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거짓이 당신의 가슴을 울립니다!
모스크바에서 도박으로 빚을 떠안고 고향인 우즈베키스탄의 한 작은 마을로 돌아온 무하마드.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그의 손에 들린 바이올린을 보고 그가 도시에서 성공한 연주자인 줄로 착각 한다. 그러나 허풍을 떨며 돈을 빌리러 다니는 그의 친구들은 반겨주질 않고 가족들의 삶 또한 여전히 고단해 보인다.무위도식하며 여전히 불안한 시간을 보내는 그에게 어느 날 새로운 전령사가 찾아온다. 그의 창가에 매일같이 달걀 하나가 놓아져 있는 것이다. 곧 응급차 운전수의 딸이 자신을 흠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무하마드는 고마운 마음으로 소녀에게 머리핀을 선물하고,한편 그의 정체를 의심하던 어머니는 결국 아들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보게 되고 실망만 하게 된다.
어느 날 그를 의심하는 마을 사람과 집으로 찾아온 경찰들을 피해 무하마드는 할아버지 작업장으로 피신을 하고야 만다. 그곳에서 태연한 척 호기를 부려가며 집을 팔고 대도시로 이사 가자며 할아버지를 강하게 회유하자 할아버지는 그의 욕망과 거짓을 꾸짖는 대신 자신이 수 년 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비밀을 그에게 털어 놓는다.
할아버지의 우화 같은 이야기를 들은 무하마드는 깨달음과 가족의 의미를 알게 되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고향을 등진 채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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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아 공화국의 거짓말쟁이 낯선 이방인에게 영화의 영감을 선물하다.”
<괜찮아, 울지마>는 전작 <벌이 날다>가 끝난 시점인 1999년 말 기획되었다. 199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란의 거장 모센 마흐말바프감독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아 해외영화제에 널리 알려진 <벌이 날다>는 그 해 이탈리아, 그리스, 독일, 러시아 등에서 많은 상을 수상하며 민병훈 감독에게 커다란 영예를 안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벌이 날다>가 다소간의 짐이 되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러시아 출신의 공동 감독인 잠쉐드 우스마노프와의 공동 연출로 인해 <벌이 날다>가 잠쉐드에 의해 주도적으로 만든 것이고 중앙아시아의 타지크스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한국사람이 이렇게 만들 수 없다는 시샘이 민병훈 감독에게 들려왔다. ‘당신들이 그렇게 의심한다면 이번에는 내가 단독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며 재도전의 의식끝에 시나리오 구상에 들어간 민병훈 감독은 2000년 그루지아 공화국을 여행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화의 소재나 다름없는 한 시골의 탄광마을에서 22살의 베짱이 같은 친구를 만나게 된다.
모두들 석탄을 캐러 간 사이 혼자 마을에 남아 매일 노래만 부르고 춤을 추며 무위도식하는 이 낯선 남자는 민병훈 감독에게 말을 걸어왔고 그와 원치 않는 만남을 갖는다. 그 청년은 록음악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음악 테잎을 모스크바에 보내 음반사와 곧 계약할거라는 등 허풍을 떨었다. 계속 지켜보니 이 친구가 거짓말도 잘하고 철이 없어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연민의 정이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 때문에 예정보다 오래 머무르게 된 민병훈 감독은 낮에는 카드게임을 하고 저녁이면 술도 마시고 그의 친구 집에도 놀러 가며 지내게 되었지만 주변인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여행 마지막 날 이 친구는 민병훈 감독의 전화번호를 묻고 자신을 한국에 초청해 달라며 애원 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을을 떠나면서 이 친구가 손을 막 흔들어 주는데 굉장히 처연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 친구를 보며 나를 보는 느낌도 들었고 괜찮아 울지마 모티브가 이 친구에요.” 그래서 이런 얘기를 주인공을 통해서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벌이 날다>의 연장선에 있는 얘기도 되면서 내가 교감하는 얘기로 확실히 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혼자의 힘으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에서 외국배우와 현지스텝과 한국 스텝들에 의해 완성되었고 2002년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와 그리스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며 그에게 드리웠던 의심의 멍에를 말끔히 씻어 버렸다.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 <포도나무를 베어라> 두려움에 관한 3부작
2007년 마침내 두 번째 두려움을 만나다.
