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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소수로 남을 수 있을까
다시, <씨네21>에 대해 말하고 싶은 열두 가지 것들
1. 정확히 9년 전, <씨네21> 창간 1주년을 맞아 나는 위 제목의 글을 ‘특별기고’했다(<씨네21> 100호 특별기고, 내가 <씨네21>에 대해 말하고 싶은 열두 가지 것들). 그리고 이제 10주년 기념호를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축하나 덕담에 앞서서, 더이상 내가 9년 전처럼 열심히(!) <씨네21>을 읽지 않는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우편으로 배달되기까지의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서” 정기구독을 하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정기구독을 하기 때문에 그나마 <씨네21>을 매주 만나고 있는 형편이다.
2. 그렇다면 왜? 물론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의 변화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종이에 씌어진 글씨보다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글씨를 읽는 데 훨
<씨네21>을 비판한다 [2] - 김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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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되고 살이되는 批判 6言
창간 10주년을 맞아 감독, 제작자, 기자 여러분께 쓴소리를 듣겠다고 하니 흔쾌히 허락하는 분이 없었다. 깊은 애정과 관심이 없다면 힘들 일이고, 애정이 깊다고 하더라도 그걸 글로 쓴다는 건 별개의 일이다. 일개 독자인 내가 왜 그런 걱정도 모자라 글을 쓰는 수고를 끼쳐야 하느냐는 것이 많은 분들의 푸념이었다. 주제넘게 바쁜 분들을 책상에 앉히고 채근하고 잔소리하는 악역을 기꺼이 맡았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 분들에 대한 애정이야말로 <씨네21>의 근거다. 이분들의 걱정과 질책은 우리가 가장 먼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말이라고 믿는다. 구색맞추기 아니냐는 귀여운 힐난도 있었지만, 창조적 소수로 남을 날이 오리라는 것도 각오하라(김홍준), 산업과 관련한 문제의식이 지난 10년간 영화계에 비해 가장 뒤처져 있다(오기민)는 값진 충고를 또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실패한 영화의 미덕도 볼 줄 알라(이준익), 단 한번이라도 감독의 마음을 이해하는 문장을
<씨네21>을 비판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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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영화로 치환되는 패전의 역사
이같이 제3세대형 전쟁영화 <로렐라이>는 노스탤지어 영화로서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는 향수를, 가상역사영화로서 점령기를 겪은 전후세대에게는 자부심을, 전쟁이 먼 나라 이야기인 신세대에게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의 쾌감을 주며 국가주의를 주입 및 재교육시킨다.
과거의 전쟁영화와 비교해볼 때 <로렐라이>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부터 지킨다는 슬로건이다. 진주만 공습은 빼먹고 히로시마 원폭에서부터 스토리를 풀어가는 이 영화에서 일본 제국군의 이미지는 일본 헌법 9조에 의해 군수방위만 허락되는 자위대의 그것과 자연스레 겹친다. 마사미 함장의 캐릭터도 가부장적인 상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협력을 끌어내는 리더로 설정되어 있고 휘하의 군인들도 전체로 취급되기보다는 개성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어 구일본군은 꽤나 자유 민주주의적인 단체로 그려진다.
또 다른 변화는 엘리트주의를 부정하고 보통사람들
일본 극우영화 <로렐라이> [2] - 전쟁영화 라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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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한 선전영화, 일본을 홀리다
일본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독도문제와 역사왜곡 교과서 문제가 시끄러운 요즘, 일본의 우경화를 근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한·일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욘사마 열풍으로 한-일간 문화교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한 요즘, 일본 우익세력이 날뛰는 우울한 소식을 매일 접하는 것은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다. 일본에서 지난 3월5일 개봉한 전쟁영화 <로렐라이>가 관심을 끄는 것도 이런 정치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단순한 극우영화라고 단정하기 힘들지만 <로렐라이>가 보여주는 어떤 태도는 적지않은 위험을 안고 있다. 일본에서 <로렐라이>를 보고 현지 분위기를 관찰한 영화학도 김려실씨는 <로렐라이>가 패전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조작하는 교묘한 선전영화라고 말한다. 과연 <로렐라이>가 어떤 영화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한국에서 8·15는 광복절이지만 일본에서 이날은
일본 극우영화 <로렐라이> [1] - 제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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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자라지만 뉴질랜드여, 안녕
8월24일/ 한국행 비행기 안
결국, 뉴질랜드에서 촬영하기로 했던 장면 중 5% 정도를 찍지 못한 채 이곳을 뜬다. 변덕스런 날씨는 마지막 날까지도 우리를 괴롭혔지만, 키위들은 그래도 우리가 운이 좋은 편이란다. 이제 반환점을 돌았지만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뉴질랜드 촬영 쫑파티 때 NZFX의 제프와 한국쪽 특수효과팀 경수가 합심해서 만들어낸 환상적인 불꽃놀이가 떠오른다. <반지의 제왕>과 <라스트 사무라이>를 해낸 그들은 훌륭하게 남극의 자연효과를 재현해줬다. 타이틀 시퀀스에 들어갈 대원들의 행군장면을 헬기로 촬영할 때 오렌지색 구름 뒤로 모습을 보였던 무지개도 머리를 스친다. (봉)준호 형은 <살인의 추억>을 찍을 때 본 무지개에 미신적인 기대를 가졌다는데. 나 역시 그 무지개를 행운의 무지개로 맘속에 새기고 있다. 그 행운이 앞으로의 촬영을 순조롭게 만들어주길 바라며, 뉴질랜드여… 안녕!
