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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친정집 잔치는 계속 돼야 한다
정지혜 사진 최성열 2015-05-28

인디포럼 20주년: 이송희일 감독, 김일권 PD, 부지영 감독,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에게 듣다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씨네21>_1996년 인디포럼 작가회의에 기반해 시작된 인디포럼영화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영화 축제다.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집행위원장은 인디포럼 초창기 멤버이고, 다른 세분은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현재까지 상임작가로 활동 중이다. 인디포럼의 20주년을 맞는 각자의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이송희일_‘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빨리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한다. (웃음) 상임작가 의장으로 9년째인데 너무 오래했다. 사실 영화제를 4년 운영하고 도망가려고 했다. 그다음해 1월까지 잠수를 탔는데 영화제 운영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더라. 어쩔 수 없이 다시 준비해서 2011년 그해만 인디포럼이 5월이 아닌 7월에 열렸다. 내년에도 이 지랄을 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다.

조영각_당시 나는 프로그래머였다. 사실 그때는 프로그래머가 하는 일이 상영시간표 짜는 게 전부였다. 출품된 영화 편수도 100편이 안 됐고 두편인가 빼고는 거의 다 상영하던 때다. 출품작이 처음 100편을 넘은 게 1998년인데 희일의 단편 <언제나 일요일같이>(1998), 부지영의 <불똥>(1997)이 그때 상영됐다.

이송희일_영각이 형한테 “어쨌든 그때 날 뽑아줘서 고마워” 그랬더니 형이 “떨어진 게 몇 작품 안 돼”라고 하더라. 되게 상처받았다. (일동 웃음)

부지영_내가 최초로 관객과의 대화라는 걸 해본 영화제가 <불똥>을 상영한 1998년의 인디포럼이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하지만 인디포럼의 길고 험난한 역사를 꿰고 있는 이분들에 비하면 사실 나는 인디포럼의 뜨내기 손님이다. 1998년에 인디포럼과 인연을 맺었지만 그 뒤로 10년간 공백이 있었다. 2008년이었나. (윤)성호가 인디포럼에서 활동을 하고 있어서 ‘작가의 밤’ 행사에 놀러갔다가 얼떨결에 내가 1차 술값을 카드로 긁었다. 50만원이었나? 꽤 금액이 컸다. 그렇게 다시 인연이 이어졌다. (웃음)

일동_그래, 맞다. 그때 정말 난리가 났지. 갑자기 나타난 부지영이 카드를 주며, “긁어!”

부지영_일순간 사람들이 나를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도 같고. (웃음)

이송희일_그때가 이명박 정권 때라 영화제 예산이 거의 제로였다. 감독들이 자비를 털어서 겨우 영화제를 열었다. 그런데 지영이가 굉장히 세게 등장한 거다.

김일권_나는 2007년부터 시작된 인디포럼 2기 때부터 상임작가로 합류했다. 그전에는 2000년 인디포럼영화제 폐막작이었던 이지상의 <그녀 이야기>(1999, 김일권은 이 영화로 독립영화 PD로 데뷔했다)처럼 내가 프로듀싱한 작품을 인디포럼에 출품하거나 관객의 입장이었다. 좀더 거슬러 가면 1997년 명보아트홀에서 진행된 인디포럼영화제가 기억난다. 그때 영화 보러 찾아갔더니 영화제가 아예 없다는 거다. 내가 잘못 찾아왔나 싶어 헤매다 돌아갔다.

조영각_1996년에는 영화제라고 할 수도 없는 그냥 인디포럼 작가회의로 시작했다. 우리끼리 독립영화는 많이 만들었는데 상영할 데가 없다는 데서 오는 갑갑함을 해결해보자며 상영을 직접 했다. 첫해, 연세대학교 동문회관에서 열렸는데 당시에는 영화제에 등급분류면제추천이라는 게 없었다. 심의를 받지 않고 영화를 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학내에서 상영하는 것이어서 그곳을 택했다. 하지만 학내라 관객의 접근성에 제한이 있어서 다음해에는 무조건 학교 밖에서 열자고 했고 그때 찾아낸 장소가 명보아트홀 소극장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구청과 영화진흥공사에서 득달같이 연락이 왔다. 이럴 줄 알고 우리는 일부러 문제를 만든 거지. 개막일에 구청 직원이 찾아와서 ‘이대로 강행하면 경찰이 올 수 있다, 극장이 피해를 입는다’라고 말하고. 우리는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토요일에 개막하고 일요일에는 영화제 안 하고 그랬다. 아마 일권씨가 영화제 안 한 그날 왔나보다.

