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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잔치의 조짐이 보인다고 조심스럽게 서두를 꺼내도 될까. <오세암> <해머보이 망치> <아크>. 그리고 사상 최고의 대작으로 소문난 <원더풀 데이즈>와 가장 유명한 원작으로 알려진 <오디션> 등 2003년 국산 애니메이션 달력에는 개봉 날짜를 알리는 붉은 동그라미가 줄잡아 5개에 이른다. 정말 오랜만에, 극장가는 토종 장편애니메이션의 성찬을 예비하고 있다. 익히 들어본 구문 사실이다. 2001년 벽두에도 한해를 내다보면서 국산 장편애니메이션의 대전을 예고한 바 있지만, 그 해에 <별주부 해로> 1편, 이듬해에 <마리이야기>와 <런딤> 2편이 개봉됐을 뿐. 올해 개봉예정인 5편 가운데 <오세암>을 제외하면 모두 몇년에 걸쳐 회자됐던 작품들이다. 워낙 실사영화보다 제작공정이 긴데다가 시나리오 및 캐릭터 수정,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제작비 조달 등등의 이유로 본의 아니게 미뤄지길 몇
2003년 애니메이션 기대작 3편 미리보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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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넘고 물건너 엄마 찾아서“하늘처럼 생긴 물인데, 꼭 보리밭같이 움직여.” 앞을 못 보는 누나를 위해 아이다운 소우주에서 골라낸 말로 바다를 설명하는 소년. <오세암>은 엄마의 죽음을 모른 채 마냥 천진난만한 길손이와 그런 동생을 안쓰럽게 다독이는 가미 남매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서정적인 여행이다. 볏단을 실은 소달구지를 얻어 타기도 하고, 주홍빛으로 익은 홍시를 따는 아이들을 지나,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다 강아지를 잡아주겠다며 누나의 손을 놓고 달려가는 소년과 그 때문에 물에 빠지고도 결국 동생 걱정이 앞서는 소녀가 있는 동화. 부모를 잃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오누이의 성장기를 따뜻하게 품고, 우리네 산수를 빼어 닮은 담채화 톤으로 국산 애니메이션에서도 흔히 볼 수 없던 삶의 진경을 찾아가는 작품이다. 정채봉의 동명 베스트셀러가 원작.약 2년 전 방영된 TV시리즈 <하얀 마음 백구>(이하 <백구>)의 제작진이 설립한 마고21의 첫 장편애니메이션이다.
2003년 애니메이션 기대작 3편 미리보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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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얄개전맨발에 구멍난 철모, 작은 망치 하나 들고 지구를 지키러 나선 ‘망치’와 함께 모험의 세계로! <해머보이 망치>(이하 <망치>)는 동심의 눈높이를 배려한 본격적인 가족용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의 장르라는 본연의 입지에 충실한 전략으로 돌아간 <망치>는, 8∼10살이라는 타깃층의 공감을 살 만한 10대 초반 개구쟁이의 유쾌한 모험담이다. 무대는 2112년, 환경 파괴로 물바다가 된 지구. 한때 번성했던 문명의 상징인 고층건물의 첨탑들로 이뤄진 ‘촛대마을’에 사는 망치 앞에, 쫓기던 포플러 공주의 비행기가 추락한다. 세계 정복의 음모를 꾸미는 수상 뭉크에 맞서 평화를 지키려는 공주와 제미우스 왕국의 싸움을 돕게 되는 망치. 내재된 신비의 힘을 일깨우는 수련, 할아버지와의 이별 등 시련과 모험을 통해 성숙해가는 소년의 여정은 액션어드벤처와 성장영화를 넘나드는 상상력을 펼칠 예정이다.<망치>는 생활예절 교육용 단편애니메
2003년 애니메이션 기대작 3편 미리보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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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서, 미래의 묵시록도시 전체를 짊어지는 거대한 로봇 방주, 이를 조종하는 성녀의 피와 함께 종족을 구원할 운명을 타고난 소녀. <아크>는 가상의 행성 알시온, 호전적인 스토리안과 그들의 침략에 저항하는 시비안이라는 두 종족의 갈등을 축으로 한 SF판타지다. ‘방주’란 뜻의 제목은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으로부터 시비안을 보호하기 위해 건조됐다는 거대 로봇을 지칭하는 말. <아크>는 이 로봇을 둘러싼 싸움과 함께 미래 세계의 음울한 묵시록, 낯설고 웅장한 스펙터클로 청소년층 이상의 관객을 매혹시킬 법한 프로젝트다.하지만 두 종족의 전쟁 한가운데에 휘말리는 여주인공 에머린스의 운명 못지않게, <아크>의 행보도 다사다난했다. 신씨네에서 제작 지원한 첫 데모 버전으로 제1회 멀티미디어컨텐트산업화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끈 게 97년. 당시 국산 애니메이션으로서는 드물게 100% 3D컴퓨터그래픽으로 장편을 만들겠다는 기획과 데모의 완성도는 호평
