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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사전심의는 위헌이라고 일러줬지만, 가위든 자들은 귀머거리였다.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가 “동성애를 주제로 한 영화”라는 이유로 수입되지 못했고,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는 “아이 아버지 이름은 김영삼”이라는 대사를 자진 삭제한 다음에야 개봉이 가능했다. <나쁜 영화>도 지루한 싸움 끝에 두 장면을 직접 걷어내고 극장에 걸렸고, <억수탕>은 곳곳에 ‘보카시’ 처리를 해야 했다. 새 영화진흥법이 발효되고 공륜을 대체한 공진협이 10월부터 심의 업무를 떠맡았지만 수십년 버릇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11월5일, 서준식씨는 제주 4·3항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혐의를 받아 체포됐다. 알아서 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삼성이 주최한 제2회 다큐멘터리영상제에선 중국과의 무역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주최쪽의 판단에 따라 개막작 <태평천국의 문> 상영을 취소했고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4] -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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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김미희 | 좋은영화 대표
2004 21위 | 2003 16위 | 2002 10위 | 2001 48위
오정완 대표와 함께 ‘포스트 차승재’ 시대의 주역으로 꼽히던 그가 40위권으로 추락한 것은 <아라한 장풍대작전> <여선생 vs 여제자> <발레교습소>가 예상보다 낮은 성적을 기록한 탓일 터. 시네마서비스의 우산에서 나와 독자노선을 꾸리던 그에게 요즘은 시련기다. <혈의 누>는 “꾸준히 중요한 영화를 내놓는 제작자”인 그의 명예회복을 위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42. 전지현 | 배우
2004 25위 | 2003 42위 | 2002 43위
전지현에겐 여전히 월드스타로서의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국내에선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얻었던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가 정작 홍콩과 일본에서 호응을 얻은 점만 봐도 그렇다. 정우성과 함께 캐스팅된 유위강 감독의 <데이지>는 꾸준히 제기된 연기력의 문제와 세계적 지명도
2005 충무로 파워 50 [6] - 41위~5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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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문근영 | 배우
첫 진입
충무로에서 캐스팅을 논할 때 “일본에서 장사하려면 배용준, 국내에선 문근영”이란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문근영은 단 세 작품으로 ‘국민배우’로 떠올랐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걸리게 하는 깜찍한 외모와 그 또래다운 영화 속 이미지, 그리고 모든 이의 마음을 녹이는 숨은 선행에 이르기까지 문근영의 흠은 찾기가 힘들다. 신작 <댄서의 순정>은 문근영이 10대 타깃 영화를 넘어설 수 있을지 가늠하는 척도가 될 전망이다.
32. 안성기 | 배우
2004 47위 | 2002 40위 | 2001 27위
1980∼90년대 한국영화라는 나무의 꽃이었던 그는 이제 든든한 밑둥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실미도> <아라한 장풍대작전> 등에 조연으로 나오길 서슴지 않으며,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대책위’의 공동위원장을 맡아 “오래된 산업화의 멍석”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영화계
2005 충무로 파워 50 [5] - 31위~4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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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설경구 | 배우
2004 15위 | 2003 12위 | 2002 23위
<실미도>를 건너 <역도산>을 넘고 <공공의 적2>를 무찌른 설경구의 다음 작품은 멜로영화다. 그로선 첫 ‘정통 멜로’가 될 전망. 이번엔 몸무게를 늘릴 차례일까, 라는 궁금증이 생길 정도로 그는 영화를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아왔다. 차기작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설문이 진행됐음에도 높은 평가를 받은 데는 그만큼 헌신적인 연기자가 드물다는 뜻일지 모른다.
