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는 2021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개봉 당시 가진 인터뷰에서, 이제 자신이 다루지 않은 유일한 장르가 바로 ‘서부극’이라며, 언젠가 그 장르를 다룰 수도 있다고 밝혔다. 2015년, <스파이 브릿지> 프로모션 인터뷰에서는 ‘히어로물’에 대해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우리는 서부극(웨스턴) 장르가 죽은 시대에 살고 있다. 서부극이 쇠락의 길을 걸었듯이 슈퍼히어로 무비도 서부극과 같은 방식으로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만일 스필버그가 서부극을 찍겠다고 결심한다면, 그것은 ‘죽은 장르를 찍겠다’는 결심일 수밖에 없다.
‘죽은 자식 눈 열어보기’만큼이나 쓸데없는 일이 ‘쇠락한 장르 찍기’ 아닐까? 감독이 장르 수집가도 아니고, 찍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꼭 도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영화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코언 형제(<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더 브레이브> <카우보이의 노래>), 쿠엔틴 타란티노(<장고: 분노의 추적자> <헤이트풀8>), 제임스 맨골드(<3:10 투 유마>), 제인 캠피온(<파워 오브 도그>) 등은 각자 자기 필모그래피의 최고작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을 서부극을 통해 남겼다.
정작 그간 제대로 된 서부극에 도전하지 못한 것은 스필버그를 비롯한 ‘영화 악동’ 세대 감독이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장편 데뷔작은 서부극 테마가 들어 있는 섹스플로이테이션 코미디영화 <오늘 밤 틀림없이>였고, 마틴 스코세이지는 데뷔 후 오랜 시간이 지나 간신히 <플라워 킬링 문>을 찍었다. 조지 루카스가 종종 ‘우주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이라 얘기되는 <스타워즈> 시리즈 중 <스타워즈 에피소드4: 새로운 희망>을 찍을 때 존 포드의 <수색자>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영화 악동 중 오직 스필버그와 브라이언 드 팔마만 서부극을 다루지 못했는데, 따지고 보면 다른 세 감독 역시 서부극을 정면으로 찍진 못하고 우회했을 따름이다.
존 포드에 대한 사랑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영화 악동 세대 감독들이 존 포드보다 하워드 호크스가 더 좋다고 외치는 존 카펜터나 타란티노 같은 감독보다 오히려 더 서부극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아예 (자신이 <켄터키 프라이드>의 리메이크라 주장하는) <워 호스>에서 와서야 스필버그가 간신히 ‘말’을 찍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이전엔 스필버그가 서부극의 필수요소인 말이 나오는 영화조차 제대로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하스미 특유의 과장이 섞인 말이다. 시리즈 1편인 <레이더스>에서 인디아나 존스는 제법 멋들어지게 말을 타고 추격전을 벌인다. 해당 추격 신 말미에 <역마차>의 유명한 스턴트를 오마주하고 있기도 하기에, 하스미의 주장처럼 말을 의식적으로 피한 건 아니다.) 심지어 <워 호스>에 나오는 말은 카우보이의 말은커녕 미국의 말조차 아니다. 스필버그는 또 존 포드의 <젊은 날의 링컨>에 대응하듯이 <링컨>을 찍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남부와 북부가 중요할 뿐이지 서부와 동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그는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에 존 포드를 직접 등장시키지만 여기서 스필버그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흉내내 찍은 자신의 어린 시절 습작 영화를 수줍게 모사할 뿐이다.
