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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런던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 개최됐던 이벤트(상영, 전시, 콘퍼런스, 퍼포먼스 혼합) <확장영화: 수용의 공간을 활성화하기>(Expanded Cinema: Activiating the Space of Perception)에서 앤서니 매콜을 처음 만났다. 매콜을 포함하여 맬컴 르그라이스, 윌리엄 레이번 등 영국 구조-유물론 영화의 전설들, 실험영화 및 비디오의 연구와 큐레이팅에 큰 족적을 남긴 전문가들이 모인 행사에 나는 박사과정을 마치지 않은 발표자로서 참석했다.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매콜은 물론 당시 잔뜩 긴장하고 경험도 일천했던 나도 기억하기 힘들다. 영화관을 넘어서는 대안적 형태와 관람성을 모색한 확장영화의 선구적 사례를 개척한 매콜의 첫 전시는 국내 영화계와 미술계 모두에 중요한 행사이자 15년 동안 관련 연구를 축적해온 나에게도 의미 있는 기회였다. 개인적인 존경의 분위기를 애써 일소하지 않으면서도 영화계와 미술계 모두의 독자에게 매콜의
[인터뷰] 영화의 본질을 위해 영화 바깥으로 나가다, 앤서니 매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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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봄은 바야흐로 이준영의 봄날이었다. 밸런타인데이에 공개된 <멜로무비>를 시작으로 <폭싹 속았수다>와 <약한영웅 Class 2>가 연달아 큰 호응을 얻었고, 각 작품 속 이준영의 호연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준영의 얼굴과 이름을 재확인하게 만들었다. 그는 <부암동 복수자들>의 수겸 학생이자 <D.P.>의 탈영병이었고, <마스크걸>의 데이트 폭력범인 동시에 <모럴센스>의 순박한 마조히스트였다. 새삼스럽지만 이준영은 보이 그룹 유키스로 데뷔했고, 배우 활동 중에도 얼마간 아이돌 생활을 병행했다. 그렇게 이준영이 지난 9년간 축적한 필모그래피는 배역에 완전히 동화돼 자신의 개성을 지울 줄 아는, 카메라 밖 자아를 작품 안으로 틈입시키지 않는 20대 남성배우의 탄생을 입증했다. 현재 KBS2 수목드라마 <24시 헬스클럽>을 통해 코미디 근육까지 과시 중인 이준영이 <씨네21>을 찾았다.
[인터뷰] 카메라 앞에 서면 부담이 사라진다, <폭싹 속았수다> <약한영웅 Class 2> <멜로무비> <24시 헬스클럽> 배우 이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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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와 원인은 달라도 상처를 품은 이들에겐 고통에 몸부림치던 불면의 밤이 존재했다. 사내 연애 문제로 지금 당장 머리가 아픈 선아(정지인)도, 말 못할 학창 시절의 자책을 묻어둔 선아의 사촌 지수(오우리)도 마찬가지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외딴 땅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여자들은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한 침대에 몸을 뉜다. 스튜디오에서 촬영에 임한 <내가 누워있을 때>의 배우 정지인과 오우리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두터운 애정이 느껴졌다. 언니의 촬영 장면이 담기게 개구진 얼굴로 셀카를 찍던 오우리와 동생의 차례에 진심으로 칭찬을 건네던 정지인의 우정은 영락없는 자매의 것이었다.
- 각 인물의 부피감이 돋보이는 영화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마주한 지수와 선아는 어땠나.
정지인 처음에는 선아가 모호한 사람처럼 다가왔다. 분명 성격은 확고한데 어딘가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감독님과도 너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게 그리자고 이야기했다. 선아는 사
[인터뷰] 우리가 감싸안았을 때 <내가 누워있을 때> 배우 정지인, 오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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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데뷔작 <톡 투 미>로 제작비의 20배가 넘는 수익을 거둔 필리포 형제는 유튜브 채널 <라카라카>(RackaRacka)의 운영자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2025년 5월 현재 688만명의 구독자 수를 자랑하는 이 채널은 아직 형제의 초심을 머금고 있다. 11년 전 업로드한 1분 남짓의 UCC들이 남아 있어서만은 아니다. 이 쌍둥이는 A24가 배급한 공포영화 중 역대 최고 흥행작에 등극한 첫 장편을 만들었음에도, 개봉 후 이 작품을 홍보하는 영상을 직접 편집해 올렸음에도 “영화감독 지망생들의 폭주!”(Wannabe Film-makers on a rampage!)라는 채널 소개글을 그대로 두고 있다. 이 문구는 마치 예언처럼 또 한편의 ‘폭주’를 낳았다.
