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이 나는 도시들이 있다. 보고 있는 대상들이 지나치게 아름다워 왠지 믿기지 않고, 신비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파올로 소렌티노의 <그레이트 뷰티>(2013)에서 동양인 남자가 로마의 아름다움에 반해 사진을 찍다, 기절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나에겐 그런 현기증을 안긴 도시가 셋 있다. 로마, 파리, 그리고 베네치아다. 세 도시 모두 어리둥절한 채, 하루 종일 멍하니 바라보며 걷기만 했다. 지도도 잠시 잊고, 그냥 목적 없이, 건물과 건물 사이, 광장과 광장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하루 종일 얼마나 걸었던지 저녁에 탈진이 됐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도시에 혼 들려 있었음을 알게 된다. 괴테도 <이탈리아 기행>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저녁이 되니까 피곤하고 기진맥진해진다”고 고백할 정도니, 경험이 낮은 나로서는 당연한 흥분이었다. 베네치아에는 기차로 도착했는데, 중앙역인 산타 루치아역에 내리자마자 펼쳐지는 운하의 장관에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월요일 아침>, 베네치아의 영혼을 여행
오타르 이오셀리아니는 옛 소련 연방인 조지아의 감독이다. 지금은 프랑스에서 주로 작업한다. 러시아의 국립영화학교(VGIK) 출신인데, 서구 부르주아의 관습을 풍자한 코미디를 잘 만든다. 대사가 별로 없고, 사회의 부조리한 상황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자크 타티와 비교되고, 코미디 속에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를 은밀하게 숨겨놓는 것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비교된다. 세 감독의 영화는 대체로 조용하다. 이오셀리아니가 서구에서 이름을 알린 데는 베니스국제영화제의 도움이 컸다. 특히 <달의 애인들>(1984)이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은 이후, 이오셀리아니는 이 영화제의 단골 초빙 감독이 된다. 그가 만든 베네치아 배경의 대표작이 <월요일 아침>(2002)이다.
프랑스의 중년 공장 노동자가 주인공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씻고, 밥 먹고, 차 타고 출근하여, 공장 앞에서 급히 담배 한대 피우고,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하는 ‘지루한’ 일과가 정확한 시계처럼 지켜진다. 감독은 이 장면을 반복하여 보여준다. 유일한 낙은 퇴근 후, 자기 방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것도 집의 배관 고치기, 전등 갈기 같은 잡일로 중단되기 일쑤다. 이 남자, 어느 날 부친으로부터 기대하지도 않았던 약간의 돈을 받자, 출근하다 말고 갑자기 베네치아로 가버린다. 태엽시계의 나사가 탁 풀린 순간인데, 곧이어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산타 루치아역 앞의 대운하다.
역 앞을 나오니, 푸른색과 녹색을 섞어 놓은 듯한 비취색의 물빛은 출렁이고, 운하 건너 맞은편엔 신고전주의 양식의 ‘산 시메온 피콜로 성당’(Chiesa di San Simeon Piccolo)이 균형 잡힌 자태를 뽐내고 있다. 기차로 도착하는 모든 여행객들에겐 베네치아의 첫인상으로 각인되는 이 성당은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비현실적인 대리석 건물 자체가 사람들의 상상을 압도한다. 베네치아 ‘관광영화’로는 대단히 유용한 <투어리스트>(2010)에서 조니 뎁도 바로 여기서 사랑의 여행을 시작한다.
프랑스 중년 남자는 거리에 화가들이 많은 게 반갑다. 이들은 베네치아의 거장 티치아노를 비롯한 유명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들을 준비해놓고, 관광객들에게 얼굴 부분만 바꿔 그려준다. 이오셀리아니가 직접 출연해,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갈색과 은색 옷을 입은 필립 4세>(1632)를 배경삼아 모델을 하고 있고, 남자는 흥미로운 듯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 남자가 베네치아로 올 때 가져온 유일한 짐이 간단한 화구들이다.
