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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전환이 시급한 계약직 과장 연희(류현경)에게 신경을 거스르는 일들이 계속 발생한다. 인사 평가가 코앞인데 프로젝트는 삐걱거리고, 유부남인 상사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치근덕거린다. 가장 심한 것은 지속적으로 주차 공간을 침범하는 이웃이다. 도통 해결되지 않는 주차 문제에 폭발한 연희는 차주를 불러내지만 그의 앞에는 수상한 남자 호준(김뢰하)이 등장한다. <주차금지>는 층간소음과 함께 대한민국의 인구 과밀 현상을 여실히 드러내는 주차 대란을 소재로 삼은 스릴러물이다. 사소한 이웃간의 다툼으로 끝날 문제가 뜻밖에 악인을 만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담아냈다. 현실감을 무기로 앞세우는 스릴러일수록 일상과 유리되지 않도록 밀도를 유지해야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개연성에 공백을 보이는 인물의 행적이 서스펜스를 유도하기엔 느슨하단 인상을 준다. 서사의 중심축을 지탱하는 류현경과 김뢰하의 능숙한 호연에 눈이 간다.
[리뷰] 주차도 언행도 결국 선을 잘 지켜야 한다, <주차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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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닌(어맨다 사이프리드)은 죽은 스승 찰스의 대표작인 오페라 <살로메>의 재연을 맡아 고민이 많다. 위대하지만 구시대적 요소가 많은 찰스의 작품에 손대기 어려운 까닭이다. 가장 큰 문제는 준비 과정에서 계속해서 아버지에게 받은 트라우마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별거 중인 남편은 마음이 떠난 것 같고, 어머니는 알 수 없는 말만 반복하며, 작품을 표면적으로만 접근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아쉽게 느껴지는 총체적 혼란 속에서 제닌은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 <세븐 베일즈>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감독 애텀 이고이언의 신작으로, 실제로 <살로메>를 연출하며 받은 영감이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선율로 결합된 이 오페라가 무대에 오르는 과정을 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로부터 빠져나오려 애쓰는 모습도 그 어떤 희곡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리뷰] 방도를 몰라 사랑할 수밖에 없던 내 트라우마, 이제 그놈의 목을 원한다, <세븐 베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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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스테파니(케이틀린 산타 후아나)는 오랜 시간 정체 모를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그 꿈에서는 50년 전 붕괴된 마천루 위의 레스토랑 스카이뷰가 무너져 수많은 사람이 죽는 과정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스테파니는 꿈의 주인공 아이리스가 자신의 외할머니라는 사실을 알아낸 후 그녀가 사는 곳으로 간다. 아이리스(브렉 베이싱어)는 스테파니에게 가족의 혈통에 얽힌 저주를 알려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은 2000년대 초에 유행한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의 신작으로 14년 만에 제작되었다. 오프닝을 장식하는 스카이뷰 시퀀스에서 드러나듯 데드 트랩의 활용에서 생기는 서스펜스와 창의적인 죽음이 안기는 쾌감을 극대화하는 시리즈의 정체성을 계승한다. 끝까지 고어의 강도를 올리기보다 적당하게 강약을 분배하는 전개가 인상적이다. 이전과 달리 가족 서사가 더해진 점에서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리뷰] 이쯤되면 <위기탈출 넘버원>도 어린애 장난, 동전만 봐도 손이 덜덜,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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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인공지능 엔티티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었다. 자신을 숭배하는 종교를 만들고 핵보유국의 핵 발사 시스템을 해킹해 인류를 제거하려고 한다. 에단 헌트(톰 크루즈)는 엔티티를 제거할 수 있는 장치를 찾기 위해 심해에 침몰한 잠수함 세바스토폴로 진입하는 불가능한 임무를 감행한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72시간뿐이다.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은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의 속편으로 4억달러에 육박하는 예산이 투입되었다. 영화는 작품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전반부와 비행기와 잠수함 등 세트에서 배우 톰 크루즈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강도 액션이 휘몰아치는 후반부로 나뉜다. 기술 문명을 둘러싼 종말론적 시선이 드리워져 있는 점과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설정을 소환해 시리즈의 역사와 윤리를 회고하는 느낌을 주는 점이 인상적이다. 다만 서사 전개가 다소 매끄럽지 않고 액션도 배우의 스턴트에 의존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리뷰] 영화 역사상 최후의 블록버스터를 찍는 듯한 간절함에 눈물만,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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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가 되어 세계를 구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유타에게는 유치한 망상이 아닌 현실이다. 한 차례 괴수를 물리치고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돌아온 그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 학교 축제날에 맞춰 고백을 결심하지만 또다시 괴수들이 출몰하며 그의 계획을 방해한다. 운명의 선택을 받은 소년은 설레는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세계의 균형을 수호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고백도 못해보고 세계 종말을 맞이할 순 없다. <그리드맨 유니버스>는 <SSSS. 