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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감격을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여기 왔다.------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는 개막식에 참석하는 게스트들에게 정장 차림을 요청했다. 몇몇 사람들이 그 요청을 무시했는데, 이창동 감독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개막일 밤 남포동 포장마차에서 이창동 감독은 이렇게 불평했다. “영화 하는 사람들한테 정장 입으라는 건 무리다. 자유롭고 싶어서 영화를 택한 사람들인데, 그런 격식이 맞겠나.”감독에서 장관으로 직책이 중대하게 바뀐 뒤에도 그는 격식을 무시했다. 넥타이를 매지 않았고, 자기 차를 직접 운전했으며, 장관에게 90도 각도로 절하는 관료 문화를 ‘조폭문화’와 유사하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래서 취임 첫날부터 그의 행동거지는 뉴스거리가 됐다. 화제만 제공한 건 물론 아니다. 기자실 폐쇄 등의 조치는 언론으로부터 공격받았고, 특히 <조선일보>는 문성근, 명계남씨와 그를 묶어 도마 위에 올리기도 했다. 격식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감독 시절의 자유를 누리진 못하겠지만,
장관실에서 이창동 감독을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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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려움을 어떻게 해소했나.→ 실은 고민 끝에 박광수 감독한테 전화를 해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박 감독이 그러더라. “두려워해도 소용없다. 사람은 어차피 변한다. 변한다면 변한 지점에서 출발하면 된다. 또 그럴 수밖에 없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예술가와 정치가는 다르다. 예술가는 타협하는 순간에도 타협을 자책하며 결국 그걸 숨기지 못한다. 정치인은 그가 혁명가가 아니라면 타협이 본업이다. 장관이 정치인은 아니라 해도, 정부의 정치적 선택에 공동책임을 져야 하며 정부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한다. 정부의 어떤 정치적 선택을 내면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때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정부가 내가 내면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예상을 했다면, 난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거다. 만에 하나, 그런 선택을 하려 한다면 그걸 저지하는 것도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예를 드는 게 좋겠다.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통화를 하면서 대이라크전 지지발
장관실에서 이창동 감독을 만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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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책은 시장에서 배제되는 중요한 가치들을 보존하는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극장에 걸리기 힘든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는 정책적 지원으로 제작되고 상영된다. 민간 자율이라는 건 결국 시장의 힘에 전적으로 맡기는 결과가 될 수도 있지 않나.→ 시장에 맡기겠다는 게 아니다. 민간이 갖고 있는 자발성과 창조성에 의존한다는 거다. 예컨대, 영화진흥위원회는 현장과 직접 맞닿은 사람들이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기구다. 책상에서 만들어지는 정책보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제안되는 정책이 훨씬 더 존중돼야 한다. 처음부터 최상의 제안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시행착오의 과정이 문화적 힘을 향상시킬 거라고 믿는다. 공적인 조직이 그 방향으로 가는 데는 분명히 충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지난 대선, 반전시위, 촛불시위 속에는 분명히 무언가 새로운 게 있다. 그것의 정체를 몇 마디로 단정짓긴 힘들지만, 분명히 새로운 문화적 힘
장관실에서 이창동 감독을 만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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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인데요... 사실 난 돈키호테입니다.
곧 개봉예정인 <지구를 지켜라!>는 그 제목만큼이나 엉뚱한 영화다. 외계인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불행이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병구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벌이는 고군분투를 그리는 이 영화에는 황당한 상상력이 구석구석에서 출몰한다. 보는 이를 때론 당황하게, 때론 웃음짓게 할 이 영화는 1995년 이라는 단편영화로 주목받았던 장준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엿보이는 갖가지 희한한 발상은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골때리는’ 이야기를 생각했을까. 데뷔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력과 후반작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회고하며 직접 쓴 ‘<지구를 지켜라!> 창작비화’를 보면 그 궁금증이 풀린다.
“비밀을 간직하고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실 난 존 레넌이다.” 이 인상적인 독백으로 시작하는 장준환 감독의 단편영화 은 1995년 발표 당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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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 선인장>을 끝낸 직후 그는 봉준호, 김종훈 감독과 함께 <유령>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다. 차승재 대표가 던져준 “잠수함이 나오는 영화다. 일본이 나와야 한다”는 정도의 앙상한 ‘화두’를 놓고 각각 시나리오를 썼고, 이중 장준환의 버전이 채택됐다. 영화의 기본 설정뿐 아니라 자기파괴적인 성격의 캐릭터나 비극적인 결말부까지의 골격은 이때 만들어졌다. “시나리오 초고는 한달 만에 가뿐하게 썼다. 그런데 각색이 힘들었다. 나 혼자 괜히 무거워지면서 한국으로 미사일을 날리는 장면을 생각하고, 그러면서 혼자 감동하고….” <2001 이매진>에서 얼핏 엿보였던 장준환 특유의 비관주의가 스스로를 지배한 탓이었다. 워낙 작업이 더뎌지다보니 두달 동안 달랑 석줄만을 고친 적도 있었다.
