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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평론가와 관객이 만장일치로 박수를 치는 영화란 드물다. 작가로서 스티븐 킹 자신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 소개한 베스트 영화 10편 목록은 일반의 예상과 달리 <샤이닝>이나 <캐리> 같은 작품이 빠져 있다. 다음은 스티븐 킹이 꼽은 자신의 원작 영화 베스트 10이며 순서는 시대순.
크리스틴
자동차는 괴물이다. 유약하고 겁많던 10대 소년이 ‘크리스틴’이라 불리는 빨강색 자동차를 갖더니 부모에게 대들고 학교에서 가장 예쁜 여자와 데이트를 한다. 자동차와 섹스를 하는 <크래쉬>에는 못 미치지만 <크리스틴>에 등장하는 자동차 역시 사춘기 소년의 리비도를 통제불능 상태로 몰고간다. 크리스틴은 숭배의 대상에서 기꺼이 강간당하는 여성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제공하며, 소년의 여자친구를 질투하고 소년을 조롱하던 건달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한다. “이제 로큰롤은 싫어”라는 마지막 대사가 뜻하듯, <크리스틴>은 기성 세대와
스티븐 킹, 그의 소설, 그의 영화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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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본트, 킹의 페르소나
<캐리> 이후 시작된 스티븐 킹과 할리우드의 밀월관계는 지금도 변함없다. 최근 개봉한 <그린 마일>만 해도 미국에서만 흥행수입 1억3천2백만달러를 넘어 킹 원작 중 가장 큰 흥행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킹의 원작을 영화화하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은 킹의 에이전트인 CAA에서 영화판권과 관련된 일을 대행하고 킹 자신이 각본 작업에 참여하는 일도 있지만, 킹의 소설이 막 주목받기 시작하던 70년대 후반만 해도 출판사 더블데이에서 영화판권 관련업무를 하면서 초보 작가 킹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팽고리아>와의 인터뷰에서 킹은 78년 무렵 단편집 <나이트 쉬프트> 영화판권이 영국 프로듀서 밀튼 서보츠키에게 팔렸고 이 책에 들어있던 <론머맨>이 그로부터 14년 뒤인 92년에 비로소 개봉했는데 개봉 3주 전에 영화화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개탄했다. 사실 킹의 작품 중 영화화된 것은 비교적 초
스티븐 킹, 그의 소설, 그의 영화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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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이웃에는 공포가 산다
<크리스틴>이란 영화가 있다. 스티븐 킹 원작 영화 중에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품이다. 한 고교생이 자신의 차에 지나친 애정을 가지게 되고, 차 역시 그 애정에 보답한다. 뻔한 이야기인데도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주 ‘리얼’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고교생에게 ‘차’란 바로 그 자신이다. 차가 있으면 드라이브도 할 수 있고, 자동차 극장에 가서 진한 키스나 그 이상도 할 수 있다. 자동차는, 멋진 여자아이를 꼬시기 위한 첫걸음이다. 미국 고교생의 신분은, ‘자동차’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틴>에는 그런 미국 고교생의 일상이 잘 드러나 있다. 차에 대한 지나친 애정.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그런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차가 애정을 호소해온다면? 이건 <크래쉬>가 아니다. 인간이 차에게 욕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변신’해서 왕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분출하는 이야기다. 그
스티븐 킹, 그의 소설, 그의 영화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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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치 같은 혹은 여성 같은
안석환
안석환(42)에게 <넘버.3>는 개성파 조연 배우 ‘NO.1’이라는 수식을 선사했을지 모르지만 스포트라이트는 항상 주연 배우 ‘NO 3’를 따라다녔다. <세기말>은 그에게 요요와 망치를 쥐어줬지만 대사는 한마디도 허락지 않았다. <텔미썸딩>도 마찬가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얼마 안 되는 대사를 전라도 사투리로 바꾼 것 뿐이었다. 그래도 ‘조연배우’ 안석환은 서운하지 않다. 촬영중인 김윤태 감독의 저예산 디지털 영화 <N>에서 주연인 택시기사 역을 맡고 있어서가 아니다. 지금도 산울림극장에서 연장 공연중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엑스트라 공 역을 맡아 450회 공연을 마친 ‘주연배우’ 안석환. 그에겐 7년 동안 써온 낡고 새까만 모자와 군화, 다 떨어진 의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무대가 있기 때문이다. ‘연극배우가 본업’이라는 안석환. 오후 5시가 되면 소극장으
조연배우로 산다는 것 [2] - 안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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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나니 같은 혹은 형사 같은
장항선
“잘 생긴데가 있나, 눈은 찢어지고, 광대뼈는 나오고. 딱 깡패로나 어울릴 상이지.”
