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한 편의 영화로 출발해 ＜이리＞와 ＜중경＞ 두 편의 영화가 되기까지

＜이리＞와 ＜중경＞은 애초 한 편의 영화로 기획되었던 작품이다.
이리역 폭발사고를 모티브로 하여 시작된 ＜이리＞는 처음에 절반은 중국의 “중경”에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익산”에서 촬영할 예정이었다.
영화에는 그 배경이 되는 나라와 그곳의 삶이 온전히 묻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장률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한국의 삶이 묻어나는 영화를 찍기 위해 자신이 익숙한 중국에서 시작해 한국에서 끝맺는 전개 방식을 선택했다.
완성된 시나리오가 아닌 이야기의 얼개에서 시작해 현장에서 그곳의 공기와 그곳의 삶이 주는 느낌을 더해 영화를 완성시키는 작업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장률 감독. 이 한 편이자 두 편인 영화는 2007년 여름, 중경에서 크랭크인 했다.

장률 감독은 “한국에서 산 적이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제대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중경>을 찍고 난 다음 이건 정말 자신이 있었지만, 한국 분량은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영화를 시작할 때 두 개의 원칙이 있었는데 하나는 무조건 중경에서 절반, 이리에서 절반을 찍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중경에서는 여름에 찍고 이리는 겨울에 찍겠다는 원칙이었다. 중경을 선택하게 된 것은 절대적으로 이리를 선택하고 난 다음의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느낌이 다른 두 도시를 ‘대구’처럼 촬영하려는 의도를 밝힌 바 있다.
영화도 유기체처럼 운명이 있다고 믿는 장률 감독은 <중경>을 촬영하며 점차 분량이 늘어나기 시작해 결국 95분이 넘게 되자 <중경> 분량과 <이리> 분량을 한 편으로 완성해 4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상영할 것인지, 두 개의 영화로 나누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고 결국 제작진과 감독은 두 편의 영화로 개봉을 결정하게 되었다.

시리즈물이 아님에도 이렇게 한 편으로 시작되었다 두 편으로 나뉘어 개봉하게 된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게 된 <이리>와 <중경>은 각 영화의 호흡을 살리기 위해 결국 폭발 전의 도시 <중경>과 폭발 후의 도시 <이리> 두 편의 영화로 관객들을 만나게 되었다.

잃어버린 30년의 기억,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농담처럼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빨리”라고 한다.
한국전쟁 후, 성장과 개발이 국가 제일의 가치로 여겨졌을 만큼 성장에 대한 열망으로 모두가 내달리고 있던 1970년대는 성장이라는 유령을 좇기 위해 수많은 희생이 정당화되거나 목표를 벗어난 가치들이 소리소문 없이 묻혀지던 시기였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를 시작으로 1971년 대연각 화재사건, 1971년 실미도 사건, 1972년 유신 선포,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1974년 육영수 피살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피살사건,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1979년 박정희 피살사건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는 첨예한 냉전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성장 제일주의가 부른 인재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사고의 회오리바람이 대한민국을 정신 없이 강타하던 정점의 시기였다.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 이리역 구내에 40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화차가 폭발했다. 화약을 가득 싣고 광주로 가기 위해 하행선에 대기 중이던 화물열차가 폭발하면서 반경 1km 이내의 건물과 가옥이 초토화 되었고 사고지점 10km 근방의 주택 창문은 모두 깨졌다. 이 사고로 모두 59명이 죽고 1,316명의 부상자가 생겼으며 1만 6천명의 이재민과 1만여 동의 가옥손실로 당시 전무후무한 인재(人災)로 회자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이리역 폭발사고’이다. 당시 시민들의 대부분은 한국 대 이란의 월드컵 예선전을 보고 있어 더욱 피해가 컸다.
그 폭발사고 뒤 ‘이리’는 ‘익산’으로 지명이 바뀌었고, 영화 <이리>가 제작되던 2007년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가운데 이리역 폭발사고 30주년을 맞는 해였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를 모티브로 한 <이리>는 그 사건이 얼마나 참혹하고 큰 사고였는지를 돌이켜보고자 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 사고를 통해 상징적으로 대변될 수 있는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참혹한 사고 이후 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잊혀진 가운데 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 이리, 그곳에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재중동포 감독 장률, 처음으로 한국을 이야기하다,
타인의 시선으로 그리고 동포의 시선으로 ‘이리’를 들여다보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감독, 자신을 예술가이기보다 “영화 만드는 노동자, 일꾼”으로 소개하는 장률 감독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할아버지 대에 중국으로 이주한 ‘재중동포’이며 중문학을 전공하고 소설을 출간한 적도 있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재중동포라는 그의 이력을 차치하고서 한국에 근거지를 두지 않은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 본 한국에 대해 그는 “한국은 폭발이 끝나고 난 다음의 황폐함이 느껴지는 나라.”라고 얘기한 바 있다. 그래서 “폭발하고 난 곳에서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기 위해 <이리>의 연출을 결심한 것이라고.