도입부에 인용한 인터뷰에서 스필버그는 자신이 지난 40년간 서부극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밝힌다. 위 진술은 세 가지 의미로 거짓이다. 일단 스필버그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아마추어 때 서부극을 이미 찍어본 적이 있다. 물론 이건 어린 시절에 찍은 것이라 공식 필모그래피는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스필버그가 공식적인 필모그래피에서 아직 찍지 않은 장르는 서부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는 아직 다큐멘터리도 찍어본 적이 없다. 그가 어린 시절에 찍은 비공식 필모그래피까지 따져보면 <파벨만스>에서 묘사됐다시피 다큐도 찍긴 했으나, 아직 ‘공식적으로는’ 찍어보지 않은 장르라 서부극을 찍어봐야 한다면 다큐멘터리에도 한번 도전해보겠다고 말해야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콕 짚어 서부극 얘기만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매번 영화를 찍기 전 무조건 존 포드 영화를 본다는 스필버그가 “내가 지난 40년간 서부극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라고 말한다면, 이 말을 믿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스필버그가 우회적인 방법으로도 서부극을 찍지 않은 건 의식적인 회피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왜 미국의 영화감독은 서부를 찍고 싶어 하는가? 왜 ‘영화 악동’ 세대는 제대로 된 서부극을 찍지 못했는가? 그리고 존 포드를 가장 존경하는 스필버그는 왜 여전히 서부극을 찍지 않는가? 이는 아메리칸 시네마와 그 감독들을 이해하기 위해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무력한 카메라 vs 무서운 카메라
스필버그는 영화에 매혹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영화가 마냥 아름답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영화란 때로 모골이 송연하게 무섭고, 가슴 시리게 잔인해질 수 있다. <파벨만스>에서 가족이 함께 보낸 아름다운 추억을 편집하다가 어머니의 불륜을 깨닫는 순간은 카메라를 든 사람의 의도조차 초과해 뻗어나가는 카메라의 시선, 그 기계적 힘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스필버그는 작품 활동 내내 카메라가 지닌 이 잔인한 힘을 필사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고투를 보여주는 소품 중 하나가 바로 <터미널>이다.
<터미널>은 휴머니즘적 드라마 영화로서 스필버그의 영화 중 범작 취급을 받지만 도입부를 가만히 살펴보면 플롯 구조상 언제든지 카프카적 지옥도로 빨려들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빅터 카진스키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 크라코지아 출신으로, 영어 한줄 읽을 줄 모르지만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제 막 뉴욕 터미널에 내렸다. 그런데 하필 그때 크라코지아에서 쿠데타가 터지고, 여권이 무효화되면서 주인공은 무국적자가 된다. 자다 일어나 재판대에 서는 <심판>의 주인공처럼, 카진스키는 영문도 모른 채 안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공항이란 림보에 갇힌다. 그러나 카프카의 <실종자>에서 묘사되는 미국과 달리 <터미널>의 미국은 그리 잔인하고 폭력적이진 않다. 공항관리국에서는 그저 그를 입국시키지도, 쫓아내지도 못해 난처해한다.
카프카 소설 속 관료기구와 비슷한 무자비함을 보이는 유일한 캐릭터인 관리국 직원 프랭크는 주인공을 회유해 공항에서 치우려 하지만 카진스키를 밀입국자나 난민으로 만드려는 이 시도는 모두 실패한다. 이때 프랭크가 카진스키를 불법 밀입국자로 만들려 함정을 파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부러 입국 게이트 경비원을 다른 곳에 배치한 프랭크는 카진스키에게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듯이 잠시 해당 게이트를 아무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한다. 그 말을 믿은 카진스키가 게이트를 나서면 곧장 밀입국 혐의로 체포해 송환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카진스키는 입국 게이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는데, 프랭크는 이를 원격조종이 가능한 CCTV 카메라로 지켜본다. 주인공은 문 앞을 서성이다가 이 카메라가 자신을 좇는단 사실을 알게 된다. 카진스키는 카메라의 사각지대로 슬쩍 피했다가 혼란스러워하는 카메라 앞에 불쑥 나타나 자신은 떠나지 않을 거라고 선언한다. 프랭크 뒤에서 화면을 지켜보던 다른 직원은 모두 웃음을 터뜨리고, 프랭크는 분한 표정으로 카진스키를 노려본다. 카메라의 시선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이 장면은 스필버그 영화 세계에서 카메라가 무력함을 드러내는 보기 드문 장면이다. 절대 꺾이지 않는 작지만 숭고한 용기를 지닌 소시민적 영웅 카진스키는 카프카의 ‘성’처럼 자신을 짓누르려 드는 거대한 악인 카메라가 밝힌 등잔 밑에 잽싸게 숨는다. 