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역사의 중심에는 영화사 쇼치쿠가 있다. 쇼치쿠 영화의 역사를 본다는 것은 그래서 일본영화의 정통성을 본다는 의미다. 그 정수를 보여주는 쇼치쿠의 주요 작품 19편이 12월17일(토)부터 30일(금)까지 “일본영화 계승과 혁신: 쇼치쿠 110주년 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1895년, 영화가 탄생한 해에 창립된 쇼치쿠 영화사는 1920년 쇼치쿠 키네마 합명사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영화제작에 뛰어든다. 이번 상영작인 19편의 작품들은 쇼치쿠에서 제작된 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고른 대표작들이다. 게다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이 많아서 더 의미가 있다.
시기별로 보자면 쇼치쿠의 작가로 명성이 높은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시미즈 히로시의 30, 40년대 영화가 포진해 있고, 50년대 말에서 시작된 이른바 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기주, 시노다 마사히로 등 쇼치쿠 누벨바그 삼총사의 패기 넘치던 시절의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60년대 초까지 전통의 도제 시스템 안에서 장인으로 이름을 알린 기노시타 게이스케, 고바야시 마사키 등의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오즈 야스지로의 무성영화 두편 <도쿄의 합창> <부초 이야기>, 그리고 오즈와 어깨를 견주었던 시미즈 히로시의 독특한 멜로드라마 <장식 비녀>, 2005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 복원판으로 특별 상영된 미조구치 겐지의 <겐로쿠 주신구라>가 눈에 띈다. 비교적 한국에 덜 알려져 있는 세명의 감독 고바야시 마사키, 요시다 기주,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영화세계에 대해서는 각각 12월19일, 21일, 23일 한 차례씩 강연도 있을 예정이다(상영작 중 <겐로쿠 주신구라>는 전편과 후편으로 각각 나눠 상영될 예정이며, <할복>과 <말라버린 꽃>에 대한 작품 소개는 ‘<씨네21> 526호 쇼치쿠 특집 중 쇼치쿠 대표작 10선’을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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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상영작
<도쿄의 합창> 東京の合唱/ 오즈 야스지로/ 1931년/ 흑백 무성/ 91분
‘오즈적인 것’으로 정착한 중·후반 영화들과는 다소 다르며, 무엇보다 오즈가 희극에 얼마나 능한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즈를 삶의 비운에 관한 작가로만 알고 있는 관객에게는 더없이 신선한 자극이 될 듯싶다. 마치 할리우드 무성 코미디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일본의 소시민극에 할리우드적 터치를 가미하려는 노력들이 여기저기 엿보인다. 내용은 월급쟁이 소시민이 직장 동료의 억울한 해고에 항의하다 오히려 자신도 해고당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주인공은 아내의 옷을 팔아먹고 살아야 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영화는 그 주인공의 곁에 언제나 웃음을 배치해둔다. 어두운 이야기를 희극으로 보여주는 오즈의 재치가 돋보인다.
<부초 이야기> 浮草物語/ 오즈 야스지로/ 1934년/ 흑백 무성/ 89분
이 영화의 스토리 작가는 제임스 마키로 알려져 있는데, 알고 보면 오즈의 또 다른 이름이다. 초창기 시절 오즈는 종종 제임스 마키라는 가명을 즐겨 썼다고 한다. 주인공은 유랑극단의 단장이다. 그는 오래전에 들렀던 마을로 우연히 다시 흘러들어온다. 그런데 거기에서 자신이 이미 오래전부터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모르는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죽었다고 알고 있으며, 그를 만나서도 삼촌으로 여긴다. 이후 이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조용히 펼쳐진다. 오즈 자신은 이 영화를 특별히 아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9년에 만든 컬러영화 <부초>는 바로 이 영화의 리메이크작이다.