22. 김기덕 | 감독
2004 24위 | 2003 50위 | 2002 28위
지난해 베를린과 베니스를 휩쓸었던 그는 신작 <활>로 올해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진출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지난해 전세계적으로 860만달러 이상의 수입을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의 오랜 푸대접에 반발심을 표출하고 있지만, ‘한국 영화계가 보유한 보물이자 진정한
2005 충무로 파워 50 [4] - 21위~3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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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광섭 | 롯데시네마 대표
2004 31위 | 2003 22위
롯데시네마의 기세가 무섭다. 영화계 진출을 선언한 2003년 이후 소극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던 롯데가 공격적인 확장노선을 펼치고 있는 것. 롯데의 거침없는 행보는 우선 극장에서 드러난다. 최근 서울 도심에 ‘명품 영화관’을 지향하는 에비뉴엘관을 연 데 이어 서울을 중심으로 스크린 수를 대폭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롯데의 생각대로라면 현재 15개 극장 118개 스크린은 올해 말까지 28개 극장 203개 스크린으로 거의 두배 가까이 늘어나고, 2008년까지 450여개 스크린을 확보하게 된다. 투자·배급 부문 또한 대폭 확충해 이미 개봉한 <B형 남자친구>를 포함해 8편의 한국영화를 배급하게 된다. 특히 이중에는 임권택 감독의 신작 <천년학>도 들어 있어 롯데의 의지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게 한다. 롯데가 CJ, 쇼박스와 함께 3강 체제를 꾸리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12. 이승
2005 충무로 파워 50 [3] - 11위~2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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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동호 | CJ엔터테인먼트·CJ CGV 대표
2004 4위 | 2003 9위 | 2002 15위
CJ 독주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인가. 박동호 CJ엔터테인먼트·CJ CGV 대표가 8년 아성의 강우석 감독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충무로에서 CJ의 파워를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외형적으로 투자에서 배급, 제작, 상영에 이르기까지 수직적 통합을 이뤄냈을 뿐 아니라 싸이더스, 영화사 봄 등 탄탄한 제작사와의 제휴, 프리머스 인수 등 내실면에서도 충무로의 절대자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했기 때문. 극장체인 CGV 또한 현재 확보하고 있는 29개 극장의 233개 스크린 외에 올해도 6개 극장 46개 스크린을 늘릴 계획이다. 특히 최근 시네마서비스에 150억원을 투자키로 한 결정은 CJ의 절대파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CJ의 발걸음은 국내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일본의 초대형 미디어기업 가도카와와 제휴를 맺었고, 중국시장을 노크하고 있으며, 미국시
2005 충무로 파워 50 [2] - 1위~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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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국 영화산업을 이끄는가
대기업과 스타감독과 배우의 상승, 충무로 자본과 프로듀서의 하락. 2005 충무로 파워50의 결과는 현재 한국 영화산업의 지형도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횟수로는 11번째이며, 순위를 매긴 것으론 9번째에 해당하는 2005 파워50에서 가장 놀라운 결과는 ‘파워 넘버원’의 교체다. 1997년 이후 내리 8차례 1위를 기록했던 강우석 감독이 한 계단 내려앉은 대신 CJ엔터테인먼트의 박동호 대표가 최초로 ‘권력교체’에 성공했다. 이는 대기업 자본의 ‘파워 업그레이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쇼박스와 롯데시네마 관계자들의 순위가 지난해보다 급상승한 결과는 CJ-쇼박스(오리온 그룹)-롯데의 ‘신3강’ 체제가 구축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박찬욱, 강제규, 봉준호 등 감독들과 송강호, 배용준 등 배우의 대거 진입 또한 감독 파워와 스타 파워가 커져만 가는 충무로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특히 배우는 11명이 올라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반면에 제
2005 충무로 파워 50 [1] - 설문참가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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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 “우리 형님으로 포장을 해달라니까”
1999년 7월, 모 감독 형제 찾아와 협박
“우리 형님으로 포장을 해달라니까요!” 그들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온 것은 오전 11시경, 찾아오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몇 시간 뒤 정말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그들이 화가 난 건 한 배우의 인터뷰 기사 때문이었다. 어떤 영화의 촬영장에서 만난 그는 <씨네21> 기자에게 자신이 출연한 다른 영화를 가리켜 “내가 출연했다고 무조건 좋은 영화라고 하진 않는다. 촬영할 때부터 실망스러웠고, 작품에 애정도 없다”고 했는데, 이 표현이 해당 영화를 연출한 감독과 그 동생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문제는 이 배우가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한 데서 시작됐다. 졸지에 없는 말을 지어낸 꼴이 되어버린 <씨네21>에 정정 보도를 의뢰하러온 이들은, 절충안으로 감독의 포장, 즉 표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최보은 취재팀장과 김영진 기자가
<씨네21> 10년 사건과 실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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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보은아, 나 죽고 싶어”
1995년 4월, 창간하자마자 개편 들어간 사연
1995년 4월24일, <한겨레>를 떠나 ‘야인’으로 지내던 최보은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보은아, 나 죽고 싶어.” 친구이자 동료인 <씨네21> 조선희 편집장이었다. 축배라도 들고 있을 줄 알았던 조 편집장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사람 같았다. 임진각에 있던 최보은씨는 만삭의 몸으로 한겨레신문사 앞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신문사 앞 갈빗집에 들어서자, 조 편집장은 넋나간 사람 모양 널브러져 있었다. 권근술 <한겨레> 사장이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고, 뒤늦게 합류한 최보은씨는 “창간호가 나온 것만으로도 업적”이라며 치어리더처럼 뛰어다녔지만, 납덩이 같은 분위기를 띄울 수는 없었다.