그러나 스필버그의 다른 주인공 모두 이런 행운을 얻는 건 아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주인공 앤더튼은 살인범으로 몰려 도망다닌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SF에서는 안구가 신원 확인을 위한 주요 수단으로 묘사되는데, 정체를 감추기 위해 앤더튼은 안구 이식 수술을 받는다. 시술 후 12시간 동안 빛을 보면 안되지만, 추적 로봇 ‘스파이더’의 추적을 받은 앤더튼은 하는 수 없이 신원 확인을 위해 왼쪽 눈을 드러낸다. 롱테이크로 찍힌 이 장면은 얼음 욕조에 몸을 담가 검문을 피하려 시도하지만 끝내 실패하는 과정을 긴 서스펜스로 담고 있다. 스파이더는 기본적으로 카메라가 달린 거미 로봇이다. 이 카메라는 사람의 홍채를 스캔해 신원을 파악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다. 강한 빛을 조사해 안구를 태우는 카메라는 <터미널>의 무력한 CCTV와 정반대에 있는 존재로서, 스파이더와 CCTV는 스필버그가 카메라를 바라보는 양 측면을 각각 담고 있다. 즉, 스필버그에게 카메라는 무력한 동시에 무시무시하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시가 쌍둥이 빌딩을 둘러싼 두개의 선택일 것이다. 스필버그는 영화 역사상 가장 마지막으로 세계무역센터를 찍은 인물이다. 스필버그가 를 세상에 내놓은 지 2개월 반 만에 9·11 테러가 발생해 빌딩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스필버그는 DVD판에서도 이 장면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뒀다. 그리고 4년 후에 만든 영화 <뮌헨>의 엔딩 장면을 찍기 위해 스필버그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CG로 그려넣는다. 뮌헨올림픽 참사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암살 작전을 다룬 <뮌헨>은 끝없는 복수를 비판적으로 그리는 영화다. 여기서 암살요원으로 나오는 주인공은 자신이 대의를 위해 벌인 일이 무의미한 것을 넘어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기여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품는다. 스필버그는 엔딩 신에서 상사와 대화를 나눈 후 그가 떠난 자리 후경에 쌍둥이 빌딩을 배치해 그의 불안이 근미래에 현실화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때 카메라는 무력한 동시에 잔인하다. 카메라는 근과거를 배경으로 현실에서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찍어 주인공과 관객에게 잔인한 진실을 들이민다. 동시에 그 고발은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것으로서, 그것이 결국 뒤늦은 고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관객은 주인공에 동화돼 무력감을 느낀다. <뮌헨>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목표를 놓친 프랭크인 동시에 눈이 불 탄 앤더튼이 되는 것이다. 이곳에 카메라를 놀려먹는 카진스키의 자리는 없다.
동북으로 진로를 돌려라
스필버그는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대학을 나와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무급 인턴으로 일하다가 감독이 됐다. 북동부인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미국을 가로질러 남서부로 향한 그는 경력의 대부분을 남서부에 위치한 LA, 즉 할리우드에서 키웠다. 하지만 정작 그의 21세기 영화에서 미국이 배경으로 나올 때 주요하게 다뤄지는 공간은 대부분 북동부, 그중에서도 특히 뉴욕이다. 미래를 다룬 SF영화 와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그랬고, 과거를 다룬 영화 <뮌헨> <링컨> <더 포스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도 그랬다.
특히 가상의 현재를 다룬 SF <우주전쟁>에서 주인공 일행은 뉴욕에서 출발해 보스턴에 도착하는 경로로 이동하는데, 지옥이 된 뉴욕과 달리 더 동쪽에 있는 보스턴은 재난의 물결을 비껴간 듯 평화로운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이 영화는 재난물이나 가족 재결합 드라마 정도로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모호한 결말로 향한다. 결말에 이르면 주인공 페리어가 전처와 재결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암시되는가 하면, 마치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처럼 사라졌던 아들은 아무런 설명 없이 전처 옆에 서 있다.
이 영화는 결말을 포함해 관객의 기대를 깨는 전개를 계속해서 선보인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도입부다. 외계인이 통념과 달리 하늘이 아닌 땅을 갈라 튀어나오기 전, 그리고 그 외계인이 사람을 죽이기 전 모두, 경찰이나 행인이 여러 차례 제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행인들이 외계인의 기계에 시선을 못 박은 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심지어 지진이 발생한 후에도 그 진원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서서, 뒤편에 선 사람은 진원지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폴짝폴짝 뛰기까지 한다.