1970년, 그래서 장항선(54)은 어렵게 들어간 방송사을 떠나 도망쳤다. “조금만 잘생겼더라면, 주인공은 고사하고 예쁜 여자와 손잡고 걷는 역 한번 해봤으면”하는 꿈을 접고, 오징어잡이 배를 가지고 있던 친구에게 밀항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어디가서 돈이라도 많이 벌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선남선녀, 미남 미녀만 필요로 하던” 당시의 분위기가 연기하는 배우가 되려했던 그를 강원도 속초 바닷가로 내몰았던 것. 친구의 간곡한 설득에 못이겨 3개월 만에 방송사로 되돌아간 장항선은 “일생에 한번밖에 없는 행운”을 만난다. ‘전설’의 드라마 <전우>였다.
장항선은 KBS에 입사하기 이전, 영화 촬영장을 전전한 배우, 배우 지망생이었다. 69년 5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극장에서는 겨우 ‘저게 내 발’이라며 생색을 내야 했고, 친구들로부터 ‘어디 나오
조연배우로 산다는 것 [1] - 장항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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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6 기록영화제작소 보임 설립, <낮은 목소리> 기획
9 일본 대사관 앞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참가 시작
9 ∼ 11 나눔의 집 취재와 예비촬영
11 촬영과 녹음 기자재를 일본 ‘오가와 프로덕션’으로부터 기증받음
12. 20 ∼ 4 <낮은 목소리> 국내 예비촬영 및 보충취재
12. 23 100차 수요시위, <낮은 목소리> 첫 촬영
1994.
3 <낮은 목소리> 100피트 회원 운동 시작
4 나눔의 집, 혜화동으로 이사
6 <낮은 목소리> 중국 무한 취재
8. 2 ∼ 11. 15 <낮은 목소리> 1차 국내 본촬영
11. 24 ∼ 12. 5 <낮은 목소리> 중국 촬영
12 ∼ 1 <낮은 목소리> 2차 국내 본촬영
1995.
1 ∼ 4 <낮은 목소리> 편집 및 후반작업
4 100피트 후원회원 마감 (총 175명의 100
1993∼2000 <낮은 목소리>에서 <숨결>까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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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을 보는 동안 우리는, 이 영화의 본질이 종군 위안부의 배상문제가 아니라 위안부였던 여성들이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 획득해가는 내적변화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랫동안 등굽힌 채 자기 안에만 가둬둠으로써 화석처럼 경직되었던 ‘슬픔’이란 명사를, 그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슬퍼한다’는 동사로 바꿔나간다. 그리고 이 변화를 통해 그들은 ‘슬퍼함’의 행위와 그 감정을, 타자와 공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간다. 이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슬픔은, 늠름하고 굳건하게 살아갈 힘으로 ‘반전’(反轉)되고 있다.
