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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젊은 감독들이 이야기하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이주현 사진 백종헌 2016-08-24

10주년 맞은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장편영화제작연구과정 출신 백승빈, 조성희, 한승훈, 김정훈 감독 대담 ➊

한국영화아카데미(이하 아카데미, 현 원장 유영식)가 설립된 지 올해로 33년. 봉준호, 김태용, 최동훈 등 수많은 감독들이 아카데미를 거쳐갔다. 2007년부터는 정규과정에 더해 장편영화제작연구과정(이하 장편과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2010), 조성희 감독의 <짐승의 끝>(2010), 홍석재 감독의 <소셜포비아>(2014) 등이 장편과정을 통해 제작된 영화들이다. 장편과정 10주년을 맞아 올해 아카데미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 10주년: KAFA 十歲傳’을 준비했다(9월1일부터 4일까지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KAFA 십세전’이 열리기 앞서, 장편과정을 통해 주목받은 젊은 감독들에게 만남을 청했다. 모두 이번에 상영되는 작품들의 감독들로 <장례식의 멤버>(2008)의 백승빈 감독, <짐승의 끝>의 조성희 감독, <이쁜 것들이 되어라>(2013)의 한승훈 감독, <들개>(2013)의 김정훈 감독이 1차 대담 멤버다. 이들은 압박면접으로 유명한 아카데미의 면접 경험부터 아카데미의 정체성에 대한 얘기까지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다음 호 2차 대담도 기대해주시라.

백승빈

한국영화아카데미 22기. 대학 시절 전공은 미국학, 부전공은 영문학이었다. 영미문학에 대한, 소설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카데미 졸업작품이자 제6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절대악몽 부문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인 단편 <프랑스 중위의 여자>(2007)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아카데미 장편과정 1기 작품인 <장례식의 멤버>는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과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을 수상했다. 최근엔 옴니버스 공포영화 <무서운 이야기3: 화성에서 온 소녀> 중 하나의 에피소드 <여우골>을 연출했다.

<장례식의 멤버>

<장례식의 멤버> 장편과정 1기

감독 백승빈 / 출연 이주승, 김별, 유하복, 박명신

희준(이주승)의 장례식장에 모인 한 가족의 이야기. 중년의 동성애자인 아버지(유하복), 시니컬함이 극에 달한 고등학교 국어교사 어머니(박명신), 시체염습 일을 하는 고등학생 딸(김별)이 각자 공유하고 있는 희준과의 사연이 하나씩 플래시백으로 공개된다. 거침없는 대사가 인상적인 작품이며 소설과 영화의 특징도 자유자재로 오간다.

조성희

한국영화아카데미 25기. 산업디자인학과를 나와 아카데미에서 만든 중편 <남매의 집>(2008)으로 제8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장편과정 작품이자 장편 데뷔작 <짐승의 끝>으로 영화적 감각을 인정받았고, 송중기 주연의 <늑대소년>(2012)으로 흥행까지 맛보았다. 이제훈 주연의 세 번째 장편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에서도 감독의 다양한 장르적 취향과 상상력은 여전하다.

<짐승의 끝>

<짐승의 끝> 장편과정 3기

감독 조성희 / 출연 이민지, 박해일, 유승목

고향에 아이를 낳으러 가는 순영(이민지)과 순영이 탄 택시에 합승한 정체불명의 남자(박해일)의 기묘한 이야기. 순영의 과거를 꿰고 놀라운 예언을 하는 이상한 남자,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배경, 비현실적인 사건. 이처럼 영화는 불친절하고 불확실한 것투성이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긴장감으로 관객을 붙들어맨다. 조성희 감독의 놀라운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한승훈

한국영화아카데미 28기. 영화영상학과를 졸업하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제11회 미쟝센단편영화제 희극지왕 부문 작품상 수상작인 <이기는 기분>(2011), <엄마의 커다란 김치찌개>(2009) 등을 만들었고, 장편 데뷔작 <이쁜 것들이 되어라>로 다시금 소란스럽지 않게 코미디를 구사하는 재능을 뽐냈다.

