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데요.” “글쎄, 없는 것 같은데….” 올 여름 개봉예정작 중 한국공포물이 있느냐는 질문에 영화사들 대답이 한결같다. “없다.” 예년 같으면 충무로 전체적으로 평균 3∼4개, 많게는 5∼6개까지도 한국공포물 개봉 스케줄이 잡혀 있어야 할 4월 초, CJ엔터테인먼트나 쇼박스를 비롯해 롯데엔터테인먼트, 스튜디오2.0, M&FC, 밴티지 홀딩스 등 주요 투자·배급사들은 이에 해당되는 개봉예정작이 “한편도 없다”고 답하고 있다. 심지어 “투자를 고려 중인 프로젝트 중에도 현재 촬영 중인 공포영화는 없다”는 답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다른 데는 있지 않을까?”라고 되묻는다. 여름 시즌이면 ‘으레 있어줘야 할’ 공포물이니 설마 시장에 한편도 안 나오겠냐는 반문이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정말 한편도 없게 될지 모를 상황이다. 한국영화 공포물이 올 여름 개봉을 목표로 한다면 적어도 현재 촬영 중이거나 후반작업 중이어야 하는데 <씨네21> 646호 제작진행표만 참고하더라도 이런 과정에 있는 공포물은 없다. 또 주요 영화사들이 기획·개발 중이라고 말하는 공포물 아이템들은 최소한 내년 이후를 개봉 목표로 삼는 것들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지난해 <해부학교실>을 청어람과 공동배급하고 <두사람이다>를 투자·배급한 M&FC의 한 관계자는 “외화 중 공포물이 한편 있는데 그것도 개봉할지 말지 고민 중”이라는 말도 전했다. “개봉하는 공포물이 아예 없으면 관객은 그 시즌 자체를 잊게 되니까 (외화 공포물조차)안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거다.” CJ에서 수입·배급 예정인 <장화, 홍련>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도 하반기에 개봉할 듯 보인다. 또 다른 배급사 관계자는 “아무리 못해도 공포물은 기본 50만명은 든다고 보는 시장 아닌가. 마니아 관객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시장인데 정말 한편도 없을 거라니 의아하긴 하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위축된 투자환경 속에 매력요소 사라진 공포물
공포물 시장이 이렇게 싹까지 말라버린 것은 최근 몇년간 없던 일이다. 지난해를 보면 5월에 <전설의 고향>을 시작으로 <검은집>, <해부학교실>, <므이>, <기담>, <두사람이다>, 그리고 10월에 <궁녀>와 12월 말 <헨젤과 그레텔>까지 8편의 한국영화 공포물이 개봉했다. 2006년에는 안병기 감독의 <아파트>를 비롯해 <아랑> <스승의 은혜> 그리고 CJ에서 4부작으로 기획·제작한 HD영화 <어느 날 갑자기> 시리즈물이 있었고 2005년엔 <여고괴담> 4편을 비롯해 김혜수 주연의 <분홍신>, 성현아 주연의 <첼로: 홍미주일가 살인사건> 등이 개봉했다.
해마다 식상한 소재, 기획력과 연출력 부족, 과장된 청각효과 등 여러 비판이 존재해왔지만 그래도 꾸준히 만들어졌던 것이 또 공포물이다. “이상할 것 없다. 충분히 예측됐던 상황이다.” <가위> <폰> <분신사바> <가발> <어느 날 갑자기> 시리즈, <두사람이다> 등 지금까지 10편의 공포물을 작업해온 김용대 PD의 말이다. “지난해에 <두사람이다>를 끝내면서 이제 한동안 한국영화에서 공포물은 나오기 힘들겠구나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충무로 상황이 너무 안 좋고, 공포영화가 지금껏 된 게 없다. 이 어려운 장르를 다들 너무 쉽게 생각했다. 특히 신인감독들. 귀신 날고 반주 깔고 이펙트 깔면 된다고 생각한 거다. 10편을 한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걸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게 이해가 안 간다.” 김용대 PD는 “충무로의 전체 제작편수가 줄어든 만큼 신인감독들의 등용 기회도 줄어들었는데 공포물은 흥행에 관한 신뢰까지 바닥을 쳤기 때문에 더더욱 없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간편한 프로덕션과 저예산이 매력적’이라는 환상도 통하지 않게 되었다. 한 관계자는 “공포물이 저예산이라는 것도 옛날 얘기다. 그 저예산이 요즘 같아선 한국영화들의 일반 수준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투자환경이 위축되어버린 만큼 거의 모든 프로젝트들이 예산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공포물의 ‘저예산’은 큰 장점이 되지 못한다는 얘기다. 김용대 PD는 “공포물이 저예산이라는 사실 자체가 오해”라고도 말한다. “액션물과 비교했을 때 그와 비슷하거나 더 들면 더 들었지 덜 들지 않는다. 공포물에도 액션 들어가고 무술감독 필요하고 CG 들어가고 와이어 쓴다. 안 들어가는 게 없고 프로덕션도 복잡한데 저예산으로 생각한다. 전신 더미(dummy: 배우의 신체를 대신하는 인형 소품) 하나 만드는 데만 1천만원이 든다.”