어렵사리 <유령> 시나리오를 마친 뒤, 99년 장준환은 몇개의 다리를 건너 캐나다로부터 시나리오 작업 제의를 받는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한국인 제작자가 시나리오 손볼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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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디카프리오가 영화의 영감을 주다
2000년 어느 봄날 , 감독의 자취방
오늘도 감독은 12시쯤 눈을 떠 졸린 눈을 비비며 늦은 아침을 먹고 멍하게 누워 시체놀이를 즐기고 있다. 1년쯤 공들인 시나리오를 데뷔작으로는 너무 거대한 이야기라는 둥, 엄청난 특수효과와 CG를 소화하기 힘들다는 둥, 갖가지 핑계를 대가며 스스로 엎어버린 뒤 감독은 별반 즐거울 일이 없다. 감독은 거창한 얘기보다는 신인감독에게 맞는 적당한 규모의 이야기를 찾고 있다. ‘영화를 보면 색다른 영감이 떠오를까? 그래 오늘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은 감이 들어!’ 감독은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영화 보러 나간다. 그의 뒷모습이 경쾌하다.
몇 시간 뒤, 돌아오는 버스 안
햇살 따가운 구석자리에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감독. 별 소득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착잡한 표정의 감독은 가판대에서 산 <씨네21>을 펼친다. 이리저리 기사를 뒤적이던 감독의 눈이 한 페이지에 꽂힌다.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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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당신은 외계인을 믿으십니까?
강사장/ 지구를 처음 발견한 건 칠십오 대조 선왕님이셨어
강사장/ 선왕께서는 이 아름다운 행성을 푸른 행성이라고 불렀지.당시 푸른 행성은 멍청한 파충류들이 지배하고 있었어.(중략)실험대 위에서 아기 공룡을 해부하는 외계인들. (시나리오 중)
2000년 가을, 수서 작업실
다시 찾아온 슬럼프. 시나리오의 진도도 잘 나가지도 않고 컨디션도 좋지 않은 감독은 멍하게 누워 시체놀이를 즐기고 있다. 곧이어 굼벵이놀이로 전환, 뒹굴뒹굴 몸을 굴리던 감독의 눈에 며칠 전 길거리에서 받아서 바닥에 던져놓았던 전단 하나가 눈에 띈다. ‘외계로부터의 xx… 라엘리언 어쩌고저쩌고….’‘음… 저기에 가면 뭔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몇 시간 뒤, 종로 탑골공원 근처
전단지를 든 감독, 종로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다. 한참을 헤매다 허름한 콘크리트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감독은 얼마 전 자료조사차 마네킹 공장을 방문해 눈치없이 이것저것 물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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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에필로그
2003년 초 편집실
감독은 적이 당황하고 있다. “이 장면은 너무 어두워. 빼는 게 좋겠어.” 제작진들이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2002년 5월부터 11월까지 힘겨운 촬영을 끝낸 가뿐한 상황임에도 감독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모든 스탭과 배우가 고생했지만, 그중에서도 누구보다 힘들어했던 주연 신하균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장면을 뺀다고 생각하니 감독은 하균 앞에 면목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구? 다음을 봐라.
플래시백- 2002년 여름 강원도의 어느 국도
감독은 병구가 친구인 태식으로부터 무시당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찍고 있다. 태식이 자신의 상처를 건드려 괴로운 병구의 내면이 드러나야 하는 장면이다. 병구가 자신의 뺨을 세게 때리며 트럭을 운전한다는 설정은 이렇게 그의 아픔과 이상심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감독은 생각한다. 근데 왠지 불안하다. 병구 역의 신하균이 수동기어를 어색하게 조작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드디어 감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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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촉구! <임소요>에서 <아들>까지, 반드시 ‘극장에서’ 만나고 싶은 걸작 10편 지지선언
수입은 해놓고 개봉을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때로는 걸 만한 극장을 찾을 수 없어서, 때로는 수입사 스스로 흥행 가능성에 자신이 없어서, 때로는 심의문제가 걸려서. 영화사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이런 영화 가운데 상당수가 외국의 각종 매체에서 그해 베스트 10에 꼽힌 작품들이다.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경탄을 자아내고 열렬한 지지를 받은 영화들을 하루빨리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씨네21>의 이번 특집은 그 방법 가운데 하나로 기획된 것이다. <임소요> <큐어> <해피니스> <팜므파탈>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아들> <막달렌 시스터즈> <볼링 포 콜럼바인> <노 맨스 랜드>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1] - 임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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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어>(Cure)
내 안에 악마가 숨어 있어
