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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BPM>, 김조광수 감독·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이혁상 감독 대담
이주현 사진 백종헌 2018-03-21

끊임없이 성소수자의 현재를 환기시키는 감각적인 영화

김조광수 감독, 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 이혁상 감독(왼쪽부터).

“레인보우팩토리가 수입 안 하면 누가 수입해.” <로렐>(2015), <라잇 온 미>(2012), <호수의 이방인>(2013),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2013)과 같은 퀴어영화들을 수입해 개봉하다보니 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는 종종 이런 얘기를 듣곤 한다. 그 책임감과 의무감이 뭐라고 로뱅 캉피요 감독의 <120BPM>도 사들였다. <120BPM>은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에이즈 감염인들의 권리 보장을 위해 도발적 운동을 펼쳤던 액트업 파리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김승환 대표의 인생 파트너이자 영화적 동지인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 및 감독 그리고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에서 활동하며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2010)과 <공동정범>(2016)을 만든 이혁상 감독. 이렇게 세 사람이 청년필름 사무실에 오전부터 둘러앉았다. 2013년 공개 결혼식을 올려 국내 첫 동성 부부가 된 김조광수, 김승환 커플(물론 우리나라는 아직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불허하고 있다)과 그 사이에 낀 이혁상 감독은 커밍아웃한 (게이)감독의 시선으로,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의 시선으로 <120BPM>을 읽고 또 풀이해주었다. 액트업에 대해, 에이즈에 대해, 차별과 편견의 역사에 대해, 우리의 성소수자 투쟁사에 대해, 알아두면 쓸모가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120BPM>을 수입한 김승환 대표를 비롯해 이 영화의 안팎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해줄 수 있는 인물들을 찾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 감독이자 연분홍치마 활동가인 이혁상 감독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이자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건강에 대해 연구해온 김승섭 교수도 섭외하려 했다. 그런데 일정이 맞지 않았다.

=김조광수_ 오전엔 강의가 있고, 자녀가 셋이라 저녁엔 육아에 전념해야 한다더라.

=김승환_ 이성애자 남성이 이렇게 성소수자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이어가는 경우가 드물어서 김승섭 교수의 연구와 활동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다.

김조광수_ 원래도 인권 활동에 뚜렷한 관심을 가진 분이었지만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 지도교수가 게이였는데 그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 김승섭 교수는 우리 부부의 혼인 소송 당시 참고인으로 증언도 해줬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었다가 반발로 인해 다시 폐지된 적이 있었다. 짧은 시차를 두고 결혼을 할 수 있었던 커플과 그렇지 못한 커플들이 캘리포니아주 안에 동시에 생긴 거다. 김승섭 교수가 양쪽의 케이스를 건강 문제와 연결해 연구했다. 동성 결혼 법제가 폐지됐을 때 동성애자들이 받았던 심적, 육체적 고통을 파고든 흔치 않은 사례다. 그 연구 결과를 우리의 혼인 소송 당시 법제화의 근거 중 하나로 제시했다.

=이혁상_ 물론 평등권은 중요하지만 동성애든 이성애든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공동정범>을 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모양인지 요새 부쩍 집에 들어갔을 때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진다. 외로운가보다. (웃음)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120BPM>을 보고 어느 영화사에서 수입할까 궁금했다. 개인적으로는 LGBT 커뮤니티에서의 반응이 뜨거울 것은 물론 일반 관객에게도 진입 장벽이 높은 영화는 아니라고 느꼈기에 수입하려는 영화사가 꽤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김승환_ 로뱅 캉피요 감독의 <이스턴 보이즈>(2014)를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감독의 차기작이었던 <120BPM>의 제작 소식도 일찌감치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실 캐스팅이 약하다는 인상도 있었고, HIV/에이즈는 다루기 어려운 소재여서 영화가 어떻게 완성될지 지켜봤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만 하더라도 매튜 매커너헤이라는 스타 배우가 출연하고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지 않았나. 게다가 매튜 매커너헤이가 연기한 캐릭터는 이성애자였다. 아무튼 <120BPM>을 서울프라이드영화제에서 상영할 의향은 있었지만 수입 가격도 센 편이고 감독이나 배우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편이 아니어서 수입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 주변 지인들이 생각나더라. 영화를 통해 게이 커뮤니티의 울타리를 넘어 그 바깥에서도 HIV/에이즈에 대한 담론이 형성됐으면 하는 마음에 어렵지만 수입을 결정했다.