영화 <이리>는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에만 포커스를 맞춘 영화가 아니다. 영화에는 그곳의 삶이 묻어나야 한다는 연출 철학을 지닌 감독은 한국에서의 첫 작업인 <이리>를 통해 영화 속에 한국의 삶이 온전히 묻어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으려 평소 그의 다른 영화보다 긴 제작 기간을(<이리> 12회차/<중경> 9회차) 가졌다.
<이리>를 준비하면서 “한국사회, 한국을 더 잘 알 수 있는 방법을 지금 영화를 만들면서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어느 영화보다 긴장하고 있다.”는 변을 밝힌 바 있는 장률 감독은 <이리>를 통해 감독으로서, 그리고 동포로서, 그 어느 한국 감독도 감히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이리’를 사건이 발생한지 30여 년이 지난 오늘 카메라에 담았다.
장률 감독은 “내가 여기서 하려는 것은 한국이라는 생활을 묻어나게 만드는 방법을 찾는데 있다. 그러면 사회가 묻어나는 것이기에. 그 찾아가는 방법에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는 말로 영화를 만드는 그의 뚝심 있는 자세를 피력한 바 있다.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한국인이 보기에 부자연스럽다면 아무리 잘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가짜’라는 소신으로 철저히 지금의 한국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감독의 결심은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영화를 시작하면서부터, 이름 앞에 재중동포라는 수식어가 항상 주석처럼 따라다니고 있는 장률 감독은 자신에게 그 무엇보다 큰 과거이자 과제였던 한국에서, 아무도 얘기하지 않고 30여 년이 흐른 ‘이리역 폭발사고’를 소재로 한 <이리>로 한층 더 깊어진 영화적 시선을 선보인다.

딱 30년이 된, 맞춘 것 같은 촬영 장소들
‘이리(泥里)’는 이 영화 속 무형의 주인공이다

지금은 익산으로 지명이 바뀌어버린 이리는 중고등학교 사회역사 교과서에 수록된 대로 일제 강점기부터 호남의 곡창지대와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지금도 익산은 전라 남북도를 관통하는 모든 기차역의 중심으로, 익산역에 내려서면 익산역을 중심으로 나뉜 나즈막한 건물들 사이로 도시를 관통하는 기차선로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부모를 잃고 그 사고 속에 조산으로 태어난 진서와 그런 동생의 유일한 보호자인 태웅은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 이곳에서 단 한 번도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살고 있는 남매이다. 그런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로 등장하는 익산 모현아파트는 세트가 아닌 지금 현재도 익산역 뒤편에 건재하고 있는, 그리고 ‘이리역 폭발사고’ 다음해에 건설된, 그러나 곧 재개발로 철거가 예정된 30년 된 아파트이다.
장률 감독은 <이리> 시나리오가 잘 풀리지 않아 고민에 빠져있던 2007년 초, 처음 익산을 방문했고 그곳에 머물면서 이야기를 다시 썼다. 도착 첫 날, 익산역 뒤 모현아파트를 발견하면서 감독은 다른 곳은 더 둘러볼 필요도 없다며 이곳을 촬영장소로 확정했다. 세월의 더깨가 그대로 앉아있는 유령 같은 이 아파트를 발견하고 “이제 됐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마치 운명인 것처럼, 그곳은 익산역 뒤편의 언덕 쪽에 위치하고 있어 떠나고 도착하는 실타래처럼 얽힌 기차 선로들이 그대로 내려다 보인다. 그곳에 30년의 시간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진서, 태웅 남매가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노인정’으로 등장하는 공간은 마치 과거의 어느 순간에 시간이 정지된 듯 아직도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과 액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치 30년 전 ‘이리’의 공간이 그대로 멈춘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이 완벽한 헌팅 장소는 과거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리(泥里)는 한자어로 ‘수렁, 진흙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감독이 “이 영화는 감독이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공간이 만드는 영화다.”고 밝혔을 정도로 인공적인 일체의 가감 없이 그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익산에서 <이리>는 모든 촬영을 끝냈다.
사고의 현장에서 절망과 비탄 속에 그저 살아갈 뿐인 진서, 태웅 남매의 잃어버린 30년의 삶은 ‘이리’의 뜻 그대로 수렁처럼 깊고 힘겹다.

