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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를 가진 부모와 자신의 일상을 따뜻하게 관찰한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5)의 이길보라 감독이 베트남전쟁을 회고하는 다큐멘터리로 5년 만에 극장을 찾는다. 이길보라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부지런히 드나든 곳은 베트남의 퐁니·퐁넛 마을. 매년 음력 2월이면 마을 전체가 한날 한시에 죽은 가족들을 향한 슬픔으로 잠긴다. 휴양지 다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에서 동떨어진 이 마을은 1968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이길보라 감독은 주민들과의 만남을 토대로 기억과 증언의 이미지를 엮어나간다.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 응우옌 럽, 딘 껌이 중심이 되어 여성이 바라보는 전쟁, 장애인이 기억하는 전쟁의 의미를 되짚어나가는 시도다. 영화는 한국을 방문한 마을 생존자가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 참석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여성 인권 증진에 앞장섰던 고 김복동 인권운동가와 만나는 장면처럼 기록적인 순간들도 촘촘히 새겨넣
<기억의 전쟁> 쉽게 간과되고 잊히는 과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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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안드레아 아놀드 / 출연 나탈리 프레스, 대니 디어, 조디 미첼, 몰리 그리피스 / 제작연도 2003년
글에 생명력을 담으려 카메라를 샀다. 처음 의도와 다르게 카메라 안에서 형형색색 쏟아져 나오는 활기에 빠져들어 풍경을 수집하듯 촬영하고 편집해나갔다. 더 생생하게 담기 위해 망원렌즈에서 광각렌즈로 거리가 가까워질 때쯤 문득 눈앞에서 다채롭게 살아 있는 것들이 카메라 안에서 죽어간다는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돌파구가 필요했고 해답으로 서사를 만들어나갔다. 하지만 내가 써낸 서사 안에서의 인물들은 언제나 수동적이고 저항할 수 있는 의지를 갖추지 못한 채 끝내 갇히고 말았다. 암전 속에서 무력하다고 느껴질 시기,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단편영화 <말벌>을 보았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카메라 안에서 명멸 없이 발광하는 생명력을 느꼈다. 나는 이 영화를 한 픽셀씩 분리해나가면서, 다채롭게 살아 있는 것들이 카메라에 담기고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법에 대해 고민했다.
영화
[내 인생의 영화] 조민재 감독의 <말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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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 그것을 말해서는 안된다. 2020년 상반기 미국의 각종 영화제, 시상식에서 주목받은 아콰피나 주연의 영화 <페어웰>은 가족과 거짓말에 관한 영화다.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주인공 빌리(아콰피나)와 그녀의 가족이 고향인 중국 창춘으로 돌아와 할머니인 나이 나이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꾸민다. 그 과정에서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진지하고 섬세하게 질문한다.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룰루 왕 감독은 <페어웰>을 통해 여러 문화권이 공존하는 현대인들의 가족의 의미를 되짚는다. 래퍼로도 활동 중인 배우 아콰피나는 그녀가 지금껏 연기한 인물 가운데 가장 복잡한 인물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33억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아콰피나에게 아시아계 최초로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영화 부문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에서도 최우수작품상과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Coming Soon] <페어웰>, 여러 문화권이 공존하는 현대인들의 가족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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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작은 아씨들> 우리 형제들이 서로 도와야지
[정훈이 만화] <작은 아씨들> 우리 형제들이 서로 도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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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포함 4개 부문 수상작 <기생충>은 미술상과 편집상 부문에도 후보에 올라 한국영화 스탭들의 저력을 널리 알렸다. 그중 양진모 편집감독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아쉽게도 오스카 편집상은 수상하지 못했으나, 그는 미국영화편집자협회 시상식 장편영화 드라마 부문 편집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하며 할리우드 편집자들에게서 실력을 입증 받았다. <씨네21> 1243호에 실린 김성훈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와 그간 <씨네21>이 <기생충> 제작진과 나눴던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양진모 편집감독의 활약상과 <기생충>의 편집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정리해보았다.
