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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여성영화 <폰>
2002-08-14

너희가 여자의 욕망을 아느냐?

스포일러 워닝(Spoiler warning): 이 글을 읽으시는 분 가운데 혹 <폰>을 아직 안 보신 분이 있다면, 이 글을 읽음으로써 영화의 내용을 미리 알게 될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들어가며

왜 서양의 공포영화에서는 남성이 공포를 일으키는 주체이고 여성은 희생자인 반면,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여성이 공포를 일으키는 주체일까? 토템적, 원죄적 주인공인 늑대인간과 드라큘라에 대비되는 구미호, 사녀(蛇女)도 그렇고, 근래의 하이틴 공포물 <스크림>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에 대비되는 <여고괴담> <가위>도 그렇다. 그 외 <장화홍련전> <월하의 공동묘지> <전설의 고향> 시리즈 등, 우리나라 공포물에 가장 많이 나오는 주인공은 ‘한을 품고 죽은 처녀 귀신’이다. 서양의 집단 무의식이 ‘미녀와 야수’에 닿아 있는 반면, 우리의 집단 무의식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에 닿아 있는 듯하다.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빌자면 한(恨)이란 ‘상징작업에 실패한 욕망’들이다. 이 형체를 얻지 못한 맹목적 욕망이 주체화되면 귀신이 된다. 그런데 왜 한(恨)은 주로 여성의 전유물일까? 규정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욕망이 여성에게서 더 막강하다는 것인데, 이는 그 규정이라는 것이 남성중심사회의 산물들로서, 그녀들의 욕망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가 범주화해내는 여자들의 욕망이란 고작, 백설공주가 되고 싶은 계집아이의 꿈이거나, 외디푸스적 감성으로 위장된 양가집 딸래미의 깜찍한 꿈이거나, 또래 남자친구에게 가슴 설레는 여학생의 꿈이거나, 부자 남자를 만나 살림하면서 애 키우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는 현모양처의 꿈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들의 욕망이 이런 박약한 틀 안에 담겨지지 않는다. 남성들의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그녀들의 욕망이 ‘아버지의 법’을 넘어 용암처럼 흘러 넘친다. 이것은 현실이 아닌 악몽으로 재현된다. 환상은 비로소 그 욕망을 표현해내고, 현실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힘으로써 그 욕망을 배출시킨다.

영화 <여고괴담>은 학교 붕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을씨년스런 진실을 담고 있었다. ‘꿈 많은 여고 시절’이라는 환상은 저주받을 ‘당신들의 천국’이요, ‘당신네들의 지배/ 권력 욕망의 덧씌우기일 뿐’이라고 도리질치는 여고생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인 학교를 무너뜨린다. 최신작 <폰>은 또 하나의 공고한 이데올로기인 가정을 폭파시키고자 한다. 이 영화는 <가위>를 만든 감독의 후속작답게, 세련된 형식미와 더불어 휴대폰이라는 가장 개인화된 소통장비를 공포의 매개로 삼는 참신함까지 갖추고 있다. 얼굴을 가린 채 다가오는 벨소리, 그중 휴대폰 벨소리는 기존의 전화와는 달리 딱 한 명의 당사자만을 호명한다. 휴대폰은 친밀하고, 직접적이며, 개인적이고, 깊숙한 장비이다. 공포가, 원자화된 개인들간의 내밀한 욕망의 소통체인 휴대폰을 타고, 파고든다는 것은 세련된 환유이다.

몸 말

이 영화는 여성/청소년/아동의 규범화되지 못한 욕망을 생생하게 살리고 있다. 영화의 중심축이 각기 다른 주체들의 욕망으로 이동해 가면서 공포의 강도는 점증되고, 갈등의 양상은 심화되며, 욕망은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1. 하지원의 욕망

영화의 도입부에서 그녀는 가장 당돌하고 욕심 많은 주체인 듯 보인다. 그녀는 일하는 미혼여성으로, 자아실현 욕구가 강하고 사회적 불의나 폭력 앞에도 당당하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도전적인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세력간의 대립, 혹은 그녀로 말미암아 안온한 가정에 위험의 씨가 뿌려지는 것이 중심공포인양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은 명쾌하며 대체로 규정되어지는 것들이다. 그녀의 욕망은 내밀하거나 왜곡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지향성을 가지며(원조교제 고발), 심지어 이타적이다(난자공여). 그녀의 욕망은 주체화되지 않는다. 욕망의 관찰자이자 화자로서 구조의 중심에 놓여 있는 그녀의 욕망은 사실상 비어 있다. 그녀는 타자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자, 일종의 항등원(0)이다.