김조광수_ 지난해 칸에서 심사위원장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 오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알모도바르와 함께 경쟁작 심사를 한 박찬욱 감독에게 정말 알모도바르와 윌 스미스가 대성통곡을 했냐고 물어봤다. (웃음) 자신의 양옆에서 영화를 보던 두 사람이 진짜 30분을 울었다더라. 두 사람 모두 에이즈로 죽은 친구들이 있었던 거다. 두 사람은 <120BPM>의 황금종려상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또 다른 문화권의 심사위원들은 좀더 거리를 두고 영화를 바라본 것 같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도 나한테 이 영화를 수입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강력히 권했다. 박찬욱 감독뿐만 아니라 엣나인필름에서도 ‘레인보우팩토리가 수입 안 하면 누가 하냐’며 수입을 부추겼다. (웃음)

-<120BPM>은 다들 어떻게 봤나. 감상평을 얘기해보자

이혁상_ 우선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이야기이지 않나. 나는 <종로의 기적>에서부터 HIV/에이즈 이슈를 이야기해왔고, 주변에 세상을 떠난 친구들, 감염인 친구들도 많다. 그런데 HIV/에이즈와 액트업 파리의 이슈를 이렇게 풀 줄 몰랐다. 액트업 파리의 여러 투쟁 속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죽음의 드라마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프닝부터 의외였다. 오프닝의 시위 장면과 그 이후 이어지는 장시간의 토론 신들을 보면서, 이 영화가 1980년대 말로 돌아가 그 당시의 치열함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영화구나, 그런 철저한 의도를 가진 영화구나 싶었다. 어떤 면에선 이 영화가 극영화 포맷으로 기록 영화의 기능까지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었기 때문에 칸에서 상(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건가 싶기도 하고. 영화가 꽤 길다는 생각을 했지만, 길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예상을 비켜가는 전개가 이어져 놀라웠다. 주인공의 죽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영화는 죽음 이후 새로운 시퀀스를 만들어낸다. 그 장면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미완이었을 거다. 액트업 파리라는 공동체가 주인공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견고해지는 이야기로 끝나기 때문에 여러모로 <공동정범>이 생각나기도 했다.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것은 질병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현상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정부와 제약회사의 책임도 크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흔들리고 와해되는지, 또 어떤 극복의 과정을 겪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내게는 매우 가깝게 다가왔다.

김조광수_ 멜로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영화의 멜로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컸다. 내러티브의 과감한 점프가 거듭되는 가운데 클럽 신의 몽환적인 분위기, 음악으로 서사를 연결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이야기를 순서대로 쌓아가지 않고도 멜로의 감정을 전달하는 연출에 감탄했다.

이혁상_ 나도 클럽 신이 좋았다. 120BPM의 의미와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 클럽 문화의 맥락을 전달한다는 점도 훌륭하다. 특히 춤추는 장면에서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가 HIV 바이러스 세포로 이어지는 이미지를 언급하고 싶다. 게이 커뮤니티에서 자주 부딪히는 난제 중 하나는 ‘게이=HIV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인식 앞에서 자꾸만 숨게 된다는 거다. 클럽 신의 몽타주는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바이러스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계속해서 드러낸다. 이것이 곧 우리 공동체의 문제이면서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이슈라는 지점을 어필하는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김승환_ 로뱅 캉피요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 중 하나가 성소수자 공동체의 회복이었다고 한다. 1980~90년대에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발달하지 않은 상태라 실제로 만나고 부딪히면서 모든 활동이 진행됐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사실상 질병에 대한 공포 자체도 많이 사라졌고, 예전처럼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모이거나 함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HIV/에이즈는 종결된 이슈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로뱅 캉피요 감독은 HIV/에이즈 운동이 지속돼야 하고 공동체의 회복도 지속적으로 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전달하려 한다. 이 영화의 연출에서도 놀란 지점이 많았는데, 로랑 캉테 감독의 <폭스파이어>(2012), <클래스>(2008)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 출신 감독이라 스토리텔링이 뛰어날 거란 건 알았다. 그런데 편집을 비롯해 영화 전반의 연출이 이렇게까지 현란하고 감각적일 줄은 몰랐다.

-이성애자 감독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이야기지만 결과적으로 <120BPM>은 게이 감독인 로뱅 캉피요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감각으로 완성된 영화다. 더불어 캐릭터 구성에서도 게이와 레즈비언, 백인과 흑인, 10대의 아이와 엄마, 농인 등 다양한 구성원을 등장시키는 세심함을 보여준다. 성소수자 감독이기에 표현 가능했던 사려깊음과 차별화된 미덕을 영화를 보면서 많이 느꼈을 것 같다.