<씨네21>_영화계가 검열 당국에 대항해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던 1990년대 중•후반을 지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인디포럼도 안정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다 2006년을 기점으로 인디포럼의 존폐 위기라고 할 정도의 내부적으로 치열한 고민의 시기가 있었던 걸로 안다.

이송희일_영화제를 주체적으로 해오던 사람들이 더이상은 못하겠다고 했다. 2006년 겨울에 영각이 형, 임창재, 원승환 등 인디포럼 초창기 멤버들이 다 모여 원점에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했다. 심지어 서울넷필름페스티벌을 흡수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웃음) ‘그래도 이렇게 힘들게 해왔는데 어떻게든 유지해보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재정비를 해서 2007년부터 다시 해나갔다.

김일권_그때 나, 이송희일, 김곡, 김선, 윤성호, 김동명, 양해훈, 박동훈 등이 합류했다. 거기에 남다은 평론가, 남다정 감독, 변성찬 평론가 등이 가세했다. 1기가 감독 중심이었다면 2기는 폭을 좀더 넓혀보자는 뜻에서 평론가나 PD까지도 함께하게 된 거다.

조영각_그 분류가 좀 애매한 것 같다. 초창기부터 내가 있던 2001년까지가 1기였고 그다음 5년이 2기, 그리고 지금까지가 3기 아닌가.

이송희일_3기가 너무 길다. (일동 웃음)

조영각_내가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2001년 영화제의 슬로건이 ‘영토 확장’이었다. 영화제 관객을 더 많이 만나고 독립영화의 접점을 넓히자는 의미로 내세웠던 기조다. 그때 흥행 성적이 좋아서 2천만원 정도 흑자가 났다. 우리는 입이 찢어졌다. 그 후 곧바로 인디포럼 2002의 슬로건이 ‘꽃순이 칼을 들다’였다. 독립영화가 진정 추구해야 할 새로움과 지향이 무엇인가를 놓고 독립영화 내부로 칼을 겨눠 성찰을 해나갔다. 일종의 영화미학을 놓고 논쟁하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서사는 홀대받았고 관객과는 점점 멀어지고 영화제는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김일권_2006년 영화제 끝나고 다음 영화제가 열릴 가능성이 안 보이더라. 2007년에 인디포럼에 참석할 때는 어떻게든 다시 영화제가 열리도록 세팅만 해주고 나오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들 내가 운영하는 ‘달 바’(Dal Bar)라는 술집에 모여서 회의를 하더라. 그 틈에 나도 자연스레 회의에 참여했다. 회의 끝나고 술값도 안 내고 다들 사라지고. (웃음) 그렇게 시작됐다.

인디포럼 의장 이송희일 감독.

<씨네21>_다른 영화제와 다른 인디포럼만의 독특하고 독보적인 정체성은 상임작가 회의의 존재에 있다. 감독, 영화평론가, 독립영화 PD 등이 합류해 상시적으로 모임을 갖고 영화제뿐 아니라 포럼과 제작 워크숍을 겸한다.

조영각_서독제에는 손님으로 오는 감독들이 여기서는 직접 일을 한다. 이 커뮤니티가 그냥 나오는 게 절대 아니다. 나로서는 굉장히 부러운 공동체다. 상임작가 회의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분명히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된다.

김일권_처음에는 프로듀서뿐 아니라 배우도 들어오면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평론가는 의미가 있다지만 프로듀서는 좀 어중간하지 않나.

부지영_왜, 장소 빌려주는 사람이면 확실히 필요한 역할이다. (웃음)

이송희일_인디포럼 사무국이 여러 번 이사를 했다. 예전에 문화학교 서울에 잠시 기거하다가 2007년부터는 이상하게도 독립영화 배급사에 기생하게 됐다. ‘인디스토리’에 3년 정도 있었는데 자기들도 사정이 어려우니까 나가라고 하더라. 어디로 가야 하나 했는데 가만 보니 ‘시네마 달’이 생기는 거다. 어? 여기도 배급사네? (일동 웃음) 그래서 지금까지 거기서 기생 중이다. 인디포럼이 운용할 만한 돈이 없다보니 이렇게 여기저기… 아, 1년 정도는 한국독립영화협회에도 있었다.