필리포 형제는 유튜브에서부터 호러, 고어, 코미디를 넘나들면서 혈기를 분출해온 크리에이터답게 신작 <브링 허 백>에도 광란의 장을 펼친다. 이야기는 부모를 잃은 앤디(빌리 배럿)와 파이퍼(
[인터뷰] “관객이 거북함 느끼는 동시에 이입할 수 있는 인물 원했다”, <브링 허 백> 대니 필리포, 마이클 필리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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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할 적당한 용어가 없어서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라는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을 용서하시기를. 이 말은 ‘스페셜리스트’ 즉 전문가와 대비되는 의미로서, 묘하게 경멸의 의미를 담는 경우도 많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많이 알기는 하지만 자기 고유의 전문 영역이 없어서 막상 어느 한 분야에서도 권위를 가질 수 없는 지식인과 기능인을 통틀어서 부르는 말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회와 직장에서는 물론 심지어 학계에서도 찬밥이 되기 십상이다. 때깔은 좋고 폼은 날지 몰라도 막상 어디에 써먹기는 힘든 ‘은도끼’ 취급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 하나의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듣는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서 부닥치는 가지가지의 문제들에 꼭 맞는 전문가가 존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구두와 이를 고칠 때에는 구두수선공과 치과의사가 있지만, 출산율 저하 문제나 남녀 갈등 문제 등에 그런 전문가가 있을 리가 없다. 제너럴리스트들은 여기에서 반
[홍기빈의 디스토피아] 인공지능과 ‘제너럴리스트’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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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의 그 학생, <협상의 기술>과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의 그 인턴. 배우 차강윤은 최근 2년간 드라마에서 새싹 캐릭터를 연달아 맡으며 주목받았다. 실수를 거듭하며 때론 스스로 깨우치며 방향을 찾아가는 인물을 매번 조화롭게 그려내 신인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을 시청자에게 안겼다. 지난 5월18일 종영한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의 인턴 탁기온은 중반에 투입된 역할로, “이미 형성된 극의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게” 관건이었다. 현장에서 주로 합을 맞춘 “이창훈, 신시아, 고윤정 선배님의 연기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대화도 적극적으로 나누며” ‘율제병원 사람’다운 리듬을 잡아나갔다. 표현의 정도에도 특별히 신경 썼다. “아직 초보라 해도 의사이지않나. 너무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연기하면 현실성이 떨어질 것 같았다. 마냥 귀여운 인턴처럼 보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기온의
[WHO ARE YOU]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 <협상의 기술> 차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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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타맨>은 험난한 현실 속에서 음악을 통해 희망을 찾아가는 천재 기타리스트 이기철(이선정)의 성장과 사랑, 상실을 그려낸 작품이다. 성원제약 대표이자 이선정밴드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인 이선정이 기획, 제작, 연출, 주연을 모두 맡았다. 올해 초, 세상을 떠난 고 김새론 배우의 유작이기도 하다. 김새론은 이기철이 합류한 라이브 밴드 ‘볼케이노’의 키보드 연주자 유진 역을 맡아 기철의 마음을 열고 변화시키는 밝은 온기를 선보인다. 영화 속 주요 음악은 이선정 감독이 직접 작사, 작곡, 편곡을 맡았다. 다소 상투적인 연출이 아쉽지만, 영화가 전달하려는 따뜻한 메시지와 음악이 만들어내는 감동은 분명하다. 삶의 고난 속에서도 음악이 위로와 치유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현실 속 상처받은 이들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무엇보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새론 배우를 그리워하는 관객들에게 선물이 될 영화다.