김조광수_ 조너선 드미 감독의 <필라델피아>(1993)와 비교해보면 좋을 것 같다. 1990년대에 이성애자 감독이 HIV/에이즈를 다룬 영화와 21세기에 게이 감독이 같은 제재를 풀어낸 영화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필라델피아>가 드라마투르기가 중심인 휴머니즘영화라면, <120BPM>은 훨씬 감각적인 영화다. 과거엔 에이즈를 왜 그런 식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는지 고민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제목에 대해서도 얘기하자면, 이것도 박찬욱 감독에게 들은 얘긴데, 당시 게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비트가 120BPM이었다고 한다. 게이클럽에 가면 120BPM의 음악이 주로 나왔다. 게이들이 좋아하던 그 음악의 속도는 곧 사랑을 할 때 우리의 심장이 뛰는 속도이기도 하다. 그런 데서도 섬세한 감수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혁상_ 고증이 그렇게 철저한 영화는 아니다. 애써 1980년대 분위기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느낌인데, 이건 어쩌면 <120BPM>이 동시대성을 이야기하는 영화여서인 것 같다. 만약 한국영화라면 액트업 활동가 중 한 사람 정도는 마이마이 카세트를 차고 나올 법도 한데(웃음) 그런 장치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다. 이야기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들면서도 충분히 감각적인 연출,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현재를 환기시키는 의도들이 놀랍게 잘 어우러진 영화다.

-액트업 운동의 경험이 있는 미국,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의 HIV/에이즈 관련 논의와 운동은 여전히 폐쇄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김승환_ 미국과 유럽도 초반엔 매우 폐쇄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내 곁의 친구들이 죽어가기 시작하면서, 직접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운동이 힘을 얻었다. 한국에선 여전히 언론이나 공개적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비롯해 신원을 밝히는 사람이 드물다. 물론 커밍아웃은 철저히 개인의 문제이고 절대 강요할 수 없다. 아웃팅이 범죄임은 두말할 나위 없고.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낙인과 그로 인한 공동체의 붕괴를 두려워한다. 개인적으로는 문제의 공론화를 통해 오히려 공동체가 더 견고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120BPM>을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혁상_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가 HIV/에이즈 공포증을 조장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보수 기독교였다. 액트업을 비롯한 미국 성소수자 인권 활동은 기독교의 전략과 허상을 깨부수는 역할 또한 했다. 이후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는 과정에서 장로교는 남녀간의 결합만을 결혼으로 명시한 조항을 삭제했다. 시대적 흐름에 발맞춘 기독교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반해 한국에선 변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사회에서도 에이즈 포비아를 조장하는 건 보수 기독교인데, 그들은 감염인을 세금 도둑으로 몰아가기까지 한다. 시민의 질병을 돌보는 건 국가의 책임인데 그 지점이 간과되고 있다. HIV/에이즈 인권연대 ‘나누리 플러스’에서 활동 중인데, 매번 낙인과 편견의 벽에 부딪힌다. 문란해서, 방종해서 걸린 병이라는 낙인은 개인을 향하고, 감염인은 소수자 안의 소수자로 위치되곤 한다.

김승환_ ‘우리가 정말 문란한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구조다.

이혁상_ 문란하면 좀 어때? (웃음) ‘우린 절대로 문란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건 HIV/에이즈를 감염인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프레임에 휘말리는 꼴이다.

김조광수_ 메르스 바이러스가 퍼지던 시기와는 판이한 정부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같은 바이러스 질병임에도 HIV/에이즈는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이를 해결할 때 드는 비용에 대한 부담을 과시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건 에이즈가 동성애에 대한 형벌이라는 암묵적인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김승환_ 그러고보면 HIV/에이즈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영화는 <120BPM>이 처음인 것 같다.

김조광수_ <필라델피아>만 해도 개인과 회사의 문제로 풀어가니까.

