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식간이었다. 채도와 명도가 높은 파란색 파도가 휘몰아쳤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주위 사람들도 웃거나 탄성을 질렀다. 공항 건물이 살짝 흔들린 것도 같았다. 귀국한 아티스트 J가 공항 출구에서 자신의 차로 향하는 시간은 10여초였다. 몇 시간을 기다린 팬들이 그를 따라가며 환호한 것은 물론이고, 나처럼 누군가를 마중 나왔다가 난데없이 그 파도를 맞은 사람들도 왠지 들떠 웅성거렸다. 누군가 말했다. “와, 정말 대단하다.” 그건 K팝 스타의 인기라든가 팬들의 ‘열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공기를 눈부신 것, 차가운 것, 또는 열렬한 것, 간지럽고 조금 눈물 나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사랑이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이만한 에너지를 가진 건 사랑밖에 없다.
사실 팬덤 문화에 대해서라면 나도 모르지 않는다. 한반도의 팬덤 역사에서 나는 신석기인쯤 될 것이다. 90년대 초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열풍이 시작되기도 전, 종로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재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사랑의 기쁨
-
배우 임지호는 현재 드라마 <구미호뎐1938>에서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일본 요괴 사이토 아키라로, 영화관에선 <스프린터>의 단거리 육상 선수 준서로 현실을 전력질주 중이다. 한때 고교 랭킹 1위였으나 지금은 성적이 나오지 않는 준서는 학교 육상부가 존폐 위기에 처하자 절박한 마음으로 레이스에 오른다. 임지호는 이미 정교하게 쓰인 시나리오를 분석하며 캐릭터의 디테일을 채웠다. “준서가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규직 전환에 대한 코치 지완(전신환)의 부담에 은연중 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 분석이 행간을 읽어낸 것이라 짐작했지만 막상 작품을 쓴 감독님은 ‘그럴 수 있겠네!’라고 말씀하셨다.” 학창 시절 체육대회 계주 경주에 늘 출전했던 그는 이번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육상 전문가들과 두달간 훈련하며 실제 선수처럼 보일 방법을 연구했다. “내가 언제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님의 지도를 받겠나 싶어 호기롭게 훈련장에 갔는데 운동장을 두 바퀴
[WHO ARE YOU] '스프린터' 임지호
-
공백기 없이 30년을 쭉 달려온 “한국의 마돈나” 엄정화. 노래와 춤, 모든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전천후 연기력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엄정화가 정확히 20년 전 촬영한 영화 <싱글즈>의 현장 사진이다. 극 중 절친인 세 친구가 모종의 이유로 기쁨에 찬 함성을 지르는 이 장면에선 고 장진영 배우와 이범수 배우의 반가운 얼굴이 함께 보인다.
[ARCHIVE] 엄정화
-
뻗친 머리에 남루한 옷차림, 항시 근심 가득한 표정. 수인의 외양은 그간 우리가 봐온 배우 이윤지와 영 딴판이다. 성격도 마찬가지다. 산업재해로 남편이 사망한 이후 수인은 어두운 기척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해사하고 따스한 성정의 배우 이윤지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캐릭터다. 그러나 <드림팰리스> 속 이윤지는 놀라울 정도로 수인과 닮았다. 이것은 진심으로 수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으려는 배우의 깊은 공감과 몰입에서 비롯된 결과다.
- 수인의 겉모습과 성질은 배우 이윤지의 이미지와 무척 다르다. 그런데 지금껏 맡은 배역 중 수인이 평소의 본인과 가장 많이 닮았다 느꼈다고.
= 수인과 나 모두 두 아이의 엄마라는 점이 컸다.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수인의 처지에 공감이 됐다. 그리고 사실 수인의 초췌한 외모가 요즘의 나랑 비슷하기도 하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집에선 어쩔 수 없이 수인 같은 모습이 되니까. (웃음) 물론 수인이 평소 배우로서의 내 이미지와 다르다
[인터뷰] ‘드림팰리스’ 이윤지, 나를 닮은 수인을 만나
-
-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선영을 통해 생애 보편적인 애환과 고락을 덤덤히 그려낸 배우 김선영은 능청스럽게 동네 분위기를 압도하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박찬숙으로, 밀도 높은 설움과 슬픔을 끌어안은 영화 <세자매>의 희숙으로 작품에 다양한 현실을 반영해왔다. 드라마 <일타 스캔들>의 극성 맞은 학부모 조수희의 얼굴과 목 터져라 노동가요를 부르짖는 드라마 <퀸메이커> 화수의 얼굴이 동시대 같은 하늘, 다른 곳에서 안착할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남편의 산업재해 합의금으로 새로운 터전을 찾은 <드림팰리스>의 혜정은 미분양 아파트가 숨긴 민낯을 그대로 직면한다. 유가족 농성장을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아파트를 할인 분양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가해자만 지워진 전쟁터에서 피해자 간의 혈혈한 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배우 김선영은 혜정이 되어 또 다른 현실을 비춘다.