[리뷰] 김새론 배우의 생기와 열연을 기억하며, <기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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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르가모에 위치한 아카데미아 카라라 미술관의 재개관을 기념하여 제작된 다큐멘터리가 관객을 찾아온다. 18세기 미술품 수집가 자코모 카라라 백작의 수집품을 기반으로 설립된 카라라 미술관은 르네상스부터 19세기 말까지 거장들이 탄생시킨 600여점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다비데 페라리오 감독은 미술관의 주요 작품들을 전문가 인터뷰와 함께 생생하게 담아낸다. 메인 포스터에서 볼 수 있는 산치오의 걸작 <성 세바스찬>을 비롯해, 보티첼리의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초상화>, 피사넬로의 <리오넬로 데스테의 초상>, 벨리니의 <알차노의 마돈나>, 만테냐의 <성모자>, 모로니의 <노인의 초상> 등을 만날 수 있다. 이 걸작들은 미술사적 가치를 넘어 초상화가 지닌 인간 내면의 고뇌와 시대의 흔적을 담아내며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달한다. 미술관의 내외부 전경을 담아낸 화면은 직접 방문한 듯한 설렘을 자아낸다.
[리뷰] 시간을 거슬러 만나는 거장들의 초상, <초상화의 이면. 아카데미아 카라라의 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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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재벌 사업가인 자자 코다(베니치오 델 토로)는 쌓은 업보 탓에 매 순간 암살 위협에 시달린다. 페니키아 지역에 거대 인프라 시설을 건설하는 것이 현재 그가 추진하는 일생의 프로젝트다. 어느 날 비행기 추락 사고 후 기적적으로 생존한 그는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계획을 이어갈 후계자를 선택하는데, 이는 수녀가 되려는 딸 리들(미아 트리플턴)이다. 이제 자자는 사업 자금을 투자할 자본가뿐만 아니라 아빠를 악당이라 생각하는 딸의 마음까지 얻어야 한다. 그 기묘한 비즈니스 트립에 어리숙한 가정교사 비욘(마이클 세라)이 동행한다. <페니키안 스킴>은 웨스 앤더슨의 신작이다. 이번 작품 역시 시각적 즐거움으로 가득하며, 근작에 비해 서사구조도 그리 복잡하지 않게 느껴진다. 다만 자자가 가끔씩 떠올리는 사후 세계를 통해 세상에서 제일 부지런한 연출자의 가장 최근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리뷰] 각자가 생각하는 천국의 갭을 좁혀보기 위한 너와 나의 비즈니스 트립, <페니키안 스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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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미연(길은혜)은 아픈 엄마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민이 많다. 투병 기간이 길어지며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미연은 자신을 걱정하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유기견 센터를 방문하는데, 그곳에서 발견한 강아지 해피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렇게 함께 살게 된 해피는 미연의 가족에게 얼마간 행복을 주는 듯 보이지만, 아직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된 게 없고, 엄마의 병세는 날로 악화된다. 엄마가 보물처럼 껴안고 사는 검은 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에 따라, 이 가족의 미래가 결정날 것처럼 보인다. <해피해피>는 강아지라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 긍정적인 변화를 맞는 한 인물의 모습을 따뜻하게 담아냈다. 미연과 친구, 동네 수의사 캐릭터 등이 만들어내는 유머러스한 상황들이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또 하나의 주인공 해피의 매력도 돋보이나 그것에만 의존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리뷰] 영화도 인생도 해피하기가 너무 어렵다, <해피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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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한 호텔에서 독일 기자가 암살당한 사건이 CIA를 뒤흔든다. 기자 암살 사건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암살된 기자들 모두 미 정보기관의 해외 활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는 공통점이 드러나면서 여론은 범인을 CIA로 지목한다. CIA는 사실을 긴밀히 파악하기 위해 ‘브릭레이어’라고 불렸던 전설적 요원 스티브 베일(에런 에크하트)을 호출한다. 이미 죽은 걸로 알려진 빅터 라덱(클리프턴 콜린스 주니어)이 강력한 용의자라고 오른 것에 흥미를 느낀 베일은 협조 요청을 받아들이고 현직 CIA 요원 케이트 배넌(니나 도브레브)과 팀을 이뤄 그리스로 향한다. <브릭레이어>는 FBI 요원 출신 작가 노아 보이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서로를 못마땅해하던 2인조가 산전수전을 겪으며 동료애를 느끼는 과정이 익숙하지만 안정적인 재미를 준다. 주인공이 벽돌공이라는 컨셉에 맞춰 사건을 기발하게 풀어가는 재치가 돋보인다.