기계가 위협적으로 등장한 후에도 사람들은 어떤 기대에 찬 눈빛으로 기계를 바라본다. 이때 외계인에게 당한 최초의 희생자가 다름 아닌 캠코더로 외계인을 찍던 사람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일종의 처벌이다. 군중의 매혹된 눈빛은 <미지와의 조우>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과 조응하는데, <미지와의 조우>에서는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외계인과 인류의 우정을 보여주며 마무리되지만, <우주전쟁>의 외계인은 살인광선을 쏘며 군중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스필버그는 여기서 긴 시간을 두고 두편의 영화로 펼친 영화 사상 가장 잔인한 대비 몽타주를 펼친다.
스필버그는 <우주전쟁>의 학살 장면에서 카메라가 아닌 대상이 지닌 위험성, 즉 ‘카메라로 무엇을 찍은 것인가’를 둘러싼 선택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카메라가 지닌 시선은 때로 대상을 포박하고 대상화하는 권능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런데 종종 어떤 대상은 카메라의 시선에 복속되는 대신 스크린을 넘어와 관객의 시선을 복속시키곤 한다. 이 영화가 개봉될 때만 해도 이 장면은 걸프전과 9·11 테러 보도를 둘러싼 매스미디어의 스펙터클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됐지만,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지금 우리는 카메라가 소형화되며 펼쳐진 영화 혁명이, 매스미디어가 아닌 개인 미디어를 통해 진정 악몽과도 같은 현실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스필버그는 뉴 할리우드라는 역사가 ‘비극으로 반복되는’ 현실 앞에서 <파벨만스>라는 자전적 영화를 통해 자신이 8mm 소형 필름 카메라로 영화를 찍던 시절을 돌아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손에 쥐고 찍을 수 있는 작은 카메라로도 여전히 아름다운 것을 찍었던 시절에 대한 철 지난 회고가 아니라, 열차 사고를 보며 희열을 느끼고, 사랑하는 가족을 진실로 파괴하며, 평범한 인간에 거짓을 불어넣어 영웅으로 부풀리는 영상매체의 본질에 대한 코멘트를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필버그는 영화란 본질적으로 ‘매혹’이라 믿는다. 다만 매혹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인간을 매혹한 외계인은 빛과 음악의 향연을 줄 수도, 아니면 살인광선을 줄 수도 있다. 영화 속 열차 사고라는 가상의 비극은 한 어린아이에게 충격에 가까운 쾌락을 안겨주지만, 아이는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매혹됐던 바로 그 영화라는 매체가 안겨주는 잔인한 진실에 고통받는다. 이렇듯 영화가 주는 것은 희열일 수도 죽음일 수도 있고 때로는 둘이 동시에 작동할 때도 있다. 스필버그는 몇몇 영화를 제외하면 대체로 희열의 손을 들어주지만, 그 희열 안에도 언제나 비극의 씨앗이 숨어 있다. <파벨만스>에서도 엔딩 신은 얼핏 경쾌한 음악 덕분에 희망을 붙들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존 포드에게 전달받은 메시지는 정확히는 다음과 같다.
“지평선이 바닥에 있으면 흥미로워. 지평선이 꼭대기에 있으면 흥미로워. 지평선이 가운데 있으면 더럽게 재미없어. 자 이제 행운을 빈다.”
존 포드는 무엇이 ‘흥미로운가’에 대해 얘기했을 뿐, 지평선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를테면 <젊은 날의 링컨> 엔딩 신에서 존 포드는 링컨의 죽음, 혹은 남북전쟁이라는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기 위해 지평선을 바닥에 놓은 구도를 사용한다. 언덕을 오른 젊은 링컨을 카메라가 정면에서 찍는다. 이윽고 링컨은 천둥번개가 치는 오른쪽을 바라보며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고, 빗방울이 화면을 덮는다. 깔리는 배경음악은 <공화국 전투찬가>로, 상당히 밝은 분위기라 화면에 깔린 어두운 암시와 대비를 이룬다. 여기서 아래에 깔린 지평선은 상당히 비극적인 의미를 지녔다. 스필버그 역시 영화 <링컨>에서 암살당하기 직전 링컨의 마지막 모습을 똑같이 지평선을 바닥에 둔 구도로 찍는데, 여기서 카메라는 링컨의 뒷모습을 찍고 있다. 링컨은 촛불로 밝힌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 오른쪽 아래로 사라진다. 이 장면에서도 역시 아래로 깔린 지평선은 슬픈 결말을 뜻한다. 그렇기에 <파벨만스> 엔딩 신의 프레임은 분명 주인공의 희열을 표현하고 있는 ‘흥미진진한’ 구도지만, 낮게 깔린 지평선을 그 자체로 희망으로 해석할 순 없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주인공이 상당히 답답한 구도로 찍혔다는 걸 알 수 있다. 주인공이 걷는 길은 사방이 세트장 건물로 둘러싸인 공간이며, 양편에 우뚝 선 거대한 건물은 프레임이 바뀌자 더욱 크게 느껴져 안 그래도 점점 더 멀어지며 작아지는 주인공을 더욱 짓누르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이 장면에서 스필버그는 지평선은 찍고 있지도 않다. 이 신에서 지평선이 보여야 할 정면이 세트장 건물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주인공이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나는 뒷모습을 찍는 장면에서는 후경에 앞이 탁 트인 풍경을 배치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이 선택 탓에 소년은 사방이 폐쇄된 공간에 갇혀버린 것처럼 찍혔다. 이 프레임은 완전히 닫힌 프레임이다. 기쁘지만 동시에 불길함을 안겨주는 스산한 프레임. 이 프레임의 정체는 무엇인가? 스필버그는 왜 열린 지평선을 찍지 않은 것일까?
