 60살 되던 생일날 세상을 등졌다. 습관처럼 오즈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나면, 우연이든 운명이든 시작과 끝을 일치시켜 삶을 살다간 그의 윤회 과정에 언제나 소름이 돋는다. 2003년 겨울, 도쿄 외곽 사원에 있는 그의 묘지를 찾았을 때 그는 다른 이웃들과 거기 그렇게 조용히 묻혀 있었다. <태어나기는 했지만>이라는 제목을 중얼거리는 순간 그 묘지의 차갑고도 평온한 풍경이 떠오른다. 태어남과 죽음이 같은 의미로 공존하는 오즈의 영화이어야만 가능한 연상일 것이라고 믿는다.
오즈가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작가가 된 것은 친구 야마나카 사다오를 경쟁자로 삼아 형식을 고민하고, 미국영화를 무척이나 즐기면서 보냈던 그 전전 초창기 시절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오즈적인
<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8] - 아시아영화 베스트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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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압도하는 서정
샤트야지트 레이의 <길의 노래>
샤트야지트 레이는 첫 영화가 될 <길의 노래>의 촬영을 1952년에 시작했지만 제작비 마련이 여의치 않았던 탓에 3년 뒤에나 완성을 볼 수 있었다. 결코 바짝 죈 상태가 아니었던 그 오랜 기간 사이에는 자연히 많은 공백들이 있었는데, 때론 그런 공백이 레이에게 실망이 아닌 격려를 주기도 했다. 인도에서 최초의 국제영화제가 열렸을 때가 그 예가 되는 경우였다. 당시 촬영에서 손을 놓고 있던 레이는 극장으로 달려가 2주일간 하루에 네편씩의 영화를 보았다. 그렇게 해서 그가 접했던 영화들 가운데 특히 레이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이었다. 3일 연속으로 이 영화를 보았다는 레이는 그것에서 영화감독의 손길이 얼마만큼 황홀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산 증거를 보았다. 그렇지만 레이는 구로사와의 비범한 연출력 앞에서 주눅이 들기보다는 자기도 그에 필
<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7] - 아시아영화 베스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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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을 메운 진짜 피와 뼈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
2005년의 사람들은 영화를 게임처럼 만든다. 1954년의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화를 전쟁하듯 만들었다. 구로사와는 스탭과 배우들을 이끌고 이즈의 산속에 지은 오픈 세트장에서 1년 이상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치른 끝에 <7인의 사무라이>를 완성해냈다. 제작과정에서 수많은 사고들이 잇따라 일어나는 가운데 심지어 마지막 빗속 전투장면을 촬영하다 스탭 한명이 사고로 죽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게임을 그만두고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화면 안의 인물들은 아바타가 아니다. 비가 쏟아지는 장면에서 배우들은 비를 맞아야 한다. 말이 쓰러질 때 그 위에 탄 인물은 정말 쓰러져야 한다. 아무리 연기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육체의 사실주의, 피와 뼈의 리얼리즘, 상처와 먼지의 리얼리티가 있다. 화면에는 늘 눈속임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화살이 날아갈 때 정말
<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6] - 아시아영화 베스트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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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향한 조용하고 격렬한 관찰
<송환>
망각이 꼭 역사의 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영화의 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요즈음에는 많은 영화들이 너무 빨리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 그만큼 빠르게 잊혀진다.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심지어 어떤 이들은 빠르게 잊혀지기 위한 영화들을 만들기까지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서두르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뒤에 남겨진 흔적들을 꼼꼼히 다시 더듬으면서, 현실의 변화의 추이를 세심하게 뒤쫓으면서, 시종일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며 작업하는 김동원 감독 같은 이가 우리 곁에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의 오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다림의 결실인 <송환>은 오래도록 기억되고 논의되어야 할 우리 시대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인물 다큐멘터리에 사람들의 얼굴이 담기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얼굴들이 모여 스스로 하나의 역사를 이루고 세상의 형상을 만들어내게끔 하는 것이 그리