2. 아이의 욕망

그녀는 부르주아 가정의 아이로 해맑은 심성을 가진 소녀로 자라줄 것을 요구받는다. 그녀에게 난폭함이나 기괴함은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외상’이거나, 많이 양보해도 ‘질병’일 뿐, 그녀의 내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녀의 발칙한 욕망은 기껏해야 ‘외디푸스적 욕망’으로만 규범화되는데, ‘외디푸스적 욕망’은 부르주아 가정을 전제로 삼고 있기에, ‘가정이라는 안온한 꿈’을 전복시키지는 못한다. 따라서 아이의 꿈틀거리는 욕망을, 유일하게 허용 가능한 형태인 ‘외디푸스의 삼각형’ 안으로 구겨 넣는 것은, 계집아이들의 다면적 욕망을 <백설공주>가 되고픈 욕망 따위로 도식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억압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아빠를 사랑하지만,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야 하는데, 만약 아빠가 사랑하는 것이 엄마가 아니면 어쩔 것인가? 영화는 중반까지 가정 밖에서 형성된 욕망(=불륜)이 ‘귀신’으로 주체화되어, 가정 안으로 침투하여, 외디푸스 삼각형의 한 꼭지점이자 가장 신성 불가침인 아이의 영혼에 천연덕스럽게 들러붙어, 이 완벽한 가정을 초토화시키는 것이 핵심 공포인양 위장한다.

3. 남자의 욕망

영화의 중반까지 그의 욕망은 가장 이상적인 부르주아 가정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부유한 남편, 조신한 아내, 그리고 천사같은 딸로 이루어진 성 가정! 이 한장의 가족사진을 보라!” 이 환상(? 환각!)적인 복음을 전해들은 이들은 행복하다. 정작 자신들의 가정은 왜 이 악다구니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남편의 욕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고생을 사귀면서 자신의 성적 자아를 느끼고자 하였다. 여고생에게 용돈 몇 푼 집어 주고, 잠시 즐긴 것이라고 믿고 싶은 그의 아내는 그녀를 타이른다. 그러나 여고생은 원조교제가 아니라 진짜 “사랑”이었으며, 오히려 그의 가정이 껍데기에 불과하고, 자신과의 사랑이 알맹이였다고 맹랑하게 주장한다. 아내와 여고생은 각각 “흔들리는 것은 잠시, 곧 돌아올 것”이라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으니, 남자의 욕망은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였던 것이리라. 그때, 여고생이 결정적인 한방을 날린다. “넌 씨 없는 여자다! 넌 죄다 가짜다!” 그녀가 어떻게 난자공여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남편은 모르는 체하였지만,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고생에게까지 말한 것이다. 자신의 허무한 감정을 실어서. 여고생의 말을 빌자면, 그는 그의 아내를 숨막히게 느끼고 있었고, 그의 행복한 가정이 가공의 성(城)이요, 일종의 허위의식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는 그 허위의식에 충실히 복무하면서, 그것이 고작 허위의식인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여고생과 진정한 욕망의 공유를 꿈꾸었던 것이다.