이혁상_ 메르스가 언급돼서 생각난 건데, 메르스가 창궐할 당시에 최초 감염자로 입국한 사람은 남성이었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지독한 여성혐오는 홍콩에 쇼핑하러 나간 여성들이 바이러스를 몰고 왔다는 여론을 확산시켰다. 이 선동에 분노한 여성들이 만든 것이 메르스 갤러리이고 그것이 메갈리아로 이어졌다. 여기서 미루어볼 수 있는 게 바이러스를 대하는 태도에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소위 사치를 부리고 해외여행을 다니는 여성상에 대한 낙인이 메르스 바이러스와 연결됐던 것처럼 1980년대엔 성소수자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 에이즈 바이러스와 함께 공격의 대상이 됐다. 일단 감염인의 위치에 놓이는 순간 그들은 바이러스의 숙주가 된다. 청천벽력 같은 참사의 피해자가 되는 동시에 다른 누군가를 감염시킬 수 있는 가해자가 된다. <120BPM>에서 “네가 누굴 감염시킨 것도 네 책임이고, 네가 감염이 돼도 네 책임이다”라는 대사가 오래 맴돌았다. 마찬가지로 <공동정범>의 인물들 역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구도 속에 놓인다. 서로를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누고 사안의 경중을 가리면서 죄를 지목한다. 그 과정에서 이충연 전 용산 철거민대책위원장은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진다. 감염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자-가해자 프레임 속에서 엄숙주의에 빠진다. 그리고 스스로를 단절시킨다. 심지어는 누구를 감염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더 큰 공포를 앓는다. 소위 ‘방종한’ 게이들의 문화와 성행위를 단죄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당사자 스스로 갈등의 주체가 되는 사례가 많다.

-액트업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을 만든 제임스 웬지 감독도 그런 말을 했다. “액트업 뉴욕의 활동은 에이즈로 인해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감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액트업은 성소수자 운동에 한획을 그은 단체다. 혹 이들의 활동에 영향을 받은 지점이 있나.

이혁상_ 액트업의 상징 구호인 ‘Silence = Death’는 HIV/에이즈뿐 아니라 커밍아웃에 대한 의미 또한 담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않는 것은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영화에 나오듯, 제약회사에 난입하거나 시체처럼 바닥에 눕는 시위 방식 등 액트업 활동에 영향을 받아 우리도 다국적제약회사 로슈 앞에서 치료제 공급을 촉구하는 시위를 한 적이 있다. <종로의 기적>에도 나오는 장면이다. (웃음) 액트업은 굉장히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운동을 했다. 가짜 피를 담은 풍선을 던지고 에이즈로 죽은 친구의 뼛가루를 뿌렸다. 영화도 이야기하지만 때론 착하고 얌전한 방법으로 주장해서는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액트업은 도발적 운동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를 정면으로 돌파했고, 결국 그들의 활동이 현재 HIV/에이즈의 기능적 완치 상태를 만들어냈다.

-한국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되짚어볼 만한 것들은 뭐가 있을까.

김조광수_ 1990년대 초반 ‘친구사이’ 같은 성소수자 단체들이 출현했던 시기가 매우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단체를 조직해 운동으로 이어가려는 움직임이 그때 시작됐다.

김승환_ 그곳(친구사이)이 있었기에 우리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권단체에서 만났다고 하면 괜히 정숙해 보인다. (웃음) 그 밖에도 홍석천의 커밍아웃, 하리수의 도도화장품 광고 등이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 같다. 괜히 하는 얘기가 아니라, 커밍아웃한 감독들이 꾸준히 영화를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김조광수_ 예전과 달리 2000년대 이후에는 확실히 창작자의 정체성이 명확해졌다.

이혁상_ <120BPM>을 이야기하는 자리니까 HIV/에이즈 운동 단체들의 이름을 언급하면 좋을 것 같다. 한국에서 HIV 감염인 당사자들이 최초로 만든 모임인 ‘KNP+’는 제각기 흩어져 지내던 사람들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하나의 단체를 만들기로 결심한 사건이다. 친구사이 내에도 소모임 ‘PL 가진 사람들’이 조직됐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런 단체의 출현이 역사의 변곡점을 마련한다고 본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이자 감독, 제작자로서 어떤 예술적 행동과 대응을 고민하고 있나.

김조광수_ <와니와 준하>(2001) 기자회견에서 나의 정체성을 겨냥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게이 커플의 모델이 누구냐, 당신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당시엔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당황해서 대답을 피했다. 이후에도 그 기자에게 연락이 왔는데 말하지 못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부정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 심리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언젠가 커밍아웃을 하면 꼭 게이영화를 만들겠다고. 게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 영화를 만드는 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적어도 내 후배들은 나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도록 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있다. 내가 연출하고 제작한 작품들을 보면서 퀴어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우리 제작사를 방문할 수 있게 됐다. 그런 일들이 중요하다고 본다.

김승환_ 레인보우팩토리를 통해 ‘스며드는’ 운동을 하고 싶다. 레인보우팩토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영화,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 영화들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닿아서 작게나마 영향을 주면 좋겠다.