<벌이 날다>는 자신보다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검사와의 두려움에 맞선 한 교사의 이야기이고 <괜찮아, 울지마>는 도박 빚에 쫓긴 한 남자가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거짓이 탄로나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친다는 이야기이며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신과 여자 문제에 직면한 한 신학대학생의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부터 두려움에 관한 3부작을 만들고자 했던 민병훈 감독의 3부작은 마침내 끝을 맺었지만 <괜찮아, 울지마>는 안타깝게도 국내에 개봉을 하지 못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에서 나오는 대사 중에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마음까지도 부정하게 되고 거짓을 진실처럼 믿게 된다”는 말처럼 <괜찮아, 울지마>는 도박에 빠져있던 한 젊은 남자가 빈털터리가 되면서 빚쟁이에 쫓겨 고향인 우즈베키스탄의 한 마을에 돌아오지만 그는 성공한 바이올린리스트로 잘못 알려져 있고 계속된 거짓말로 인해 두려움에 직면하게 되자 결국 동네를 떠나게 된다.
주인공 무하마드는 재산을 처분해 대도시로 이사 가자고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조르지만 할아버지는 우화 같은 이야기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먼 옛날, 이 곳에 잃어버린 새끼 낙타를 찾아 울면서 떠돌아다니는 어미 낙타가 있었단다. 어미 낙타는 새끼를 찾지 못한 채 중국으로 팔려가게 되었고 슬픔에 잠긴 어미 낙타는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먼 중국까지 하얀 젖을 짜놓았단다. 그때 나온 젖이 하얗게 굳어서 지금의 돌산으로 변해 버린 것이고 네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너를 보며 이 돌로 집을 지어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였지.”
“그럼 저는 잃어버린 새끼 낙타겠네요?” / “넌 아직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잖니!”
“벼랑 끝에 섰을 때 희망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주인공 무하마드가 두려움에 마을을 떠나지만 그는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닌 희망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일지 모른다. 그래서 <괜찮아, 울지마>라는 제목이 더 없이 잘 어울려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수작의 귀환’ 6년 만에 국내 관객을 만난다.
37회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_ 특별언급상, 비평가상 수상
43회 그리스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 _ 예술공헌상, 아시아, 유럽상 수상
전작 <벌이 날다> 이후 중앙 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의 한 작은 마을에서 만들어진 <괜찮아, 울지마>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 되어 호평을 받았고 이후 카를로비바리 국제 영화제와 테살로니키 국제 영화제에서 특별 언급상과 비평가상, 예술 공헌상과 아시아, 유럽상 등을 수상하며 또 다시 좋은 평가가 이어졌다.
세계 10대 영화제에 속할 만큼 알아주는 영화제에서의 수상 실적에도 불구하고 <괜찮아, 울지마>는 국내 시장 여건과 제작사의 투자, 배급, 마케팅에 대한 준비부족으로 국내 개봉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영화의 제목처럼 정말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지만 이제 곧 개봉을 앞두고 ‘괜찮아, 울지마’라는 농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가고자 했던 방향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목표점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민병훈 감독의 집념과 다양성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이 늘어나서 일 것이다.
2007년 <포도나무를 베어라>와 <괜찮아, 울지마>의 연이은 개봉으로 마침내 두려움에 관한 3부작을 매듭 지은 민병훈 감독에게는 개인적으로나 한국의 영화사적으로도 뜻 깊은 해로 기억될 것이다.
Production Note
민병훈 감독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 내다.
<괜찮아, 울지마> 우즈베키스탄에서의 고군분투 제작기 풀 스토리
<괜찮아, 울지마>의 탄생 배경부터 개봉까지 모든 과정을 풀어내면 한 권의 책으로 엮일 만큼 끝이 없다. 그것은 곧 <포도나무를 베어라> 개봉 이후 민병훈 감독이 <괜찮아, 울지마>의 국내 개봉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작 후 6년의 세월이 지났다. 제목만큼이나 험난했던 지난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제목만큼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다.