2003년 애니메이션 기대작 3편 미리보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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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오시마는 어떻게 몰락했나
오시마 나기사(1932-)는 지금 와병중이다. 일본에선 그가 병상에서 다시 일어나는 일이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고 보고 있다. 전후 일본영화계 아니 일본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던 당대의 반역아요 미학적 혁명아였던 그래서 평생 늙을 수 없을 것같던 오시마도, 그렇게 생로병사의 마지막 지점까지 오고 말았다. 문화학교서울에서 열리는 그의 회고전은 그래서 뜻깊다. 우리는 잔인하게도 그의 전락의 이유를 따져보기로 했다. 이건 한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천재 감독에게 바치는 또다른 헌사다.
2000년 칸영화제에서 선보인 오시마 나기사의 <고하토>는 이 영화에 특별한 기대를 가진 많은 이들을 다소 실망시킨 영화였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비평적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던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미국의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 같은 이는 <고하토>의 미국 개봉을 앞두고 쓴 리뷰에서 “시적 스타일의 승리” 운운하며 이 영화가 단연 별 네개짜리 ‘걸작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회고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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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의 일본사회 비판
영화경력의 초창기부터 오시마가 영화 속에 빈번히 끌고 들어온 소재들 가운데 하나는 범죄 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단순한 스펙터클말고도 영화에서 이걸 갖고 논할 수 있는 건 다른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시마는 일본사회, 예를 들면 <소년>(1969)의 경우에서 보듯 자유에의 갈구가 범죄행위로 인도되고 마는 불모의 일본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할 영화적 도구로 이것을 이용했다. 그리고 좀더 과감히 나갈 때 그는 범죄행위를 국가 자체에 대한 근저로부터의 공격과 연결지었다. 그 예를 우리는 오시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교사형>(1968)에서 볼 수 있다. 교수형 집행을 당했으나 ‘죽음을 거부한’ 재일한국인 R을 둘러싸고 영화가 전개된다. 당황한 사형집행인들은 기억을 상실한 채 살아난 R에게 범죄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R의 과거를 재연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착수한다. 사형수는 자신의 죄를 의식한 상태에서 처벌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두 여고생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회고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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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발한다,일본사회를
청춘잔혹이야기
중년 남자의 차를 얻어탄 여학생 마코토가 이 남자로부터 겁탈을 당하려는 찰나 기요시라는 젊은이가 나타나 마코토를 구해준다. 기요시와 마코토는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고 마코토는 집을 나와 기요시와 동거를 시작한다. 돈이 필요한 두 사람은 함께 거리로 나가 마코토가 중년 남자의 차를 얻어타면 뒤이어 기요시가 나타나 남자의 돈을 갈취하는 식의 사기 행각을 벌인다. 쇼치쿠 누벨바그의 만개를 알린 <청춘잔혹이야기>는 당시 유행했던 청춘영화인 ‘태양족 영화’의 틀을 빌려 만든 오시마의 두 번째 영화다. 말 그대로 청춘의 잔혹한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다가 오시마는 섹스, 폭력, 범죄와 같은 대중영화적 요소를 이용하면서도 당시 사회에 대해 젊은 세대가 느끼는 지독한 환멸감을 잘 불어넣었다. 꿈이 없어 비참하게 끝나지 않을 거라 소리치는 기요시와 학생운동의 패배로 인해 절망한 그 윗세대 사이의 갈등이 일종의 정치적 사상 투쟁에 근접하게 그려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회고전 [3] - 상영작 12편 가이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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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주의 살인마