그리드맨>과 <SSSS. 다이나제논>의 세계관을 멀티버스 서사로 엮은 특수촬용물이다. 글리치로 묘사되는 다중우주의 붕괴가 극중극 구조와 맞물리며 메타 픽션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곤 사토시에 버금가는 진중한 사유로 나아갈 수 있음에도 영화가 액션·청춘물로 회귀한 점은 아쉽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유사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리뷰] 오직 너를 만나기 위해 공룡이 멸종했어, <그리드맨 유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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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거래 사기로 바이크를 훔치는 데 성공한 줄리아(줄리 레드루). 바람을 가르며 그녀가 도착한 곳은 한눈에 봐도 거친 남성들로 가득한 바이크 라이딩 현장이다. 곡예 운전을 한껏 뽐내는 남성들 사이에서 ‘얌전히 뒷좌석에 앉지 않고’ 핸들을 쥔 여성 라이더는 눈엣가시일 뿐이다. 바이크 서클의 일원이 되고 싶은 줄리아는 그들을 대신해 온갖 잡일을 도맡지만, 그녀를 향한 시기 어린 눈빛은 좀처럼 거두어지지 않는다. <로데오>는 생존을 위해 범죄가 일상이 된 사회 속 여성 라이더의 삶에 주목한다. 거친 질감의 필름이 척박한 현실 속 날것 그대로의 몸짓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감독이 실제 바이크 커뮤니티에서 만난 여성을 바탕으로 만든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한 권력 사이에서 위태로운 곡예 운전을 이어나간다. 제52회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 인기상을 수상했다.
[리뷰] 외줄타기가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조건인 것처럼, <로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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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연출한 영화의 제목을 읊는 것만으로도 특유의 촉감이 전해진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2016),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2022) 등을 만든 일본 감독 미키 다카히로 이야기다. <소라닌>(2010), <양지의 그녀>(2013)와 같은 초기작부터 줄곧 보드랍다 이내 촉촉해지는 청춘 로맨스 양식을 고수해온 그의 필모그래피를 뒷받침해온 서브 장르는 바로 판타지. 고양이를 사람으로 환생시키고, 두 연인의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면서 관객을 울려온 미키 다카히로는 평행우주를 배경 삼은 프랑스영화 <러브 앳>을 각색한 신작 <나를 모르는 그녀의 세계에서>로 다시 한번 장기를 발휘했다.
표제 속 ‘나’는 리쿠(나카지마 겐토), ‘그녀’는 미나미(미레이). 소설을 쓰는 리쿠와 곡을 쓰는 미나미는 같은 대학을 다니던 중 인연을 맺는다. 우연히 서로에게 각자의 창작물을 들킨 두 사람은 응
[리뷰] 파트너의 성공이 결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란! <나를 모르는 그녀의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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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칸영화제 뉴스를 보며 2011년 칸영화제에서 찍은 사진을 꺼내보았다.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로버트 드니로의 인상적인 수상 소감을 여기 전한다. “우리의 무지한 대통령은 자의적으로 주요 문화기관의 수장을 임명했고 예술·인문·교육 분야의 예산을 삭감했으며, 이제는 미국 외의 국가에서 제작된 영화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 우리는 단순히 관람석에 앉아 있을 수 없다. 행동해야 한다. 지금 당장. 폭력이 아닌 강한 열정과 결단력으로.”
[Archive] 로버트 드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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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이 죽을 때 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안쓰러워서 우는 걸까, 우리 스스로가 안쓰러워서 우는 걸까?” 학교에 제출한 에세이에서 후키는 한 소녀의 장례식을 지켜본다. 상주 자리에 선 부모님을 보며 후키는 그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본인의 판타지 에세이에 전술했듯 11살의 후키는 종종 죽음을 상상한다. 나아가 상실을 겪은 이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어한다. 수시로 영혼을 불러오는 주술을 행해보고 텔레파시에 심취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암 환자인 후키의 아버지에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고 그런 그를 간호하고 생계를 잇느라 어머니는 후키를 돌볼 여유가 없다. 고요한 집에서 아이는 자주 외로움을 곱씹는다. 제78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르누아르>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자신이 천착하는 죽음과 연대라는 주제를 공고히 한다. 데뷔작 <플랜75>을 통해 70대 여성의 시선에서 노년의 생과 사에 주목한 데 이어 <
[조현나의 CANNES 레터 - 2025 경쟁부문] <르누아르> 최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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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딩턴 Eddington (감독 아리 애스터 Ari Aster)
“이번에도 다락방이 나오니?” 5월17일 밤, 칸 숙소에 도착한 김혜리 기자의 첫 질문이다. 앞서 뤼미에르 대극장에서의 <에딩턴> 프리미어 상영이 막 끝난 참이다.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닌’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오컬트도, 환각도, 바디호러도 없다. 다만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 이어 미쳐버린 호아킨 피닉스와 끔찍한 가족, 그들이 살아가는 최신의 망가진 미국이 있을 뿐이다. 트라우마로 점철된 장르의 세계에서 현대 미국 웨스턴으로 초점을 확장한 아리 애스터의 신작은 팬데믹 상황을 정면으로 반영한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이기도 하다. 연대기적 상징성을 떠나 아리 애스터 필모그래피의 시계열을 넓혀 바라볼 때 중요한 분기점임은 분명해 보인다. 영화는 팬데믹, 인종 갈등, 온라인 음모론, 숏츠와 가짜 뉴스, AI 빅테크 기업의 침투 등 동시대 미국을 대변하는 요소들을 작은 집단에 욱여넣은 전방위적 사회실