김일권_안 그래도 사무실 이사해야 하는데 축소해서 이사해야겠다. (일동 웃음) 사실 프로듀서로서 상임작가를 한다고 해서 내가 인디포럼에서 하는 일은 별로 없다. 돈과 관련된 어려움이 생기면 뒤에서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하는 게 다다.

이송희일_사실 돈 문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건 정말 중요하다. 인디포럼은 현재 서울시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로부터 공적 지원을 받고 있다. 인디포럼은 크게 두번의 위기가 있었다. 하나가 앞서 말한 2000년대 중반에 터진 내부의 정체성, 정치의 문제를 미학적으로 심화시켜 극복하려던 시기다. 그때는 정말 인디포럼이 게토화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면서 다들 나가떨어졌고. 두 번째 위기가 바로 재정 상황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권 때 영진위 독립영화전용관 사업자 선정이 불공정하게 진행됐다고 법원에 ‘사업자선정취소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패소했다. 그 소송 비용 등이 고스란히 빚이 됐고 그걸 다 갚는 데 5년이 걸렸다. 지금은 또 다른 빚이 있다. 이명박 정권 때 인디포럼이 이른바 ‘촛불 관련 단체’로 찍혔다. 영진위에서 영화단체사업지원이라고 중소 규모의 영화제에 주는 지원금이 있는데 (2013년부터 20%씩 삭감되는) 일몰제를 적용해 5년 뒤에는 완전히 없어진다. A급 영화제라고 불리는 부산국제영화제도 최근 영진위의 지원금이 대폭 삭감돼 난리이지 않나. (4월30일 발표한 영진위의 ‘2015년 글로벌 국제영화제 육성지원’ 결과에 따르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지난해 14억6천만원에서 6억6천만원이 삭감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그 일몰제가 적용 중이다. 올해 지원금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준다고 해도 얼마나 또 팍 깎아서 줄는지….

<씨네21>_공적 지원 얘기가 나왔으니 덧붙여 묻자. 최근 영진위가 발표한 ‘2015년 독립영화전용관 운영지원 사업 개편안’에서 독립영화전용관인 인디스페이스와 아리랑시네센터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영화제 역시 안정적인 공간 확보가 늘 큰 과제 중 하나일 텐데 이런 흐름이 영 달갑지 않을 것이다.

조영각_영화제 운영의 모든 걸 공적 지원에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적어도 독립영화계와 정책 당국, 서울시가 서로 이야기를 해서 전용관이 더 생기게 해야 한다. 그래야 영화제뿐 아니라 영화제에서 상영한 작품이 개봉할 때도 안정적인 상영관 확보가 가능해진다. 지금도 보면 독립영화가 인디스페이스에만 의존해서 개봉하는 경우는 단 한편도 없다.

김일권_독립영화전용관 자체의 한계도 있다. 관이 적은 전용관에서 영화제를 열면 그 기간에 개봉하는 다른 독립영화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영화제는 개봉 전 독립영화가 관객과 미리 만나는 자리이고 향후 개봉했을 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시너지 효과가 생길 수 있어야 한다. 근데 그게 전혀 안 되는 구조다. 소규모 영화들은 ‘왜 우리가 영화제 기간에 개봉을 했지’ 이렇게 한탄하게 돼버리니까. 이명박 정권 들어서면서 서독제도 2년간 지원 못 받았고 인디포럼도 ‘채무변제파티’를 해야 할 정도였다. 이번 인디스페이스의 경우도 그렇고 부산국제영화제까지 예산 삭감이 돼다보니 정책 당국이 얼마나 더 영화계를 파편화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송희일_독립영화의 축제인 영화제들을 독립영화전용관에서 하는 게 맞는데 안타깝게도 극장 환경이 안 따라준다. 단순히 극장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의 독립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의 문제다. 독립영화계에 관심 없으면 그냥 두기만 해도 괜찮겠다. 꼭 못살게 괴롭히니. 우린 영화제 하나 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쪽에 대응한다 어쩐다 하다보면 신경 쓸 게 많다.

