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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둘. 세속적 이기주의자나태한 휴 그랜트가 시종일관 성실하게 멀리하는 가치가 있다면 ‘심오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연기의 열병에 감염되셨나요?” <피츠프레스>의 인터뷰어가 던진 진지한 질문에 그는 그런 병력은 없다고 대답했다. “학교 때는 여학교 학생들과 무대에 같이 오르고 남들이 나에게 호감을 표하는 것이 기뻐서 연기를 했다. 나는 온갖 올바르지 못한 동기로, 돈과 명성과 얄팍한 재미 때문에 이 직업을 좋아한다.” 여러 미녀들과 스페인의 섬에서 몇주를 지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영화를 고른 적도 있는 휴 그랜트는 <어바웃 어 보이>의 귀족급 백수 윌과 세계관을 같이하는 남자다. 성가신 파파라치는 혐오하지만, ‘로맨틱코미디의 왕자’니 ‘가장 섹시한 수입품’이니 하는 언론이 붙여준 타이틀과 트로피에 대해서는 진지한 연기자 이미지를 해치건 말건 환영이다. 상이라면 밥상이건 뭐건 받는 편이 낫다는 주의. ‘깊이에의 강요’를 얼마나 싫어하냐면, 만의
네 가지 키워드로 읽는 휴 그랜트의 매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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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넷. ‘내추럴’형의 유혹자로버트 그린이 쓴 <유혹의 기술>의 분류를 응용하자면, 휴 그랜트는 ‘내추럴’형의 유혹자다. ‘내추럴’은 자연스럽고 천진난만하며 자신의 행위가 야기할 파장에 상대적으로 무심하며 스스로의 결함과 약점을 최대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해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유혹자. <네번의 결혼식…> 오디션장에서 “배우는 성인의 직업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말한 바 있는 휴 그랜트의 가슴에는 듬뿍 사랑받고 자란 소년이 들어앉아 있다. 좋은 머리와 귀여운 외모로 얻는 호의와 사회적 혜택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집에 돌아와서 엄마가 없으면 불안해서 눈꺼풀에 경련을 일으키는 소년. 1994년 매춘 스캔들이 솔직한 사과 한마디로 대중에게 쉽게 용서된 것도 돈많은 스타의 추태가 아니라 사춘기 남학생의 철없는 탈선으로 비쳐진 덕택이 컸다.“어머니는 나와 형에게 애정을 퍼부었다. 넉넉히 사랑받으면 사랑을 공기처럼 당연시하게 된다. 문을 열고 나아가 사랑을 찾아 헤매고
네 가지 키워드로 읽는 휴 그랜트의 매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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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멜로로 귀환한 ’소나기’ 동화가분명 예외적인 일이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어떤 계기로 성공을 하고나면,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그 사람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행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만약 그 사람이 오랜 기간의 ‘공백기’를 거쳤거나, 지극히 입지전적인 인물일 경우, 그 행사에 동석하지 못해 조급해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반가움과 궁금함의 표시일 것이다. 하지만 뒤늦은 관심과 호기심으로 도배된 칭송은 여전히 현재와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는 당사자의 자기 판단과는 달리, 그 과거 궤적들을 추억의 앨범 속에서만 찾아내도록 유도하거나 구태여 묻어놓도록 강요하는 무례함으로 전도되기도 한다.곽재용 감독은 8년간의 공백을 깨고 <엽기적인 그녀>로 한국영화사에 또 하나의 거대 흥행작을 추가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엽기적인 그녀>의 상업적 성공 이후, 그러니까 ‘곽재용이 돌아왔다’고 소문이 자자하던 그때, 반가움의 표시이건 무례함의 호기심이건 ‘감독 곽재용’에