다케다 다이준의 단편을 각색한 작품으로 여자들을 강간하고 살해하는 남자 에이스케를 중심에 놓고 스토리가 펼쳐진다. 영화는 그와 관련된 두 여자, 즉 죽음 직전에 에이스케로부터 구출된 다음 그에게 강간당한 시노와 에이스케의 부인인 교사 마츠코가 그들의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통해 그들 사이에 감춰진 비밀을 풀어낸다. <백주의 살인마>는 우선 범죄적 성향, 시체를 둘러싼 섹슈얼리티, 죽음의 에로티시즘 등을 탐구하는 부조리극으로 비치지만 그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시도의 붕괴와 폭력의 문제를 연계시키는 영화로도 읽힐 수 있다. 형식적으로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전부 2천개가 넘는 숏들을 가지고 격한 몽타주를 구사했다는 점이다. 노엘 버치는 <백주의 살인마>를 가리켜 에이젠슈테인의 이래 가장 창조적인 몽타주영화라고 극찬한 바 있다.
교사형
1958년 9월 한 재일한국인 소년이 여고생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회고전 [4] - 상영작 12편 가이드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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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의식>은 오시마의 이름을 서구에 널리 알리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영화다. 영화는 사쿠라다가(家) 지역의 한 부유한 가족의 전쟁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기를 주인공 마스오가 회상하는 형식을 통해 들려준다. 마스오의 회상은 주로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의식’이 벌어지는 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그럼으로써 영화는 사쿠라다가의 가족 성원들을 불러모아 그들 내부의 붕괴되는 모습을 그려간다. 또 다른 한편으로 눈여겨볼 것은 마스오의 회상이 시작되는 지점들이 하나같이 일본의 현대사에서 중요한 지점들이라는 것. 여기서 오시마가 한 가족의 연대기를 일본의 역사와 맞물리게 하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감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각의 제국
오시마의 영화세계에서 한 정점을 차지하기 때문에,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오시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 군국주의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던 30년대 중반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외부와는 완전히 격리되어 오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회고전 [5] - 상영작 12편 가이드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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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한탄했다. 음악을 글로 분석하는 일은 건축물에서 얻은 감상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가망없는 짓이라고. 이 말에 서린 깊은 고심을 이해하고 영화를 돌아본다면, 영화야말로 영화를 논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근사한 요리를 대접받은 감격을 다시 스스로 정성들인 요리로 표현하고 사례하듯이, 김홍준 감독과 김소영 영상원 교수는 한국영화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아담한 다큐멘터리영화로 만들었다. ‘나의 한국영화’라고 이름 붙인 열린 프로젝트의 ‘에피소드1’에 해당하는 김홍준 감독의 <My 충무로>는 6mm카메라를 들고 예전 극장과 영화사가 사라진 충무로를 소요하며, 그에게 영화의 날카로운 첫 키스를 남긴 과거 한국영화의 장면을 통해 필름 속 정지된 삶을 추억한다. 김소영 교수의 <황홀경>은 좀더 확대된 1인칭을 구사한다. 여성들이 한국영화를 창조하고 소비하며 경험해온 다양한 황홀경들이 과거 영화의 한 장면, 여자들의 인터뷰를 빌려 다물었던 입술