<이쁜 것들이 되어라>

<이쁜 것들이 되어라> 장편과정 6기

감독 한승훈 / 출연 정겨운, 정인기, 윤승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지만 매번 사법고시의 문턱에서 좌절하던 10년째 고시생 정도(정겨운)의 성장기. 목적 없이 살았던 한 청년의 자아찾기 과정을 유쾌하고 사랑스럽게 그려낸다. 배우 정겨운의 발견이란 얘기가 있었듯 연기 연출도 좋다. 카파 필름에선 잘 볼 수 없었던 로맨틱 코미디 장르다.

김정훈

한국영화아카데미 28기. 서울대학교 영화동아리 얄라셩에서 활동했고 <이태원 살인사건>(2009) 연출부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단편 <DEAL>(2010) 등을 만들었고, 아카데미에 입학해선 어려서부터 관심이 많았던 폭탄이란 소재로 첫 장편 <들개>를 만들었다. 특정 장르나 방향을 규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간의 악하고 어두운 내면에 관심이 많아서 범죄나 폭력, 이상심리 관련 소재를 좋아한다고.

<들개>

<들개> 장편과정 6기

감독 김정훈 / 출연 변요한, 박정민, 오창규, 김희창

대학원 연구실에서 조교로 일하는 정구(변요한)는 남몰래 사제 폭탄을 만드는 게 취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만든 폭탄을 터뜨려줄,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효민(박정민)을 만난다. 어쩌다 아웃사이더, 사회 부적응자가 돼버린 두 청춘의 자화상을 통해 이 시대 청춘들의 답답한 현실을 보여준다.

-근황 얘기로 시작하자. 다들 어떻게 지냈나.

=조성희_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 끝난 뒤엔 다음에 뭐 할지 생각하면서 그냥 집에 있었다. 대략 다음 작품의 윤곽은 잡았지만 아직 얘기할 단계는 아니다. 천천히 시작하려고 한다.

=백승빈_ 최근엔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앤솔러지 형식의 작품이 될 텐데, 연작 시리즈로 매해 겨울마다 한편씩 찍고 있다. 이번에도 여러 군데에서 제작지원을 받아서 올겨울에 촬영할 계획이다. 그전엔 옴니버스 공포영화 <무서운 이야기3: 화성에서 온 소녀>의 한 에피소드 <여우골>을 찍었다.

=한승훈_ <이쁜 것들이 되어라> 끝나고 용필름에서 <키 오브 라이프>(감독 이계벽, 하반기 개봉예정) 각본 작업에 1년간 참여했다. 지금은 신생 제작사에서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작업 중이다. 로맨틱 코미디가 될 것 같은데, 진행 상태가 매우 느리다. 그러고보면 상업 장편을 두편이나 만든 조성희 감독님이 참 대단한 것 같다.

=김정훈_ 동기들 사이에선 서로 근황 묻는 게 금지다. (웃음) 아무튼 조성희 감독님이랑 제작사 비단길 사무실을 공유하면서 지내고 있다. <들개> 개봉 전에 비단길과 계약을 했고, 계속해서 다음 작품 아이템을 개발하고 있다. 그동안 방황을 많이 해서 빨리 다음 작품을 찍고 싶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걸 찍었던 때와 달리 좀더 보편적인 관객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 고민이 많다. <들개> 끝나고는 정말 너무 후련했다. 그때 모든 걸 소진해서인지 그만큼의 열정과 에너지를 다시 쏟을 만한 대상을 빨리 못 찾고 있는 것 같다.

=한승훈 나 역시 아카데미 졸업하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쓰고 싶은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은 커지고, 그러면 부담감이 커지고, 결국 글은 더 안 써지는 과정이 반복됐다.

-<늑대소년> <탐정 홍길동>, 두편의 상업영화를 만든 조성희 감독 또한 이런 고민의 시간을 통과했을 것 같다.