프로듀서, 촬영, 시나리오, 감독, 통역 등 1인 4역을 해낸 민병훈 감독
<벌이 날다> 이후 그루지아 공화국에서의 여행을 모티브로 시나리오를 구상하던 민병훈 감독은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재수생 시절 알던 친구였는데 10년 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의 회사와 함께 인터넷 영화로 잘 알려진 류승완 감독의 <다찌와마리>, 김지운 감독의 <커밍아웃>, 장진 감독의 <극단적 하루>를 기획, 제작하는 일을 도와주게 되면서 <괜찮아, 울지마>는 기획되었다.
그러나 세 작품은 네티즌들로부터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까지 좋았지만 제작비대비 수익률은 좋지 않았지만 그 회사로부터 장편영화 제작을 제안 받은 민병훈 감독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그루지아 등 세 곳의 촬영 후보지를 정하고 영화 촬영 조건이 가장 나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촬영하기로 정하고 홀로 우즈벡에 들어가 촬영 준비를 하게 된다.
이후 국내 스텝 13명과 현지스텝 30명을 꾸려 오디션을 보고 시나리오 번역을 하고 현지 우즈벡 필름과 합작으로 영화화 하기로 결정하고 두 달 만에 촬영은 완성했지만 그가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무려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모두가 반대한 내전지역에서 마침내 카메라는 돌아간다
영화의 내용상 로케이션 장소가 영화의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기에 신중에 신중을 다해 헌팅을 다닌 민병훈 감독은 최종적으로 우즈벡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12시간 정도 떨어진 키르키즈스탄의 국경지대인 호바 마을을 낙점하자 현지스텝은 물론 국내 스텝들에게도 심한 반대에 직면한다. 이유는 그곳이 국경지역이고 내전지역이라는 것이었다.
스텝들을 설득해 우여곡절 끝에 촬영지로 선택되었지만 문제는 또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듀서를 비롯해 현지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민병훈 감독 혼자 프로듀서 역할을 해야 했다. 오디션을 끝내고 모든 배우들의 캐스팅을 마치자 이번엔 의상과 소품, 미술, 발전차 등을 섭외해야 했고, 혼자 발로 뛰며 촬영에 들어갔지만 제작비가 제때 들어오지 못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며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70% 촬영중 제작 중단!! 모두 한국으로 철수하라!!
한국 스텝중 러시아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민병훈 감독이었기에 여러가지 힘든 상황은 너무 너무 많았다. 현지인과 국내 스텝들을 다독거려가며 70%쯤 촬영을 하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바로 국내 제작사가 더 이상 제작비가 없으니 모두 철수 하라는 것이었다.
민병훈 감독은 모든 스텝들을 모아놓고 한국에서 제작비가 없어 제작을 포기한다는데 나는 절대 포기 못한다. 갈 사람은 가라 그리고 우즈벡 대표에게 당신들이 나를 믿는다면 내가 어떻게든 돈을 갚을 테니 나를 믿고 나머지 30%를 찍자고 설득했다.
민병훈 감독, 빚 갚을 때까지 우즈벡에 볼모로 잡혀있다.
필름 수급과 충분치 못한 제작비에 풍족하게 먹지도 못한 고생은 사치에 가깝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것은 한국에서 보내주는 필름을 수급하는 문제였다. 현지의 까다로운 통관 절차와 제작사가 없기 때문에 몰래 밀수로 필름을 들여와야 했다. 민병훈 감독은 작품의 소중함 때문에 70%의 분량을 영국의 유명한 현상회사인 딜럭스사에 현상을 하며 작품에 자신감을 얻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나머지 분량을 완성하고 몰래 스텝과 필름을 한국으로 보내고 국내 제작사를 설득해 30%의 제작비 약 1억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결국 주변인들과 은행의 대출을 통해 그 빚을 다 갚고서야 한국으로 올 수 있었지만 문제는 후반 작업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작사는 민병훈 감독에게 돈이 생길 때까지 기다라는 답변만 했고 결국 공동제작사를 구해 후반작업을 했고 몇 차례의 어려움을 넘기며 부산국제영화제 출품되었다.
