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창동, 2010
예술과 윤리의 상관성을 논하는 현대사회의 공론장은 종종 예술의 주체인 예술가를 조명한다. 예술 활동을 하는 예술가는 도덕적인가? 예술가의 미적 가치관은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얼마만큼 윤리적 책임을 지는가? ‘1995-2024 한국영화 전체 베스트10’ 1위에 오른 이창동 감독의 <시>또한 예술과 윤리가 어떻게 서로를 물고 삼키며 예술가의 ‘감수성’을 잉태하는지를 응시한다. 그 감수성은 시를 한번도 써본 적 없는 60대 여성 양미자(윤정희) 개인이 예술가의 지위를 획득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양미자가 수행하는 미적 탐구는 곧 한국 사회 전체의 부채의식으로도 환원된다. 양미자의 시 쓰기는 집단 성폭행 사건의 주범인 손자 종욱(이다윗)의 범죄에 대해 속죄하는 과정과 교차하고, 이는 동시대 관객으로 하여금 현대사의 여러 참사 앞에 직접적으로 가해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공유하는 최후의 죄책감을 일깨운다. 돌아보면 이창동의 영화는 <밀양>을 제외하면 늘 가해자의 서사에 관객이 공명할 법한 공범 의식을 짚었다. <초록물고기>는 막동(한석규)의 비극을 통해 도시개발과 정상 가족의 신화를 수호하기 위해 사회가 내친 것들을, <박하사탕>은 김영호(설경구)가 시간을 역전하면서까지 바로잡고 싶은 국가의 폭력과 그 안에서 짓밟힌 인간의 존엄을 다룬다. <시>는 이창동의 초기작 그 이상을 성취한다. 미자는 죄를 지은 자는 그게 혈육일지라도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고, 자신 또한 보호자로서 그 허물을 얼마간 대속한다. 그리고 미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예술가가 된다. 삶에 도사린 절망을 직시하고 사회의 부도덕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바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진짜 시’를 쓴다. 그러므로 <시>는 이창동의 정점이자, 극장 밖 세계의 개선 가능성을 영상 언어로 질문해온 한국영화가 마침내 달성한 예술의 경지다. /정재현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살인의 추억>은 진범이 밝혀진 2019년 이후에도, 아니 오히려 그 이후에야 비로소 온전한 형태로 관객에게 귀환했다. 영화가 묻는 것이 ‘범인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범인을 잡을 수 없었는가’이기 때문이다. 잿빛과 세피아로 물든 화면에 포착된 1980년대의 수사극은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러 출동하는 계엄군, 사이렌과 함께 시작되는 민방위훈련 속에서 자행되는 살인에 동행한다. 잔혹한 수사의 일면은 국가 폭력과 개인이 저지른 살인이 동일한 토양에서 자란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일지도 모르는 남자에 관해 ‘평범한 얼굴’이라고 떠올린 소녀와 카메라를 응시하는 박두만 형사(송강호)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은 비극들 앞에서 배회하는 시민의 초상일 것이다. 2000년대 초, 한국영화가 도달한 정치적 우화의 정점이자 장르를 변주하며 시대를 증언하는 봉준호식 리얼리즘의 첫 번째 걸작. /김소미
<마더>봉준호, 2009
앨프리드 히치콕 <싸이코>의 오이디푸스 구조를 전복한 <마더>는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욕망을 응시한다. 지적장애 아들 도준(원빈)을 향한 혜자(김혜자)의 모성은 애착을 넘어 과거에 아들을 동반 살해하려 했던 불완전한 ‘살인의 추억’까지 품고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굴레 속에서 혜자는 아들의 무죄를 증명하려다 역설적으로 자신의 원죄와 아들의 과오를 확인한다. 지역성이 농후한 배경막 위에 기억과 망각이라는 장르적 미로를 배치한 봉준호의 영화는 그럼에도 논리가 아니라 하나의 몸짓, ‘마더의 춤’으로 기억된다. 모성을 성역화하는 통념의 배를 갈라 꿈틀거리는 서글픔과 광기를 영화언어로 증명한 <마더>를 많은 이들이 다시 호명했다. /김소미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돌아보면 박찬욱의 영화는 복수와 욕망을 둘러싼 인간의 집념이 극단의 상황 앞에서 붕괴하는 순간을 제의적 이미지로 응축해왔다. 혀를 자르는 자기 처벌, 햇빛 아래 불타는 뱀파이어 연인들처럼 그의 영화는 신화적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헤어질 결심>은 감독 스스로 “내가 만든 인물 중 가장 착한 사람들”이라 말한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를 통해 폭력을 덜어내고 감정의 심연으로 침잠한다. 탐정 서사와 누아르의 외피를 뚫고 나오는 멜로드라마는 장르를 내파하며, 프로덕션은 양식미를 덜고 인물과 자연에서 뉘앙스를 추출한다. 제3의 비인칭적 응시로 남녀의 교감과 어긋남을 입체적으로 포착한 시점숏은 감독의 부지런한 실험적 진화마저 기대하게 만든다. 복수의 서사에서 미결의 서사로 이동하며 박찬욱 영화는 정서적 만조를 맞이했다. /김소미
<고양이를 부탁해>정재은, 2001
적은 상영관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를 부탁해>는 개봉 당시부터 관객 주도의 ‘다시보기 운동’이라는 기록적 사례를 일으켰다. 다섯명의 절친한 청춘들의 우정을 묘사하는 영화는 그 내부에서 여성들을 짓누르는 억압의 풍경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한편 개별 인물들의 차이를 새겨넣는 감독 특유의 생생한 소묘를 더했다. 무엇보다 2025년에 다시 보는 <고양이를 부탁해>는 그 용감함과 섬세함에 더불어 녹슬지 않는 모던함에 감탄하게 한다. 어느덧 24년. 과거와 현재의 청춘들이 세대를 아울러 태희(배두나)의 나룻배 곁에 자기 영혼을 띄워보내는 사이,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고 자란 수많은 감독들이 영화계에 진출해 정재은 감독의 시대를 앞서간 걸작을 호명 중이다. /김소미
<기생충>봉준호, 2019
<올드보이> 박찬욱, 2003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1998
계급의 수직 구조를 저택-반지하-지하실의 건축학으로 가시화한 <기생충>은 <설국열차>의 알레고리를 한국 사회의 리얼리티에 안착시킨 결과다. 이 영화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4관왕을 휩쓴 봉준호 감독의 성취에 역사적 의의를 거론하는 것은 너무 진부한 해설이 될 듯싶다. 계급적 모멸을 냄새라는 신체적 각인으로 번역한 <기생충>이 한국 관객에게 남긴 유효한 상처, 동시대 한국에서 심화되는 계층간 사다리 소멸 세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늘해지는 무엇이다. <올드보이>는 여전히 한국영화에 폭력의 미학을 질문한 작품으로서 대체작을 거론하기 힘들다.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상징인 박찬욱의 결정적 영화를 2025년에 다시 돌아볼 때, 그 창조성이 녹슬지 않았다는 사실도 놀라움을 준다. 동시대 영화 관객에게 일반화된 ‘미장센’의 감각은 <올드보이>의 등장으로부터 순식간에 점화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국 멜로드라마의 문법에 아시아적 품위를 더한 영화다. 죽음 앞에 놓인 사랑을 다루면서도 눈물을 강요하는 대신 관조의 태도를 택한 허진호 감독은 고정된 카메라와 최소한의 패닝으로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일상의 담담함을 기록한다. 시한부의 로맨스 이전에 현존의 온기를 깨닫게 하는 영화의 몸만큼은 여전히 맥박을 유지하고 있다. /김소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