<장식비녀> 簪/시미즈 히로시/ 1941년/ 흑백/ 75분
시미즈 히로시는 오즈와 동세대 쇼치쿠 감독이었음에도 영화적으로는 오즈와 많은 점에서 대비되고 있다. 특히 가정을 벗어난 장소에서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많이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장식비녀> 역시 배경과 주인공들은 온천 여관의 손님들이다. 손님들 중 한 사내가 온천탕에서 비녀에 발을 찔려 다치게 되자, 그 비녀의 여주인이 사과를 하기 위해 그를 찾아온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시미즈 히로시는 적재적소에 코믹한 대사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한편, 독특한 뉘앙스의 멜로드라마로 영화를 완성해간다. <우게츠 이야기>의 여주인공이자, 쇼치쿠 오후나 스튜디오 시절의 스타 여배우 중 한 명인 다나카 기누요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겐로쿠 주신구라> 元祿忠臣藏/ 미조구치 겐지/ 1941년/ 흑백/ 219분
미조구치 겐지의 역사 대작. 일본의 고전 작품인 <주신구라>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상영시간만 따져도 거의 4시간에 이른다. <주신구라>는 1702년(연호 겐로쿠) 모욕을 당하고 죽은 영주 대신 47명의 무사가 모여 복수를 하고, 모두 자결한다는 내용이다. <주신구라>는 많은 가부키와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일본인에게는 익숙한 소재다. 그러나 미조구치 겐지는 이야기의 정점인 전투 장면을 생략하고, 무사들의 제식과 토론을 중심으로 어떤 예와 충절의 영화를 완성한다. 한편으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제작된 세트와 그를 담아내는 미조구치만의 롱테이크와 크레인숏의 흐름 역시 돋보인다. 이번에는 전편과 후편으로 나눠 상영한다.
<밤의 여인들> 夜の女たち/ 미조구치 겐지/ 1948년/ 흑백/ 75분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결핵으로 아이를 잃은 후사코는 사업가를 가장한 마약딜러 구리야마의 비서이자 정부다. 여동생 나츠코가 구리야마와 관계를 가졌다는 걸 알고 집을 뛰쳐나온 후사코는 오사카 뒷골목의 창부가 된다. 후사코를 찾아 뒷골목을 헤매던 나츠코는 우여곡절 끝에 언니를 찾아내지만, 후사코는 나츠코를 냉담하고 거칠게 대한다. 미조구치 겐지의 중기작에 속하는 <밤의 여인들>은 집안의 빚 때문에 창부가 된 여인을 그린 초기작 <오사카 엘레지>(1936)에서처럼 공격적이고 거친 여성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다. 현대적인 여성 캐릭터와 함께 어둡고 음울하면서도 화려하게 짜인 엔딩 시퀀스의 미장센은 탐미주의자 감독의 영화적 색깔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감탄스러운 대목.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 カルメン故鄕に歸る/ 기노시타 게이스케/ 1951년/ 컬러/ 86분
시대극, 코미디, 멜로 등 다양한 장르에 능했던 감독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흥겨운 대중영화. 시골 촌구석의 집을 말없이 뛰쳐나와 도쿄에서 스트리퍼가 된 카르멘은 나름대로 돈을 벌고 성공한 연예인이 된 뒤 친구 아케미와 함께 고향을 찾는다. 화려한 두 도시 여자가 출현하자 마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그런데 동네 체육대회날 두 여자는 본의 아니게 망신을 당한다. 자존심도 되찾고 재미도 누릴 겸, 카르멘과 아케미는 유료 스트립쇼를 열기로 한다.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는 일본 최초의 올 컬러영화다.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에서 들을 수 있는 재즈 넘버를 삽입하고, 슈베르트의 <숭어>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메인 테마를 오리지널 스코어로 우아하게 써서 앞서가는 시대감각도 보여주고 있다. 이듬해에 속편 <카르멘 사랑에 빠지다>가 만들어졌다.
<태양의 묘지> 太陽の墓場/ 오시마 나기사/ 1960년/ 컬러/ 87분
오시마 나기사의 세 번째 장편영화. 오사카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하층민과 그곳을 거점 삼아 싸움을 일삼는 삼류 깡패들의 생활상이 등장한다. 이제 막 깡패 집단에 들어간 순수한 주인공 청년을 따라 영화는 흘러가고, 크고 작은 싸움과 강간이 빈번히 일어나는 과정 속에서 청년은 도덕적 방황을 겪는다. 사회를 겨냥한 직접적인 발언은 없으나, 영화의 정조만으로도 당시 일본사회의 음울함을 반영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유약하면서도 곧 터질 것 같은 불안한 감정이 돋보이고, 묘지 위로 쏟아지는 붉은 석양이 내내 영화를 위태롭게 감싼다. 오시마는 이 영화 다음에 만들어진 <일본의 밤과 안개>가 일방적으로 상영중단되자 이에 항의하며 쇼치쿠와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쓸모없는 녀석> ろくでなし/요시다 기주/ 1960년/ 컬러/ 88분
쇼치쿠 누벨바그의 또 다른 총아였던 요시다 기주의 데뷔작. 삶을 지루하고 무력하게 느끼는 청년들이 범죄행각을 통해 탈출구를 찾으려 한다는 내용. 당시 유행하던 태양족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지만, 좀더 차갑고 날렵한 면이 돋보인다. 흔히 요시다 기주의 최초 걸작은 <아키즈 온천>, 가장 진보적으로 실험한 작품은 <에로스 플러스 학살>이 꼽히는데, 이 영화에선 누벨바그에 대한 영향력을 한껏 자인하고 있다. 특히, 요시다 기주는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마지막 장면을 영화의 엔딩에서 되풀이하며 일종의 헌사를 바친다. <쓸모없는 녀석>은 이 시기 태양족 영화 중에서는 다소 차가운 쪽에 속하는 듯하다.