<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5] - 한국영화 베스트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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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를 다룬 최고의 영화
<박하사탕>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파리 외곽의 양계장 분쇄기에 머리부터 넣어져서 닭모이가 되었다고 한다. 진실의 한 자락을 들추었을 뿐인데 엽기적인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실제 상황으로 다가온다. 2005년에도 우리의 현대사는 여전히 직면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무서운 시대를 다룬 <박하사탕>을 5년 만에 다시 보았다. 한국 현대사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시대순으로 나열하면, <역도산> <효자동 이발사> <실미도> <그때 그 사람들> <살인의 추억>)을 보고 나서 다시 본 영화는 어떤 울림을 자아냈다. 1999년에서 1979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박하사탕>은 <살인의 추억>을 지나 <그때 그 사람들>의 시간에서 멈춘다. <박하사탕&
<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4] - 한국영화 베스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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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희귀한 한순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년 데뷔 이래 지금까지 홍상수의 영화에 관한 논의는 넘쳐흐를 만큼 많지만, 그의 영화를 말하는 건 여전히 난감한 일이다. 언어로 그의 영화를 붙잡으려는 순간 그의 영화는 그곳에 없다. 본질적으로는 모든 영화가 그렇긴 하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의미의 생성을 방해함으로써 문자 언어의 구애를 애초에 외면한다. 그의 영화를 말할 때, 자크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의 개념을 동원하려는 빈번한 시도는 그래서 자연스럽다. 심지어 “이 시나리오는 라캉과 들뢰즈를 독해하고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같은 놀라운 추론까지 나온다. 물론 그런 논의도 끝에 가면 대개 후기구조주의의 언어만 남고, 영화는 사라진다.
1996년 5월의 어느 날, 지금은 사라진 코아아트홀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만났다. 감독은 생소했고 그런 영화의 시사회가 있다는 사실도 전날 알았으므로, 의무감으로 가긴 했지만 전날
<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3] - 한국영화 베스트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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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2004 한국영화 베스트 10
최종 결과(괄호 안 숫자는 설문 답변에서 언급한 횟수)
역사를 향한 조용하고 격렬한 관찰, <송환>(32)
현대사를 다룬 최고의 영화, <박하사탕>(26)
살벌한 리얼리즘의 잔혹동화, <살인의 추억>(24)
한국영화의 희귀한 한순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22)
이명세표 스타일의 경이로운 성과, <인정사정 볼 것 없다>(22)
유례없이 괴상한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19)
한국영화의 진정한 원류! <춘향뎐>(18)
박찬욱 최고의 걸작, <복수는 나의 것>(18)
우리 안의 괴물을 끄집어내는 판타지, <빈 집>(16)
누구도 성취 못한 불온함의 미학, <넘버.3>(16)
공수창 초록물고기 | 공공의 적 | 넘버.3 | 간첩 리철진 | 접속 | 8월의 크리스마스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 공동경비구
<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2] - 한국영화 베스트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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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10년, 아시아영화의 110년
10주년을 맞이한 <씨네21>이 4월22일부터 14일 낮과 밤에 걸친 잔치를 벌인다. 다른 주제의 파티는 생각할 수 없었다. <씨네21> 독자와 영화의 연인들을 초대한 이 간소한 연회가 내놓는 차림표는 한국과 아시아의 걸작영화 스무편이다. 한국영화는 <씨네21>이 태어난 1995년부터 10년간 제작된 영화 중 베스트를 선정했고, 아시아영화는 110년 역사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을 모았다.