=조성희 투자받고, 캐스팅되고, 작품 들어가는 과정에는 노력뿐만 아니라 여러 운이 따라야 하는 것 같다. 작품은 운명 같은 것, 사랑 같은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쟤 좋아할 때 쟤도 나 좋아해야 되고, 이것저것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한다. 지금 제대로 얘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웃음)

=백승빈 졸업영화 만들고 바로 상업장편영화 데뷔해서 흥행까지 한 조성희 감독이 가장 순탄하게 흘러간 좋은 모델일 거다. 다들 비슷하겠지만 나 역시 <장례식의 멤버> 이후 제작사와 미팅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나 스스로 준비가 덜됐던 것 같다. 김정훈 감독이 말한 것처럼 개인적인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 대중을 고려한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갭을 크게 느꼈다.

=한승훈 <이쁜 것들이 되어라>를 만들 땐 영화의 구조라든지 인물의 배치 같은 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쓰고 싶은 방향대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썼다. 그러다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쓰려니 여태껏 간과했던 것들 혹은 몰랐던 것들과 부딪혀야 되더라. 일종의 상업영화 문법 같은 것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도 중요한데 그런 부딪힘을 어떻게 돌파해 나가는가도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백승빈, 조성희 감독의 친분은 아카데미 입학 전부터 시작됐다고 들었다.

=조성희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친한 대학교 동아리 후배이자 <남매의 집>에서 깨진 안경 끼고 출연한 배우 백승익이라고 있는데, 그 친구 사촌형이 백승빈 감독이다. 승익이가 사촌형이 영화아카데미에 다닌다고 해서 소개시켜줬다. 그때 삼겹살 먹으면서 승빈 형을 처음 뵙고 아카데미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었다. 그러고보니 <장례식의 멤버> 콘티도 내가 그려줬다. (웃음)

=백승빈 맞다, 협박조로 <장례식의 멤버> 콘티를 부탁했었다. 본인 영화 콘티도 안 그리는 사람인데.

=조성희 <장례식의 멤버> 현장에도 놀러갔다. 박기용 전 원장님이 연출전공 신입생들을 데리고 장편과정 촬영장 견학을 시켰는데, ‘내가 그린 콘티로 찍겠구나’ 내심 뿌듯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본 콘티가 내가 그린 콘티가 아닌 거다! (웃음) 그날 촬영분은 추가로 그린 콘티로 찍고 있었다. 깔끔하게 콘티를 내가 다 그렸어야 했는데….

=백승빈 사촌동생한테 성희를 소개받고, 성희가 아카데미 입학 포트폴리오로 냈던 영화(<트로피칼리아>)도 봤다. 무슨 얘기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웃음) 그런데 그게 너무 좋은 거지. 하나도 알 수 없는데 좋았다. 아카데미에 합격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면접 팁 같은 것도 많이 가르쳐주지 않았다.

=조성희 그때 승빈 형이 아카데미 면접 보고 고향 가는 기차 안에서 분한 마음에 부들부들 떨었다는 얘기를 해줬다.

=한승훈 나는 면접 들어가자마자 노래를 해보라고 시켰다. 1분 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더니 면접 보던 선생님이 “넌 노래를 못 불러서 일단 떨어졌어” 하시더라. (웃음) 또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자기소개서에 맞춤법 틀린 게 있었다. 그걸 지적하면서 ‘맞춤법을 틀려서 낸 건 점검을 안 했다는 뜻인데, 결국 그건 네가 게으르다는 것 아니냐, 게으른 사람을 우리가 왜 뽑아야 하느냐’고 하시더라. 아카데미 면접이 힘들기로 유명하다. 아는 선배는 면접 보러 들어갔는데 ‘니체’ 스펠링을 불러보라 시켰다고 했다.

=백승빈 어떤 친구는 면접 때 선생님들이 뭐 보여줄 거 없냐고 해서 돌려차기를 했다. (일동 웃음) 단편 <민요삼총사>(2007) 만든 아카데미 23기 이호경 감독이 돌려차기하고 아카데미에 붙었다.