프로덕션 노트

1. 리얼리티를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 한국적 스타일, 자연스러움을 고집

<이리>는 재중동포 출신인 장률 감독이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서 작업하게 된 첫 작품이다.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 외국인 비자가 필요한 그는 사실 지금의 익산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그런 그가 이번 영화를 위해 전라북도 익산에 세트를 꾸리고 현장에서 촬영을 진행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다름아닌 사소한 일상생활,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묻어날 수 있는 지역만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이었다. 영화에는 생활이 묻어나야 한다고 믿는 그의 철학 때문에 ‘이 영화의 1순위는 한국인의 영화’임을 강조하며 한국적 스타일을 고집했던 것이다. 할아버지 때 중국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중국에서 생활한 터라 한국의 문화와 정서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짧은 대사 하나도 익산 지방의 어투가 맞는지 확인했고 남매가 둘러 앉아 밥을 먹는 장면을 찍을 때도 보통 한국 가정의 저녁식탁이 맞는지를 되물었다. 덕분에 현장의 스태프 전원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감독에게 자문 아닌 자문을 하면서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2. 영화계의 큰손들이 카메오로 총출동!
-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지영 감독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영화 <이리>에 아주 특별한 손님들이 카메오로 참여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첫번째 카메오는 바로 부산영화제를 지금의 세계적 축제로 발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힘써온 1등 공신인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일년의 절반을 해외 영화제에 참석하느라 쉴새 없이 바쁜 김동호 위원장을 간신히 섭외해서 진서가 일하는 양로원의 할머니를 찾아가는 노신사로 등장했다. 비록 짧은 시간 출연이었지만 자신의 연기를 꼼꼼히 모니터하는 등 적극적인 열의를 보이며 촬영에 임했고 덕분에 영화에서는 결코 빠질 수 없는 명장면을 완성할 수 있었다.
여기에 <남부군><하얀 전쟁><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 한국영화의 산 증인, 정지영 감독이 엄태웅의 택시에 탄 손님으로 등장한다. 정 감독은 베트남 참전용사 역할을 맡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입으로 총을 쏘는 소리를 내는 애드립을 발휘하는 등 영화에 감칠맛을 내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이리> 현장에서만큼은 배우로 초청되었지만 역시 그는 천상 감독이었다.

3. 있는 그대로를 카메라 앞에서 보여라!
- 연기를 강요하지 않는 감독의 연출 스타일과 혼신의 힘을 다한 배우들의 열정

감독 스스로도 다른 준비 없이 최대한의 공백상태를 유지한 채로 현장에 임했지만 배우들에게도 똑같은 주문을 요청했다. 카메라 앞에서 특정 캐릭터인 채로 말하고 행동해왔던 배우들에게는 철저히 캐릭터 분석을 해서 현장에 와달라는 것이 통상적일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연기를 하지 말라는 감독의 말은 곧 인위적으로 특정 감정을 만들어내서 억지로 표현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였던 것.
반면 때로는 배우의 동선을 초단위로 끊어서 디테일한 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윤진서는 5초 뒤에 고개를 돌리고 앉았다가 2초 정도 멈췄다가 말하라는 촬영 전 감독의 주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서자 지금까지의 연기적 습관들을 버리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장면에 몰입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통곡을 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뺨을 내리치는 장면에서는 볼이 퉁퉁 붓는지도 모르고 뺨을 때리며 연기에 집중했다. 엄태웅 역시 지금까지는 카메라 앞에서 뭔가를 만들어내기를 요구 받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영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묻어서 감정을 잘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버틴다는 느낌은 정말 새로운 연기 경험이었다고 고백했다. 영화 5도의 날씨에 얇은 옷 하나로 바다에 들어가 한번에 오케이를 받아내며 혼신의 연기를 다한 덕분에 <이리>는 더욱 풍부한 감성과 깊은 울림을 가진 수작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4. 다양한 언어가 공존했던 현장
- 다른 국적과 모국어의 경계를 드나들다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장률 감독은 자신의 국가적 지역적 정체성을 굳이 한곳으로 정착시키려고 하지 않으려는 듯 대단히 배타적인 태도로 방관하며 영화 속 인물들이 민족과 언어의 미묘한 경계를 드나들도록 했다.
<이리>에도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물론 주인공인 진서와 태웅을 비롯한 배경이 되는 익산의 시민들. 그리고 진서가 다니는 중국어학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중국인 선생님. 그리고 익산 시내에 있는 한 목공소에서 일하는 이라크 노동자까지. 그들은 생계수단이라는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한국에 와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노동자 자노 역을 맡은 배우는 약간의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지만 촬영의 디테일한 부분의 설명까지 이해하기에는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 윤진서는 영어밖에 못하는 외국인 배우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직접 영어로 장면을 설명하고 감독의 의견을 전달하는 등 숨겨진 영어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현장의 동시통역사로 맹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