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보다 양을 원한다면,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을 기다려라.” <뉴욕타임스>의 영화평론가 A. O. 스콧은 올해로 44회를 맞은 뉴욕영화제의 중요성과 다른 페스티벌과의 차별성을 예찬했다. 뉴욕영화제는 칸이나 토론토처럼 필름마켓이나 오스카 수상 후보작 알리기로 유명하지 않고, 선댄스처럼 영화사들의 자축파티도 아니다. 뉴욕영화제는 대담하고 도발적인 작품들을 소개한다. 굳이 영화제를 상점으로 비유하자면 다른 영화제들이 백화점과 도매상점, 인터넷 상점을 추구한다면, 뉴욕영화제는 고급스럽고, 전문적이고, 독점적인 ‘부티크’라고 스콧은 표현했다. 작품선정위원회가 영화배우나 감독이 아닌 평론가로 구성된 이 영화제는 영화를 소개하고 판매하는 창구라기보다는 행사 자체가 일종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수백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일반 페스티벌과 달리 20여편의 선별된 작품만 상영하는 이 영화제는 올해 역시 뉴욕 필름버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세계 각국에서 선별된 25편의 작품을 상영했다. 이중 지난해 이례적으로 3편이 초대돼 눈길을 끌었던 한국에서는 뉴욕필름페스티벌의 단골인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과 이미 배급사가 있어 내년 1월 중 뉴욕에 개봉예정인 봉준호 감독의 <괴물>도 소개됐다. <해변의 여인>에 대해 스콧은 “지금까지의 홍 감독 작품 중 가장 일관성있고 감정적으로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또 “언뜻 보기에는 짧게 끝나버린 행복하지 않은 한 연애 이야기 같지만, 가까이서 고찰하면 미묘하게 조화를 이룬 화술과 시각적인 패턴으로 가득 차 있다”고 호평했다.
뉴욕영화제로는 이례적인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은 물론 공휴일인 컬럼버스의 날에 각각 2회 상영된 <괴물>은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스케줄상의 문제로 일반상영에 참석하지 못하고 기자시사회에만 참석한 봉 감독은 기자들에게 질문 세례를 받았다. 할리우드 진출 계획에 대한 질문에 봉 감독은 “제안은 있었지만, 심각하게 고민한 바 없다. 현재 한국에서 제작할 다음 작품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한 기자는 “당신이 할리우드에서 <살인의 추억>을 만들었으면 살인자가 잡혀야 했고, <괴물>을 만들었으면 소녀가 살아야 했을 텐데, 지금처럼 이런 자유가 있는데 왜 할리우드에 오겠냐”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복원된 고전 30편 상영해 화제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더 퀸>으로 시작된 이번 영화제에서는 소피아 코폴라의 <마리 앙투아네트>,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토드 필드의 <리틀 칠드런>, 압델라만 시사코의 <법정>,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세브린느, 38년 뒤>,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 티엔주앙주앙의 <고 마스터>,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의 <가을의 공원> 등도 소개됐다. 이외에도 워런 비티의 <레즈>와 알베르토 라투아다의 <마피오소>, 리노 브로카의 <인시앙> 등의 작품이 복원돼 상영됐다.
한편 회고전에서는 고전 작품들의 배급사로 유명한 ‘야누스 필름스’의 50주년을 기념해 새롭게 복원된 30편의 작품이 35mm 프린트로 소개돼 화제가 됐다. 이중에는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 로만 폴란스키의 <물속의 칼>,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 루이스 브뉘엘의 <비리디아나>, 아녜스 바르다의 <5시에서 7시까지의 끌레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분노의 날> 등이 소개돼 영화팬들은 물론 이번 영화제에 초청된 감독들 사이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뉴욕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자리잡은 뉴욕영화제는 지난 44년간 1천여편의 작품을 소개했다. 이중 한국영화 초대작으로는 88년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비롯해,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2002년 <취화선>,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 2004년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2005년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사람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