4. 여고생의 욕망

그간 우리는 원조교제 문제를 다루면서 여고생들의 욕망을 사장시켜버리고 마는 오류를 범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원의 최초 생각처럼 원조교제란 성인 남자의 그릇된 성욕으로 인한 가장 용렬한 형태의 매매춘으로, 일종의 사회악이며(정부는 짐승만도 못한 놈들을 감방에 처넣고, 그놈들의 신상을 낱낱이 공개하라! 공개하라!), 피해자인 청소년은 판단력이 부재하며, 약간의 물욕으로 소탐대실한 상처받은 아이들로 취급하는데 (그 애들은 죄가 없다! 우리가 보듬어 안아야 할 우리의 아이들이다! 학교와 가정으로 돌려보내 사랑으로 타일러라! 타일러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들 중 한 명이 정의와 관용의 그들을 향해 “좆까. 니미럴. 누가 니들 품에 안긴대?” 하고 욕을 퍼붓는다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성 관념으로는 미성년자는 판단력이 미숙하므로 성적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성인의 욕망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그들의 엄연한 성욕과 성숙한 육체는 자기 결정권하에 있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통제되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청소년 보호법의 근간이 되는 합의연령제도는 성인과 미성년의 경계를 ‘주민등록상의 19세’로 구획짓는데, 과연 그 기준이 절대적으로 합당한가? 극명한 반례로 나이에 비해 조숙한 여주인공이 나오는 영화 <연인>이나, (사드-마조히즘까지 혼재된) 영화 <거짓말>을 든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니까 상영금지하고 난리지!) 하기야 우리사회에서 성인 여자를 성적 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 불과 얼마나 되었다고, 언감생심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운운한다 구웁쇼? 그런데 (이 영화에서 보여지듯)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이 사실은 그들로부터 가정을 보호받고자 하는 성인(특히 성인 여자)들의 욕망의 표현은 혹시 아닌가? 청소년 보호법이 청소년들을 성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 반면, 성인의 (성적) 독점권을 법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인 것은 혹시 아닌가? 이 영화 속에서 여고생은 원조교제의 피해자가 아니라, 관계와 욕망의 주체로 자리하고 있으며, 가정내의 합법적인 성인 여자와 대등하게 맞서고 있다. 그녀는 당당하고 죄의식이 없으며, 오히려 순수하고 진실된 자신의 감정이야말로 정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예쁘장한 여고생의 욕망이 단순히 총각 선생님을 흠모하거나, 스타 혹은 잘생긴 오빠를 쫓아다니거나, 동성친구 사이에서 동성애적 호기심을 느끼거나, 또래 남자애들과 불장난을 하거나, 기껏해야 푼돈 좀 벌려고 몸이나 슬쩍슬쩍 굴리는 것쯤으로 알고 있는가? 그녀들은 당신들의 가정 바로 코 밑까지 와 있다, 젊고 싱싱한 몸과 순수한 열정을 무기 삼아. (이제 유부녀들은 여고생들을 보면 섬뜩해지겠지? 천만에!)

5. 아내의 욕망

영화 후반까지 아내는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의 계몽 대상인, ‘완벽한 가정’이라는 허위의식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느라 자신의 꿈마저 저버린 가엾은(? 혹은 내심으론 부러운!) 부르주아 가정의 안주인인양 보여진다. 영화의 막바지, 드디어 하지원이 벽 속에서 여고생을 발견한다. 영화는 여기에서, 남자의 일그러진 욕망으로 인해 가정의 신성함을 믿은 아내와, 사랑의 순수함을 믿은 여고생은 모두 엄청난 피해자인 것으로, 그리하여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의 도그마인 “남자들은 나쁘다. 여자들은 불쌍하다”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살인자의 용상(龍床)에서 남편을 끌어내리고 아내를 세워 올린다. 남편의 얼굴이 아내의 얼굴로 순간적으로 바뀌면서, 남편은 이제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듯이 소리소문 없이 바닥에 처박혀 있다. 그녀가 여태껏 가정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채, 알량한 남편에게 기대어 살아온 줄 아는가? 그녀는 스스로 부르주아 가정의 안주인이라는 신분을 획득하고 싶은 욕망에 들끓었으며, 이를 위해 부르주아 남편과, 그에 상응하는 말 잘듣는 딸이 있었어야 했다. 그녀의 욕망은 가정이라는 성곽을 필요로 했으며, 거기에 남편과 딸을 복무시키고 조련시켰다. (<구미호>에서 여우는 원시적 가학성에서 벗어나고자 평범한 인간이 되기를 원하여 인간의 아내가 된다. 야수적 본성대로 남편을 잡아먹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데도, 인간과 사랑하며 인간인 척 살아내야 하는 지상과제를 완수하느라, 그녀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가정은 그녀의 또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기에, 가정/남편의 가소로움을 가까스로 참아낸다.) 알고 보니 아내의 선택, 아내의 욕망이야말로 그녀의 가정을 떠받치는 힘이었다. 그녀는 완벽한 현모양처의 역할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불임의 장벽을 뛰어넘고, 아이에게 동화책의 도덕을 주입하고, 남편에게 그의 역할을 숨막히게 종용하며, 그의 외도를 알아내고도 (남편의 배신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성곽인 가정이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단독강화에 나선다.

