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도 세상의 아이들은 이불을 덮어주는 부모에게 이야기를 조를 것이다. 어제 들려주고 읽어준 동화와 똑같은 얘기라도 아이들은 개의치 않는다. 아니, 도리어 숙지하고 있는 클라이 맥스에 이르면 신이 나서 “그래서 악어가 해적을 삼켰어!”라고 나서서 마무리 짓고 뿌듯하게 잠을 청하기도 한다. 과하지 않은 변주도 환영 받는다. 부모가 다정히 베드타임 스토리를 읽어주는 광경을 뒷날 미국영화에서나 본 세대인 나는, 누워서 동화를 읽다 눈치껏 전등을 끄는 아 이였는데 어둠 속에선 책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뒤채며 중얼중얼 이야기를 지어 내다 잠이 들곤 했다. 나는 내 자작 엉터리 픽션이 좋았는데, 독창적이어서가 아니라 책에 나오 는 진짜 동화를 그럴싸하게 표절하면서도 등장 인물의 외모와 말투를 내 취향에 맞게 갈아치울 수 있었기에 만족스러웠다. 아득히 잊었던 수십 년 전 잠버릇을 떠올린 건 <어메이징 스파이더 맨>이 절반쯤 흘러갔을 때였다. 앤드루 가필드가 분한 피터 파커는 숙부에게 대들다 거리로 뛰쳐나갔고 벤 아저씨(마틴 신)는 걱정된 나머지 조카를 찾아 위험한 밤거리로 나섰다. 아, 이제 피터는 불한당을 짐짓 못 본 체할 테고 그 자의 손에 벤 숙부가 죽겠구나, 라고 속으로 중얼거 리며 나는, 그 순간 내가 멀티플렉스 복판에 앉은 채로 어떤 의미에서는 뻔한 서사의 무한 반 복에 중독돼 있던 유년의 침대로 돌아가 있음을 깨달았다. 십수년 전부터 ‘속편의 홍수’니, ‘2편이 지겹다고 했더니 올여름은 3편 쓰나미’류의 기사를 잔뜩 써놓고도, 2012년 여름 스크린에서 벤 아저씨가 하릴없이 다시 피터를 찾으러 나가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간 숱하게 썼던 뉴스가 관 객에게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체감한 것이다(그렇다. 영화를 글로만 배웠다).
마크 웹 감독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샘 레이미의 2002년작 <스파이더맨>과 줄기가 동일한 서사를 캐릭터와 장면을 달리해 다시 구연(口演)한다. 속편도, 전사(前史)도 아닌 이와 같은 시도를 지칭하기 위해 ‘리부트’(reboot)라는 단어가 저널리즘의 선반에 마련돼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팀 버튼이 일으키고 조엘 슈마허가 쓰러뜨린 흑기사 이야기를 <배트맨 비긴즈>로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을 때 적용된 단어다. 배트맨이 존재하는 세계의 평면을 아예 바꾼- 새로운 <배트맨> 3부작의 본질을 함축하는 조건절은 “이것이 현실이라면”이다.- 놀란의 연작과 달리 마크 웹의 리부트는 기본적으로 캐릭터 개조(makeover)에 자족한다. 앤드루 가필드의 피터 파커는 <트와일라잇> 현상을 만든 여성 관객을 겨냥한 사랑스러운 슈퍼히어로다. 즉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존재 이유는, 관객에게는 앤드루 가필드라는 신선한 얼굴이고 컬 럼비아픽처스에는 스파이더맨에 대한 라이선스 유지다. 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을 충분히 즐겼다. 샘 레이미의 첫 <스파이더맨>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그러나 동시에 내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를 기다리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이번 착안에는 재해석이 결여돼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2편이 나오면 그럭저럭 재미있게 볼테지만 흥분하거나 안달내지는 않을 것이다. 훙분이나 안달은 숙면에 해롭다. 끝을 아는 이야기의 끝없는 재연, 그것이 주는 퇴행적 안도감이 아이들을 잠들게 한다. 그런데 나는 극장에서 안온히 잠들기 원하는가? 인정! 반쯤은 그렇고 반쯤은 그렇지 않다. 이 글은 말하자면 절반의 깨어 있음을 지속할 수 있을까에 관한 근심이다.