`흥행감독` 타이틀 얻은 곽재용 감독의 어제와 오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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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클래식>의 지혜가 어머니 주희의 남자친구 준하의 편지를 읽음으로써,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지혜와 지수의 사랑은 되살아난다(참고로 <비오는 날의 수채화> 1, 2편과 <클래식>에서의 딸의 이름은 모두 ‘지혜’이다. “원래 딸아이 이름을 지혜라고 지으려고 했지만, 한자가 좋지 않다고 해서 ‘지수’로 바꿨다.” 그리고, 곽재용 감독이 진짜 엽기녀를 창조하기 위해 요즘 세대인 딸들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힌트를 얻은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지혜의 목소리,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생량한 바람이 가을을 예고해줍니다. 그 바람을 편지지에 실어 당신에게 보냅니다…”. “생량한?… 바람을 편지지에 실어 당신에게 보냅니다?… 유치해!… 음… 클래식하다고 해두지 뭐….” 마치 조소처럼, 하지만 풀리지 않을 주문처럼 영화의 초입부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멜로의 감정을 촌스럽다고, 또는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는 시각들에 대해 지혜의 입을 통해
`흥행감독` 타이틀 얻은 곽재용 감독의 어제와 오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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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을 향하여,그리고 흥행도 좀 향하여유난히 춥고 음습한 겨울날씨를 동정받을 때마다, 독일 사람들이 잘하는 말이 있다. “그 대신 우리한테는 따뜻한 난방기가 있잖아요.” 심리상태에 영향을 줄 정도로 우울한 기미가 가득한 바깥의 추운 날씨에도, 난방이 잘된 집안에 들어와 ‘하이중’(Heizung)이라고 부르는, 라디에이터 난방기의 온기를 쬐며 창 밖을 내다보면서, 자기들만의 은밀한 위로감을 맛본다는 이야기다.베를린영화제가 2월에 열리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영화관람이 베를린 사람들에게 ‘실내오락’으로서 솔깃할 뿐더러 절실한 것이리라는 계산 내지 배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부산영화제를 가본 사람들이라면 깜짝 놀랄 법하게, 베를린영화제가 거리에서는 거의 축제 분위기를 내뿜지 않는 것도 따뜻한 ‘실내’로 파묻히고 싶어하는 독일 사람들 특유의 겨울심리 탓일지 모른다.‘관용을 향하여’(towards tolerance)2월6일 제53회 베를린영화제가 개막했다. 그에 하루
제 53회 베를린영화제 개막리포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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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댑테이션> <디 아워스>, 예측최고별점 받아세계 변방의 사람들을 다룬 영화들이 ‘관용을 향하여’라는 영화제 모토와 함께 영화제 서두에 거론되는 것과는 별도로, ‘황금곰상을 향하여’ 좀더 기대를 받고 있는 영화들은 따로 있는 것이 사실이다. 22편의 경쟁부문 작품들 가운데서 스파이크 존즈의 <어댑테이션>,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는 가장 먼저 경쟁작 예측별점을 매긴 TV영화잡지 <TV무비>에서 최고별점을 받은 작품들. 이 밖에도 앨런 파커의 <데이빗 게일의 생애>, 스티븐 소더버그의 <솔라리스>, 스파이크 리의 , 조지 클루니의 <위험한 마음의 고백> 등 미국영화들은 올해 막강한 라인업을 경쟁부문에 갖추고 있다. 사형제도 반대운동가인 대학교수가 동료 여자 운동가를 살해한 뒤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은 <데이빗 게일의 생애>는 개막작 <시카고>를 제외하고는 일반
제 53회 베를린영화제 개막리포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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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작 <시카고> 기자회견“관용? 글쎄… 감독이 날 참아줬다”▶ 롭 마셜 감독뮤지컬을 각색하면서 어떤 것에 주안점을 두었나.뮤지컬과 영화는 상당히 다른 각자의 방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뮤지컬과 ‘비슷한’ 드라마로 만들었다. 노래를 스토리 중간중간에 나오게 하고, 또 스토리는 노래의 일부로서 서로 분리될 수 없게 하도록. 노래가 나올 때는 관객들이 엔터테인먼트로서 노래를 즐기고, 또 노래가 끝나면 스토리로 돌아가는 걸 무리없게 하는 게 나의 의도였다.영화의 쇼장면들이 마치 진짜 웨스턴 쇼처럼 완성도가 있다. 어떤 방식으로 작업했나.실제로 쇼공연을 하듯이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리허설을 6주 동안 했다. 캐서린이나 르네, 존 모두 잘해주었고, 정말 쇼 같다는 말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어 자랑스럽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 서도 될 정도로. (웃음)(왼쪽부터) 존 C. 레일리, 르네 젤위거, 리처드 기어, 캐서린 제타존