그러나 여고생이 그녀의 신체적 결여를 들어 그녀의 여성성 혹은 모성성의 결여로 모욕하자, 그녀는 여고생을 죽여 버린다. 그녀는 사체를 처리하는 장면에서나 그 이후 장면에서(그러니까 이 영화 내내) 일말의 죄의식이 없다. 그녀는 살인 이후에도 여전히 고상하게 아이의 분노 발작에 진정으로 상처받았으며, 하지원을 위협 요인으로 경계하면서도, 그녀의 안전을 염려하고 보살펴준다. 그녀의 한 몸 속에 살인자적 욕망과 현모양처적 욕망이 “가정 수호”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섬뜩하게 결부되어 있는 듯이 보이나, 실은 하나의 욕망의 두가지 재현이다. (마치 시멘트라는 동일 질료가 아가 발을 찍는 곳과, 시체 위를 덧바르는 곳에 이질적으로 적용되었듯이.) 그녀의 욕망은 가장 완벽한 평온함을 지향하나, 그 역동은 가장 요동치고 있다. 그녀는 가장 객체화되고, 양식화된 여성인양 보이지만 그녀야말로 욕망의 주체(화신)이다. 그녀는 인형의 집의 노라가 아니다. 노라인 척하는 인형극의 배후 조종자이다. 얼치기 페미니즘은 정말 많은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결론에 대신하여

이 영화는 욕망의 대상에 불과하였던 존재(아이, 청소년, 전업주부)를 욕망의 주체로 끌어올리고 그들의 내밀한 욕망에 귀를 기울인다. 성인 여자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성을 갖춘 페미니즘이요, 피해 망상적이지 않은 공세적 페미니즘이다. 이 영화는 묻는다. “너희가 여자를 아느냐? 그들의 욕망을 아느냐?”

그동안 남성의 시선 속에 포착된 여자는 대체로 다음 세가지 중 하나이다.

첫째, 수동적인 여성으로 남성(타자)의 욕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수많은 멜러물 속의 욕망의 희생양이 된 여주인공들.

둘째, 신비화된 여성으로 남성(타자)의 욕망을 초월적 상태로 받아들인다. 성녀 혹은 일부 김기덕 영화 속의 여주인공들.

셋째, 탐욕적인 여성으로 욕망의 주체이나 그 욕망이 즉물적이다. 탕녀. 요부. 팜므파탈 또는 ‘보들레르’ 시 속의 게걸스럽게 먹는 여자 등.

이는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것으로, 남자들은 여자들이 욕망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가지고 있더라도 자발적으로 체념하고 남자의 욕망을 우선적으로 받아주거나, 그녀의 욕망이 아주 뻔한 것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보듯이 어느 나이대의 어떤 여자도 단순히 피해자이거나, 성녀이거나 요부가 아니다. 그녀들은 모두 욕망의 주체이자, 실체적 존재이고, 구체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녀들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생생하게, 그리고 더 정교하게 욕망한다. 그녀들의 욕망은 남자들(의 페니스 따위)에 의해 순치되지 않으며, 때때로 남자들의 욕망대로 쥐 죽은 듯, 만족한 듯, 행복한 듯 연기하기도 한다. (기억하는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포스터를) 그런데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그녀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그들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 <미저리>의 공포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녀들의 규정되지 못한, 무정형의 욕망이 ‘귀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된 영화 <식스센스>나 <디 아더스>가 보여주듯, 객체를 주체로 인정하고 그들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고 소통하는 것이 공포를 물리치는 비책이다. 남자들은 그녀들을 살아있는 욕망의 주체로 인정하고, 그녀들의 욕망을 이미 알고 있다고 쉽사리 예단하는 파쇼적인 버릇을 버려야 한다. 당신의 그녀가 마녀로 돌변하거나, 귀신으로 둔갑하기 전에 민주적으로 여쭈어보라. “당신이 나한테 원하는 것은 뭐지?”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chingmee@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