이제 모르는 영화는 오지 않는가
리부트(reboot)는 컴퓨터를 재시동한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꾸준한 영화 관객인 내가 프로그래밍된 정교하고 거대한 기계 장치 안에 들어와 있다는 진실을 퍼뜩 환기해준다. 21세기 들어 할리우드라는 기계는 주로 프리퀄, 속편, 리메이크, 스핀오프, 리부트 등의 버튼으로 작동돼왔다. 일찍이 2002년 <뉴스위크>는 <미이라>에 연원을 둔 영화 <스콜피온 킹>이 “리메이크의 속편의 프리퀄의 속편”이며 <제나>는 “리메이크의 시퀄의 프리퀄의 스핀오프”라고 꼬치꼬치 명시해 독자를 웃겼다. 지나고 보니 웃을 일만은 아니었다. 2007년 <데어 윌 비 블러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마이클 클레이튼> 등 빼어나고 통렬한 영화를 양산해 한국의 영화저널까지 9·11 이후 미국영화 르네상스를 논하게 만들었던 할리우드는 이듬해 메이저 스튜디오의 독립 예술영화 제작 자회사 파라마운트 밴 티지와 워너 인디펜던트 픽처스를 닫았다. 1981년 전미 흥행 10위 중 일곱 자리를 차지했던 오리지널 각본 영화는 2001년에 2편으로 줄어들었고 2011년에는 아예 10위권에서 밀려나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이 기록한 14위가 창작 시나리오 영화로서는 가장 좋은 성적이다. 원작있는 드라마로서 가장 흥행에 성공한 <헬프>도 톱10에 들지 못했다. 각색 시나리오냐 오리지널 시나리오냐의 문제는 논점을 흐리므로 속편, 프리퀄, 영화 및 TV 리메이크 통계만 보기로 한다. 2011년 할리우드는 28편의 속편을 생산했다. 2편, 3편은 나열하기에 지면이 좁다. <미션 임파서블> <캐리비안의 해적> <스크림> <스파이키드>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네 번째 영화를 개봉했고, <엑스맨> <분노의 질주>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가 넓게 보면 같은 연작에 포함되는 제5편을 내놓았다. 넓게 보아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간주할 수 있는 2011년의 블록버스터급 영화로 <슈퍼 에이트>과 <머니볼>이 있었으나 박스오피스에서는 스튜디오들을 고무하지 못했다. 이처럼 결승선없는 연작이 대세를 이루다보니 지난해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2>가 안겨준 쾌감 중에는 작품에 대한 만족뿐 아니라 할리우드가 마냥 유예하기만 하는 ‘대단원’의 도래를 오랜만에 목도한 것에 대한 감개무량함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올 들어 우리는 <맨 인 블랙3>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에이리언> 시리즈의 간접적 전사라고 할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와 관련 히어로들의 전작을 모두 더하면 넓은 의미에서 시리즈 7편이라고 볼 수 있는 <어벤져스>를 보았다. 제이슨 본 시리즈의 4편 <본 레거시>가 대기 중이고 <토탈 리콜>과 <스파클>의 리메이크작과 다소 불명한 사유로 개봉이 미뤄진 <지.아이.조2>가 있다. 팀 버튼의 <다크 쉐도우>와 아직 국내 개봉되지 않은 <21 점프 스트리트>는 미국 바깥 관객에게 낯선 TV 시리즈까지 발굴해 재활용한 사례라 이제 자원이 어지간히 고갈되지 않았나 하는 짐작을 불러일으켰다. 리사이클 법칙은 블록버스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어서 곧 한국 스크린에 오를 <아메리칸 파이: 19금 동창회>를 비롯해 <캐리> <위대한 개츠비> <고질라> <더티 댄싱> <서스페리아> <아메리칸 사이코> <스타쉽 트루퍼스> <레베카> 등이 리메이크되고 속편이 영 어울리지 않는 미라맥스산 <셰익스피어 인 러브>와 <라운더스>의 시퀄도 추진 중이라 한다.
