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한국영화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한국 예술영화가 어렵다고는 자주 말하지 않는다. 예술영화 만들기 어려운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또 무엇이 예술영화냐는 질문도 사실은 있을 만하다. 혹은 예술영화, 라고 운을 떼면 우리는 예술 아니라며 대부분 발부터 뺀다. 하지만 문화산업 내의 상품이 아니라 진지한 사유와 미학으로서의 영화들이 처한 투자, 제작, 배급 상황은 이미 상당히 나빠져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술영화라는 미묘한 규정은 차치하고라도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의 영화가 중요하지 않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만든 영화들이 문화적으로 한국영화 토양에서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것인가. 위기에 처한 예술영화의 현재는? 과연 활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홍상수 신작 <밤과 낮> 예산 절감 끝에 촬영 시작
홍상수 감독의 8번째 영화 <밤과 낮>이 8월8일 프랑스 파리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해변의 여인> 이후 근 1년 만에 들려온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항은 아니었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서 받은 예술영화제작지원금 4억원을 포함해, 당초 16억원 정도의 예산에서 최종 11억원으로 몸집을 줄인 알뜰함 끝에 얻어진 결과다. 투자에 난항을 겪는 상황에서 애초 제작사 청어람이 손을 떼고 <해변의 여인>을 제작했던 제작사 봄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필름으로 촬영할 예정이었지만 HD 촬영으로 선회했고, 배우와 스탭들은 홍 감독의 영화에 대한 믿음으로 평소보다 낮춘 개런티를 받으며 작품에 합류했다. 앞으로 만들어질 영화에 대한 신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거론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니 한기 흐르는 한국 영화산업의 침체 탓이며, 오래된 예술영화 만들기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문제가 가볍지 않다. 이 상황에서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투자문제로 제작사를 옮기는 등 산고 끝에 제작에 착수했던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결국에는 해피엔딩을 맞았지만 홍상수가, 임권택이 이렇게 어렵다면 과연 누군들 쉬울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신진 감독들 혹은 덜 알려진 중견급 감독들의 사정은 더 나쁘다. 데뷔작으로 <피터팬의 공식>을 만들어 많은 주목을 받았던 조창호 감독은 신작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를 준비 중이었지만, 지난해에 받은 예술영화제작지원금 4억원을 제하고는 10억원을 웃도는 전체 제작비를 충당할 만한 펀딩이 이뤄지지 않아 결국 촬영에 들어가지 못했고, 지원금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다른 이유로 지원금을 포기한 경우는 있었어도 지원금 이외에 필요한 투자를 해결하지 못해 포기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가령 올해 초 <포도나무를 베어라>를 개봉했고, 곧 <괜찮아, 울지마>를 개봉예정인 민병훈 감독은 “한국에서 지금 예술영화를 하는 건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한국영화 힘들다고 해도 독립영화나 예술영화쪽만큼 힘들겠나. 입맛이 너무너무 나빠진 것 같다. 다들 시금치가 좋다는 걸 알면서도 피자만 먹으려고 든다”고 토로한다. 호평 속에 영화를 개봉한 한 영화감독도 “이번에도 내 영화가 잘되지 않는다면 충무로를 등지고 디지털 원맨밴드 영화를 해봐야겠다”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제작지원, 펀드에 작품 몰리는 가운데 투자는 얼어붙어
물론 예술영화를 지원할 제도적 장치나 투자의 손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영진위가 매년 실시하고 있는 예술영화제작지원제도와 “15억원 미만의 저예산영화에 대한 투자를 원칙”으로 조성된 80억원 규모의 ‘KTB 다양성 투자를 위한 펀드 조합’등이 저예산 예술영화를 보호할 도우미로 떠올랐다. 2006년 예술영화제작지원제도에 지원한 작품 수는 34편, 그러나 2007년에는 그 편수가 87편으로 거의 배 이상 뛰었다. 영진위의 김혜준 사무국장은 “일단 영화제작의 현장 분위기가 몇몇 메이저 중심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개별 프로덕션으로 보면 일년에 한편 할까 말까한 제작사들이 있다. 그런 경우 자연스럽게 지원제도를 찾게 된다”고 말한다. 한편, 올해 심사에 참여했던 민병훈 감독은 “정말 살벌하게 몰렸다. 심사위원들끼리 ‘이거 예술영화제작지원 맞아?’ 할 정도였다”고 말한다. 어렵다보니 일단 한번 내보자는 마음으로 지원한 영화들이 상당수였다는 뜻이다. 그러니 옥석을 가리는 일의 엄중함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KTB 다양성 투자를 위한 펀드 조합은 지금까지 네편의 영화에 투자했다. 김희정 감독의 <열세살, 수아>, 이한나 감독의 <슬리핑 뷰티>, 장률 감독의 <이리>, 오점균 감독의 <경축 우리 사랑> 등이다. <열세살, 수아>는 개봉해서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이 아니었고, <이리>는 촬영 중이며 나머지 두편은 시나리오 단계다. <슬리핑 뷰티>에 지원된 1억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영화에 각각 3억원씩 투자됐다.
정작 큰 문제는 이런 일부 제한된 제도와 투자에도 불구하고 정작 움직여야 할 충무로 중심부 투심이 꿈쩍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얼음장이 “한동안이 아니라 언제까지 이어질지 불투명하다”는 거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이 상황을 ‘상업적인 충무로 투심이 예술영화를 외면한다’는 차원으로 해석할 일도 아니다. <천년학>의 투자자 서영관 엔디드픽쳐스 대표는 “지금으로서는 비관적인 게 사실이다. 사실 지금 핵심은 그게 예술영화냐 아니냐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수익성을 낼 수 있는 컨셉인 영화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한국영화가 침체일로에 있는 이때 “부분투자자들이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데 예술성의 의미만을 따져 100% 리스크를 짊어지고 메인투자를 맡기란 어렵다”는 뜻이다. 한편, 예술영화에 대한 해외에서의 투자나 판로마저도 현재로선 김기덕 감독 정도를 제외하곤 뚜렷한 길이 없는 게 사실이다.