-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혜정을 어떻게 바
[인터뷰] ‘드림팰리스’ 김선영, 삶과 조응하는 연기
-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은 혜정(김선영)은 합의 보상금으로 신축 아파트에 입주한다. 함께 농성을 벌이던 유가족들과 다른 갈래의 길을 걷게 된 그는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쏟아지는 흙빛의 녹물. 건설사는 미분양 아파트라는 이유로 거주자가 더 모여야 수리할 수 있다며 선을 긋고, 분양사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어느새 혜정의 머릿속엔 대전제 하나가 생겨난다. ‘안정적인 삶을 누리려면 텅 빈 아파트가 먼저 채워져야 한다.’ 혜정이 수인(이윤지)에게 드림팰리스 입주를 권한 데에는 함께 투쟁하던 친구를 되찾고 싶다는 관계적 욕망과 정상화된 아파트 생활에 대한 선망이 작용한다. 농성장을 떠난 유가족과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유가족, 할인 분양으로 입주를 앞둔 사람들과 그들의 입주를 막아선 사람들. 피해자로 한데 묶인 이들은 각자의 사정과 입장 차이로 갈지자로 흩어진다. 첨예한 사회문제 속에서 김선영, 이윤지가 그려나간 감정의 굴곡을
[커버] ‘드림팰리스’ 김선영, 이윤지, 우리들의 빛과 그림자
-
박지완 지음 | 유선사 펴냄
“어떤 세계가 나를 위해 기다려준다는 든든한 생각. 아, 설렌다.” <내가 죽던 날>을 연출한 박지완 감독은 에세이 <다음으로 가는 마음>에서 책에 대한 마음을 이렇게 고백한다. 아마도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 역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 제목처럼, ‘다음’을 기약하게 만드는 일상의 여러 가지를 차곡차곡 담아낸 이 책은 영화 만들기에 대한, 그리고 몸과 마음의 건강에 대한 상념을 펼쳐간다. <내가 죽던 날>을 만들던 시기에 대한 글은 ‘40대가 되었다’라는 소제목에서 등장한다.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착수하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고통과 희열을 다루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는 ‘나’를 새로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돌아보며 회고에 젖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마냥 낙관하지도 않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일 말이다. 이 사이사이에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영화감독을 업으로 삼은 이가 무엇으로 매일을 채워가는지에
[리뷰] 다음으로 가는 마음
-
배우. 영화 <뷰티풀 데이즈>,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 <로맨스는 별책부록> 등 출연
'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톰 웨이츠의 <Tom Traubert’s Blues>
들을 때마다 많은 감정이 생긴다. 애틋하면서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그 느낌이 정말 좋아서 방방 뛰고 싶은 심정이다. 너무 좋아해서 매일 듣는다.
<귀주 이야기>
단순한 서사의 영화지만 이 영화 특유의 코미디가 좋다. 두고두고 재밌게 보고 있는 작품이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공리가 연기한 귀주 같은 캐릭터를 맡아보고 싶다.
<우리들>
영화를 통해 전달되는 아이들의 명언은 심플하지만 정확하다. 어른들이 매번 망각하는 것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야말로 ‘한방’이 있는 영화.
경주 우양미술관
[LIST] 이나영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
지난 5월4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제39회 LA아시안퍼시픽영화제(LAAPFF) 경쟁부문에 한국 감독이 연출한 환경다큐멘터리 <제로 웨이스트>가 올라 이머징 필름메이커 어워드를 수상했다. <제로 웨이스트>는 코로나19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플라스틱 사용과 이에 따른 오염의 심각성을 체감한 김동현 감독이 플라스틱 사용 감소를 위해 노력하는 ‘체인지 메이커’ 6명을 만나 창의적인 업사이클링과 쓰레기 감소 방안을 소개한다. 분리수거와 쓰레기종량제 봉투 사용 등 미국과 비교했을 때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시스템이 잘 정착된 한국에서 활동하는 환경운동가들을 취재한 김동현 감독은 시스템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개인의 인식 변화와 행동이 모이면 그 파급효과가 자원순환 경제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영화제 참석을 위해 LA를 방문한 김동현 감독은 “LAAPFF에서 월드 프리미어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큰 영광인데 첫 장편다큐멘터리로 유망주상을 받아
[LA] ‘제로웨이스트’, 서울국제환경영화제에서도 만나요!
-
“과거로 갈 수만 있다면 (중략) 엄마가 아빠를, 나를, 사랑하지 않게 만들 거예요.” <백 투 더 퓨처>에서 과거로 간 마티(마이클 J. 폭스)가 부모를 엮어주며 자신이 사라질 위기에서 벗어난다면, KBS2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자신의 소멸을 전제로 엄마가 갖지 못한 시간과 기회를 되찾아주려는 딸의 결심으로 출발한다.