감독 변영주는 그 과정을 꾸준히 함께 하면서, 한결같은 자세로 그네들의 ‘슬퍼함의 행위’와 ‘슬픔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힘쓴다. 거기 있는 것은 안이한 동정이나 공감이 아니며, 분노의 공유나 사회정의도 물론 아니다. 슬픔을 공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들의 몫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저 진지하게 그 음성에 귀기울이자, 그것만이 지금의 내게 허락된 일이다…
1993∼2000 <낮은 목소리>에서 <숨결>까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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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동안의 진실찾기, 이제 다시 시작이다
1991. 7
도시빈민의 탁아 문제를 다룬 <우리네 아이들>에서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운동에 관한 <전열>까지 몇편의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촬영과 편집일을 하며 다큐멘터리 제작에 재미를 붙여가던 어느 날이었다. 내 앞에 거대한 벽 같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과연 다큐멘터리는 무엇일까? 세계영화사 책을 보면 최근까지도 다양한 종류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져온 것 같은데, 극장에서 그 영화 중 어떤 것도 본 경험은 없었다. 영화를 보는 것이야말로 영화를 배우는 최고의 교과서일 텐데.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던 것은 당시 한국과 일본의 영화교류의 가교역할을 하던 아오키 겐스케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일본에 온다면 무척 중요한 다큐멘터리 감독을 만나게 해줄 수 있다”라는. 그리고 1991년 7월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사무실을 찾아가게 되었다. 꿈같은 여섯 시간이었다. 자신의 20여년간의 작품활동의 변화와 방법론
1993∼2000 <낮은 목소리>에서 <숨결>까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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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다큐멘터리, 새로운 숨결이 들려온다
“이제 영주가 다큐다운 맛을 안 것 같다.” 한국 독립영화의 대부 김동원 감독은 변영주 감독의 <숨결>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만이 아니라 뭇평론가들이 흐뭇하고 대견한 시선으로 <숨결>을 바라보며, <숨결>에서 <낮은 목소리> 3부작 시리즈의 명장면을 발견했다. 같은 소재로 3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변영주 감독은 동어반복에 빠지지 않고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을 이루었다. <낮은 목소리1>이 앎의 의지로 충천해 역사의 무덤가에 불을 밝혔다면, <낮은 목소리2>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들의 개인사를 기술하기 위해 카메라를 불러들인 다큐멘터리였다. <숨결>은 시리즈의 정점에서 감독과 할머니들의 시선을 조화롭게 이어준다. <낮은 목소리> 연작은 편수를 보태가면서 할머니와 감독이 함께 성장해갔으며, 스스로 작품의 의미를 교정해갔다.
<숨결>
1993∼2000 <낮은 목소리>에서 <숨결>까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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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만들어야 했다”
도쿄 롯폰기에서 열린 <배트맨 비긴즈> 배우·제작진 기자회견
여름 장마를 방불케 하는 굵은 빗줄기가 내리치던 5월30일의 도쿄. 롯폰기의 그랜드 하얏트 호텔은 <배트맨 비긴즈>의 배우와 제작진을 만나려는 300명 가까운 취재진으로 들썩였다. 일본에서 할리우드영화의 대대적인 프리미어와 기자회견이 열리는 것은 아시아에서 가장 막강한 영화시장이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앞선 결정이겠지만, 일본 문화에 경도된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입김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적인 문화인 코믹북을 영화화한 <배트맨 비긴즈>의 월드 프리미어가 어째서 일본에서 열린 것인지 의아할 법한데,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런 거다. 배트맨의 기원을 찾아가는 <배트맨 비긴즈>에는 브루스 웨인이 마법사이자 무사인 라스 알굴(와타나베 겐)이 이끄는 자객단에서 ‘인간 병기’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설정이 있는데, 할리우드로 진출한
미리 보는 <배트맨 비긴즈> [3] -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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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의상과 소품과 세트엔 다∼ 이유가 있다