=조성희 2차는 필기시험인데 작품 분석으로 아카데미 20기 선배 김선민 감독의 단편 <가리베가스>(2005)가 나왔다. 동기인 윤성현 감독이, 걔가 좀 특이한 애인데, (웃음) 거의 백지를 냈다. 그런데 2차 통과를 했다. 무슨 깡으로 백지를 냈는지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불렀다고 하더라. 성현이가 포트폴리오로 낸 영화가 단편 <아이들>(2008)인데 영화가 너무 좋으니까 선생님들도 어떤 놈인지 궁금했나보더라.

=김정훈 나 역시도 면접 때 잊을 수 없는 얘기를 들었다. “12명 중에 네 포트폴리오 점수가 최저다. 넌 필기를 잘 봐서 올라온 거다.” “지금까지 아무 성과가 없었으면 영화하면 안 되는 사람 같다. 공부가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은데 왜 영화를 하려고 하느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멘털이 완전히 붕괴된 채 밖으로 나왔는데, 화장실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면접관이었던) 정성일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너무 멍해 보였는지 다들 그렇게 면접 봤다면서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 손이 너무 따뜻해서 순간적으로 마음이 녹아내렸다. (일동 웃음)

-<장례식의 멤버>를 포함해 고태정 감독의 <그녀들의 방>(2008), 이숙경 감독의 <어떤 개인 날>, 애니메이션 <제불찰씨 이야기>가 장편과정 1기 작품이다. 당시 장편과정에 대한 내부 반응은 어땠나.

=백승빈 그때만 해도 시스템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라서 반신반의했던 것 같다. 이 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갈까, 스탭들은 어떻게 구성해야 할까, 그런 질문들을 가진 채로. 아카데미 22기가 2년제 정규과정의 마지막 기수여서 정규과정 2년, 장편과정 1년, 총 3년을 다닌 유일한 기수다(지금은 정규과정 1년, 장편과정 1년이다). 졸업 대상자 중에 장편 시나리오를 갖고 있거나 장편을 쓰면 좋겠다 싶은 사람들을 당시 박기용 원장님이 일일이 만나서 면담했다. 나는 어렴풋한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다음달까지 시나리오를 써오라고 해서 <장례식의 멤버> 초고를 썼다. 아카데미 장편과정은 개인 돈 들이지 않고 장편을 찍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장편과정에 참여하는 동안엔 돈을 벌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장편과정 1기에 참여한 우리가 장편과정 동안 장학금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했다. 20만~30 만원 정도의 그리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게 장편과정 1기에 참여한 감독들이 시위해서 쟁취한 거다. (일동 ‘와~’)

=조성희 그땐 왜 다들 거지였는지 모르겠다. (웃음) 대학교 다닐 때도 그만큼 힘들진 않았던 것 같은데.

=백승빈 앞으로 ‘카파 필름’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가기 위해선 캐스팅에 신경을 좀더 써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캐스팅은 철저히 연출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다만 박기용 선생님의 분명한 철칙은 학생들의 예술적 아이덴티티가 제대로 부각될 수 있도록 확실히 지지해주자는 거였다. 어쨌든 영화아카데미는 ‘학교’이기 때문에, 그건 교육자로서 좋은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

=한승훈 <이쁜 것들이 되어라>에는 드라마와 상업영화에 주로 출연해온 정겨운 배우가 캐스팅됐다. 배우 소속사에 캐스팅 시나리오를 돌린다고 했을 때 학교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돌리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안 될 것 같다는 분위기. 차라리 독립영화 진영의 배우를 발굴하는 걸 1차 목표로 삼고 캐스팅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튼 장편과정 1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스템의 변화가 느껴지는 것 같아 흥미롭다. 28기인 우리가 입학할 때는 장현수 원장님 체제였는데 이전 체제와 차별화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던 것 같다. 2010년,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때에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 조성희 감독의 <짐승의 끝>이 개봉하기도 해서 아카데미 영화들이 화제가 됐고, 학교에서도 전선에 나갈 수 있는 인재들을 키우겠다는 모토로 시스템을 다져갔던 것 같다.