제 53회 베를린영화제 개막리포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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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기네스북, 신기록 진기록 열전1919년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탄생한 이래, 80몇년 동안 한국영화가 남긴 기록을 들춰보는 일은 엉뚱하다. 영화 자체가 무언가를 기록하는 매체라곤 하나, 스포츠가 아닌 이상 기록을 위해 만들지는 않을 터. 신성일이 ‘최다 작품 출연’ 기록을 세우기 위해 숨을 참아가며 536편의 영화에 출연했을 리 없고, 109편의 영화를 연출한 김수용 감독이 ‘최다 작품 연출’ 부문 메달을 따기 위해 고영남 감독과 임권택 감독을 상대로 ‘할리우드 액션’을 펼쳤을 리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영화의 진기록들은 영화의 본질과는 거의 연관이 없을지도 모른다.물론, 아무리 한국영화의 갖가지 기록이 예술이나 장사와 무관하다 되뇐다 해도 그리로 눈길이 쏠리는 것마저 막을 순 없다. 크고, 길고, 많고, 강한, 그리고 오래된 것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관심을 끌어당기지 않는가. 여기 소개되는 기상천외 신통방통 황당무계 기록들 또한 어떤 이에게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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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영화화된 소재, 소설, 캐릭터 춘향단연 남원골의 절세미인 춘향이었다. 1935년 문예봉과 한일송이 출연한 이명우 감독의 <춘향전>이 발표된 이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는 모두 13번에 걸쳐 극영화로 제작됐다. 1999에는 애니메이션으로 <성춘향전>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탈선춘향전>(1960)이나 <그 후의 이도령>(1936) 같은 ‘유사작’도 발표됐다. 멜로드라마에 민족정서를 고루 녹인 이 고대소설이 그동안 가장 각광받았는다는 사실은 1961년 극적으로 표출된다. 당시 설 극장가에서 김지미를 내세운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최은희 주연, 신상옥 연출의 <성춘향>이 피할 수 없는 정면대결을 펼친 것. 결과는 신상옥의 압승이었지만, 사실 주가가 오른 것은 춘향 캐릭터였다. 당시 춘향을 연기한다는 것은 최고의 여배우의 다른 표현이었다. 김지미, 최은희 외에도 홍세미, 문희,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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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rd Maker #1: <서편제> 개봉관에서 가장 오랜 기간 상영된 영화(194일), 단관 최다 관객동원(84만6427명)<서편제>의 성공은 일종의 신화다. <쉬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영화 흥행의 한계치’라는 12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고, 1개관에서 개봉하던 당시 가장 오랫동안 상영되며,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사실, <장군의 아들> 시리즈로 큰 수익을 올렸던 태흥영화는 이 영화에서 상업적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임권택 감독의 예술성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1993년 3월10일 첫 기자시사회가 열리자 태흥 모든 직원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영화를 본 기자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에 또 칭찬을 했고, 다음날 열린 평론가 시사회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쏟아졌다. 태흥은 빗발치는 요청 때문에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연일 시사회를 열며 개봉일인 4월10일의 ‘대박’을 기대했다. 아뿔싸, 개봉관인 단성사의 첫날 결과는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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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가장 사랑한 작가는 이광수, 최인호간발의 차로 이광수가 최인호를 앞섰다. 