서부는 가장 잔인한 계절
<파벨만스>에서 존 포드가 지평선을 언급하는 장면을 다시 자세히 보면, ‘말’과 마찬가지로 지평선 역시 서부영화 특유의 요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존 포드는 지평선에 대한 가르침을 자기 사무실에 걸린 그림을 통해 풀어내고 있는데, 그 그림이 모두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카우보이의 모습이 담긴 서부시대를 묘사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서부극에서 지평선은 구도의 흥미로움을 결정하는 기술적 요소인 동시에, 존 포드가 사랑해 마지않은 모뉴먼트 밸리와 마찬가지로 서부극 특유의 풍경을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서쪽을 향해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땅이야말로 말, 총, 카우보이보다도 더 서부극의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장르의 흥망성쇠를 따라 수많은 서부극이 만들어졌지만, 개중 해변이나 바다를 무대로 삼는 작품은 없다. 서부극을 찍는다는 것은 곧 서부의 지평선을 찍는다는 것이고, 서부의 무한함을 믿는다는 것이다.
스필버그는 놀랍게도 자신의 필모그래피 내에서 단지 서부극을 찍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평선조차 제대로 담은 적이 없다. 이를테면 넓은 사막에서 펼쳐지는 <레이더스>의 사막 추격 신을 살펴보자. 자동차와 말이 동원되는 긴 레이스를 펼치며 악당이 절벽에 추락하는 격렬한 액션이 펼쳐지는 와중에도 스필버그는 철저하리만큼 열린 지평선을 찍지 않는다. 버뮤다삼각지대에서 사라진 전투기와 선박이 발견된 황야를 찍는 <미지와의 조우>의 오프닝 신. 역시 넓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스필버그는 여기서 모래폭풍을 치게 만들어 먼 곳이 보이지 않게 만든다. <워 호스>에서 전쟁을 끝낸 주인공이 간신히 부모에게 돌아왔을 때도, 석양 지는 언덕 위에 걸친 비스듬한 그림자는 드넓게 뻗어나간 땅을 상상하게 만드는 그런 지평선이 아니라, 집에 돌아온 주인공을 따뜻하게 지켜보고 감싸안는 포근한 고향 땅이다. 스필버그는 서부극을 의식적으로 회피한 만큼이나 지평선 또한 회피하고 있다.