<씨네21>_독립영화 진영에서 꾸준히 장편독립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있다. <후회하지 않아>(2006)를 비롯해 4편의 장편을 만든 이송희일 감독, <무산일기>(2011), <산다>(2015)의 박정범 감독을 비롯해 민용근, 장건재 감독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독립영화계에서뿐 아니라 상업영화를 경험하거나 둘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려는 시도도 꾸준히 있어왔다. 독립영화와 상업영화간의 유의미한 긴장을 어떻게 유지해갈 것인가가 또 하나의 고민일 텐데. 그런 의미에서 <카트>로 첫 상업영화를 만든 부지영 감독이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조영각_사실 <눈물>(2002) 끝나고 부지영이 뭐하고 사는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 이대로가 좋아>(2008)가 개봉을 한다고 하는데 감독이 부지영이더라. 결혼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애 둘까지 낳은 사람이 장편으로 데뷔한다는 건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경우 아닌가. 그 자체로 놀라웠다. 근데 또 희일이한테는 그랬다. “그 영화가 100만명이 들었으면 이 동네에는 얼씬도 안 했을 거야.” (일동 웃음) 그렇게 다시 만나 서독제 예심도 보라고 제안하고 부지영이 서독제 개막작 <나 나 나: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2012)의 총감독도 했다. 부지영 감독과 같은 사례가 더 많아져야 한다. 장편상업영화를 만들고 나면 마치 독립영화계를 떠나가는 듯하거나, 마찬가지로 독립영화계에서도 그런 감독을 떠나보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이송희일_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오가는 감독들의 가교 역할을 해준 사람이 부지영이다. 상업영화를 찍고도 이 판에 와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류승완, 김태용 감독도 그런 경우다. 관객과의 대화를 하러 와달라고 하면 무조건 달려오고 2차 술값까지 쏘고 간다. 그들에게는 독립영화판이 일종의 친정이다. 앞으로 독립영화가 계속 성장하다보면 이들처럼 상업영화를 경험하고 다시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다. 나 역시도 독립영화 진영에서 만들 영화, 상업영화로 만들 영화를 나눠서 작업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런데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하나 썼는데 다시 보니 독립영화인 게 문제다. (일동 웃음)

김일권_독립영화계를 친정으로 둔 다른 감독들과 달리 부지영 감독은 굉장히 적극적이고도 일상적으로 독립영화 진영과 결합한다.

부지영_이런 얘기를 들으니까 자부심이 생긴다. 나는 독립영화계에서 그리 열심히 하지는 않은 사람이다. 상업영화 진영의 시민권도 <카트>를 만든 이번에야 얻었다고 생각한다. 늘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독립영화판에서 오랫동안 작업한 분들이 이런 말씀을 해주니까 내 토양이 여기구나 싶다. 새삼 알겠다.

이송희일_독립장편영화가 개봉 형태로 관객과 만난 지 불과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왔다갔다하는 일이 더 많아져야 한다.

김일권_독립장편 만들고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상업영화로 데뷔해 또 한두 편 만들고. 사실 이런 패턴이 어느 정도 진행되다가 지금은 답보 상태에 이른 것도 같다. 독립장편을 만들었던 감독들이 지금도 독립영화판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거나, 의미 있는 상업영화를 만들어서 되레 독립영화판이 그런 감독을 호출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독립장편이 많이 만들어지고는 있지만 그 성과가 그리 크지 않은 거다. 작품 자체의 평가가 아주 좋거나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과가 나와서 독립영화판을 업그레이드하는 경우가 예전만큼 많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조영각_인디포럼이 생기면서 서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작품을 만들어 인디포럼, 서독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에 출품해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인정을 받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 자체가 간판이 돼주는 시대도 아니다. 인디포럼만의, 우리만의 커뮤니티가 아니라 그 외연을 어떻게 넓힐 것인가가 독립영화계 전체의 과제다.

부지영 감독, 시네마 달 김일권 PD(왼쪽부터).