1987년 우정리 연쇄살인 사건을 추적하던 윤해준(김동욱)의 타임머신 자동차에 치여 과거로 간 백윤영(진기주)은 19살 엄마 순애(서지혜)의 절친이 되고, 아빠 희섭(이원정)과 결혼을 막을 작정이다. 엄마의 꿈과 고민을 가까이하며 알지 못했던 가족사에 다가가는 윤영은 전교 1등을 해도 딸은 대학에 보내지 않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닌’ 시절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흔하다고 비극이 아닌 건 아니죠.” 우정리 사건의 진범을 추적하며 다수의 용의자를 세우는 메인 미스터리와 엮이는 윤영과 해준의 가족사는 이를테면 ‘흔했던 비극’에 속한다
[유선주의 드라마톡] ‘어쩌다 마주친, 그대’
-
<피터 본 칸트>
왓챠, 웨이브 ▶▶▷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을 각색한 프랑수아 오종의 장편영화. 제목의 차이가 암시하듯 오종의 영화는 두 주인공의 성별을 바꿔 두 남자의 멜로를 중심에 둔다. 영화는 성공한 중년의 영화감독 피터(드니 메노셰)와 성공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는 청년 아미르(칼릴 벤 가르비아) 사이에서 길항하는 사랑의 권력관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프티부르주아에 대한 풍자와 매체에 대한 성찰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무대와 백스테이지, 촬영장과 편집실이 다소 산만하게 뒤섞이는 공간에서 ‘영화에 대한 영화’가 효과적으로 성립하는지는 의문이다.
<언더 더 스킨>
왓챠, 웨이브 ▶▶▶▶
올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조너선 글레이저의 장편영화. SF영화의 관습을 해체한 이 대담한 시도로부터 어느덧 10년이 지났지만 <하이 라이프>나 <놉>을 제외하고는 장르의 규칙을
[OTT 추천작] ‘피터 본 칸트’ ‘언더 더 스킨’ ‘유령과 뮈어 부인’ ‘보라’
-
웨이브 / 감독 이종필 각본 손미 출연 이나영, 구교환, 서현우, 선우정아, 심은경, 조현철, 한예리 / 플레이지수 ▶▶▶▷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하경(이나영)은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다가 일주일 중 하루, 토요일에 당일치기 여행을 떠난다. 하경의 짐은 그녀의 걸음만큼 단순하고 가볍다. 대단한 계획 없이도 ‘떠나고 싶다’는 사소하지만 강력한 동기만 품을 수 있다면, 하경은 이미 다른 곳에 도착해 있다. 하경은 숙박 없는 절반짜리 템플 스테이를 하러 땅끝 마을로 향하고, 제자의 전시를 보겠다는 목표만으로 군산에 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하경에게 여행은 의무나 숙제가 아니다. 하경의 여행은 종종 당일치기라는 규칙을 벗어나기도 하는데, 여행의 동기와 형식이 단순하기에 우연과 즉흥을 끌어안을 수 있다.
<박하경 여행기>는 여행의 ‘힐링’과 같은 순간들만 모아놓은 소품집이 아니다. 물론 하경이 머무는 장소들은 때로 에릭 로메르 영화에 등장하는 해변처럼 이국적으로 묘사되지만, &
[OTT 추천] ‘박하경 여행기’
-
최근 사의를 표명한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에 대한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고 부산영화제측은 사표 수리를 보류하겠다고 밝히면서 부산영화제 사태가 장기화될 전망이다. 부산영화제는 조종국 부산영화제 운영위원장 임명이 가결되고 이틀 후 허문영 집행위원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내홍을 겪고 있었다. 이번 갈등을 봉합할 첫 단추로 예상됐던 5월31일 이용관 부산영화제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 4인과 허문영 집행위원장의 회동이 불발되고,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개인적인 문제로 복귀가 힘들다는 메시지를 영화제 및 언론 매체에 전달했다. 그리고 같은 날 <일간스포츠>를 통해 부산영화제에서 오랜 기간 일한 것으로 알려진 직원 A씨가 허문영 집행위원장으로부터 수년간 성희롱과 성추행 등 성폭력을 당했다고 제보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영화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해당 매체는 A씨의 주장을 복수의 영화제 전현직 직원들에게 확인했고,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제가 100% 확신을 갖고 말씀
새로운 국면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
-
칸영화제가 5월27일 폐막했다. 여전히 마음은 칸에서 배회 중인 듯한 송경원, 김소미 기자는 시차 적응에 실패했다며 다크서클을 주렁주렁 달고 출근했다. 영화 보랴 기사 쓰랴 사람들 만나랴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두 사람은 칸영화제 공식 굿즈 중 하나인 에코백 선물을 잊지 않았다. 칸영화제 출장자의 에코백 선물은 어느덧 <씨네21>의 전통 아닌 전통이 되어버려, 나는 칸영화제 에코백만으로 일주일 내내 새 가방을 들 수 있는 에코백 부자가 되었다. <씨네21> 기자들은 한동안 너도나도 한쪽 어깨에 ‘FESTIVAL DE CANNES’이 큼지막이 프린트된 가방을 메고서 묘한 동료애를 나눌 것이다. 시사회장에서나 거리에서 같은 가방을 멘 서로를 발견하고 슬며시 미소 지을 것이다. 사실 진짜로 기다린 건 에코백이 아니라 칸에서의 이야기다. 아직 두 기자는 칸에서의 이야기보따리를 제대로 풀어놓지 않았는데(나만 못 들은 건가?),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씨네21>
[이주현 편집장] 칸의 영화들, 수입 됐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