장황한 예시의 결론은 할리우드는 이제 투자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두줄의 문장으로, 30초 안에, 시놉시스를 설명할 수 없는 영화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다. 할리우드라는 기계는 관객이 이미 아는 스토리라는 보증서 없이는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게 되었다. 이러다가는 “한때 무슨 이야기를 보게 될지 모른 채 두근대며 영화관에 가던 시절이 있었지”라고 아들딸에게 회고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혹자는 비빌 언덕 없이 우뚝 선 <인셉션>(전세계 박스오피스 8억2500만달러)과 <소셜 네트워크>(1억9200만달러)가 있지 않느냐고, 역대 최고 흥행작인 <아바타>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오리지널 기획이 아니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크 나이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인셉션>이 제작에 초록불이 들어오기까지 난항을 겪었으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부터 마리온 코티아르까지 특급 캐스팅으로 안전 무장하느라 2억달러의 제작비가 들었다는 사실을 참고해야 하며, <아바타> 이후 제임스 카메론은 다름아닌 2편의 <아바타> 속편을 계약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평단이 실패한 태작으로 취급하는 <타이탄의 분노>와 <라스트 에어벤더>가 상대적으로 두둑한 3억2천만달러에 육박하는 입장수입을 올렸다는 사실도 나란히. 즉, <인셉션>의 이례적 성공은 스튜디오에 동기를 부여하지 못했고 <아바타>의 신화는 3D라는 껍질만 복제됐다. 할리우드의 20세기 마지막 10년간 흥행 상위 10위 중 6편이 오리지널 아이디어에서 나온 기획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21세기의 창작 시나리오는 저예산영화에 집중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스튜디오들이 인지도 높은 원작과 캐릭터에 기댄 영화에 주력하는 핑계는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인데, 현실적으로는 이 블록버스터들이 개봉 한철 전부터 지구촌 미디어를 뒤덮게 하는 데에 예산이 집중된 나머지 ‘기타’ 영화들은 어느 때보다 그늘에 가려져 있다.
작가(auteur)와 스타를 대체한 브랜드
배우 존 쿠색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더이상 할리우드는 없다. 일군의 은행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메인스트림>의 저자 프레데릭 마르텔 역시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사를 은행에 빗댄다. 스튜디오는 금융기업에서 대출을 받아 자금을 대는 은행이고 저작권 은행이며 세계 배급 에이전시라는 것이다. 직접 투자할뿐더러 기타 투자자인 금융기업과 단기자금을 대출하는 은행에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영화사는 실패한 경우에도 “히트한 게임/코믹스가 원작이었다”라고 사유서를 쓸 수 있는 기획을 선호한다. 기원부터 도박에 가까운 사업이었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전통적으로 예측 가능성을 보장해준 요소는 장르와 스타였다. 그리고 일부 유명한 감독이었다. 하지만 최근 10년간 장르, 스타, 작가는 ‘브랜드’로 대체됐다. 줄리아 로버츠와 톰 행크스(<로맨틱 크라운>)도 조니 뎁(<투어리스트>)도 리즈 위더스푼(<하우 두 유 노우>)도 흥행을 약속하지 못하고 감독의 이름은 더욱 희미해졌다. 그리하여 스파이더맨, 트랜스포머, 미션 임파서블은 이제 영화제목이 아니라 영화 이외의 무수한 상품을 포괄하는 브랜드이고, 역으로 그 브랜드를 중심으로 작가, 연출자, 배우가 조합되는 양상을 띤다. 영화는 동명 브랜드의 가치를 지속시키기 위해 감가상각이 한계에 달할 때까지 만들어진다. 스튜디오의 자산은 보유한 저작권의 추산 가치에 의해 평가받기 때문이다. 한때 영화광들은 리안, 브라이언 싱어, 샘 레이미 같은 개성있는 작가에게 주류 할리우드가 문호를 개방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적 결과는 그들이 주류영화를 변화시켰다기보다 감독들의 마니아 취향을 스튜디오가 섭취하고 커리어 중 짧지 않은 세월을 프랜차이즈가 점유하는 그림에 가까워진 인상이다. 보편적 포맷이 된 시리즈물 안에서 속편과 전편을 향한 고리를 요령껏 심어놓는 동시에 단일한 영화로서 적절한 완결성을 확보하는 균형감이 감독이 가져야 할 새로운 긴요한 능력이 됐다.