배트맨의 기원을 따져 올라가는 <배트맨 비긴즈>에는 설명해야 할 것투성이다. 브루스 웨인은 어쩌다 배트맨이 됐을까? 하고 많은 동물 중에 왜 하필 박쥐였을까? 검은 고무 의상은 어쩌다 입게 된 걸까? 새끈한 배트 모빌은 어디서 났을까? 누가 그를 곤경에 빠뜨렸을까? <대부>나 <스타워즈> 시리즈처럼 이야기의 가운데 토막에서 시작된 <배트맨> 시리즈는 다섯 번째 에피소드 <배트맨 비긴즈>에서 원점으로 돌아간다. “한번도 설명되지 않았던 아이콘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처음으로 돌아가 배트맨의 유래를 서사로, 비주얼로 만들어내는 것이 엄청난 부담과 노동이 수반된 작업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놀란의 <배트맨> 팀은 모든 것을 철저히 ‘리얼리티’에 기반해 세팅했다. 모든 의상과 소품과 세트엔 이유가 있어야 했
미리 보는 <배트맨 비긴즈> [2] - 비주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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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스타워즈>가 완결편을 내고 화려하게 퇴장하는 이즈음, ‘우린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라고 외친 시리즈가 있다. 팀 버튼과 조엘 슈마허의 손끝에서 모두 네편의 에피소드를 풀어냈던 <배트맨> 시리즈는 태초의 진공으로 돌아가, 이제 어떻게 배트맨이 탄생하고 진화하게 됐는지를 이야기할 참이다. 그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서 배트맨 월드의 창세기를 빚어낸 이는 <메멘토> <인썸니아>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엑스맨>의 브라이언 싱어와 <스파이더 맨>의 샘 레이미에 이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수혈된 독립영화계의 젊은 스타 놀란은 자신의 전작들과 친연성이 없어 보이는 <배트맨 비긴즈>에 어떻게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녹여넣었을까? 그가 만든 <배트맨 비긴즈>는 시리즈의 이전 작품들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비주얼 컨셉으로 태어났는지를 이야기해본다. 또한 5월3
미리 보는 <배트맨 비긴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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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의 4단계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해보겠다”
<유니언>의 김자연 감독
모이스 루이스의 흘러내리는 도상이나 프랭크 스텔라의 무한히 연장되는 선과 캔버스를 즐기는 관객이라면 애니메이션 <유니언>(Union)은 적당한 선택이 될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경향이 뚜렷한 배경 위에 팝아트의 카툰 이미지나 모바일 게임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가 무대 위에 세워지며 <유니언>은 여정을 시작한다. <유니언>은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2D애니메이팅으로 그려내지만, 선과 면만으로 3D의 입체적 공간감을 넘나드는 변용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위해 <유니언>은 인물의 동선과 공간을 자유롭게 치환한다. 이러한 두 대상을 잇는 주된 이음매가 바로 사운드다. “처음에는 왈츠를 생각했고, 여러 곡이 작곡되었다가 결국은 현재의 최소화되고 절제된 형식으로 결정되었다”는 <유니언>의 사운드는 미니멀한 이미지의 구슬
인디포럼2005의 발견 [4] - <유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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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영화의 새로운 구조다”
<실종자들>의 민제휘 감독
천년 묵은 이무기는 용이 되려 하고, 정체불명의 지하집단은 이를 막으려 하며, 주인공은 어느 날 집을 나서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찾기 위해 실종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방송사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한다. 이상은 영화가 시작된 뒤 러닝타임의 3분의 2 정도에 해당하는 시간이 흐를 때까지 진행되는 <실종자들>의 줄거리. 그렇고 그런 말장난과 서툰 비유로 가득 찬 듯 산만하기만 한 이 영화가 보는 이의 뒤통수를 치는 것은, 지하철역 플랫폼에 멍하니 서 있던 주인공이 엄마처럼 보이는 여자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주인공은 지하철에 오르는 그녀를 미처 잡지 못하고, 이무기를 반대하는 지하집단의 누군가가 석유가 가득 찬 통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른다. 플랫폼에 그가 흘린 석유에선 어느새 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끊임없이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파악할 수 없는 실체의 주변을 맴돌던 영화는, 그렇
인디포럼2005의 발견 [3] - <실종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