혹독한 가뭄이 끝나고 새로운 싹이 트길 기대
결국 올 여름 한국영화 공포물이 단 한편도 없을지 모르는 이 희귀한 상황은, 자연스럽게 닥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는 결론이다. 지난 몇년간 줄기차게 지적됐지만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던 안이한 제작방식과 장르에 대한 오해, 그로 인한 질적 저하와 잇단 흥행 실패가 장르의 가뭄을 부른 것이다. 공포물 시장의 향후를 점치는 시각은 다양하다. <여고괴담> 시리즈를 제작한 씨네2000의 한 관계자는 “올해 이렇게 없으면 내년엔 또 여러 편 나올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스릴러이자 공포물인 <검은집>을 제작·배급한 CJ의 관계자는 “지난해에 이 영화 풀 때까지도 우리나라 관객은 스릴러 안 보고 공포물 본다는 속설이 있어서 심의도 공포물로 넣고 마케팅도 그렇게 했다. 지난해 호러들 중 제일 흥행했다고 한 성적이 161만명인데 이 수치를 보고 ‘호러물 최고 흥행이 그 정도면 이제 그 장르는 시장성이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감독, PD들도 있긴 했다”고 전했다. <가발>의 제작사 프라임엔터테인먼트의 배정민 기획PD는 “시나리오 자체도 수적으로 적고 괜찮은 시나리오를 찾기는 더욱 어렵다. 10편 들어오면 그중 1편이 공포일까 말까 하고, 지난해 읽은 시나리오가 150편 정도 되는데 그중 괜찮다 싶었던 공포물은 그러고보니 기억에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떨어진 신뢰도, 시나리오 고갈 그리고 전반적인 제작환경 위축. 다른 어떤 장르보다 충무로에서 호러가 설 곳은 좁아 보이기만 한다. 그럼에도 새롭고 완성도있는 이야기를 찾아 기획개발 단계 중인 호러물 프로젝트들이 곳곳에 있긴 하다. 씨네2000의 한 관계자는 “<여고괴담> 시리즈의 5편으로 갈지 단독적인 프로젝트로 갈지 결정하진 못했지만 공포물 시나리오를 작업 중”이라고 밝혔고, 김용대 PD도 “토일렛픽쳐스에서 안병기 감독과 함께 공포물을 몇편 제작 준비 중”이라고 했다. 김 PD는 “잘하면 올해 안에 개봉할 수 있는 프로젝트도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여고괴담>(1998), <폰>(2002), <장화, 홍련>(2003) 등 몇편의 성공이 거품을 만들었던 공포영화시장. 그것이 지금 극단적인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이다. 숨고르기가 끝나면, 충무로 호러물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궁금하다.
“이제 웬만큼 해선 봐주지 않는다”
김용대 토일렛픽쳐스 PD 인터뷰
-공포물이 외면받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무어라고 생각하나. =신인감독의 등용문이 되어선 안 되는데 그렇게 돼서 영화들의 질이 전반적으로 많이 하락했다고 생각한다. 투자자들이나 신인감독들 모두 이 장르를 너무 우습게 봤다.
-토일렛픽쳐스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장르물 전문제작사를 표방했다. =안병기 감독이 이제는 자기도 잘 모르겠단 말도 한다. 너무 힘든 장르 같다고. 이젠 영화에서 귀신 아줌마 아저씨들 나오면 식상해서 관객이 보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좀비영화를 하자니 정서상 안 맞을 것 같은 부담이 있고. 관객은 눈높이가 하늘만큼 높아져서 이 장르를 이젠 웬만해서는 받아주지 않는다.
-제작 준비 중인 작품들은 어떻게 되나. =안병기 감독이 직접 연출을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두개 있다. 하나는 <속삭임>이란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정글>이란 영화인데 둘 다 소재가 독특해서 기대하고 있다. 어떤 걸 먼저 시작할지 논의 중이고, 결정되면 올해 겨울쯤 제작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지난해 토일렛픽쳐스는 (주)소프트랜드 영상사업부와 공동으로 ‘All That Horror’라는 호러 시나리오 공모전도 주최했었다. 그때 시나리오 당선작은 없었지만 트리트먼트 당선작으로 <손님>이 뽑혔는데. =그것도 역시 올해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다. 시나리오 수정 단계이고 캐스팅도 거의 확정됐다. 솔직한 얘기로 고민이 많다. 웬만큼 해선 봐주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