[리뷰] 익숙한 투닥투닥의 맛으로 밀고 나간다, <브릭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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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노현희)는 아들 재승(송승현)이 전국 1등이 되길 바라며 매타작과 폭언, 가스라이팅을 서슴지 않는다. 심신이 병든 재승의 희망은 첫사랑 정윤(박수빈)뿐. 모의고사를 앞두고 희수는 아들을 이틀 동안 재우지 않고 공부만 시킨다. 그날 밤 재승은 홧김에 칼을 휘두른다. <스위트홈 감독판>은 <CCTV>를 연출한 김홍익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의 만듦새는 대체로 허술하다. 연출에서는 슬로모션과 흑백 전환이 효과적으로 쓰이지 않는 데다가 서스펜스와 공포를 그릴 때 음악에 의존한다는 문제가 두드러진다. 대사가 대부분 일차원적이며 곳곳에서 날것 그대로의 비속어가 쓰인다. 거기에 과잉된 교육열이라는 소재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며 희수의 캐릭터는 극성 학부모를 둘러싼 여성혐오를 답습한다. 구성상으로도 2부에 판타지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전혀 설득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기술적으로도 미흡한 CG와 음향 연출 탓에 몰입이 쉽지 않다.
[리뷰] 이쯤이면 개꿈의 영화화, <스위트홈 감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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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연애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선아(정지인)는 잠시 시간을 내 본가를 찾는다. 직장 문제로 분주한 그는 서울에서 잠시 함께 지낼 사촌 지수(오우리)와 함께 곧장 올라갈 참이었다. 하지만 상경 전 부모님의 산소에 들르고 싶다는 지수의 말에 지수와 그의 친구 보미(박보람)와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반나절이면 될 여정에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고 세 사람은 외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최정문 감독의 첫 장편 <내가 누워있을 때>는 서로 다른 아픔을 지닌 세 여성을 낯선 길 위로 초청한다. 저마다 원인과 경과는 다르지만 이들의 상흔은 동시대 여성이 겪는 사회적 문제란 공통점으로 수렴된다. 연대를 도모하기에 최적의 형식인 로드무비를 축으로 삼되 시련 속에서 서로의 손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도록 만든 스릴러적인 터치가 돋보인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상영작이며 지난해 4월 작고한 가수 박보람의 장편 데뷔작이다.
[리뷰] 무례함 앞에서 서로 굳건히 맞잡고 보듬은 손들, <내가 누워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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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미국, 시카고 갱단에서 활동하던 스모크(마이클 B. 조던)와 스택(마이클 B. 조던) 쌍둥이 형제가 미시시피로 귀향한다. 인종차별이 극심한 시대에 흑인들이 자유로이 음악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술집을 열기 위해서다. 형제는 사촌 동생이자 음악에 재능을 지닌 새미(마일스 케이턴) 등 고향의 친구들을 한데 모아 성대한 오픈 파티를 연다. 그런데 행복하던 이 자리에 예견치 못한 적들이 나타난다. <씨너스: 죄인들>은 다양한 장르, 담론, 역사가 섞인 결합체다. 미시시피의 장대한 풍광을 바탕으로 새긴 전반부에선 흑인들이 겪는 따스한 일상과 차가운 핍박의 연대기가, 후반부엔 조지 로메로(<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나 로버트 로드리게스(<황혼에서 새벽까지>)의 향취를 느끼게 하는 강렬한 밀실 장르물이 펼쳐진다. 근래 조던 필 감독이 <겟 아웃> <놉> 등에서 다뤘던 미국의 인종차별적 맥락 역시 전반의 서사를 감싼다.
[리뷰] 흥미로운 풍경화, 밀실극, 장르물 그러나 예상보다 약한, <씨너스: 죄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