<희극 여자는 배짱> 喜劇 女は度胸/ 모리사키 아즈마/ 1969년/ 컬러/ 90분
공장에 다니는 주인공은 내성적이고 착실한 인물이다. 어느 날, 그에게 활달한 성격의 여인이 접근하고, 둘은 곧 연인으로 발전한다. 사소한 오해로 사이가 멀어지는 듯했던 그들의 관계는 일련의 소동 속에서 곧 회복된다. <희극 여자는 배짱>은 재미난 제목만큼 떠들썩하고 유쾌한 코미디다. 주인공의 연애가 영화의 중심이긴 하지만, 생김새도 성격도 다른 그 형의 이야기가 또 다른 축을 이루며, 하네다 공업 지대를 배경으로 한 서민일가의 일상 소묘에는 생기와 박력이 넘친다. 감독 모리사키 아즈마는 <남자는 괴로워>의 공동 각본가로 명성을 얻고, 여자들을 내세운 희극 시리즈로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이 작품을 비롯, <희극 여자는 남자의 고향> 등의 4부작 시리즈를 만들었고, 얼마 전 국내 영화제에서 선보인 <살아 있는 게 최고야, 죽으면 끝이지 당선언>을 연출한 바 있다.
<무능한 사람> 無能の人/ 다케나카 나오토/ 1991년/ 컬러/ 107분
<쉘 위 댄스> <으랏차차 스모부> <워터보이즈> 등에 출연해 여러 차례 연기상을 수상한 코미디 배우 다케나카 나오토의 감독 데뷔작. 가난한 만화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릴 수 없어 본연의 직업을 때려치운 지 오래다. 이발소를 하는 아내에게 빌붙어 살면서도 출판사로부터 들어오는 일감을 마다하는 그는, 집 근처 강가에서 돌을 모아 팔기 시작한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에게서 가치를 찾는 것이라고 그는 자기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하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는 없다. 창작의 재능이 없지 않은 그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쓰게 요시하루라는 만화가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무능한 사람>은 단순한 은유를 통해 깊은 의미를 전달하려는 영화다. 희극의 페이소스를 아는 코미디 배우의 감독 데뷔작으로서 빛나는 대목들이 발견된다.
<검은 강> 黑い河/ 고바야시 마사키/ 1956년/ 흑백/ 114분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조감독 출신으로 초기에는 서정적인 홈드라마를 만들었던 고바야시 마사키의 사회비판의식이 전면에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전후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판 기지촌 풍경이 사실적이면서도 희극적으로 펼쳐진다. 미군을 위한 각종 클럽과 매매춘을 원경처럼 배치하고, 퇴락한 연립주택에 살고 있는 밑바닥 인간 군상이 서로 돕고 질투하고 싸우는 모습을 정물처럼 흘려보낸다. 이들 사이에 지식인 청년, 야쿠자, 모던 걸의 삼각관계 멜로가 끼어들며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형성한다. 전쟁의 폐허에 여전히 갇혀 있는 일본의 신음을 청춘멜로와 풍속극으로 조율해낸 장인적 솜씨가 뛰어나다. 오즈의 오랜 동반자였던 아다 유하루가 촬영을 맡았다.
<나라야마 부시코> 楢山節考/ 기노시타 게이스케/ 1958년/ 컬러/ 98분
고려장에 견줄 수 있는, 일본 도호쿠 지역의 ‘기로’(耆老) 풍습을 그린 후카사와 시치로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했다. 식량이 넉넉하지 않은 산골마을에는 고령의 노인을 나라야마산에 산 채로 버리는 풍습이 있다. 70살을 바라보는 오린은 아직도 성한 이빨 때문에 손자에게 놀림을 받는 처지. 중년의 아들은 그를 버리는 것을 주저하는데 오린은 아들에게 새 아내를 얻어주고 스스로 절구에 이빨을 부서뜨려 때가 왔음을 알린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1983년 리메이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작품이 동물적이고 색정적인 인간의 원시성을 보여주는 데 크게 할애하고 있는 데 비해 기노시타 게이스케는 한 가족이 겪는 비극성을 담담하게 펼쳐보이는 데 주력한다. 연극적 장면전환과 미장센, 노래를 내레이션처럼 활용하는 형식미가 영화적 구조와 매끈하게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