나카다 히데오의 <링>과 이토 준지 원작의 공포영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도 우리는 일본 공포영화의 입구에서 서성이는 중이다. 고전인 고바야시 마사키의 <괴담>은 1964년 작품이고, 고어영화인 이케다 도시하루의 <이블 데드 트랩>은 너무 잔혹해서 수입할 수 없다면 마지못해 수긍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1997년 작 <큐어>는 왜? 이미 수입까지 된 상황에서 <큐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83년 <간다천 음란전쟁>으로 데뷔한 구로사와 기요시는 누벨바그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장르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바쳐온 감독이다. <인간합격> <카리스마>처럼 장르에서 벗어난 걸작들과 함께 <지옥의 경비원>에서 시작하여 <큐어>를 거쳐 <카이로>에 이르는 구로사와 기요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2] - 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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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니스>(Happiness)
신경쇠약직전의 미국으로 오세요
토드 솔론즈의 <해피니스>의 국내 배급사가 있다는 소식은 뜻밖이다. 한국의 영화시장에 대한 내 상상력은 이처럼 배짱이 없다. <해피니스>에는 소아성욕자인 정신분석가, 사정을 못해 안달난 열한살 먹은 남자아이, 폰섹스에 열중하는 비루한 사내가 화면을 들락거린다. 그들의 삶은 어딘가 덧나 있지만, 그걸 알 길이 없다. 고로 이 악몽 같은 영화를 사랑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를 일단 보고 난 뒤라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이 뒤숭숭한 영화를 잠시 기억에 가둬놓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기억의 휴지통에서 비워줄 ‘삭제’ 키는 어디에도 없다. 당장 내가 그렇다. 이 퍽퍽하고 짜증난 영화를 당분간 잊었다 싶은데, 이 영화는 수시로 악의적인 미소를 띠며 귀환한다.
<해피니스>가 돌아오는 기억의 궤도는 따로 있다. 그것은 외상의 흔적을 타고 흘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3] - 해피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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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탈>(Femme Fatale)
히치콕, 누아르에 입맞추다
유럽영화에서 할리우드영화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너의 징후를 즐기라며 핏대를 세우고 의자를 옮겨다니던 슬라보예 지젝은, 여전히 현대 영화이론을 매혹시키고 있는 두 가지 소재를 선언하며 마지막 장의 첫 문단을 시작한다. ‘히치콕의 영화와 필름누아르.’ 이 둘은 한 등에 붙어 있지만, 한 몸통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히치콕은 히치콕이며, 누아르는 누아르이다. 그러므로 세상 어느 영화이론가보다도 히치콕을 잘 알고 있는 히치콕 문하생 브라이언 드 팔마가 필름누아르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히치콕적 누아르’는 그 어디에서도 손쉽게 탄생할 수 없다. 이 희박한 창조적 결합의 순간만으로도 <팜므파탈>의 존재는 희귀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묻어둔다면 언제 다시 히치콕과 누아르의 대면을 목도하게 될지는 정말 자신할 수 없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매혹적 요부, ‘팜므파탈’. 때로는 순수함으로, 때로는 요염함으로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4] - 팜므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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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赤い橋の下のぬるい水)
오늘, 그는 다시 일어선다
한숨을 돌리려 멍하니 하늘을 보다 어떤 영화가 떠올라 혼자 키득거려본 적이 있으신지? 침울하고 피곤해서 만사가 귀찮아질 때 어떤 영화에 대해 떠들다가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껴본 적 있으신지? 아마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영화가 <오스틴 파워>인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인지는 달라도. 내겐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 그렇다. 2년 전에 본, 흐릿한 기억이지만 이 영화를 생각하면 언제나 미소짓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차마 거울을 보며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혹시 음흉한 미소일까 겁이 난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지워지지 않는 잔상은 섹스를 하면서 물을 뿜어내는 신비한 여인이다. <우나기>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하겠지만, 출옥한 뒤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야쿠쇼 고지에게 따뜻한 도시락을 전해주려 다리 위에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5] -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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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슈슈의 모든 것> (リリイ·シュシュのすべて)
14살 봄, 우리들은 썩기 시작했다
“그녀가 태어난 것은 1980년 12월8일 22시50분 이 날짜는 존 레넌이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게 살해당한 일시와 완전히 똑같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 우연의 일치는 의미가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날, 그 시각에 그녀가 태어났다는 사실뿐이다. 그녀의 이름, 릴리 슈슈….”
분노의 계절을 잊었던가. 푸른 꿈보다는 살의(殺意)가 더욱 치밀어올랐던 그 시간들을. ‘데미안’마저 부재했던 그 완벽한 고립의 시간들을. 이와이 순지의 최근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14살의 봄, 유충의 시대를 끝내고 음울한 누에고치에 갇힌 번데기의 계절로 접어든 ‘소년, 소녀들의 모든 것’이며, 의 영상적 화사함과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의 주제적 어두움을 한 작품 속에서 완벽하게 조율하게 된 감독 ‘이와의 순지의 모든 것’이다.
눈이 시린 초록빛 논 한가운데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6] - 릴리 슈슈의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