<씨네21>_독립영화의 현실을 타개해나갈 방법으로 투자, 배급, 제작 시스템 개선과 더불어 독립영화계를 알릴 스타성 있는 감독이나 배우의 발굴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송희일_스타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 장률 감독님, (박)정범이도 그렇고. 10년 전까지만 해도 독립영화가 살아남기 위해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스타라고) 타기팅해서 독립영화계 내부적으로 키워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제도, 작품도, 개봉하는 영화도 너무 많다. A급이라 불리는 해외 영화제에 다녀오는 경우도 잦아져 주목도라는 게 과거와는 다르다. 오히려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 상영하는 구조 자체가 너무 부실하다. 계속해서 작품을 만들어갈 수 있는 유의미한 재생산 구조만 만들어진다면야 스타가 왜 필요한가. 재능 있는 감독들이 알아서 나올 텐데. 재능 있는 감독들이 한편 찍고 붕괴되지 않도록 안정적인 영화 배급 구조가 꼭 마련돼야 한다. 독립 영화인들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니까 대기업의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김일권_확실히 최근 <한공주>(2014), <소셜포비아>(2015)가 불러일으킨 흥행은 <낮술>(2009), <똥파리>(2009), <혜화,동>(2011)이 관객을 극장으로 많이 불러모으며 이전의 독립영화들이 이루지 못한 성과를 낸 것과는 그 결이 다르다. 전자의 작품들은 CGV아트하우스에서 물량 공세를 확실히 해준 게 크지 싶다.

이송희일_물론 이수진 감독은 <한공주> 이전에도 단편을 여러 편 찍었다. 다만 우리와의 접점이 많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이거다. 예전에는 종종 개천에서 용이 났는데 이제는 더이상 그런 게 불가능해졌다는 말이다. 거대 투자배급사의 눈에 들지 않으면 흥행은 어렵다.

김일권_하지만 <한공주> <소셜포비아>가 일정한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계에서 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호출하지는 않는다. 아예 이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할 지분 자체가 대기업으로 넘어가버렸달까. 독립영화판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게 분명 있다.

부지영_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만드는 개개인이 어떤 의지를 가지냐에 따라 해결책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창작자가 독립영화계쪽과의 연결 끈을 계속 가지고 있고, 또 그 끈을 지속적으로 가져가려고 한다면 분명 상업영화를 해도 다르다.

<씨네21>_올해도 인디포럼영화제의 신작 공모전에는 850편이 출품돼 역대 최다 출품작 수를 기록했다. 인디포럼뿐 아니라 다른 독립영화제를 봐도 매년 출품작은 늘어나는데 주목할 만한 작품은 겹치는 경우가 꽤 많더라. 좋은 작품이 상영 기회가 많은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와 별개로 작품의 질적 성장에 대한 평가를 해보자면 어떤가.

이송희일_인디포럼 내부에서 그 문제로 계속 싸우고 있다. 2007년부터 작품을 뽑아놓고 보면 상당수가 단편 극영화 혹은 다큐멘터리다. 프로그래머들은 매년 극영화의 퀄리티가 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제를 운영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장편을 안 뽑을 수가 없다. 프리미엄 때문에 만듦새가 좋은 장편은 부산국제영화제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상영할 수밖에 없다.

조영각_서독제의 출품작도 보면 만듦새는 예전에 비해 좋아졌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화가 돈 없이 찍은 상업영화 같다. 지향하는 영화의 내용이나 구조는 상업영화인데 예산 규모만 독립영화다. 새롭다는 말을 붙일 만한, 기존의 주류 상업영화와는 다른 영화 언어와 미학을 가진 독립장편영화가 얼마나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요즘 호평받는 <위로공단>(2014), <철의 꿈>(2014), <만신>(2014)처럼 미술계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와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를 비교해봐도 질적 차이를 확 느낄 수 있다. 이제 독립영화계의 과제는 두 가지 같다. 대중성을 고려해 관객을 확보하는 일과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이것이 올해의 한국 독립영화다’라고 할 만한 작품이 적어도 1년에 두세편은 꼬박꼬박 나와야 한다. CJ든 시네마 달, 인디스토리든, 어디서 배급을 했든 간에 일정 정도 이상의 안정적인 극장 수와 배급 스코어가 확보되는 영화가 있어야 한다.

이송희일_확 치고 나가는 작품이 전반적으로 별로 없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임철민, 강상우, 정재훈 같은 독립영화계의 친구들이 내러티브는 무시하더라도 자기 식으로 참신한 미학적 시도들을 해간다. 상당히 매력적이다. 내러티브적으로도 강한 영화와 미학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영화가 공존하는 독립영화 시장이 안정적으로 운영된다면 정말 좋겠다. 그런 시장 자체가 자꾸 없어지니까 재능을 가진 친구들도 점점 더 불안해한다. 불안이 생기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가 없다.