창간 기념 영화제를 위해 <씨네21>은 100여명의 영화담당 기자, 평론가, 감독들에게 지난 10년간 최고의 한국영화 10편을 뽑아달라고 부탁했고 그중 51명이 회신을 보냈다. 감독 13명, 촬영감독 1명이 포함된 응답자 리스트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답변자는 기자, 평론가이며 <씨네21> 필진의 비중이 크다. 각자 순서없이 뽑은 10편을 모아 가장 많이 언급된 영화 10편을 베스트 10에 선정했
<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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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 동진의 복수가 시작되는 2부 도입부
김병일 촬영감독: 극단적인 와이드숏에서 주인공의 내면으로 전진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순천의 제1급수 저수지. 강둑에서 동진(송강호)은 세상에 하나뿐인 딸의 죽음을 통고받는다. 그의 눈가에 분노와 회한, 그리고 눈물이 얼룩진다. <복수는 나의 것>은 애초 1, 2부로 구분되는 화면 컨셉으로 출발했던 영화다. 류(신하균)의 유괴, 류 누나의 죽음, 딸의 죽음을 다루는 1부와 동진의 복수로 대응되는 2부 중 한 부분은 흑백으로 촬영한다는 것이 박찬욱 감독과 김병일 촬영감독의 원래 구상. 그것도 단순한 흑백이 아닌 당시 세계의 CF와 영화 전반에서 전염처럼 번지던 더러운 그린을 가미한다는 포석이 있었다. 미국 현상소의 테스트까지 마친 상황에서 제작비 때문에 그 꿈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촬영 컨셉에서 그 자취는 찾을 수 있다.
순천 저수지 시퀀스, 국과수 시퀀스는 동진의 복수가 시작되
한국영화 명장면의 비밀 [4] - <복수는 나의 것>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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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 구로동 샤론 스톤이 최창혁과의 관계를 털어놓는 장면
최영환 촬영감독: 필터 컬러 반대로, 현재를 초콜릿 과거를 그린·블루로
“이 영화는 머리와 싸우는 영화가 아니라 눈을 홀리는 영화다. 눈은 항상 부주의하고 비논리적이며 우매한 감각이다”(정성일), “끊임없이 넘나드는 과거와 현재의 아귀를 빠뜨림 없이 촘촘하게 맞춰내는 것만으로도 기특하게 여겨진다”(김은형),
<범죄의 재구성>에 대한 비판이든 찬사든, 수시로 등장하는 플래시백을 빼놓지 않고 언급한다. 어떤 맥락에서 쓰였든 영화 속 플래시백이 관객을 속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엔 최동훈 감독뿐 아니라 최영환 촬영감독의 공(?)도 적지 않게 들어 있다. 리얼사기극 <범죄의 재구성>을 가만 보자. 과거와 현재가 다른 색감으로 나눠져 있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똑같지 않다. 대개 영화가 따뜻한 색감으로
한국영화 명장면의 비밀 [3] - <범죄의 재구성> <살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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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숲> - 최 형사가 산장에 들어가는 장면
김철주 촬영감독: 조명기를 밖에 한대만 설치, 빛의 강약으로 긴장 고조
<거미숲>은 망각과 왜곡의 숲이다. 강민(감우성)이 살인을 저지른 숲속 산장은, 그의 왜곡된 기억이 똬리를 틀고 있는 거처라 할 만한 곳이다. 이 산장으로 강민의 친구인 최 형사(장현성)가 들어가는 장면. 실내는 강민의 기억만큼이나 어두컴컴하지만, 훤히 드러나는 창으로는 늦가을의 울창한 삼나무 숲이 보인다. 명료한 바깥의 풍경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검은 실내가 인상적이다. 강민의 뒤틀린 기억을 따라가던 관객은 처음으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거미숲을 바라보게 된다. 숲으로 난 통유리창이 주는 아늑함과 부패한 시체에 걸린 거미줄을 보여주며 거미숲의 고통스런 과거를 대조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김철주 촬영감독은 이 장면에 거미숲의 촬영과 조명의 컨셉이 잘 드러나 있다고 설명한다. 스릴러엔 주관적인 트랙인이나 트랙아웃 등 카메라워크가 많
한국영화 명장면의 비밀 [2] - <거미숲> <달콤한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