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전 박찬욱 감독이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봉 감독은 일본만화 <올드 보이>가 재밌어서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올드 보이>를 재밌게 읽었다. 얼마 지나 박 감독이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와요>를 영화로 만들려고 알아봤더니, 며칠 전에 봉 감독이 판권을 사갔간다(<날 보러와요>는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다). “이럴 수가!” 조금 더 지나 박 감독에게 <올드 보이>를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복수는 나의 것>을 마친 뒤였다. “복수할 기회다!”멀쩡한 20대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어딘지 모를 건물 한구석의 4평 남짓한 밀실에 갇힌다. 조직폭력배가 의뢰인이 원하는 기간만큼 사람을 잡아다 가둬놓고 징역살이를 시키는 것이다. 남자는 의뢰인이 누군지, 왜 그러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게 10년을 갇혀 있다가 마취된 상태에서 공원에 버려진다.‘출소’한 남자는 복수를 다짐하며 의뢰인
박찬욱의 <올드 보이>
-
작금의 세계화 시대를 맞아, 영어는 단지 영미권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가리키진 않는다. 영어는 동아시아 변방에 사는 보통 사람에게도 생존을 위한 구명대요, 교양을 증명할 수 있는 자격이며, 지위를 업그레이드하는 연료로 받아들여진다. 스물 몇해를 사는 동안 단 한번도 영어가 자신의 삶과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 없던 동사무소 말단 공무원 영주 또한 이 영어의 ‘광풍’을 피해갈 수 없다. 동장님의 ‘세계화 시대의 공무원론’에 이끌려 억지로 영어학원에 등록한 영주는 영어에 관심도, 실력도 없는 탓에 학원생활이 괴롭다. 그러던 그녀에게 서광이 비치니, 난생처음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는 남성 문수를 만난 것. 천성이 바람둥이인 문수의 의례적 행동을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착각한 영주는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영어에 매진한다. 영어를 매개로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여는 과정을 로맨틱코미디로 담는 이 영화는 “한국사회의 영어 콤플렉스를 통렬하게 부수려는” 김성수 감독의 바람을 담고 있다. “언어나
김성수의 <영어 완전정복>
-
‘똥개’는 족보가 없는 개다. 예전엔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개였고 특별히 영리하거나 멋있거나 예쁜 개가 아니다. 하지만 어딘지 정(情)이 가는 개, 똥개는 고향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똥개>의 주인공은 똥개처럼 살아가는 젊은이다. 지방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는 모든 판단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친구다. 아무 데나 침뱉고 괜히 눈을 부라리는 양아치지만 남들이 허리를 굽히는 권력이나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남자다. 곽경택 감독은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서 이 영화를 구상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그 사람은 곽 감독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써서 보여줬고 <친구>를 끝내고 영화제 참석차 몬트리올에 갔다가 그 글을 읽은 곽 감독은 귀국하자마자 영화판권을 샀다. <챔피언>을 끝내고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 <똥개>는 곽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휴먼코믹드라마”다. 누가 “똥개야”라고 부르면 주인공과 주인공이 기르는 똥개가 함께 뒤돌아보
곽경택의 <똥개>
-
“현대사회에 도인들이 살고 있다.” <마루치 아라치>는 이 하나의 전제에서 시작한다.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청소부가 줄에 매달려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경공을 쓰고 있고 길에 앉아 운세상담을 하는 할아버지가 실은 내공의 고수라는 ‘황당한’ 상상이 <마루치 아라치>라는 현대판 무협영화를 가능케 한다. 이야기는 어리버리한 경찰 상환이 우연히 도인들의 세계에 눈뜨면서 시작된다. 늘 남에게 당하며 사는 데 익숙한 청년 상환, 자유로운 생활을 동경하는 여자 의진, 내공의 고수인 7명의 신선 등이 등장해 세상을 구하기 위한 싸움을 펼친다. 그러니까 류승완 감독의 <마루치 아라치>는 애니메이션 <마루치 아라치>와 내용상 별 관계가 없는 영화다. 그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마루치 아라치의 어원에서 이 영화를 떠올렸다. “산마루, 할 때 쓰는 것처럼 ‘마루’는 가장 높은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고 ‘치’는 사람을 일컫는다. 마루치는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자,
류승완의 <마루치 아라치>
-
-
역대 최고의 주먹은 아마도 전문가들이라면 ‘잇뽄’ 김두한 등과 함께 그를 빼놓지 않을 것이다. ‘시라소니’ 이성순. <조선의 주먹>은 한반도의 북쪽을 주먹으로 호령했고, 중국 만주, 상하이 등지에서 수많은 전설을 남겼던 시라소니를 그리는 영화다. 그렇다고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일대기 식으로 그려내는 건 아니다. 1936년 겨울 만주의 봉천(현재 심양)과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허구적 재미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싸움을 막무가내로 좋아했고 환상적인 솜씨를 가졌다는 시라소니의 캐릭터만 사실에 가깝고, 나머지 이야기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나가게 된다. 영화는 5년 전 맞붙었다가 승부를 가리지 못했던 이상대를 시라소니가 찾아나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일본군과 중국인들로부터 조선인 거리를 지키고 있는 듬직한 주먹 이상대는 신임 일본 치안책임자 도조의 위협에 맞서고 있던 형편으로 시라소니의 갑작스런 도전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런 와중에 도조 또한 천하의