1. 김지운, 연상호, 장준환... 양진모 편집감독의 휘황찬란한 이력
<기생충>의 밀도 높은 편집은 하루아침에 탄생한 것이 아니다. 양진모 편집감독은 비주얼리스트로 유명한 이명세 감독의 <형사 Duelist> 현장편집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양진모 편집감독이 말하는, 할리우드 편집감독들이 가장 좋아한 <기생충> 장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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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못하는 사람에게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 사전 준비를 꼼꼼히 하지 않는다. 재료를 다루다 허둥댄다. 맛을 보면 잘못됐다는 건 알지만 수습할 줄 모른다. 일단 끝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자칭 타칭 ‘손 많이 가는 사람’이자 가수 겸 배우인 손담비는 심지어 가위질할 때 요령조차 없다. 뜨거운 프라이팬을 물티슈로 닦고, 먹다 남은 된장찌개를 냄비에 붓고 끓여두지 않는다. 한국 예능에 모처럼 빛나는 여성 요리치가 등장한 것이다(마침 같은 날 방송된, 얼어붙은 제육을 통째로 팬에 던져 넣고 부서지도록 볶는 개그맨 장도연의 호방한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예능에서 남자들의 ‘서툰 요리 실력’은 꽤나 흔하고 인기 있는 아이템이었다. 재료가 썩어가는 냉장고를 거리낌 없이 공개하고,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사람이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음식을 만들어도 욕먹지 않았다. 요리는 남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여자라면 잘
<나 혼자 산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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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가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게 문제입니다.” 어도비의 커뮤니티 부문 부사장이자 핀터레스트, 우버 등 여러 기업의 투자자이자 자문가라는 스콧 벨스키의 한결같은 주문이라고 한다. 아이디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과 달리, 나 역시 이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아이디어는 실현 불가능하다면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직면하면 환경 탓을 하기 시작한다. 회의만 많고 발전이 없는 조직의 모든 구성원은 이런 ‘남 탓’에 능하다. 댄 애리얼리, 그레첸 루빈, 세스 고딘을 비롯한 베스트셀러 저자들의 글을 모은 <루틴의 힘>은 환경에 매달리기를 그만두고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방법론으로서의 루틴을 손보자는 제안을 담았다. 생각하며 일하지 않으면 일하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많은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하는 자기 계발의 논리이기는 하지만,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루틴의 힘>, 시간이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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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이템이 있는지 보러 왔다. (웃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피칭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CGV여의도 3관 앞은 영화, 드라마 제작사, 네이버 웹툰 등 콘텐츠 산업 관계자들로 북적거렸다. 제3회 오피치(O’Pitch, 주최 CJ ENM)가 지난 2월 20일 오전 11시 CGV여의도에서 열렸다. 오피치는 오펜이 지원하는, 재능 있는 신인 작가들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영화, 드라마 등 영상 콘텐츠 산업 관계자들 앞에서 피칭하는 행사다. 오펜은 CJ ENM이 작가를 꿈꾸는 창작자에게 창작 공간(개인·공동 집필실)과 작품이 개발될 수 있는 기회(전문가 특강 및 멘토링, 교도소, 소방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 취재 지원)를 제공하는 사회공헌사업이다. 이제 겨우 3회째지만 신인 작가들이 쏟아지는 화수분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오펜이 운영되는 지난 3년 동안, 14명의 작가들이 영화, 드라마 제작사와 시나리오 및 기획 작가로 계약을 체결했다. 남궁종 CJ ENM CSV 경영팀장은 “한국
오펜 소속 신인 작가들이 직접 쓴 시나리오 피칭한 제3회 오피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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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70회를 맞은 베를린국제영화제(이하 베를린영화제)가 2월20일 개막했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의 가장 큰 변화는 집행위원장의 교체다. 18년간 베를린 영화제를 이끌었던 디터 코슬릭에 이어 새롭게 선임된 집행위원장은 마리에트 리센벡과 카를로 카트리안이다. 리센벡은 조직 운영을, 카트리안은 프로그래밍을 담당하며 역할 분담을 한다. 참고로 리센벡은 베를린영화제를 이끄는 첫 여성 집행위원장이다. 개막작은 캐나다 감독 필리프 팔라르도가 연출하고 시고니 위버가 주연한 <마이 샐린저 이어>다. 경쟁부문 영화는 총 18편. 한국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가 경쟁부문에 초청받았고, 그외 아시아영화로 대만의 차이밍량 감독이 연출하고 그의 페르소나 이강생이 주연한 <데이즈>, 캄보디아 리티 판 감독의 다큐멘터리 <이레디에이티드>(캄보디아·프랑스 공동제작)가 있다. 2017년 <더 파티>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은 샐리 포터 감독의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 집행위원장 교체하며 변화 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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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돈 가방에서 시작해 돈 가방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연희(전도연), 태영(정우성), 중만(배성우) 등 삶의 막다른 길에 내몰린 이들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돈 가방은 인생을 리셋할 수 있는 기회다. 한두 인물이 서사를 기승전결식으로 이끌어가는 보통의 상업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나타나 서사의 퍼즐을 꿰맞추며 전개된다. 한미연 편집감독이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재미있으면서도 어렵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래서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시나리오가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물들을 동등하게 끌고 가야 퍼즐이 조립되는 이야기”기에 “관객의 흥미를 붙잡기 위해 이야기 초반 30, 40분을 잘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6개 챕터로 나눈 이유다. “주요 등장인물들끼리 만나지 않다보니 이야기를 설정하는 초반이 지루하다는 의견도 있어 챕터별로 나눠 각각의 챕터 안에서 기승전결을 구성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한미연 편집감독 - 퍼즐 조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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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될 줄은 몰랐다. 1243호 ‘<기생충> 스페셜 에디션’을 발간한 뒤, <씨네21>의 일주일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발간 하루 만에 온라인 판매분이 전량 매진되는 한편, 회사에는 스페셜 에디션의 구입처와 재고를 문의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일주일 새 윤전기를 두번 더 돌리는 ‘사건’도 일어났다. 잡지 포장과 발송 지옥에 갇힌 마케팅 담당자들의 다크서클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안타까웠지만, 각종 웹사이트와 SNS에 독자들이 올린 구매 인증숏과 후기를 보며 잡지를 제작한 구성원들 모두가 즐겁고 뿌듯한 마음으로 한주를 보냈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다.