서부극은 미국영화의 본질을 담고 있는 장르이다. 혹은 서부야말로 미국영화의 본질이 탄생한 공간인지도 모른다. 서부는 무한한 가능성의 땅인 동시에 무법지대였다. 서부는 소박한 공동체가 뿌리박은 유토피아가 될 수도 있었고 약육강식의 지옥이 될 수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론 동부와 같은 문명 세계에 편입돼 미국이 된 공간이다. 서부극은 서부가 꿈꿨던 그 모든 가능성을 담은 모순적 장르다. 미국의 탄생 신화이지만 이것이 결코 고결한 신화가 아니며, 피로 물든 폭력적 신화라는 것을 표면에 드러낸다. 동시에 그 폭력이 결국 법과 정치로 길들여야만 하며, 언젠간 사라질 한시적 존재에 불과했다는 것을 애상에 가득 차 그린다. <역마차> <수색자>, 무엇보다 스필버그가 오마주를 바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존 웨인처럼, 동부의 법을 지킬 수 없다면 서부 사나이는 떠나야만 한다. 그러나 동부에서 시작된 개척 사업이 서부 해안을 맞이했을 때, 그보다 더욱 서쪽으로 향할 순 없었던 미국인은 그 해변에 할리우드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땅에는 끝이 있지만 꿈의 지평엔 한계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부극 속 영웅은 열린 지평선을 향해 떠난다. <역마차>에서 주인공 커플이 향하는 황야의 지평선은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은 이제 문명의 축복에서 벗어나게 됐다”라는 마지막 대사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장면은 관객의 본능적인 불안을 자극한다. 왼쪽에 늘어선 기괴한 모뉴먼트 밸리 탓인지, 아니면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한 색감 탓인지, 혹은 그동안 영화를 통해 지켜본 서부가 두 여행자에게 위험한 요소로 가득 찬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쉬이 진정되지 않는 불안에 떨며 우리는 은연중 두 사람의 안위를 기원하게 된다. 이처럼 존 포드의 카메라가 지닌 진가는 얼핏 뻔하디뻔한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마지막 장면에 부여하는 ‘모호한 종결’(토머스 샤츠)어미에서 발휘된다. 어쩌면 ‘흥미로움’보다도 ‘모호함’이야말로 존 포드가 영화에 기여한 가장 큰 선물일지 모른다.
여기서 스필버그가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 알리기 시작한 작품이 <죠스>라는 사실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블록버스터라는 말을 만들어낸 <죠스>의 출현은 곧 그가 속했던 1970년대 ‘뉴 할리우드’라는 조류를 끝장내는 일련의 과정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미국 북동부 섬에서 벌어지는 상어 출몰 소동을 다룬 이 스릴러물은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해변에서 보내고 있는데, 젊은 스필버그는 여기서 제법 거침없는 태도로 수평선에 초점을 맞춘다. 이때 이 해변과 수평선은 서부극을 보고 자라난 한 젊은 감독이 이제는 서부 해안도시 할리우드에 도착해 어쩔 도리 없이 출발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장소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교묘한 회피이기도 했는데, 그는 무대를 서부 해안이 아닌 동북부 섬으로 삼아 교묘하게 카메라를 뒤로 돌리면 리버스숏으로 잡힐지도 모르는 가상의 지평선을 은근히 설정해둔 것이다. 물론 그가 카메라를 열린 지평선을 향해 180도 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파벨만스> 엔딩 신에서 지평선을 가로막은 스튜디오는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스필버그는 새미 파벨만을 지평선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스튜디오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했다. 지평선이 지닌 모호한 고통과 희열을 직시하는 대신, 언제나 영화라는 희열로 도피했던 자신의 필모그래피 계통을 개체 반복하듯이.
로스앤젤레스의 고통과 희열
스필버그가 매혹된 카메라라는 존재는 동전의 양면처럼 희열과 고통을 동시에 전한다. 그것이 스필버그가 믿는 영화의 본질이다. 서부의 지평선은 이 영화의 모호하고 아이러니한 정체를 상기시키는 가장 상징적인 존재(라고 스필버그는 믿고 있)다. 미국과 미국영화의 유토피아적 가능성과 폭력적인 실패의 과정이 모두 그 하나의 평행한 선 위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감독 스필버그는 반드시 열린 지평선을 찍어야만 한다. 설령 광선에 맞아 잿더미가 되더라도 황야의 지평선을 마주 보아야 한다. 지평선이 지닌 가능성을 마주 보지 않는다면 미국영화의 아이들은 더 나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평선은 반드시 서부의 지평선이어야 한다.
나는 스필버그의 서부극이 희망도 절망도 아닌 가능성, 그 자체를 찍길 바란다. 그가 유머와 휴머니즘으로 우회하는 대신 ‘모호함’이 지닌 매혹과 위험성을 탐구할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새미 파벨만의 앞을 가로막았던 스튜디오를 프레임에서 치울 수만 있다면, 그 장면에 담긴 불길한 암시를 전면화할 수만 있다면, 스필버그는 서부극을 찍을 수 있다. 스필버그 스스로 참여하고 끝장냈던 ‘새로운 할리우드’, ‘새로운 아메리칸 시네마’는 그제야 비로소 다시 더 넓은 지평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존 포드의 말을 빌리자면, “행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