조영각_점점 더 불안감이 심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송희일_신작 뽑을 때는 엄격한 눈으로 평가하고, 영화제를 운영할 때는 관객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객 없이는 영화제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된다. 영화제가 매혹적으로 보여야 한다. 그러다보니 우리 색과는 조금 덜 맞지만 보다 많은 관객이 볼 법한 작품을 상영하기도 한다. 온갖 파티를 계속 여는 것도 그렇다. ‘인디포럼 심야식당’을 열어 독립영화계 사람들과 대중의 접점을 만들려고 한 게 대표적이다.

부지영_심야식당이나 포차파티는 인디포럼이 잘 만들어낸 그럴듯한 상품 같다.

이송희일_한명의 관객이라도 더 유치하려고. 살려는 발버둥이다. (웃음)

김일권_상영하는 영화들은 하나같이 까칠한 거 틀면서 겉만 기름칠을 해둔 격이라고 하자.

조영각_영화도 까칠한데 사람까지 까칠해봐라. 영화가 불친절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친절하게 관객에게 설명하려고 해야 한다. 그 고민 없이 ‘이런 걸 누가 보겠어’라고 하면 관객은 절대로 안 온다.

<씨네21>_해결해야 할 독립영화계의 과제는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또 간다’는 게 인디포럼이 오랫동안 가져온 정신 아니겠나. 인디포럼의 내년, 다음 20년은 어떻게 내다보나.

이송희일_매년 전쟁이다. 사실 영각이 형은 서독제 집행위원장이 직업이지만 나는 감독이 주업인데 투잡을 뛰고 있는 거다. 영화제 준비하면서 시나리오 쓰고 심지어 촬영까지 한 적도 있다.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그리고 나보다 좀더 어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그들이 가진 에너지가 유입되면 좋겠다.

부지영_그만두겠다는 소리를 내가 5년째 듣고 있는 것 같다. (웃음) 오늘 좀 답답한 얘기를 많이 했다. 그래도 몇년에 한번씩은 인재들이 꼭 나타나니까, 영화 찍고 의장도 하는 이송희일처럼 그의 뒤를 이을 누군가가 나오지 않겠나. 인디포럼의 깨어 있는 정신을 인정하고 지지한다. 매달 월례비행이라는 이름으로 꼬박꼬박 회의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는 곳이다. 이런 데가 없다. 영화제 기간에만 반짝 준비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꼭 상업영화에 가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계속 독립영화계에서 살아남아 장편 작업도 하고 인디포럼에서도 계속 만나는 작가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이송희일_인디포럼은 작가 공동체를 지향하며 시작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영화제 운영과 영화 상영에 너무 급급해하는 것 같다. 이번에 인디포럼 심야식당 끝나고 뒤풀이에 갔는데 유독 젊은 감독들이 많이 왔더라. 이 친구들에게 작품을 재생산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만 더 주어진다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의 만듦새도 더 좋아질 거다. 이 친구들에게 영화제 상영의 기회보다도 지속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판, 함께할 동료가 중요하다. 그걸 만들어가야 한다.

김일권_부지영, 이송희일 감독이 상임작가를 하든 안 하든 20년 후에도 인디포럼영화제에서 자기 영화를 틀거나 영화제에 나타나 함께하길 바란다. 여기에 새로운 친구들이 더 많이 들어와 에너지가 충전되길. 인디포럼은 아주 가난한 친정이지만 까칠한 엄마(이송희일)가 그래도 건강하고, 장성해 분가한 외삼촌(조영각)에, 능력 있는 이모(부지영)도 있다. 친정집 잔치가 계속 북적북적대길 바란다.

조영각_그동안 독립영화가 처한 환경,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에 비하면 인디포럼이 참 잘해왔다. 인디포럼은 그 패기와 생기의 정체가 궁금해서라도 자꾸만 들여다보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다. 이 커뮤니티에서 인정받는다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인정하고 동료로 인정한다면 그 어떤 상을 받은 것보다 더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리고 독립영화의 양대 축인 서독제와 인디포럼이 건강한 경쟁관계를 만들어가면 좋겠다.

이송희일_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20주년은 사실 없어지기 딱 좋은 해다. 30주년은 넘어야 ‘아, 장수를 하나보다’ 한다. 지켜봐야 한다. (일동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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