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최은희가 지난 4월 16일 향년 92살로 타계했다. 그는 ‘영화 같은 삶’, 아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로 수식된다. 고 신상옥 감독의 페르소나이자 영화적 동지였고 한국 최고의 배우로 스크린을 빛냈지만, 그의 인생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순간들과 맞물려 있었다. 어린 시절 겪은 일제 식민지기와 해방의 혼란은 물론이고,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과 국군의 정훈공작대에 차례로 소속되며 전쟁의 고통을 체험했다. 1960년대부터 박정희 정권의 총애를 받다가 1970년대 중반 정권과 사이가 벌어졌고, 1978년 납북된 후에는 김정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1986년 극적으로 북한을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 3년간 은둔 생활을 했고 서울올림픽이 끝난 1989년에야 다시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 그 자체였다.
문예봉을 동경하던 소녀
최은희는 1926년 11월 9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최경순이다. 1930년생이라는 그간의 기록은 동갑인 신상옥 감독보다 나이를 어리게 하려고 그렇게 알렸다는 후문이 있다. 소학교 시절 예체능 분야에 두루 재능이 많았고, 가수의 꿈을 꾸기도 했다. 식민지기 조선영화의 여배우 트로이카인 김신재, 김소영, 문예봉을 우상으로 삼았는데 특히 전형적인 한국 여성상을 보여준 문예봉을 가장 동경했다고 한다. 1943년 연극배우 문정복의 소개로, 황철이 창단한 극단 ‘아랑’에 연구생으로 입단하며 연기를 시작했다. 첫 무대부터 떨지 않고 대사를 소화했고 연구생 때부터 주요 배역을 맡았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토월회와 극예술연구회의 연극에 꾸준히 출연하는 등 무대를 통해 실력을 쌓았다. 스크린의 스타로 명성을 날리던 1972년에도 극단 ‘배우극장’을 설립해 활동했고, 미국 체류 시절에도 무대에 올랐으며, 영구 귀국한 직후인 2001년 극단 ‘신협’ 대표를 맡아 뮤지컬을 만들기도 했다.
스크린 데뷔, 한국전쟁의 불행
영화배우로서의 도전은 해방 이후 시작되었다. <새로운 맹서>(감독 신경균, 1947)에서 순박한 어촌 처녀 역할을 맡아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최은희는 첫 영화 현장에서 배우로만 출연한 것이 아니라 스크립터 일을 자청했다고 한다. 영화에 대한 열정은, 훗날 한국영화사의 세 번째 여성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는 일로 이어졌다. <새로운 맹서> 개봉 후 그는 이 영화를 촬영한 김학성과 결혼한다. 최은희가 갓 스무살을 넘긴 때였고, 가족을 포함한 주변에서 상대방이 나이도 많고 자식까지 딸렸다는 이유로 말렸지만 결국 감행한 결혼이었다. 하지만 김학성의 폭력과 의처증으로 인해 최은희에겐 한동안 불행한 삶이 이어졌다.
1949년에 촬영한 <마음의 고향>(감독 윤용규)은 최은희가 뽑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식까지 잃은 30대 미망인을 담담히 연기하며 해방기 한국영화의 명작으로 기록되는 데 일조했다. 그의 동양적이면서도 서구적인 얼굴과 지고지순한 한국 여성이라는 배역이 만나, 한국 사람들이 좋아한 최은희만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영화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이듬해 한국전쟁 발발은 최은희를 큰 고통 속으로 빠트렸다. 서울에 남았던 그는 인민군에 휩쓸려 북으로 올라가다 탈출, 다시 국군 소속으로 정훈공작에 투입되는 등 생사를 담보로 한 우여곡절을 겪는다. 2007년 발간된 고인의 자서전에서 항간에 떠돌던 여성으로서 겪은 고초는 인민군이 아닌 국군쪽으로부터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남과 북의 두 권력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 <상록수>(감독 신상옥, 1961).
영화청년 신상옥과의 만남
최은희와 신상옥은 일반적의 의미의 부부를 넘어 서로를 영화적 동지로 여겼던 동반자 관계였다. 둘은 신상옥이 연출한 세미다큐멘터리 <코리아>(1954)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신상옥이 “나와 함께 영화를 해보지 않겠소?”라는 말로 프러포즈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던 전남편 김학성이 둘을 고소했고, 당시 언론은 최은희를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재혼한 잉그리드 버그먼에 빗대 ‘한국의 잉그리드 버그먼’으로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사생활보다는 스크린 속 최은희가 발산하는 우아한 이미지가 차라리 버그먼의 그것과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후 영화계의 비토로 신상옥은 영화 제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의 흥행 성공, 1959년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자매의 화원> <동심초> 등 멜로드라마의 연이은 히트로 한국영화의 대표 감독으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최은희 역시 이 영화들을 통해 때로는 서구적 외모로 어필하고, 때로는 동양적 청초함을 풍기는 한국의 전통적 여성상을 연기함으로써 대표적인 스타 배우에 등극했다. 그 이미지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의 미망인 역할로 정점을 찍게 되며, <성춘향>(1961)의 흥행 성공으로 최은희·신상옥 커플의 영화제국 ‘신필림’은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왕좌를 차지한다.
1950~60년대를 관통한 독보적 배우
혹자는 최은희를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원조 트로이카로 묶기도 한다(60년대 후반의 문희·남정임·윤정희 트로이카에 앞선다는 의미). 대중적 인지도로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경력의 시작점으로 보나 연기의 수준으로 보나 그는 다른 차원의 배우였다. 해방기부터 스크린에 등장해 50년대를 풍미한 것으로는 조미령과 견줄 만하고, 연기력으로는 문정숙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 약 120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만 보면 일견 다작으로도 볼 수 있지만, 트로이카 여배우들의 출연작에 비하면 반정도 되는 수준이었으며 주로 신상옥의 페르소나로 신필림 작품에 출연한 덕분에 이미지를 필요 이상으로 소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성우의 후시녹음으로 목소리를 입히던 시절, 대부분의 작품에서 본인의 목소리로 녹음한 몇 안 되는 배우 중 하나였다.
당시 대중은 최은희의 전통적인 여성상, 지고지순한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동경했다. ‘과부 전문 배우’로 굳어버릴까 연기 변신을 시도한 <지옥화>(1958)의 양공주 소냐 역과 <로맨스 그레이>(1963)의 바걸 만자 역할은 대중의 호응을 많이 받지 못했다. 그가 자서전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출연작으로 뽑은 작품들 또한 <마음의 고향> <어느 여대생의 고백>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당대 관객의 선호도와 그 계보를 같이한다.
감독 최은희로 이름을 남긴 것도 특별한 부분이다. 그는 박남옥, 홍은원에 이은 한국영화 역사상 세 번째 여성감독이었다. 신필림 제작으로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 선생>(1972)을 연출했고, 북한에서도 <약속>(1984)을 감독했다. 또 1970년부터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을 맡아 후배 연기자들을 양성했다. 최은희는 스타 여배우라는 구식 호칭을 넘어서는 인물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였고, 시대의 아이콘이었으며, 치열하게 살아온 예술인이었다.
* 최은희의 삶과 영화는 다음 자료를 더 참고할 수 있다.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랜덤하우스, 2007) /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https://www.daarts.or.kr) 구술채록 아카이브 최은희 편(책임연구 이용관, 2006) / 한국영상자료원 고전영화 DVD 컬렉션: <마음의 고향>(2011), 1950년대 신상옥 멜로드라마(2013)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