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함께> 시리즈에서 염라대왕을 연기하며 인간들의 죄를 심판했던 이정재. 그가 이번에는 신의 존재에 의구심을 지닌 인물로 변신했다. 2월20일 개봉한 <사바하>에서 그는 신흥 종교 단체의 비리를 캐는 종교문제연구소의 박목사를 연기했다.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맡아온 그는 <사바하>로 한층 넓어진 캐릭터 스펙트럼을 넓혔다.
1990년대초 청춘스타로 활약했던 이정재. 데뷔 초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구사했지만, 확실히 배우로서의 전성기는 현재진행형인 듯하다. 이제는 무려 27년차 중견배우가 됐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10년 단위로 그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1990년대 청춘스타 시절
청춘스타로 이른 성공1993년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데뷔한 이정재는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청춘스타로 부상했다. 그 시작점은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더 블루’의 손지창, 김민종과 함께 출연한 드라마 <느낌>. 이정재는 손지창, 김민종의 동생이자, 삼형제의 막내로 출연, 반항아 캐릭터를 연기하며 인지도를 쌓았다. 이후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에서도 그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해 인기를 끌었다. 조각 같은 근육으로 ‘몸짱’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장본인. 그의 모습이 담긴 <젊은 남자> 포스터를 팬들이 뜯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그를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올려준 작품은 평균시청률 50%를 넘으며 국민드라마가 됐던 <모래시계>다. 이정재가 연기한 재희는 혜린(고현정)을 경호하는 보디가드로 과묵한 성격과 순애보로 주인공 태수(최민수)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목숨까지 바치며 많은 이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킨 캐릭터다. 그에게 빠진 시청자들은 방송국에 그를 죽이지 말라는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모래시계>로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이정재는 성공을 뒤로 한 채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그 인기를 그대로 이어받는 이가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 영화 <본 투 킬> 등으로 얼굴을 알린 정우성이다.
청룡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이정재는 1996년 제대, 곧바로 김영빈 감독의 <불새>로 복귀했다. 그가 연기한 민섭은 <젊은 남자>에서의 캐릭터와 유사한 야망에 가득 찬 마초남. <불새>는 이정재의 복귀작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개봉한 김성수 감독 연출, 정우성 주연의 <비트>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해 최고의 청춘스타 자리는 정우성이 차지하게 됐다.
이후 김성수 감독이 정우성, 이정재를 동시에 캐스팅한 영화가 1999년 개봉한 <태양은 없다>다. 이정재가 연기한 홍기는 돈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인물로 ‘멋’이 강조됐던 전작들과 차별된 이미지를 보여줬다. 이정재 스스로도 “<태양은 없다>를 계기로 연기가 정말 즐겁다고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연기 변신에 성공한 이정재는 1999년 청룡영화제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박중훈, <텔 미 썸딩>의 한석규, <쉬리>의 최민식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나이 27세로 청룡영화제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이었으며, 이 기록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
<태양은 없다>를 통해 친분을 쌓은 이정재, 정우성은 지금까지도 막역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이정재, 정우성의 소속사 ‘아티스트 컴퍼니’도 2016년 두 사람이 함께 설립한 회사다.
흑역사금성(현 LG) 게임기기 ‘3DO Alive’ TV 광고
이정재는 배우로 데뷔 이전 롯데제과의 광고 모델로 발탁, 가나 초콜릿, 스크류바 CF 등으로 먼저 얼굴을 알렸다. 그중 크런키 초콜릿 CF에서는 로커로 등장해 개성과 젊음을 강조한 광고 컨셉을 잘 대변했다. 반면, 1994년 LG의 전신인 금성의 게임기 ‘3DO Alive’ TV 광고는 그에게 ‘흑역사’로 남아있다. <스타워즈>의 BGM을 사용, 이정재가 우주전쟁 게임을 하는 내용이다. 열심히 게임을 하며 “우와앗! 이거 영화야 게임이야. 단 1초도 방심할 수 없어요” 등의 대사를 외치는 이정재.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함은 보는 이의 몫이다.
2000년대 쇠퇴기
멜로로 노선 변경21세기에 접어들며 이정재는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다. 2000~2001년에는 무려 네 편의 멜로영화에 연달아 출연했다. 이전에도 멜로, 로맨스영화에는 출연했지만 주로 방황하는 청춘을 소재로 한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들. 2000년대에는 더 넓은 연령층을 타겟으로 한 멜로에 초점을 맞췄다. 역할도 공무원, 무명 개그맨 등 명확한 직업이 있는 인물을 연기했다.
