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무하마드(무하마드 라히모프)는 모스크바에서 도박으로 빚을 지고 우즈베키스탄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성공한 바이올린 연주가 행세를 하는 한편,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닌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그는 어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집을 팔고 도시로 떠나자고 사정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아들의 바이올린 케이스 속에 바이올린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할아버지 역시 손자의 거짓된 욕망을 말없이 꿰뚫어본 뒤다.
<괜찮아, 울지마>는 민병훈 감독의 <벌이 날다>(1998)와 <포도나무를 베어라>(2006) 사이에 위치하는, ‘두려움에 관한 3부작’ 중 순서상으로 두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벌이 날다>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검사라는 권력에 맞서는 가난한 교사의 이야기이고, <포도나무를 베어라>가 여인에 대한 사랑과 신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신학생의 이야기라면, <괜찮아, 울지마>는 끊임없는 거짓말로 두려움을 위장하면서도 결국 두려움을 떨칠 수 없는 소심한 청년의 이야기다. 직접 촬영을 맡은 민병훈 감독의 카메라는 두려움에 빠진 무하마드의 요동치는 내면을 반영하는 대신 그와 그의 주변을 천천히 관찰하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는 무하마드의 주변 풍경들, 예컨대 그를 철석같이 믿어주는 철없는 어린 동생, 그를 흠모하며 매일같이 그의 창가에 계란을 놓아두는 소녀 등 그를 신뢰하는 이들의 모습에 세심한 관심을 쏟는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거짓말의 발각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죄의식’의 두려움에 당면하게 되는 것이다.
무하마드가 자기 앞의 두려움을 다시 한번 피하려고 할 때, 그의 할아버지는 돌산에 얽힌 우화와 돌산에 남겨진 무하마드의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들려주며, 그가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우화적인 감성을 진부하지 않게 형상화하는 것, 그리고 그 우화의 메시지를 계몽이 아닌,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민병훈 감독의 재능이다. 무하마드가 다시 가방을 짊어지고 고향을 떠나는 길 위에 서서 마지막으로 뒤돌아볼 때, 카메라는 후회와 아쉬움과 고통과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무거워진 그의 표정을 쳐다본다. 비로소 삶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 자의 표정일까. 또다시 두려움에 빠져든 자의 비루한 초상일까. 언제쯤 그는 이 길로 당당히 돌아올 수 있을까. 그렇지만 ‘괜찮아, 울지마’. 이 마지막 장면의 힘은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