고진감래 <괜찮아, 울지마> 해외영화제에서 빛을 발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굉장히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괜찮아, 울지마>는 영화 첫 스크리닝 후 세계 3대 영화제인 칸느, 베니스, 베를린 외에 카를로비바리 등 해외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부터 동시에 러브콜을 받았다. 그러나 후반 작업을 한 공동 제작사가 결정을 늦추고 해외배급사가 없는 관계로 결국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만 출품하게 되었고 이후 영화사는 자취를 감추었으며 그 후 2년의 세월을 더 보내게 되었다.
2007년 9월! 제작후 6년.. 마침내 국내에 개봉되다.
이후 민병훈 감독은 판권의 주체자가 아니란 이유로 <괜찮아, 울지마>에 대해 아무런 권한을 가질 수 없었다. 결국 민병훈 감독은 원 제작사의 대표가 공동제작사의 대표를 설득해 판권 포기를 받아내게 하고 자신이 돈을 마련해 결국 판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제작 후 5년이 지난, 2006년 이었다. 그 후 <포도나무를 베어라>가 국내 개봉되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이어 <괜찮아, 울지마>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Interview
개봉하는데 의의가 있는 게 아니라, 개봉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영화를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서 만들 수 있다는 것.
<괜찮아, 울지마>는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행복해지고 좋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게 주 목적이죠.
- 민병훈 감독
Q : <괜찮아, 울지마>의 제작과정에 대해 설명해달라. 작품구상은 어떻게 했는지.
A : 전작 <벌이 날다>를 힘들게 개봉시킨 후 후유증이 있었다. 충무로의 자본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다 보니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닌 공동으로 만든 잠쉐드 우스마 노프가 만든 것이고 한국사람이 이렇게 만들 수 없다라는 소릴 들었다. 그 당시 부가판권 부분이 순탄치가 않아 의기소침 해 있었는데 그 얘기에 더 광분했고 그런 시기에 <괜찮아, 울지마>를 구상하게 되었다. 나에겐 재도전의 의미였다. ‘당신들이 그렇게 의심한다면 이번에는 내가 단독으로 오지에 가서 만들어 오리라’ 라는 개인적인 반감에 대한 표출의 행동이었다. 이게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 이유는 한국에서는 제작자들도 잘 모르고 마음적으로도 힘들었기에 한국에서 무언가를 한다는게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 중앙아시아를 여행했었던 일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 시골의 탄광 마을을 여행하다가 22살쯤 되는 베짱이 같은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자기는 록음악을 할 것이고 녹음한 테잎을 모스크바 같은 도시에 보내 큰 성공을 할 것이라며 매일같이 노래 부르고 춤만 추는 게 전부였다. 계속 지켜보니 거짓말도 잘하고 술도 좋아하고.. <괜찮아, 울지마>의 모티브가 이 친구다. 거짓말쟁이, 베짱이, 소외된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 시작했다. 힘들게 제작자를 구하고 시나리오를 완고하고 친구를 피디로 만들어 놓고 스텝을 꾸려 우즈벡으로 떠났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Q : 현지에서는 어떻게 진행했나. 쉽지만은 않았을텐데.
A : 촬영지는 우즈벡으로 결정을 했다. 내가 이곳은 열번 이상 여행했던 곳이고 여유가 있던 편이었다. 총 11억의 제작비를 예산하고 제작사에서 전액 투자를 약속했고 난 스텝을 꾸렸다. 연출, 촬영, 시나리오는 내가 직접 했고 피디는 친구를 쓰고 현지 사람들과 조인을 해서 한국스텝 13명, 현지스텝 30명을 모았으며 오디션을 보며 배우를 캐스팅했다. 하지만 언어도 통하지 않고 경험도 부족했던 피디였기에 캐스팅, 헌팅, 의상, 소품, 미술 등 대부분을 피디 없이 내가 진행을 했고 힘들게 촬영을 해 나갔다. 어렵게 70%정도 촬영했을 쯤 서울로 급히 전화를 달라는 연락을 받고 전화를 했는데 회사가 너무 힘들다고 이 영화를 포기한다며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보낼 테니 2주안에 철수해 들어오란 소식이었다. 하지만 난 거기서 그만둘 수가 없었고 모든 상황을 스텝들에게 설명 후 나를 믿고 나머지 30%를 찍자고 설득을 했다. 우리 스텝들은 결국 나를 믿고 무료로 나머지 부분을 다시 촬영해 나갔다.