베네치아에서의 시간은 프랑스와는 정반대로 진행된다. 아무런 계획도 없고, 말 그대로 발 가는 대로 이곳저곳을 구경한다. 소매치기를 당해 돈을 몽땅 잃어버렸지만, 다행히도 동년배의 베네치아 노동자들을 만나 이들의 도움으로 숙식을 모두 해결한다. 중년의 노동자들끼리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우정을 나눈 것이다. 매일 보트를 몰고 도시의 곳곳을 구경하던 중, 현지 친구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산 마르코 성당’ 뒤 어느 집 지붕에 올라가 도시 전체를 구경시켜준다. 눈앞에는 파노라마처럼 베네치아의 운하와 운하 주변의 걸작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 그 친구의 설명대로 카메라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산 조르지오 성당’(San Giorgio), ‘치텔레 성당’(Zitelle), ‘레덴토레 성당’ (Redentore), 그리고 ‘살루테 성당’(La Salute)을 비춘다. 네 성당 모두 베네치아의 보석이자,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의 빛나는 유산이다. 이때 베네치아 친구가 말한다. “이게 베네치아야! 중요한 건 영혼이지. 마르코 폴로를 움직인 그 영혼, 티치아노에게 걸작을 그리게 했던 그 영혼 말이야. 자, 이것이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그러자 카메라는 베네치아의 영혼을 잡으려는 듯 다시 네 교회를 차례대로 천천히 보여준다.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은 이전과 똑같이 살고 있는 것 같다. 아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평소처럼 행동한다. 그림 솜씨를 닮은 고교생 아들은 마을 교회에 그리던 벽화 <용을 잡는 산 조르지오>를 완성해가고 있다. 다시 ‘월요일 아침’, 영화의 마지막에서 노동자는 이전과 똑같이 출근 준비를 하고, 화면에는 공장의 수많은 굴뚝들이 가득 보인다. ‘베네치아의 영혼’을 선물받은 이 남자가 앞으로 어떤 삶을 펼칠지는 우리의 상상에 맡겨놓은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에게 베네치아란?
화가가 어울릴 것 같은 프랑스의 공장 노동자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베네치아를 찾았다. 세상 사람들은 일탈을 꿈꿀 때, 이탈리아로, 또 베네치아로 떠나는데, 그렇다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같은 상황에서 어떤 도시를 상상할까? 역시 베네치아로 짐작된다. 이탈리아식 코미디 <빵과 튤립>(2000)이 그런 상상을 뒷받침한다. 바깥에 덜 알려진 이탈리아의 중견감독 가운데, 과거의 ‘이탈리아식 코미디’를 맵시 있게 되살려낸 대표적인 감독이 실비오 솔디니다. 사랑 이야기 속에 이탈리아의 풍습과 통념을 패러디한 게 이 장르의 특징인데, 이것은 솔디니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과거 루이지 코멘치니 감독이 지나 롤로브리지다를 내세워 <빵, 사랑, 그리고 판타지>(1953), <빵, 사랑, 그리고 질투>(1954) 같은 코미디로 이 장르를 개척했는데, 솔디니의 <빵과 튤립>이란 제목도 코멘치니의 영화를 의식한 것이다.
로잘바(리치아 말리에타)는 이탈리아 남부 페스카라에 사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사업가 남편은 바쁘다는 핑계로 밖으로만 나돌고, 10대 두 아들은 엄마를 거의 투명인간 취급한다. 가족들의 아침식사 준비를 마치면, 청소하고 빨래하다 하루를 다 보낸다. 게다가 남편은 웬 잔소리가 그리도 많은지, 아내의 행동이 굼뜨다고 틈만 나면 핀잔이다. 사실 로잘바는 뭘 자꾸 잊어버리고, 떨어뜨리곤 한다. 가족 모두 단체여행을 갔다가, 로잘바는 칠칠맞게 휴게소에서 관광버스를 놓쳐버렸다. 다음 목적지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지나가는 승용차를 얻어 탔는데, 이 차의 최종 목적지가 베네치아다. 차 주인은 잠에 떨어졌고, 로잘바는 중간에 내리지 않고,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베네치아로 차를 몬다.