그날 아침, <씨네21> 창간호가 나왔더랬다. 기대 이하였다. 조선희 편집장은 “낯뜨거울 정도로 후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사이
<씨네21> 10년 사건과 실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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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이 10주년을 맞았다. 10년의 세월, 500권의 잡지로 남은 지난 3500일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1995년, 한국에서 영화주간지가 되겠냐는 회의와 불신 속에서 첫발을 내디딘 창간 준비팀의 고투는 말할 것도 없다. 영화 저널과 기자의 한계, 취재원과의 관계, 잡지의 노선, 시장성에 대한 고민 속에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고달프고도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그간 잡지를 만들면서 우리가 어떤 사건사고를 저지르고 또 당했는지, 이제 그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한다. 진지한 성찰과 겸허한 반성을 기대하신 분들께는 다소 얄팍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냥 함께 웃고 떠들고 탄식하면서, <씨네21> 취재와 마감의 비하인드 스토리, 그 추억을 나누었으면 한다.
<씨네21> 10년 사건과 실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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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장관이었다. 6천여명에 달하는 거대 인파가 개막식장인 부산 수영만 야외극장으로 모여들었다. “13일의 금요일”이라는 수군거림은 기우였고, 9월13일은 “한국 영화사 최대 길일”이 됐다. 시네필들의 환호 속에 마이크 리의 <비밀과 거짓말>이 눈을 떴고, 27개국에서 날아든 170여편의 영화들이 9일 동안 연달아 기지개를 켜는 동안, 남포동 극장가는 넘쳐나는 관객으로 매일 흥청거렸다. 총관객 수 18만4071명. 매표 수익은 애초 기대했던 3억원을 훨씬 뛰어넘는 4억5천만원이나 됐다.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미지의 영화들과 조우한 관객의 함성은 부산을 찾은 외국 게스트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축제는 밤에도 이어졌다. 특히 해운대 앞 포장마차는 코리안 펍의 대명사가 됐고, 김동호 집행위원장은 좌판에 자리깔고 앉은 파란 눈의 외국인들에게 소주잔 돌리기 바빴다. 관객의 부산영화제 애호증은 식지 않았다. 올해 10회 행사를 앞두고 지금까지 부산국제영화제를 다녀간 이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3] -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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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탄생 100주년을 대한민국처럼 뜨겁게 기념한 나라는 없었다. 영화를 예술로, 영상문화를 대중문화의 심장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탄생한 새로운 영화잡지들은, 그들을 낳은 흐름에 가속도를 보탰다. 영화잡지 시장은 5월 창간된 <씨네21>과 <키노>, 12월에 첫호를 낸 <프리미어>로 인해 재편됐다. <씨네21>은 <한겨레>의 저널리즘적 감각으로 영화광 문화를 폐쇄회로에서 끌어냈고 <키노>는 비타협적인 작가주의 비평의 관점을 견지했으며 <프리미어>는 국내 유일의 라이선스 영화잡지로서 사진과 할리우드에서 직송된 기사를 장점으로 내세웠다. 새로운 잡지들은 10대에 편중된 영화잡지 독자층을 30대 너머로 확장했고 감독과 제작자를 대중문화의 스타로 만들었다. 영화는 강의 리포트에서 일상대화까지 대학가 문화의 중심에 파고들었다. 영화예술에 대한 갈증은 창작과 배급 부문에서도 답을 찾았다. 국립영상원이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2] -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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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2004 한국영화의 불타는 연대기
“가수 김광석이 죽었다. 김광석이 활짝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을 보고 감독 허진호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촬영감독 유영길의 유작이 됐다. 유영길은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눈을 갖고 있었다고 빈소에서 감독 이창동은 말했다. 이창동에게 메가폰을 들려준 건 제작자로 변신한 배우 명계남이었다. 스크린쿼터 집회에서 명계남은 명사회자로 통했다. 스크린쿼터 집회에는 감독 임권택도 빠지지 않았다. 임권택이 정부에 항의하며 삭발하던 날 배우 전도연은 울먹거렸다….”
지난 한국영화 10년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네버엔딩 스토리다. 한번 들어서면 출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졌고, 잊혀졌고, 다시 살아났다. 스크린쿼터는 바람 잘 날 없었고, 각양각색 전주(錢主)들이 으르렁거렸고, 덩치 큰 메이저 영화사들이 탄생했고, 무엇보다 3천편 이상 되는 영화들이 극장에 내걸렸다.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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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시내 라이트> Cine Lights
제작 남동철
감독 손홍주, 이종도
출연 안성기, 문근영
시나리오 이종도
진행 박혜명
옌볜어 교정 문근영
촬영·미술 손홍주
편집 박초로미
조명·세트 문성일, 김민주(디자인 이즈)
스타일리스트 이정민(안성기), 고민정(문근영)
의상협찬 이도, Lyle & Scott, Perry Ellis, 니체 이태리(이상 안성기) 시슬리, 레니본, 96ny(이상 문근영)
헤어 및 메이크업 이정민, 이지영(이상 안성기) 민지현(엘트레), 이희경(엘트레)(이상 문근영)
매니저 이바름(안성기), 한돈섭(문근영)
<시내 라이트> [4]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