Q : 부산국제영화제와 해외영화제에서의 반응은 어땠나.
A : 부산국제영화제때는 반응이 너무 좋았다. 첫 스크리닝을 끝내고 난 후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지만 일단 해외 영화제(칸느, 베를린, 베니스)에서 바로 러브콜을 줬다. 프로그래머들을 직접 다 만났고 모두들 가져가겠다 얘기가 되었고 카를로비바리도 바로 경쟁으로 가져가겠다는 등 정말 반응이 뜨거웠는데 서울에 오니 당시 영화사 대표라는 사람이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잔머리를 굴렸다. 빨리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기저기 찔러보자 서로 가져가겠다던 각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나중엔 ‘서로 나 안가져’ 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 놓치고 카를로비바리에만 가게 되었고 상은 두 개를 받았지만 특별하게 홍보사도 없고 영화사의 직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언론에 보이지도 않았고.. 반응은 좋았지만 결과적으론 힘이 없으니 그냥 그렇게 영화가 묻혀 버린 거다.
Q : 촬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A : 촬영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너무 많았다. 다행히 언어는 통했으니 말하는건 문제가 없었지만 일단 돈이 없어서 힘들었던 적이 많았다. 숙박이나 음식은 다 좋았지만 대신 풍족하게 먹지 못했고 특히 필름 수급하는 게 굉장히 어려워서 세관 통과할 땐 몰래 밀수로 들어와야 했다. 내가 촬영을 직접 하다 보니 욕심이 많이 생겨서 직접 영국까지 가서 현상을 해왔고 인부들 시켜 산도 깎고 절벽도 깎고 길도 만들고. 힘은 들었지만 반면에 우즈벡 사람들이 순박하고 워낙 다들 정이 많아서 큰 문제없이 집중하며 촬영할 수 있었다.
아, 재미있었던 일이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나갈 때 사비를 털어 주인공인 무하마드를 불렀는데 바다를 처음 봤다며 한국 사람들을 몰래 만나 체류비자 해서 불법체류로 남아 한국에서 영화 한다고 하다가 나한테 걸려 억지로 보내졌던 일이 있었다.
Q : 전작 <벌이 날다>를 보면 이웃집에 잘사는 남자가 나온다. <괜찮아, 울지마> 역시 옆집 사는 남자로 부자로 등장하는데 그러한 배치가 영화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지. 전작과의 연속성을 염두에 둔 것인가.
A : 지금 생각해보면 연속성이라 할 수도 있겠다. 내 성향이 심플모드다. 아주 가난한 사람과 아주 부자인 사람의 이야기라기 보단 주인공이 팽팽하게 맞설 수 있는 대상을 둔 것 뿐이다. 예를 들어 박태환이 수영을 잘하는 이유가 옆에서 같이 운동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했고 이봉주가 훈련을 할 때 훈련 파트너가 있어야 했던 것처럼 주인공을 두각 시키려면 옆에 있는 구조나 상황들이 탄탄해야 한다. 그 탄탄한 점을 난 그 마을의 특이성과 영화의 주제성의 배치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끔 구조를 만들어 주면서 이 사람의 캐릭터뿐 아니라 이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의 캐릭터가 확실하게 서지 않을까 하는 의미로 옆에 부자를 둔거다.
Q : 주인공 ‘무하마드’는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라 하지만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 고향으로 피신한다. 모스크바에서 그가 돈 때문에 겪은 고통을 더 절실하게 보여주었다면 고향에서의 모습이나 할아버지를 통해서의 깨달음이 더 자연스럽게 이입되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생략된 점이 아쉽다.