=김정훈 그때 김태균 감독님이 연출과 교수로 처음 오셨는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너희들, 밖에 나가서 굶어죽을 영화 찍을 거냐”는 얘기 진짜 많이 하셨다. (웃음) 우리 기수에 장르영화에 관심 있는 연출자들이 애초에 많기도 했고.

=조성희 <짐승의 끝> 만들 땐, 첫 장편을 만든다는 것에 신났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친구들이나 부모님한테 ‘나 진짜 영화감독입네’ 했던 것 같다. 박해일 선배님이 캐스팅되고 난 뒤에 괜히 엄마 앞에서 “어제 박해일 선배랑 얘기가 길어졌어” 그런 자랑하고. (웃음) 장편을 찍으면서 뭔가 제대로 영화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멘토링 시스템도 중요해 보인다.

=백승빈 선생님들이 장편과정 1기 때부터 다른 건 몰라도 멘토는 확실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땐 학교 외부의 감독들과도 매칭을 시켜줬다. 주로 아카데미 출신 선배 감독들과 많이 연결됐다. 결국 멘토링에서 얻는 게 가장 많은 것 같다. <장례식의 멤버>의 멘토는 당시 연출 전공 선생님이었던 오승욱 감독님이었다.

=조성희 오승욱 감독님이 백승빈 형을 굉장히 좋아한다. 수업 때 형 얘기를 많이 하셨다.

=백승빈 그런데 오승욱 감독님이 좋아하는 연출자 중에서 잘된 사람은 조성희 감독밖에 없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아카데미에 다녀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오승욱 감독, 정성일 감독이자 평론가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거였다. 아카데미가 지금은 좀더 실전을 대비하는 곳으로서의 의미가 커졌지만, 정규과정이 2년제이던 우리 때만 해도 ‘교육’에 더 악센트를 뒀다.

=조성희 오승욱 감독님은 약간 <위플래쉬>(2014)의 플래처 교수(J. K. 시먼스) 같지 않나? 가차 없으시잖아. (웃음)

=한승훈 <이쁜 것들이 되어라>는 박헌수 감독님이 멘토였다. 박헌수 감독님이 내 얘기를 많이 끌어내려고 노력하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다지 소통이 원활한 성격이 아니어서 생각과 고민을 남과 잘 공유하지 못하는데, 감독님께서 “네 얘기 좀 해봐라, 내가 싫으냐, 왜 도망다니느냐” 그런 얘기들을 하셨다. 참, 결혼식 주례도 봐주셨다. (웃음)

=김정훈 <들개>의 멘토는 김태균 감독님이었다. 사실 <들개>는 장편과정으로 뽑히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사제 폭탄이라는 소재만 공유할 뿐 처음엔 지금과 전혀 다른 내용의 시나리오였다. 이야기를 진전시키려 해도 잘되지 않아서 심사 때마다 많이 혼났다. 그런 날이 반복되자 압박이 컸다. 게다가 직전 기수에서 장편과정으로 선정됐다가 시나리오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촬영에 못 들어간 작품이 있었는데 ‘너도 제대로 못 하면 영화를 못 찍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교수님들이 유독 나한테 많이 했다.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을 때 김태균 감독님 못지않게 도움을 줬던 분이 정지우 감독님이다. 작품 심사할 때 정지우 감독님이 해주신 짧은 코멘트가 너무 좋아서 그 후로 따로 찾아뵙고 이것저것 많이 여쭤봤다.

=한승훈 정지우 감독님이 학생들에게 정말 인기가 많았다. 정말 섬세하면서도 정확하게 보신다.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이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으면서 이후 카파 필름의 배급 규모도 커졌다. <파수꾼> 이전과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는지.