[김소미의 CANNES 레터 - 2025 경쟁부문] <에딩턴> 최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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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땅 위에 사람들이 대형 스피커를 설치한다. 멜로디 없이 반복되는 울림에 맞춰 모두가 춤을 춘다. 인파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방인은 단 두 사람. 루이스 부자는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오랜 기간 모로코의 사막을 헤맸다고 말한다. 아마도 다른 파티에 딸이 있을 것이라 말하며 떠나는 일행 뒤를 루이스 부자가 말없이 따라붙는다. ‘시라트’는 이슬람교에서 ‘지옥을 가로지르며 이승과 낙원을 연결하는 다리’를 의미한다. 오직 의로운 사람만이 다리를 건널 수 있으며 불의한 사람은 불에 타는 형벌을 받는다. 올리버 라세 감독은 자기 식대로 시라트를 광활한 사막 위에 펼친다. 교리대로 의과 불의를 가려 형별을 내리는 형식이 아니라 인물들 앞에 지뢰처럼 고통을 심어놓은 뒤 이 고통을 딛고 ‘어떻게’ 다음으로 넘어갈 것인지에 관해 논한다.
<시라트>를 관람할 때 연상되는 작품은 의외로 <매드맥스>다. 사막을 배경으로 곧게 질주하는 차, 전쟁의 가능성이 암시되는 세계에서 훼손
[조현나의 CANNES 레터 – 2025 경쟁부문 리뷰] <시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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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지음 창비 펴냄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파리에서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1980년대의 홍세화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꼬레에서 왔소.” 꼬레에서 왔지만, 그가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나라 역시 꼬레가 된 현실. 해외 지사 근무차 유럽에 갔다가 남민전 사건이 터져 귀국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그는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시작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1995년 출간되었고, 당시 아직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던 홍세화 없이 출간 기념회를 치른 후 금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출간 30주년 기념, 홍세화 선생의 타계 1주기를 기억하는 의미로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이전까지는 한없이 낯설었을 ‘톨레랑스’(tolerance)라는 단어를 한국 사회에 알린 것이 이 책이었고, 유럽 여행이 드물었던 시대에 그의 택시 뒷좌석에 타고 파리 시내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듯한 진기한 경험을 하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이제 파리 여행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있고, 그게 어렵다면 유튜브로도
씨네21 추천도서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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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이 인물을 내가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을까. <디트랜지션, 베이비>의 첫장부터 이러한 의문에 봉착한다. 이 소설에는 무작정 긍정할 수 있는 주인공이란 등장하지 않는다. 죄다 어딘가 불안정하고 결함이 있으며 이해불가한 선택을 연속한다. 트랜스젠더 여성 리즈는 아이가 갖고 싶다. ‘이 섹스로 인해 임신을 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느끼고 싶어서 버그체이싱(성행위를 통해 의도적으로 HIV바이러스 감염을 추구하는 행동)을 시도한다. 리즈는 과거 엄마가 될 준비를 한 적이 있다. 에이미라는 트랜스 여성과 레즈비언 커플로 사귀던 시절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려 했지만 에이미는 트랜스 여성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디트랜지션(Detransition)을 결정하며 다시 남성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의 이름은 에임스다.
에임스는 트랜스젠더를 대하는 혐오 사회와 주변인의 태도에서 피로감을 느꼈고, 더불어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애매함을 환멸해 원래의 성
씨네21 추천도서 - <디트랜지션, 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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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신종원 글 한규현 그림 소전서가 펴냄
신종원의 장편소설 <불새>를 읽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고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예정되어 있던 시기였다. 공교롭다고 말한 까닭은 이 소설이 젊은 사제 바오로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양을 찾아 떠나지만, 드물게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양들이 그들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노아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또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빚어질 때 이미 목자로 명명되어 일생 양들을 이끈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 신부가 등장한다. 그는 비행기에 타고 있다. 그런데 성당에 다니냐는 옆자리 사람의 말에 그는 “네, 그런데 이제 그만두려고 합니다”라는 비밀을 누설한다. 비행기에 탄 이유는 곧 밝혀진다. 성직을 내려놓겠다는 바오로 신부에게 아버지 신부인 베드로는 “네 눈으로 직접 성배를 보고 돌아오라”고 했던 것이다.
일의 발
씨네21 추천도서 - <불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