지금까지 이광수의 작품이 영화화된 것은 21번. 1925년 이경손 감독이 <개척자>를 스크린에 옮긴 이후 김기영, 전창근, 강대진 감독들이 뒤를 이었다. 1960∼70년대 여러 감독들이 다들 한번씩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무래도 문예영화 제작 붐과 관련이 있다. 14편 중 특히 <무정> <유정> <사랑> <흙> 등은 2번씩 영화화됐고, <꿈>은 배창호 감독이 1번, 신상옥 감독이 2번 모두 3번씩이나 영화화됐다. 하지만 이광수보다 최인호의 작품이 영화화된 게 하나 더 많다. 최인호는 <바보들의 행진> <적도의 꽃> <겨울나그네> <황진이> 등 15편이, 21번 영화화됐다. 필모그래피 중 배창호 감독과의 작업이 압도적으로 많다. 1976년 <걷지말고 뛰어라>를 직접 연출하기도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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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키스신 <운명의 손>(1954)‘혁명’이었다. 이전까지 러브신이라 해봤자 하염없이 바라보다 덥석 두손을 마주 잡거나 와락 껴안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외국 배우들이야 ‘필’만 꽂히면 입술을 부벼댔지만서도, 이를 본 관객이 금발의 연인들을 제몸처럼 여기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운명의 손>이 건드린 표현 금단의 영역은, 그래서 ‘조선’ 관객에겐 달콤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5초가량 슬쩍 입을 맞댄 것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한형모 감독의 ‘결단’이 뜻대로 진행되기 위해선 거추장스러운 몇 가지 의례가 요구됐다. 일단 카바레 마담 정애 역의 윤인자와 국군 대위 영철 역의 이향의 키스 도중 ‘부적절한’ 감정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차단해야 했다. 두 사람의 입술에 셀룰로이드 재질의 비닐(담뱃갑의 비닐을 활용했다는 설이 있다)을 입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질병 전염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일석이조. 이와 관련해 사회적으로 질병예방 체계가 허술했던 전쟁 직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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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검열80년 동안 가위질은 쉬지 않고 계속됐다. ‘오버’ 제스처의 극단이었던 검열의 연속. 이중엔 기가 찬 사례 또한 많았다. 일제는 이규설의 <농중조>(1926) 중 “노출이 심하다며” 가위를 들이댔다. 화숙 역을 맡았던 복혜숙의 ‘종아리’가 드러났다는 이유에서였다. 해방을 맞았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4·19와 함께 민간심의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들어선 것도 잠깐. 군화 신은 독재자들은 검열을 진두지휘했다. 반공영화 <7인의 여포로>(1965)에 용공혐의를 걸어 감독인 이만희를 구속하기까지 했다. 극중 자신들을 겁탈하려는 중공군을 쏘아죽인 인민군 장교를 두고 남쪽의 여포로들이 “멋있다”는 대사를 읊은 것이 꼬투리였다. 오죽했으면 감독이 재판정에서 김일성에게 영화를 보여준 뒤 그의 반응에 따라 용공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을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두 여보>(1970)는 “한 여인이 두 남편을 거느리는 것이 사회정서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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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엑스트라가 출연한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 <무사> 또는 <태백산맥>영국 DK출판사에서 펴낸 <Top 10 of Eveything 2002>에는 ‘엑스트라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영화’ 부문 3위로 한국영화 <우주괴인 왕마귀>(1967, 권혁진 감독)가 올라 있다. 무려 15만7천명을 동원했다는 것. 하지만 당시 이 영화의 제작사인 세기상사에 근무했던 정종화씨는 “홍보를 위해 부풀린 것. 유료로 고용된 엑스트라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본 문화평론가 이순진씨도 “참 많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김성수 감독의 <무사>(2001)가 50마리의 말과 기수를 기본으로 해서 많을 때 200명가량 동원해 112회 동안 찍었으니, 연인원 2만명 정도 규모의 엑스트라를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