세트라서 쉬울
<남극일기> 제작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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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만국공용어?
6월25일/ 마운틴 라이포드
<올드보이>의 마지막 장면을 비롯해서 전지현이 나오는 디카 광고까지 찍었다는 마운틴 라이포드. 마지막 헌팅 때까지만 해도 완벽한 설산이었던 곳이 눈이 다 녹아서 민둥산이 되어 있다. 팀의 막내인 민재가 리더인 도형의 엄청난 과거를 알게 되고, 근찬의 발은 동상으로 썩어들어가는 등 대원들이 점점 심리적·육체적 한계에 도달하는 듀피크 정상을 찍어야 하는 곳인데, 아무래도 원하는 풍경을 찾기 힘들어 보인다. 대안이라면 산자락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방법 정도? 그러나 뉴질랜드 스탭들은 여건상 촬영이 어렵다며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따져묻자, 침착한 대답이 돌아온다. 장비의 이동과 전력문제. <태극기 휘날리며> 조연출 출신인 조감독 환희는 강원도 산꼭대기까지 수많은 짐을 지고 올라가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는데, 운동을 그렇게 싫어하는 나조차 직접 옮길 수 있을 정도의 짐이건만 헬기를 불러야 한다
<남극일기> 제작기 [2] - 한국 스탭 vs 뉴질랜드 스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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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가을. 임필성 감독은 무보급 남극 횡단에 도전했다 좌절한 허영호 대장의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접한 뒤, 한계상황에서 원형의 욕망을 드러내는 탐험대원들의 이야기를 구상했다. 그는 이미 지난해 6월 말, 5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데뷔작 <남극일기>의 촬영을 앞둔 떨리는 소감을 <씨네21>에 보내온 바 있다. 그리고 다시 1년. 칠전팔기 끝에 촬영에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라 굳게 믿었던 임필성 감독은 예상치 못했던 좌절을 연이어 겪으며 고난의 행군을 이어왔다. 작업환경과 스타일이 전혀 다른 뉴질랜드 스탭과의 불화와 화해, 철두철미한 준비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뉴질랜드의 기상변화, 광활한 자연을 세트장 안에 고스란히 재현해야 하는 어려움 등 모든 것은 도달불능점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영화 속 탐험대의 여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숱한 눈보라와 화이트아웃 상황을 지나 이제는 CG와 믹싱 등 마지막 후반작업에 여념이 없는 임필성 감독. 그가 5월1
<남극일기> 제작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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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9일과 3월14일,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미션 임파서블’을 달성했다. 이 영화들을 관람 가능한 15살 이상 인구의 27%에 해당하는 전국관객 1천만명을 동원한 것. 특정영화를 보지 않으면 대화에 참여할 수 없다는 식의 국민적 분위기가 형성된 결과 2월 한달간 한국영화 점유율이 82.5%로 최고를 기록했다. 이같은 결과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멀티플렉스와 엄청난 물량을 투여한 볼 만한 대작임을 강조했던 마케팅에 힘입은 바가 컸다. 민감한 소재를 다룬 영화(<실미도>)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자 역사적 사실이 다시금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고, 일찍이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스펙터클(<태극기…>)을 목격한 관객은 한국영화를 할리우드영화와 대등한 것으로 여기게 됐다. 영화계 전체에서는 스크린 독점과 덤핑 의혹 등도 있었지만 한국영화 관객의 층을 한결 넓혔다는 점에서 장기적 성과를 인정받았다. 2002년 블록버스터영화들의 줄지은 참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11] -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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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올드보이> <장화, 홍련>. <씨네21>이 선정한 그해의 한국영화가 아니다. 전국관객 300만명 이상을 동원하면서 2003년 한국영화 흥행 5위 안에 포함된 영화들이다. 이는 변형된 조폭코미디 <가문의 영광>이 서울 160만명을 동원하면서 2002년 최고 흥행작이 되었던 것과는 분명 다른 현상이었다. 시나리오부터 촬영, 연출, 연기, 미술 등 제작 전반에 걸쳐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에 투철한 작가정신이 결합한 수작들이 양산되어 관객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킨 탓에 2003년 한해는 제작자와 관객, 그리고 영화저널 종사자들 모두에게 행복한 한해가 됐다. 실제로 이해 연말 <씨네21>이 설문을 돌린 제작자 10명 중 8명이, 한국 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변화로 웰메이드 영화의 성공을 꼽았다. 상업영화의 당연한 미덕에 불과한 웰메이드가, 한국영화의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10] -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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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예술성을 세계에 알린 해였다. 그동안 꾸준히 3대 영화제에 발을 들여놓던 한국영화는 2002년 들어 연이어 쾌거를 이뤘다. 2000년 <춘향뎐>에 이어 <취화선>으로 두 번째 경쟁부문에 진출한 임권택 감독은 제 55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영화제 후반에 시사를 하는 영화들이 주로 수상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례에 따라 수상 예감은 이미 팽배했다. 폐막식 하루 전날 공식 시사를 가진 <취화선>은 “매혹적인 추상의 경지로 인도하는 정확한 연출의 소유자”라는 현지평과 함께 지난 세월의 노고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제 수상은 한국영화의 수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역시 5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주요 부문을 수상함으로써 축포를 이어갔다. 비공식 부문 4개 부문을 비롯, 이창동 감독이 감독상을, 여자주인공 문소리가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2002년의 영화