그래서 뭐가 문제란 말인가? 70년대에도 할리우드는 <록키> <스타워즈> <슈퍼맨> <레이더스> 그리고 덜 유명하지만 <엑소시스트> <죠스>의 속편을 배출하지 않았는가. 80년대의 <리쎌 웨폰> <다이 하드> <폴리스 아카데미> 그리고 기다랗게 늘어진 슬래셔 호러 연작들은 어떠한가. 차이는 현재 코믹스, TV 시리즈, 기존 영화의 속편이 할리우드의 자산을 점유하고 영화 문화의 흐름에 행사하는 독점적 영향력이다. <가디언>의 데이비드 콕스는 지난 7월10일 할리우드가 2010년 제작한 영화의 60%는 여전히 오리지널 기획이지만 스크린을 차지하는 영화는 나머지 40%라는 요지의 기사를 썼다. 탤런트의 측면에서도 같은 우려가 피어오른다. 리들리 스콧은 <에이리언>의 프리퀄과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을 연출할 계획이고 하스브로 사의 보드게임 모노폴리의 영화화에도 이름을 걸었다. 팀 버튼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다크 섀도우>에 시간을 탕진했고 <반지의 제왕>의 피터 잭슨은 <러블리 본즈>를 거쳐 1편 이상의 <호비트>에 향후 몇년을 바칠 참이다. J.J. 에이브럼스에겐 <미션 임파서블>과 <스타트렉>이 있었다. <크로니클>로 주목받은 신예 조시 트랭크 역시 <스파이더맨> 스핀오프의 연출자로 거명되고 있다. 2억달러를 갖고 복합적인 자기 스타일의 사이코 스릴러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배짱을 과시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 정도를 제외하면 과연 이 감독들이 합당한 프로젝트에 재능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리지널이 각색물보다 좋은 영화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고 원작 TV쇼, 만화, 심지어 장난감과 테마파크 놀이기구의 영화화가 나쁜 결과물로 직결된다는 주장도 논리적 근거는 없다. 그러나 할리우드, 즉 전세계 오락영화 시장의 중원에서 프랜차이즈가 기형적으로 점유율을 불려가고 있는 현상이 개별 영화-텍스트의 질(質)과 무관할 거라는 주장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올해 첫 블록버스터였던 <배틀쉽>의 포스터에는 <트랜스포머>로 영화계의 빅네임이 된 장난감 회사 하스브로가 당당히 이름을 박았다. 레고와 루빅스 큐브도 영화로 기획되고 있는 마당에 <배틀쉽>을 보는 동안 내가 받은 충격은 보드게임을 영화로 각색했다는 전제가 아니라, 이 특정한 게임의 규칙이나 개성이 구체적인 액션 어드벤처의 서사로 어떻게 해석되고 변환됐는지 전혀 함수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적을 공격할 때 포격의 좌표를 외치는 대사가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다). <배틀쉽>은 그저 미국 전함이 어느 별인지 몰라도 외계인 침략자 군단에게 공격받는 이야기면 충분한 영화였고 스토리텔링은 일곱살 소년이 양쪽 진영의 장난감 전함을 양손에 들고 입으로 폭파음을 내면서 만들어가는 서사를 연상시켰다. 장난감은 영화를 거쳐 비디오게임이 되고 게임으로 개작되는 과정에서 추가된 새로운 캐릭터를 장난감으로 먼저 생산한 다음 그 캐릭터를 보탠 속편 영화를 제작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루프의 반복. 이 순환 속에서 영화작가와 감독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여지는 보잘것없어 보인다.
같은 서사 매체끼리의 변환이라는 점에서 완구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슈퍼히어로 서사도 분명 제한된 반경이 있다. 영웅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매력있는 캐릭터이건 일단 전투에 돌입하면 서사 및 장면설계는 대동소이해지고 클라이맥스는 반드시 (모종의 공생 관계로 맺어진) 슈퍼히어로와 악당의 싸움이어야 하며 엔딩은 속편 예고를 서비스해야 한다. 관객은 질서와 혼돈 사이에서 선택을 반복한다. 그런가 하면 연작의 형식은 1편에 영웅의 기원과 주요인물 소개의 의무를 할당할 수밖에 없고 비교적 자유로운 2편을 거쳐 3편 이후로 나아가면 형식의 과잉으로 방전되기 일쑤다. 그리고 다시 리부트. 마치 디즈니가 어린이들의 성장 속도를 고려해 7년에 한번씩 고전 애니메이션을 재개봉하던 풍속이 할리우드 전반에 확산된 형국이다.