한국영화에 바치는 두편의 필름 에세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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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는 나에게 또 다른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송화가 아이의 인도로 눈 내리는 길을 떠나는)에 나오는 아이는 내 딸 수연이다. 그때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겨울방학 중이었다. 영화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을 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그 아이는 누구인지. 주인공 송화의 딸인지 아니면 그냥 동네 아이인지.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은 그 아이는 조감독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시나리오를 100% 완성하지 않고 계속 토론을 해가며 <서편제>를 찍었다. 촬영이 중반을 넘긴 1월. 영광에서 겨울장면을 찍는데 70년 만에 폭설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나왔다. 회의 자리에서 임 감독은 평소 당신 스타일대로 “앞 못 보는 송화가, 그래도 자리잡고 살던 마을을 떠나는데… 그, 인심이 그런 게 아니잖아 하다못해 버스 정류장까지라도 누가 바래다줘야…” 하고 느릿느릿 말을 꺼내셨고 연출부는 <넘버.3>의 충성스런 불사파
한국영화에 바치는 두편의 필름 에세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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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황홀한 초상, 우리들의 기쁜 연대기
김소영의 <황홀경>
모던한 머리 매무새와 양장을 한 부인이 거리를 배회한다. 서울역 지하도를 내려가고 서대문 건널목에 서서 기차를 지나 보낸다. 전차에 오르더니 자리에 앉을 염도 내지 않고 선 채로 손잡이를 의지 삼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마치 머릿속에 괸 상념을 흘려 보내기라도 하듯이. 갈 곳이나 있는 걸까. 아니, 혹시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일부러 미루고 있는 것일까. 허술한 난간이 세워진 길을 터벅터벅 걷던 그녀가 소스라치듯 뒤를 돌아보는 순간, 화면이 멈춘다. <귀로>(1967)에서 서울을 배회하던 문정숙. 그녀의 시선이 꽂힌 자리에 극장이 서고 은막 위에 <자유부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미워도 다시 한번>의 세 여인이 나타나 그녀를 말끄러미 응시한다. 김소영 영상원 교수의 새로운 다큐멘터리 <황홀경>의 시작이다.
이애림 감독이 제작한 <황홀경
한국영화에 바치는 두편의 필름 에세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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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촌을 쫓겨난 이상 남자 털어먹는 직업을 가질래. 다방, 바, 돈벌이라면 뭐든지 할래.” “난 올케 사는 집 식모살이 할 테야. 잘사는 법을 지켜보고 배운단 말이야.” “서울에는 31층 빌딩이 있대. 우리 헤어져도 그걸 쳐다보고 살자.” “31층 떨어져 죽기 편리하겠다.” (<화녀> 중 두 이농처녀의 대화)
<황홀경>의 손거울에 비친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그들만의 전성시대’다. <가시를 삼킨 장미> <꽃순이를 아시나요> <겨울여자>. 근대화의 썰물이 밀려나간 사금파리 투성이의 개펄에서 여공, 차장, 매춘부의 옷을 입은 무수한 영자들이 울고 있다. 그리고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멀티플렉스의 시대. 새로운 한국영화의 황금기는 이상한 망설임으로 남한 여성을 초대하기를 주저했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파이란> <서편제> <오아시스> 같은 성공적인 영화에서 남
한국영화에 바치는 두편의 필름 에세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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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의 진실>은 박중훈의 할리우드 메이저영화 데뷔작이다. 지난해 12월27일 명보극장에서 열린 이 영화 시사회장에, 많은 충무로 제작자와 배우들이 참석했다. 그중 박중훈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마음을 졸였던 이들을 순서대로 꼽는다면 안성기는 최소한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것 같다.
둘은 이틀에 한번꼴로 통화하고, 못해도 일주일에 한번은 만난다. 수시로 함께 골프치러 가고, 영화계 안팎의 경조사나 각종 영화제에 함께 참석한다. 집이 가까워 박중훈이 가는 길에 안성기를 ‘모시고’ 간다. 연말연시에도 두집 식구가 용평에서 만나 와인을 한잔 했다. 50대 초반과 30대 후반의 둘은 14살 터울이지만 연기생활이 각각 45년, 18년에 이르다보니 더 감출 것도 없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됐다.
누구다 알다시피 안성기는 80년대 내내 독보적인 한국영화의 주연배우였고, 그뒤 5년 남짓 같은 자리를 박중훈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영예의 부침을 피하기란 힘들었다. 90년대 후반 안성기에게
박중훈이 안성기에게 털어놓은 할리우드의 진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