투자, 배급 등 모든 부분에서 난항, 다양성의 길 열어야
그렇다면 방법은 아예 없는 걸까. 서영관 대표는 덧붙인다. “<후회하지 않아>처럼 1억원 정도의 예산에 컨셉이 좋은 영화이거나 제작 지원금을 포함해 6억∼7억원 정도로 맞춘 예산이어야 아마 소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KTB 다양성 투자를 위한 펀드 조합의 관계자도 비슷한 대안을 내놓는다. “어찌보면 10억원 미만의 영화들은 리스크가 적기 때문에 아이템과 영화만 좋으면 지금 상황에서 훨씬 더 투자가 용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분간 예술영화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지원금을 끼고 위험 수위를 낮추거나, 적은 제작비 대비 신선한 컨셉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는 좀더 원론적인 차원에서의 대안 제시도 있다. 영진위의 김혜준 사무국장은 “예술영화일수록 예상 가능치를 더 높이면서 짜임새를 갖추어야만 한다. 또 그럴수록 프로듀서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물론이다. 해결책은 사실 쉽게 보이지 않는다. “부가판권 시장이 무너지고 극장 수익성에만 의존하는 이 상황이 펀딩의 어려움보다 우리를 더 어렵게 만든다”는 한 감독의 입장을 듣고 있노라면 예술영화의 문제가 투자를 넘어 극장에 걸리기까지 지난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지금 한국 예술영화의 위기는 투자의 문제, 창작의 문제, 관객의 문제, 배급의 문제 모두에 심각하게 걸쳐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잊지 말아야 할 것. 한국의 영화문화가 풍성해진 것은 다양한 작가영화의 가능성과 다양한 젊은 감독들의 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그 다양성의 길을 열어야만 한다. 한국영화의 위기에 대해서 말할 때 지금부터라도 이 논의를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관객과 만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괜찮아, 울지마> 개봉 앞둔 민병훈 감독
민병훈 감독은 자기 길을 가는 감독이다. 그러나 수월하지 않게.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 <포도나무를 베어라>를 순서대로 만들었는데, <괜찮아, 울지마>는 사정상 몇년이 지나 <포도나무를 베어라> 다음에야 개봉하게 됐다.
-<괜찮아, 울지마>는 뒤늦게 개봉한다.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타슈켄트에서 어렵게 찍고 있는데 회사에서 갑자기 철수해라, 돈 떨어졌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머지 30%는 내 돈 1억원 보태 6억원 정도에 찍었다. 돈 가져왔으니 다시 한번 해보자 했는데도 여전히 제작사는 후반작업비 때문에 거절하더라. 그때 서울영상벤처사업단이 후반작업비 대는 대신 판권을 넘기라고 하더라. 판권을 넘겼고, 부산국제영화제 출품도 했다. 그 뒤로 두 회사 모두 행방이 묘연해졌고, 우여곡절 끝에 판권 찾아오는 데 4년이 걸렸다. 그 4∼5년 동안 한국영화 상황은 너무 나빠졌고, 배급하려고 돌아다녀도 해줄 곳이 없었다. 그동안 쉴 수만은 없어서 <포도나무를 베어라>를 하게 됐던 거다. 이번에 영진위 마케팅 지원 3천만원 받았고, 영화사 유레카가 배급을 맡았다.
-확실히 요즘 예술영화는 더 힘들어졌다. =예술영화 만드는 거? 그건 개인적으로 힘든 일 아니다.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만든 걸 갖고 어떻게 만나야 하느냐다. 그게 현재 극장밖에 없는 게 문제다. 첫날부터 퐁당퐁당(교차상영)하고, 자기들이 알아서 내려버리니까 수익이 날 리가 없다. 두 개관이라도 만족하라고 한다. <괜찮아, 울지마> 같은 영화는 1∼2개관이 아니라 70개관 걸고 2주 보장해줘야 10만명이 넘을 거다. 그것 같고도 사실 순재 뽑을 수 없다. 대개 많아야 5개관 걸고 지방 2주 정도 도는 건데, 그런 구조에서 이 영화가 수익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과연 누가 판단할 것인가. 인터넷이나 케이블을 위해서 만드는 방법도 말하는데 쉽지 않다. 어떤 배우가 거기 쉽게 출연하려고 하겠나.
-예술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어려운 점은. =어떤 운동화로 뛰든 잘 뛸 수 있다. 만들 수는 있다는 거다. 정작 예술영화, 독립영화, 이런 용어도 중요한 게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다양한 영화가 어떻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가 하는 출구를 고민해야 한다. 요즘처럼 나쁜 상영 구조에서 앞길이 뻔한데 내가 어느 투자사에 가서 돈을 달라고 하겠는가. 부가판권 장치나 출구가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 펀드 지원이야 있지 않나. 배급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다양한 루트 말이다. 케이블, 비디오, 인터넷, 도서관, 대학교, 학교 등 다양한 루트와 시장이 개발돼야 한다.
-다음 작품 상황은 어떤가. =<천국의 향기>라는 작품이다. 아직 펀드 받은 건 없다. 하지만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PPP에 나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