그중 타임워프를 소재로 한 <시월애>에서는 1997년에 살고 있는 남자 성현(이정재)을 맡아 1999년에 살고 있는 은주(전지현)와의 사랑을 그려냈다.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과 풍경 등으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 그 결과 <시월애>는 <동감>, <클래식> 등과 함께 2000년대 한국 멜로영화로 남게 됐다. 또한 한국영화 최초로 할리우드에서 <레이크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정재는 심은하의 은퇴작인 <인터뷰>, 일본 배우 다치바나 미사토와 함께 한 <순애보>, 이영애와 부부 사이를 연기한 <선물>로 짙은 멜로 연기를 보여줬다. 반면 <선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며 흥행에서는 실패를 기록했다.
다양한 장르에 도전 그러나 흥행은?멜로로 내공을 쌓은 이정재는 스릴러, 액션, 코미디에까지 출사표를 던진다. 이미연, 안성기 등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한 <흑수선>에서는 형사를 연기해 처음으로 미스터리 스릴러에 도전했다. 그러나 산만한 스토리, 어색한 분장 등으로 혹평을 받았다. 이후에도 김용화 감독의 데뷔작 <오! 브라더스>를 제외하고는 쭉 흥행 실패 영화들에 출연하며 이정재는 내리막을 걷게 됐다.
곽경택 감독의 남북 소재 영화 <태풍>이 300만 관객을 동원했지만 여러 국가에서 촬영을 진행한 대작인 만큼,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2008년에는 사극, 액션, 코미디까지 결합한 <1724 기방난동사건>으로 3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지만 결과는 대실패. 부족한 개연성, 억지스러운 코미디 등으로 이정재 최악의 영화로 남았다. 이외 드라마 <에어시티>, <트리플>에서도 성공적이라고 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정재는 장르와 캐릭터의 폭은 넓혔지만, 흥행 실패 배우로의 이미지가 굳어지며 아쉬운 시기를 보냈다.
2010년대 제2의 전성기
매력적인 악인, 성대모사 단골 소재 배우로이정재는 2010년 이후 다시 부활에 성공한다. 그 시작점은 임상수 감독의 <하녀>. 칸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여러영화제에 초청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다. 이정재는 두 얼굴의 부호 훈을 연기하며 재기의 초석을 다졌다. 그리고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 <암살>,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 한재림 감독의 <관상>이 모두 흥행을 기록하며 다시 충무로 대세 배우 자리를 꿰찼다.
위 작품들의 공통점 이정재가 모두 악인을 연기했다는 것. <신세계>는 명확한 악역 포지션 캐릭터가 없는 영화였지만, 이정재가 연기한 주인공 이자성은 양심의 가책을 버리고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는 인물. 그밖에 <도둑들>의 배신자 뽀빠이, 역모를 행하는 <관상>의 수양대군, <암살>의 밀정 염석진은 모두 명확한 악역이었다. 그 가운데 <관상>의 수양대군은 한국영화 최고의 등장 신으로 꼽힐 만큼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했다.
매력적인 악인을 연기한 만큼 이정재는 “거 너무한 거 아니오!”,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내 몸속에 총알이~” 등 수많은 명대사를 남기며 성대모사 단골 배우가 됐다. 이정재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격양된 어조가 코믹하게 재현됐지만, 그만큼 그의 연기는 많은 이들에게 강하게 각인됐다. 이정재 역시 최근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성대모사에 대해 “처음에는 놀리는 것 같아 어색했는데, 호감에 대한 표현이라는 걸 알았다. 대중과의 거리가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 지금은 나도 즐기고 있다”고 전했다.
소년 같은 눈웃음 & 프리허그마지막으로는 팬들이 사랑하는 이정재의 모습이다. 이정재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매력 포인트는 쳐진 눈꼬리와 반달처럼 휘는 눈웃음. <신세계>에서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불안정한 심리를 보여줬지만, 과거를 보여주는 마지막 엔딩 신에서는 활짝 웃는 미소로 팬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소년 같은 해맑은 미소의 소유자다. 또한 영화 <암살>에서는 잠깐 20대 청년으로 등장했는데, 이는 CG, 특수분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촬영된 장면이다. 최동훈 감독도 교복을 입은 이정재가 너무 어려 보여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정재는 프리허그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암살>이 8·15 광복을 기념, 관객수 815만 명을 돌파하면 프리허그 행사를 개최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다. 그리고 8월7일 관객 수 815만 명을 돌파하며 100여 명의 팬들과 프리허그 행사를 가졌다. 한 명 한 명 정성스레 안아주며 팬들의 ‘덕심’을 200% 채워줬다. 프리허그 행사를 마친 뒤 화장품이 묻어 오른쪽 어깨가 하얗게 된 사진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