이혁상_ <종로의 기적>은 착한 게이들이 나오는 착한 영화였다. 실제로 너무 착한 영화를 만든 게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그 뒤 우리의 재현 전략을 다시금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게이영화를 만든다면 착하고 이해받기 쉬운 혹은 너무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목소리는 지양할 생각이다. 이제는 그게 철 지난 방법 같다. 우리는 착한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젠 나쁜 게이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다. 그걸 통해서 우리의 시급하고 논쟁적인 이야기를 전할 생각이다.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의 파장이 큰 물결로 이어질 수 있다면 기꺼이 돌멩이의 역할을 하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김조광수_ <완월>이라는 장편영화 연출을 준비 중이다.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던 영조가 자신을 빗댄 듯한 소설을 발견하고는 소설의 작가를 찾아나서는데, 결과적으로 그 작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시대극이자 멜로드라마고, 현재 캐스팅 단계다.

김승환_ 레인보우팩토리는 다음 작품으로 <톰 오브 핀란드>(2017)를 개봉할 예정이다. 핀란드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투코 락소네가 주인공인 전기영화다. <이미테이션 게임>(2014)과 비슷한 지점도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살다가 그림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실존했던 인물의 이야기다. 지금은 캐릭터 ‘무민’ 작가와 더불어 핀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명이다.

이혁상_ 연분홍치마는 지금까지 <3xFTM>(2008년), <레즈비언 정치도전기>(2009), <종로의 기적>으로 성소수자 3부작을 선보였다. 최근 변규리 감독이 성소수자 부모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곧 4부작이 완성될 것 같다. 나 역시 이 작품에 프로듀서로 참여한다. 그런데 잘하면 5부작이 될 수도 있다. 김일란 감독이 <공동정범> 이후 차기작으로 준비 중인 주제가 인터섹스(intersex)다. 성소수자 내부에서도 LGBT 이외에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터섹스는 성별 이분법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지속해온 연분홍치마와 잘 어울리는 주제인 것 같다. 김일란 감독이 아픈 와중에도 매우 저돌적으로 인터섹스를 탐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극영화 시나리오를 계속 쓰고 있다. <조선의 태양>이라는 조총련계 재일 조선인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다.

이혁상이 사랑하는 퀴어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바운드> <파리는 불타고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처음 봤을 당시엔 게이로서 초기여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연애 관계를 맺는 데 서툴러서 감흥이 크지 않았다. 여러 연애의 경험을 쌓고 다시 봤을 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울었다. 영화는 개인의 경험과 역사 속에서 매번 새롭게 보인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워쇼스키가 자매가 아닌 형제이던 시절 만든 <바운드>(1996)는 레즈비언 누아르라는 파격적인 작품이다. <파리는 불타고 있다>(1990)는 대학에서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화질 안 좋은 VHS테이프로 봤는데, 보깅댄스와 흑인 게이 커뮤니티의 모습이 꽤 충격적이었다. 최근엔 넷플릭스에도 떴더라. (웃음) 소수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식에 많은 영감을 주는 영화다.”

김조광수가 사랑하는 퀴어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밀크> <해피 투게더>

“<브로크백 마운틴>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의 멜로드라마였다. 리안 감독 특유의 감수성이 성소수자나 비성소수자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멜로드라마를 만들어냈다. <해피 투게더>(1997) 역시 서로의 마음을 할퀴는 인물들의 세심하고 솔직한 감정을 놀랍도록 잘 표현한 영화였다. 장국영이 그리워서 가끔 보기도 하는 영화다. <밀크>(2008)의 주인공인 실존 인물 하비 밀크는 내 삶의 롤모델이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더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전기영화지만 일생을 다루는 게 아니라 특정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방식도 좋다.”

김승환이 사랑하는 퀴어영화

<패왕별희> <트랜스아메리카> <라잇 온 미>

“<패왕별희>(1993)에서 장국영이 연기한 캐릭터가 데이인데, 게이 커뮤니티에서 활동할 때 데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정도로 장국영과 이 영화를 좋아한다. 당시 김조광수 감독이 ‘혹시 데이가 <패왕별희>의 그 데이냐’라고 말을 걸면서 친해졌는데 어찌보면 이 영화는 김조광수 감독과 나를 이어준 영화이기도 하다. (웃음) <트랜스아메리카>(2005)는 성소수자이면서 부모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지금 봐도 시대를 앞서간 훌륭한 영화다. <라잇 온 미>는 정체성 고민이나 사회 속의 차별 등 일체의 외부 요인들을 제거하고 오로지 당사자들의 사랑만을 밀도 있게 다룬 영화다. 사람과 사람, 사랑과 사랑만이 중요하고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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