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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바그의 거장, 별이 되다 - 장뤽 고다르, 향년 91살로 별세

SHUTTERSTOCK

지난 9월13일, 누벨바그의 거장 장뤽 고다르가 91살로 별세했다. 복합적인 병리 문제로 의료진의 조력을 받아서, 그는 합법적인 죽음을 스스로 결정했다. 2014년 스위스 공영방송 <RTS>와의 인터뷰에서 “만일 내가 너무 아픈 상황이라면, 수레에 끌려다니고 싶지는 않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고다르는 고통 없이 삶이 진행될 수 있다고 믿는 낙관론자가 아니었다. 밤의 끝을 여행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그는 스스로의 삶에 개입했다.

고다르가 30살에 만든 <네 멋대로 해라>(1960)는 세계 영화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필름 중 하나였다. 이 작품은 배우, 소재, 주제 면에서 완벽하게 ‘미국의 필름누아르’를 차용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완성됐다. 시간의 흐름을 끊는 편집 기법과 전통적 내러티브의 연결을 거부한 화법으로, 그는 ‘젊음의 이미지’를 신선하게 드러냈다. 기존 영화계가 선호하지 않은 ‘젊음’이라는 주제가 이후 프랑스영화계의 주요한 테마가 된 것은 추가적 성과였다.

실제로 <네 멋대로 해라> 속 젊은이들의 모습은 마냥 순수하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영화 속 배우들은 당대의 현실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정신적 혼란을 육체를 통해 표현한다. 어느 평론가의 언급처럼, 이 영화로 인해 기존의 “시네마는 부상당한다”. 환상과 마법의 장치로써 존재하던 전통적인 영화문법은 옛것이 된다. 고다르가 자신의 첫 번째 영화에서 열어젖힌 것은, 다름 아닌 ‘현대영화’의 위대한 포문이었다.

젊음, 사랑, 그리고 정치

고다르는 연출자가 아닌 비평가로서 영화계에 첫발을 디뎠다.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그가 작성했던 비평 글은 110여편으로, 당대 영화평론가 활동을 병행하던 프랑수아 트뤼포에릭 로메르에 비해 적은 양이었다. 고다르 스스로가 설명했듯 그는 ‘평론가’보다 ‘영화 수필가’라는 표현에 더 잘 어울리는 연출자다. 그럼에도 그의 비평적인 활동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저술 스타일이 연출 경향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모럴’(도덕)이라 불리는 현대 프랑스영화의 중요한 개념이 그의 비평에서부터 출발해 완성됐다.

1959년 <카이에 뒤 시네마>에 발표한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에 관한 비평에서 고다르는 “트래블링은 모럴의 문제다”라고 적었다. 그가 보기에 시네마와 다른 예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촬영’이었다. 동일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졌다. 설혹 모욕적이거나 잔인한 숏이라 해도 응시의 방식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즉, 미장센이 문제였다. 아무리 도발적인 문장을 캐릭터가 말하더라도, 연출자는 도덕적인 중심을 고집해야만 했다. 그런 맥락에서 고다르는 ‘매춘’ 소재에도 접근했다. <비브르 사 비>(1962),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1967),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1980) 등에 등장하는 매춘 행위는 이러한 개념들과 연관된다. 그는 여주인공의 매춘 관련 행동을 일관되게 시적으로 포착한다. <비브르 사 비> 속 아나 카리나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한다. 마치 꿈을 꾸듯 아름답게, 그녀는 영화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감정의 극단을 광적으로 파괴하면서, 고다르는 낭만성을 배가했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사랑의 본질은, 비평적 응시의 대상에 다름없었던 듯 보인다. ‘젊음’과 ‘사랑’에 이어서 그가 집중한 주제는 ‘정치’였다. 1960년대 초 고다르는 <여자는 여자다>(1961), <경멸>(1963), <국외자들>(1964)의 잇단 성공으로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며, 이후에 68혁명의 실패를 바라보면서 서서히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급진적인 좌파 노선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수많은 실험적인 비디오영화들이 당시에 창작되었다. <중국 여인>(1967), <동풍>(1969) 등 ‘지가 베르토프 그룹’으로 분류되는 영화들이다. 그의 파트너는 그사이에 배우 카리나가 아니라 사진작가 안느 마리 미비유로 바뀌어 있었다. 1971년 파리에서 만난 미비유는 고다르가 스위스에서 사망하는 순간까지 함께했다.

영화적 실천에서 이데올로기의 함축으로

지가 베르토프 그룹의 영화들은 대중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일련의 혁명적인 꿈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은 뒤, 고다르는 다시 현실로 복귀한다. <만사형통>(1972)과 함께였다. 이 작품 이후에 그는 서서히 ‘영화적 실천’에서 ‘이데올로기의 함축’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마침내 누벨바그의 작가 정책이 종결되었음을 받아들였다. <영화의 역사(들)>(1988~98)와 같은 ‘에세이 필름’이 그 결과 완성되었다. 비평가로서의 감각을 무장한 채, 2000년대 고다르는 스타일리시한 브리콜라주에 열중했다. 감독 스스로의 설명처럼 “카피하면서 동시에 혁신하고, 창조와 동시에 비판”하는 작업에 빠져들었다. <필름 소셜리즘>(2010)과 같은 시적 인용의 영화들도 차례로 등장했다.

어쩌면 1950년대에 비평적인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이미 고다르는 일종의 ‘재창조’를 시작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의 글은 비평적인 영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자체로 영화의 일부가 되어 살아남았다. 진정한 모던시네마의 실체로서, 그는 스스로를 드러냈다. 2021년 3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다르는 <시나리오>와 <웃긴 전쟁들>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며, 두편의 글을 마친 뒤에 은퇴하겠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렇게 그는 70년 영화 인생의 장대한 은퇴를 선언했다.

고다르가 물러나며 현대영화를 지탱하던 비가시적인 기둥도 함께 사라졌다. 오랜 기간 그는 존재만으로도 예술영화의 거대한 한축을 담당했다. <알파빌>(1965)의 어느 대사가 떠오른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아직 울지 않는다.” 고다르의 방식으로 이 말을 뒤집어 적어본다. “실재하지 않는 아이는 더이상 울지 못한다.” 고다르의 영화들은 이제 성전의 높은 십자가에 올라 우리를 내려다본다. 그의 위대함은 이제 역사적으로 공식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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