홍상수의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9] -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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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은 한국영화 관객점유율이 50%를 넘어선 기록의 해였다. 2000년의 35.1%에 비하면 약 15% 성장한 괄목할 만한 수준이었다. 한국영화 관객 수도 4481만명으로 전년도 2271만명에 비해 두배 정도 늘어났다. <친구>와 <엽기적인 그녀>의 흥행 대박에 큰 힘을 얻었고, 흥행 5걸 안에 들어 있는 조폭영화들의 선전도 한몫을 했다. 한국영화의 상승폭이 두드러진 만큼 직배영화의 하락폭이 뚜렷했다. 직배영화의 관객점유율은 전년도 64.9%에 비해 15% 떨어진 49.9%였고, 관객 수도 2천만명 이상 하락했다. 한국영화 관객점유율 상승세의 원인은 우선 우후죽순처럼 문을 연 멀티플렉스들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 CGV가 12월19일 기준 1300만명의 관객을 돌파한 것으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급작스런 지형변화가 몰고올 흥행 양극화와 독과점 현상, 제작비와 마케팅비 상승 등에 대해 우려하는 의견도 많았다.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8] -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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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에 디지털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사용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한해였다.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가 마련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에 각각 충무로와 실험영화를 대표하는 박광수, 김윤태 감독이 중국영화 감독 장위안과 함께 참여했다. 영화제용 디지털영화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박철수 감독은 <봉자>로, 임상수 감독은 <눈물>로 디지털 영화제작의 상업적 일반화를 시도했다. 남기웅 감독의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는 디지털 제작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또 다른 저예산 프로젝트의 예였다. 한편, (주)씨네포엠이 주최한 인터넷 단편영화 상영 프로젝트에는 세명의 젊은 감독이 참여했다. 8월7일 <커밍아웃>(김지운), 9월20일 <극단적 하루>(장진), 12월12일 <다찌마와 Lee>(류승완)로 이어졌고, <다찌마와 Lee>의 경우 조회 수 18만번에 이르렀다.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7] -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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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게 뭐야?” 1월14일, 전국의 50여개 극장에는 권총 든 한석규의 전신 사진이 실린 <쉬리>의 대형 스탠디가 배치됐다. 영화홍보용 입간판을 말하는 스탠디는 그때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전유물이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50분의 1도 안 되는 제작비로 만들어진 한국영화가 극장에 거금을 들여 스탠디를 세운다는 건 상상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쉬리>는 똑같이 했다. 얼마 뒤, ‘1999년 1급 프로젝트’라는 <쉬리>의 홍보 문구는 거짓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좀처럼 깨지지 않을 것 같던 <타이타닉>의 흥행 기록을 <쉬리>가 뛰어넘으면서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 있음을 영화인들은 목격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기이한 범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1998년은 강제규 감독의 말처럼 “10억원을 들여 30억원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30억원을 들여 5억원을 벌어야 하는”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홍콩영화의 퇴조는 아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6] -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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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한국영화는 스크린쿼터 축소 위협으로 풍전등화 위기에 처했다. 국민의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탈출을 위해 미국과의 경제협상에 안간힘을 썼고, 스크린쿼터 축소는 대미협상 타결을 위한 미끼로 매번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7월에는 한-미투자협정을 진두지휘하던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쪽 입장을 대변하다 영화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얻어맞았다. 미국은 3월31일 한-미 통상협의체회의에서 한국영화를 일정기간 의무상영하도록 하는 것은 세계무역기구의 내국민대우 규정에 위반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시작으로, 쿼터를 줄여주면 한국의 극장업계에 5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하는 등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던져댔다.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는 “스크린쿼터 현행유지에는 변함없다”는 말을 여러 번 되뇌었지만 영화인들에게 신뢰를 안겨주지 못했다. 여기에 서울시극장협회가 8월18일 스크린쿼터를 현행 146일에서 86일로 줄여달라는 공문을 문화관광부에 보냄에 따라 영화계 안에서도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갈등이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5] - 19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