1243호의 인기에 힘입어 <기생충> 국내 개봉 당시 <씨네21>이 발간했던 과월호를 찾는 독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지면을 빌려 한 가지 ‘팁’을 드리고자 한다. ‘<기생충> 스페셜 에디션’과
[장영엽 편집장] 아날로그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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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제3의 봉준호 감독이 나오기 위해서는 제도적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영화인들의 목소리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수상으로 인한 범국민적 관심과 오는 4월 총선을 겨냥한 것이다. 먼저 영화인들은 ‘(가칭)포스트 봉준호법’을 위한 서명을 시작했다. 2월 17일 SNS를 통해 확산된 이 움직임은 한국 영화산업 독과점을 규제하기 위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기업의 영화 배급업과 상영업 겸업을 제한하고 특정 영화의 스크린독과점을 금지하며 독립·예술영화 및 전용관 지원을 제도화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창동·임권택·임순례·정지영 감독, 배우 권해효·문소리·안성기·정우성, 이준동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문성근 평창남북평화영화제 위원장 등 영화인 50인이 먼저 1차 서명에 참여했다. 2월 19일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오석근, 이하 영진위) 위원 일동 9인은 21
영화인들, 4월 총선 겨냥해 새로운 영화 정책 마련 위한 움직임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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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흑백판이 2월 26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봉준호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 컬러리스트가 숏 하나하나의 콘트라스트를 조정해서 만들었다는 흑백판은 국내 개봉에 앞서 제49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목소리 부문에서 최초 공개됐다. 다음은 <씨네21> 1243호에 실린 김혜리 기자의 ‘로테르담국제영화제 <기생충> 흑백판 공개 현장에서 오간 이야기들’ 기사에 실린 내용을 중심으로 최초 공개 이후 밝혀진 사실 몇 가지를 정리해봤다. 흑백 영화에 대해 봉준호 감독이 평소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생각도 함께 덧붙였다.
1. 프레임 안의 선들이 두드러진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에 대한 해석이 온라인을 강타하면서 ‘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유리창에 선이 있고 그것이 어떤 구획을 나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이에 대해서 로테르담 상영 후 질문이 나왔다. “프레임 안의 선들이 흑백판에서 더 두드러지
<기생충> 흑백판 최초 공개 이후 밝혀진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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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환향이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 주요 부문 4관왕을 달성한 <기생충> 팀이 19일 오전 11시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이날 현장에는 국내 매체뿐 아니라 BBC, CNN, NHK 등 여러 외신 매체도 <기생충> 팀을 만나러 왔다.
봉준호 감독은 “이 자리에서 <기생충> 제작발표회를 했는데 벌써 1년이 지났다. 세계 곳곳을 다니고 돌아오니 감회가 새롭다”며 인사를 건넸다. 바쁜 오스카 캠페인 일정으로 배우 송강호는 실제로 코피를 흘리기도 했으며 봉준호 감독은 600회 이상의 인터뷰, 100회 이상의 GV(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그만큼 작품을 밀도 있게 검증하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피날레를 장식하고, 오랜 전통을 가진 과정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하며 캠페인의 의미를 회상했다.
송강호는 “미국 경험은 나보다 타인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상을 받는 것보다 우리 작품
봉준호 감독, "오스카 레이스 직접 겪어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