이야기는 언젠가 영화에 복수할 것이다
피터 파커가 10년에 한번씩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그야말로 ‘할리우드 괴담’일 것이다. <토이 스토리> 외에 속편을 만들지 않았던 픽사는 지난해 <토이 스토리3>와 <카2>를 내놓았다. 그리고 <몬스터 주식회사> 속편 <몬스터 유니버시티> 기획을 발표하더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존 카터>가 입힌 손해로 부채감을 안고 있을) 앤드루 스탠튼 감독에게 <니모를 찾아서2>를 연출하게 할 거라는 뉴스가 들려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픽사 너마저!”
순진한 믿음에 의거하여 우기자면 영화는 이야기를 제대로 끝내야 한다(이것은 “영화가 끝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해피엔딩이란 무의미하다”라는 이창동 감독의 철학에 대한 반대와 무관하다). 좋은 영화는 관객의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계속되도록 하되 텍스트 안에서는 서사를 책임있게 맺는다. 모든 스토리의 결말은 죽음의 알레고리이고 상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우리로 하여금 직면하게 하는 장소다. 기약없는 속편의 벨트로 이어지는 영화 문화는 허황되게 영생을 꿈꾸도록 부추기거나 죽음과 상실을 외면하는 집단 무의식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시리즈화는 할리우드의 유서깊은 전통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속편 퍼레이드가 익스플로이테이션 오락영화 특유의 존재방식 혹은 그것의 확장 수준에서 이뤄졌다면, 21세기의 프리퀄, 속편, 리메이크, 리부트는 ‘원 소스 멀티 유스’라는 효율성 제일주의 아래 창의적 모험을 최대한 배제함으로써 대신 투여된 자본을 지키고 그 좌판이 영화와 얼마나 관련이 있건 시장을 확장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충실한 영화 리뷰를 쓰려면 <시학>보다 코믹스 우주의 계보와 <브랜드 하이재킹> 같은 책을 서둘러 읽어야 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이는 불평하거나 걱정할 일이 아니다. 불안한 것은 양극화의 조짐이다. 만천하가 아는 캐릭터나 프랜차이즈의 후광없이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블록버스터의 상당수를 점하던 지난 세기에는 관객의 의식 속에서 중저예산의 완성도 높은 장르영화와 블록버스터 사이의 문턱이 그리 높지 않았다(한국영화를 선택할 때 관객의 감각은 아직 상대적으로 그렇다). 그러나 거대 스튜디오가 브랜드로 인식하는 프랜차이즈 영화에 제작과 마케팅 자원을 집중하면서 관객에게 “극장 가서 봐야 하는 돈값 하는 블록버스터”와 그 나머지 영화는, 구매 동기 자체가 다른 ‘상품’으로 구별되고 있다. 관객의 태도 변화에는 3D가 부추긴 관람료 상승도 한몫한다. 전세계 극장가에서 3D 스크린의 수는 이 포맷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영화나 관객의 수를 웃돌아 소비자의 적잖은 불만을 부르고 있다(2011년 현재 국내 총 2100개 스크린 중 3D 및 4D 스크린 782개. 2010년 현재 미국 3D 스크린 수 7837개로 전체 디지털 스크린의 49.7%).
영화는 이야기가 전부가 아닌 매체지만 서사의 우주에 공헌하기를 멈춘다면 이야기는 언젠가 영화에 복수할 것이다. 비즈니스가 예술을, 아니 엔터테인먼트를 잡아먹을 때 애초에 영화가 비즈니스가 될 수 있게 만들었던 창의성은 비즈니스를 역습할 수 있다. 영화는 한 세기 동안 2D, 셀룰로이드 필름, 인간 배우, 날씨, 카메라의 시야 등등의 물리적 한계를 끌어안고 정해진 러닝타임 동안 이미지와 소리로 이야기하는 백만 가지 방식을 필사적으로 모색했고 그 과정에서 예술/엔터테인먼트가 됐다. 100년간 짊어졌던 물리적 현실의 제약을 하나씩 벗어던진 다음, 브랜드의 가치 제고를 위해 제작되고 시설 초기 투자분을 회수하기 위해 3D로 만들어지는 작금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온 영화와는 이질적인 무엇으로 보인다. 차라리 우리는 포스트 시네마라는 단어의 사용을 고려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