이탈리아 사람인 로잘바에게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과 그 앞의 광장은 압도적인 풍경 그 자체다. 로잘바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광장과 성당과 성당 옆의 첨탑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단 하루만 베네치아를 구경하고 가족에게 돌아가려 했는데, 풍경에 넋이 나간 로잘바는 마지막 기차를 그만 놓치고 만다. 여비도 떨어져 싼 방을 하나 구하려 했는데, 식당주인 페르난도(<베를린 천사의 시>의 주인공인 브루노 간츠)는 자기 집의 조그만 방을 빌려준다. ‘튤립’의 향기가 풍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감독 솔디니는 외부에 알려진 베네치아의 명소보다는 뒷골목, 작은 광장 등을 잘 이용한다. 알다시피 베네치아는 물 위에 건설된 도시다. 땅을 아주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건물들이 다른 도시들보다는 더 높고, 서로 거의 붙어 있다. 한치라도 아끼려는 결과였다. 베네치아 특유의 좁은 골목길은 이렇게 탄생했다. 현지에서 ‘칼레’(Calle)라고 부르는 골목은 어른 한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곳도 있다. 또 길도 미로처럼 얽혀 있어, 잘못 들어서면 꼼짝없이 갇히기도 한다. 베네치아의 칼레는 복잡하고 좁아서 길 잃기 십상이지만, 운이 따르면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1996)의 우디 앨런처럼 꿈의 연인(줄리아 로버츠)과 우연히 맞닥뜨릴 수도 있다.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도 베네치아의 골목길을 잘 이용한 작품이다.
이탈리아는 넓고 아름다운 광장으로도 유명한데, 베네치아의 광장은 다른 도시에 비해 대단히 작다. 그리고 베네치아에선 광장도 일반적인 단어인 ‘피아차’(Piazza)로 불리기보다는 ‘캄포’(Campo, 들판이란 뜻)라고 불린다. 대표적인 광장인 산 마르코 광장 정도가 피아차이고, 나머진 거의 캄포, 또는 그것보다 더 작은 개념인 ‘캄피엘로’(Campiello)라고 불린다. 계몽주의 시절 베네치아를 대표하던 희극작가 카를로 골도니의 작품들은 주로 이 캄포, 또는 캄피엘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를테면 <일 캄피엘로>(Il campiello)는 조그만 광장 주변에서 베네치아 사람들이 보여주는 일상적인 관습을 풍자한 작품이다. 솔디니의 <빵과 튤립>도 마치 골도니의 코미디처럼, 사람들이 캄포 주변을 맴돌고, 소문을 퍼뜨리고, 오해하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풀려, 캄포에서 춤추는 것으로 끝난다. 짐작하겠지만 로잘바는 베네치아의 ‘튤립’을 선택한다.
<투어리스트>. 저 멀리 산 마르코 성당 주변이 보인다. 사진 앞쪽은 살루테 성당.
베네치아, 현대판 ‘사랑의 성지’ 시테라 섬
베네치아는 일탈의 유혹뿐 아니라, 그곳에 가면 사랑이 이뤄질 것 같은 상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신화에 따르면 비너스의 고향은 그리스의 시테라 섬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의 배경이 된 섬이다. 말하자면 시테라 섬은 사랑의 성지인데, 그 성지의 현대적 공간은 베네치아로 변한 것 같다. 베네치아도 섬이다. 그러기에 많은 영화들이 베네치아에서의 사랑을 꿈꾼다. 이런 신화적인 믿음을 퍼뜨리는 데는 베네치아의 계몽주의 시인 자코모 카사노바도 한몫했을 것 같다. 카사노바가 말년에 보헤미아의 도서관에 칩거하며 자신의 삶을 회상한 방대한 기록 <카사노바 나의 편력>(한국판은 발췌본)에 따르면, 그는 이탈리아에서 640명, 독일에서 231명, 프랑스에서 100명, 터키에서 91명,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1003명의 여성과 사랑을 나눴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의 허세를 다 믿을 독자는 많지 않겠지만, 책 속에 묘사된 아름다운 외모의 여자들, 또 남자들 그리고 사랑에 거리낌 없는 그들의 태도에 야릇한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테다. 당대 최고급의 선진도시가 베네치아인데, 문명이 치러야 하는 대가인 성적 억압을 뚫는 그곳의 자유로운 문화는 도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런 궁금증은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덴마크의 여성감독 론 셰르픽은 캐리 멀리건이 주연한 성장 코미디 <언 애듀케이션>(2009)으로 우리에게도 제법 알려져 있다. 데뷔 때는 라스 폰 트리에가 주도하던 극단적 리얼리즘 운동인 ‘도그마 95’에 서명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셰르픽이 ‘도그마 95’의 형식으로 만든 로맨틱 코미디가 <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2000)이다. 덴마크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매주 수요일마다 시에서 진행하는 이탈리아어 수업에 참가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예닐곱 되는 이들은 최근에 가족과 사별했거나, 직장에서 해고 위기에 처해 있거나, 혹은 고아나 다름없이 혼자 사는 고독 속에 놓여 있다. 어쩌면 이들에게 유일한 낙이 일주일에 한번 ‘본 조르노’(Buon Giorno!) 같은 간단한 이탈리아 말을 배우는 ‘이탈리아어 초급반’에 가는 것 같다. 평소에 이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한데, 여기만 오면 웃음이 떠나지 않아서다. 초급자들에게 이탈리아 말은 꽉 막힌 공기를 뚫는 조그만 창문 같은 역할을 한다.