A : 도박을 하고 돈을 빌리러 다니고 쫓기고 하는 씬이 있었는데 이런 장면들이 무하마트를 보여주는데 있어서 굉장히 많은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구조로 가면 너무 드라마 트루기에 빠질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생략을 갖고 마을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었다. 쌓이면 쌓일수록 좋은 것도 있겠지만 쌓이면 쌓일수록 이것 자체가 정보를 너무 줘버렸기 때문에 재미가 없는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촬영 내용을 편집하며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런 것들 자체가 생략이 된 상태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 좀 더 나은 장면이 나왔던 것 같고 할아버지와의 장면은 아쉬운 부분들이 많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무언가 하다 마는 느낌도 들고 올라오다가 그냥 저냥 끝나버리는 느낌. 이게 좀 아쉽다.
Q : 무하마드는 자신이 성공한 음악가라고 고향사람들을 속였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과정들이 하나의 사건처럼 이어지지 않고 있다. 직렬 구성이 아닌 병렬로 구성한 이유는?
A : 예전 관객과의 대화를 했을 때 그런 질문들이 많이 나왔다. 정말 바이올린을 켤 줄 아느냐, 친구한테 사기친거 맞냐, 엄마가 뚜껑을 열었을 때 정말 바이올린이 있었냐, 물론 직렬 구성으로 가면 편하다. 그런데 그 답을 주기 시작하면서 이미 영화는 무너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답을 딱 줘버리면 상상의 폭이 좁아지는. 어떤 정답과 해답을 우리가 아는, 자기가 원하는 루트로 딱 줘버리면 영화가 가지는 어떤 확장성, 예술이 가져다 주는 그런면들의 폭이 좁아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인간적인 부분들은 조금 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그런 의미에서 그런 것뿐이다.
Q : 할아버지는 인생의 참뜻을 이야기해줬고 어머니 역시 가난하지만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살자 이야기했음에도 불구, 무하마드는 희망 없는 방랑길에 오른다. 이유는?
A : 도망치는 것,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봐라. 집이 섬에 있는데 엄마 혼자 산다. 서울에서는 회사도 망하고 힘들어서 엄마한테 갔는데 엄마가 딱 알아보는 것이지,
그런데 거기서 ‘엄마 나 망했어’ 라는 말을 못하고 ‘그냥 며칠 쉬러 왔어’라고 말을 할 것이고 여기저기 일할 곳을 찾아보는데 잘 안되고. 그런데 나중에 할아버지와 엄마가 알았다면 어떻게 하겠어,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희망을 찾아 가는 것일 수도 있고, 죽을 만큼 창피해 떠나는 것일 수도 있고, 떠나기 싫은데 떠날 수도 있는 것이고.. 표정은 딱 그런데..
그래서 제목이 괜찮아, 울지마 이다. 위안의 뜻일 수도 있지만 감독으로서 주인공에게 희망적으로 괜찮아, 울지마를 주는 것이다.
Q : 주인공 무하마드는 노력은 안하며 일확천금을 꿈꾸는, 베짱이 같은 친구다. 관객 입장에서는 감정이입이 어렵고 ‘괜찮아, 울지마’라는 말을 들을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A : 무하마트 같은 캐릭터는 많다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무하마트 같은 허풍이 70-80%정도는 다 있다 생각하고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내숭이라는 것으로 포장된 허풍이 있다. 난 무하마트가 적절하게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이런 식이 아닌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여러가지 방향의 씬을 넣어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동정심이 되어 버릴 것이다. 예를 들어, 입대하는 애들보다는 제대하는 애들이 더 불쌍하다는 것이다. 일병부터 병장때까지 왕처럼 군림을 한 나쁜 놈이 병장 마지막 날 애들한테 어쩔 줄 몰라 하는 거다. 왜냐하면 나가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마지막에 나가면서 너, 가라! 니가 뭘하겠냐? 하는 조롱도 있겠지만 안타까울 수도 있다. 관객들이 볼 때 그게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