=조성희 <파수꾼>이 물꼬를 터줬다. 화제가 많이 됐고 인정도 많이 받았다. 앞으로 아카데미에서 만들어지는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배급해도 되겠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홍석재 감독의 <소셜포비아>(2014)나 안국진 감독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를 보면 점점 배급 환경이 나아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카파 필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 또한 많이 높아진 것 같고. 의심과 불안으로 장편과정이 시작했지만 꾸준히 성과를 내면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걸 인정받게 된 것 같다.

=한승훈 배급 같은 외부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파수꾼> 이후 입학한) 우리에겐 굉장한 동기부여와 자극이 됐다. 영화를 잘 만들면 이만큼의 주목과 이만큼의 흥행을 이룰 수 있구나, 어떤 선을 넘을 수 있구나 하는 가능성을 제공해준 작품이 <파수꾼>이다.

=김정훈 배우들을 캐스팅할 때도 영향을 끼친 측면이 있다. <들개>에 변요한, 박정민 배우가 출연하는데, 박정민은 <파수꾼>에 출연한 배우라서 장편과정의 시스템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변요한은 이제훈의 한국예술종합학교 후배여서인지 이 과정을 생소해하지 않았다. 배우들이 아카데미의 장편에 의욕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끔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 <파수꾼>이 아닌가 싶다.

-제작비(기본 5천만원)를 생각하면 장편을 만들기에 넉넉한 조건은 아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나름 배움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나.

=한승훈 그건 굉장히 긍정적인 생각이다. (웃음) 물론 장편을 만들 수 있는 제작비이긴 하지만 배우는 말할 것도 없고 스탭들도 기존에 받던 인건비보다 훨씬 적게 받고 참여한다. 우리야 장편을 완성하면 개인 포트폴리오로 남으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고생하면서 뛰지만 스탭들은 다르지 않나. 많은 사람의 신세를 져야 하는 시스템인 것 같고, 스탭들의 처우를 위해서라도 제작비는 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정훈 <들개>의 경우 사제 폭탄이 소재인 영화라 기술 스탭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하는 영화였다. 시나리오를 쓸 때도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제대로 그림을 구현하지 못할 거면 차라리 폭발 장면을 안 쓰는 게 낫다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오히려 당시 최익환 원장님이 폭발물 신이 생각만큼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조성희 제작비가 적어서 정상적인 과정으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인건비는 그 돈으로 충당이 안 된다. 그렇지만 제작비를 조금 올리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작비가 적기 때문에 순수하게 영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들을 더 고민하게 된다. 새로운 표현을 강제로 모색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나 같은 경우 <짐승의 끝>의 녹음, 믹싱 업체와 <늑대소년> 때 다시 만나 함께 작업했다. 내가 이 업체와 작업해야 한다고 우긴 건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나중에 연출자들이 신세를 갚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장편과정을 하려는 후배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는 거다. 상황은 열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어보려는 집요함을 기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아카데미를 향한 발전적 쓴소리도 듣고 싶다.

=백승빈 한달 전쯤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한 적 있다. 연출전공 1학년생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질문을 받았다. “장편과정으로 영화를 찍으셨는데, 장편영화 찍을 때 대중은 생각하지 않고 영화를 만드셨나봐요?”(웃음) 좀 뜻밖의 질문이었고, 처음 받아보는 질문이었다. 그때 아카데미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확 느꼈다. 장편과정 작품을 만들면서 굳이 대중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 건 아닌데, 또 대중을 생각하지 않은 게 큰 잘못인가 싶더라. <파수꾼> 이후 대중으로부터 주목받은 영화들이 꽤 있어서인지 요즘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친구들은 장편영화 개봉까지 염두에 두고 들어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승훈 입학 당시 <파수꾼> <짐승의 끝> 같은 경우가 있어서 장편과정 연출에 대한 큰 동기를 제공받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특별한 감독이어서, 그들이 영화를 너무 잘 만들어서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확실히 변한 건 있다. 장편과정 영화가 완성되고 영화 개봉 시점이 잡혔을 때 배급 규모가 커졌다는 걸 느꼈다. 28기 동기인 엄태화 감독의 <잉투기>(2013) 는 100개관 정도에 걸렸으니까. 그런데 장편과정 땐 자기가 쓰고 싶은 것, 자기가 좋아하는 걸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 더 빛내고, 어떻게 더 발전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작업이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서 멘토가 붙는 거고. 개봉과 흥행을 먼저 생각하는 건 장편과정의 취지와 맞지 않는 것 같다.