이탈리아어 초급반에 다니는 이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함께 여행을 가는 곳이 베네치아다. 이들 중에 몇명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고 있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저 멀리 운하 맞은편에 보이는 산 조반니 성당을 배경으로, 이들이 함께 단체 사진을 찍는 것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곤돌라를 타고, 운하 옆을 걷고, 골목길에서 같이 헤매는 사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용기를 낸다. 식당에 함께 모인 이들이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의 유명한 이중창 <오 사랑스런 소녀여>(O soave fanciulla)가 피아노곡으로 조용히 연주되는 것을 들으며,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어찌 보면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성인데, 베네치아라는 공간이 마치 그리스 비극의 결말에 나오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처럼, 모든 문제를 한번에 풀어버린 것이다. 베네치아라면 왠지 그런 억지도 가능할 것 같지 않은가.
베네치아의 영화적 주인 루키노 비스콘티
간혹 도시를 상징하는 감독들이 있다. 로마의 로베르토 로셀리니, 뉴욕의 우디 앨런, 도쿄의 오즈 야스지로, 그리고 파리의 장 뤽 고다르 또는 프랑수아 트뤼포 등이 그렇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감독은 누구일까? 많은 영화인들이 루키노 비스콘티라고 답할 것 같다.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이 그의 대중적 명성을 높인 이유에서다. 그런데 비스콘티가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만든 첫 작품은 <센소>(1954)이다. 영화사적으로 볼 때, 도시 베네치아의 매력이 제대로 알려진 것도 바로 <센소>를 통해서였다. 베네치아의 오페라 극장인 ‘라 페니체’ (불사조라는 뜻), 운하와 운하 옆의 건물들, 좁은 뒷골목, 곤돌라, 작고 아름다운 캄포들, 그 캄포에 늘 있는 우물들, 지금은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전시관으로도 쓰이는 병기창(Arsnale,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이 여기서 상영됐다) 같은 대표적인 건물들이 멜로드라마의 주요한 배경으로 사용됐다.
<센소>의 전반부, 이탈리아의 귀족 리비아(알리다 발리)와 점령군 오스트리아의 말러 중위(팔리 그랜저)는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만난다. 주세페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가 공연 중일 때다. 이 오페라가 스페인의 귀족여성과 반란군 리더인 음유시인 사이의 사랑 이야기인데, 영화도 그처럼 신분과 국적이 다른 두 연인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두 사람이 베네치아의 푸른 밤을 배경으로, 사람이라곤 없어 사막처럼 보이는 길을 걷는 곳이 ‘새 유대인 게토’(Ghetto Nuovo) 지역이다. 유대인들은 더 좁은 장소에 한정돼 살아야 했기에, 건물들은 더 높고, 더 좁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살던 곳이다. 마치 표현주의영화의 건물들처럼 이곳의 아파트는 위태위태해 보이는데, 그런 건물들을 배경으로 미래가 불안한 두 남녀가 걷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한밤의 우물가에서 하인리히 하이네의 연시(戀詩)를 놓고 이야기하는 곳은 ‘새 유대인 게토 광장’(Campo di Ghetto Nuovo)이다. 역시 주위엔 아무도 없고, 여기서 두 사람은 자기들만 존재하는 꿈의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다.
시테라 섬을 꿈꾸며 베네치아로 가는 사람들은 사랑 혹은 우정을 경험하는 아름다운 시간을 갖는다. 그런 경험들은 신화처럼 전수되고, 그래서인지 여전히 세상의 몽상가들은 베네치아로 향한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곳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는 사람들도 있다. 이때 베네치아는 죽음의 공간으로 바뀐다. 그 대표작이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일 것이다. 다음엔 ‘죽음의 도시’로서의 베네치아를 여행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