=백승빈 개인적으로는 아카데미가 정체성 혼란을 겪던 시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장편과정 1기에 참여한 박기용 원장님부터 지금의 교수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박기용 원장님은 지금 단국대에 계신데,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졸업작품인 김대환 감독의 <철원기행>(2014)을 보면 마치 아카데미 장편과정 1기 때 나올 법한 영화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원장님의 성향에 따라 아카데미의 방향성과 시스템도 많이 변해왔다. 개인적으로는 현장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좋은 연출자를 기르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지만 아카데미가 영화학교로서, 교육기관으로서 담당해야 할 역할 또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현장에서 아카데미 출신 감독들이 점점 줄기 시작했고, 그러다 중요한 시기에 장편과정이 시작됐고, 장편과정 1, 2기를 지나면서 조금씩 아카데미가 원했던 실질적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지금은 어떻게 하면 빨리 (상업장편영화) 데뷔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아지게 된 것 같다. 뭐가 좋고 뭐가 나쁘다, 뭐가 옳고 뭐가 틀렸다 그런 맥락이 아니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거다. 우리 땐 연출전공자가 상업영화 데뷔 얘기를 하면 뭐랄까 스노브(속물)처럼 보이는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 때 선생님들이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얘기했던 건 자기 영화를 찾아서 나가야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 영화’라는 말을 하는 게 왠지 부끄럽고 오그라드는 분위기인 것 같다.

=조성희 지금의 아카데미 분위기를 잘 모르는 나로선, 아카데미를 통해서 자기가 무얼 얻고 무얼 할지에 대한 생각은 개개인이 모두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입학할 때, 홈페이지에서 본 것 같은데,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끌어갈 영화 인력 배출’이라는 문구를 읽은 터라 그런가보다 했다. (웃음) 학교의 방향, 학교의 분위기, 원장님의 의지가 있을테고, 거기 임하는 학생들 각자의 목표와 의지 또한 있을 거다. 어떤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아 빨리 데뷔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거고, 장편과정을 하나의 훈련의 기회로 삼는 사람도 있을 거고, 단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궁금한 사람도 있을 거고. 그렇게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아카데미가 상업영화 데뷔를 위한 등용문이나 예술영화를 만드는 레이블, 어느 한쪽으로 규정되는 것보다는 말이다. 그래야 좀더 다양한 작품이 나오지 않겠나. ‘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 하면 딱 떠오르는 고정된 이미지가 없었으면 좋겠다.

=한승훈 본질적인 건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학생들이 가진 예술적 특징을 키워주려고 노력하는 작업들 말이다. 만약 변화가 있다면 그건 선배님들의 작업물이 쌓이면서 아카데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뀐 것 아닐까. 거기에 시대적 변화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고. 예전의 영화과 친구들이 홍상수나 김기덕의 영화를 논했다면 지금의 친구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그 흐름에 아카데미가 동참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백승빈 바라는 건, 고유한 느낌이 살아 있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거다. 아카데미가 독특한 게 뭐냐면, 교육기관이면서 동시에 영화 제작사의 역할도 하고 있다는 거다. 그런 시스템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화라는 게 있다고 본다. 교수님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멘토로 붙어서 영화를 지도해주는데, 이를테면 그런 시너지로 나올 수밖에 없는 영화들을 많이 보고 싶다.

=조성희 지금 이대로 장편과정이 지속적이었으면 좋겠다. 이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고유의 에너지와 창의성이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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