김태균 감독의 <조선의 주먹>
-
사이버펑크 2차 대전 발발!래리 & 앤디 워쇼스키의 <매트릭스2 리로디드>(Matrix Reloaded) + <매트릭스3 레볼루션>(Matrix Revolutions)난데없이 튀어나와 전세계 박스오피스 수입 5억2천만달러를 올리고 DVD 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 왕관까지 내처 차지한 <매트릭스>는 1999년 최고의 깜짝 히트였다. 아니 사실 그 이상이었다. <매트릭스>는 1970년대 이래 심미안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던 할리우드 액션영화에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다층적 스토리텔링이라는 신무기까지 보탰다. 워쇼스키 형제는 2001년 3월부터 2002년 7월까지 캘리포니아와 시드니 폭스 스튜디오에서, 본래 그들이 3부작으로 구상한 인간 대 기계의 사이버펑크 전쟁 서사시 2편과 3편을 찍었고 워너는 도합 3억달러를 쏟아넣었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제작자 조엘 슈마허는 2편 <매트릭스2 리로디드&g
2003년 최강 프로젝트 해외영화 12편 (1)
-
터미네이터, 세 번째 귀환조너선 모스토의 <터미네이터3: 기계들의 반란> (Terminator3: Rise of Machines)용광로 속에서 그의 뼈대가 녹아 사라지는 순간에도 감히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은 관객은 없었을 것이다. “돌아온다”는 것은 그의 입버릇이었으니까. 터미네이터의 세 번째 귀환은 무려 12년이나 걸렸다. 2002년 4월 제작에 돌입해 9월 촬영을 마친 <터미네이터3>는 50대 중반의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다시 T800의 이름으로 소환해 2003년 여름 시즌 제패의 출사표를 던졌다. “오사마 빈 라덴의 집 전화번호만큼 알아내기 힘들다”는 소리가 나돌 만큼 의 보안은 철통 같지만 이야기의 구조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3편의 시계는 <터미네이터2>로부터 10년 뒤.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성장한 존 코너를 죽이기 위해 2029년을 지배하는 기계들은 다시 암살자를 보내고 인간 레지스탕스는 사이보그 T800을 보호자로 파견
2003년 최강 프로젝트 해외영화 12편 (2)
-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완전한 사색리안의 <헐크>(The Hulk)리안의 행보는 언제나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결혼 피로연> <음식남녀> 등 대만 중산층 사람들의 삶을 다룬 소박한 드라마에서 급작스레 선회, <센스, 센서빌리티> <아이스 스톰> 등으로 영국인과 미국인에 관한 섬세한 초상을 그려내더니, 다시 클래식 차이나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담은 무협영화 <와호장룡>을 선보였다. 매번 다른 문화권의 다른 이야기, 심지어 다른 장르의 영화에 도전하는 리안의 미스터리는 모든 작품들에서 퀄리티의 수준을 지켜낸다는 점. 따라서 리안이 마블사의 코믹북 <놀라운 헐크>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도 그의 팬들은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영화에 관한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인 상황이지만,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리안이 모범적인 과학자의 내면에 자리잡은 욕망과 갈등의 소용돌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을 사색할 것이라는
2003년 최강 프로젝트 해외영화 12편 (3)
-
두근두근 울렁울렁 가슴뛰어요!팀 존슨의 애니메이션 <신밧드>(Sinbad: Legend Of The Seven Seas)야생마 스피릿의 자유를 향한 여정을 따라 서부의 영웅담으로 내달렸던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2003년 바통을 이어받은 주자는, 모험왕 신밧드다. 돛 가득히 바닷바람을 안고 진기한 보물 또는 전설을 찾아 7번의 항해에 나섰던 뱃사람 신밧드는 알리바바, 알라딘과 마찬가지로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캐릭터. 레이 해리하우젠이 제작, 각본, 시각효과를 맡았던 <신밧드의 대모험>, 국내에서는 “두근두근 울렁울렁 가슴 뛰지만” 하는 주제가와 더불어 80년대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누렸던 TV애니메이션 시리즈 등 이미 여러 차례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던 모험담의 영웅이다.원전과 얼마나 닮아 있을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이국적인 풍경과 괴물 혹은 괴인들, 미지의 세계에서 맞닥뜨리는 위기와 모험의 스펙터클이라는 기본기만큼은 기
2003년 최강 프로젝트 해외영화 12편 (4)
-
웃기는 대사 상에 <몬테크리스토>___“자네, 감방의 돌에 이름은 붙여봤나?”하나 하면 어바웃 어 보이, 둘 하면 맨 인 블랙, 셋 하면 쓰리 그리고 파이(원주율 마크 넣어주세요), 넷은 크로스로드, 일곱은 007 그리고 아홉은 세션 나인, 열은 텐 미니츠, 열하나는 오션스 일레븐, 열셋은 13 고스트, 열아홉은 K-19, 서른은 트리플X, 마흔은 40데이즈 40나이트, 그리고 다시 51번째주. 영화와 함께 노래하고 훌쩍이고 깔깔대고 뒹굴며 흘러간 2002년 한해를 가지각색 이유로 말미암아 잊기 힘든 외국영화의 순간들을 빌려 끼적끼적 정리했다.최고의 키스, 최악의 키스<시네마천국> 마을의 신부님은 올해도 손목에 쥐가 나게 종을 흔들었으리라. 스크린에 찍힌 무수한 키스 마크 중 관객을 질투에 불타게 만든 최고의 입맞춤은 거미 남자의 키스였다. 비결은 발상의 180도 전환. 메리 제인이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스파이더 맨의 마스크를 입가만 벗겨내려 한 짜릿한 키스의
<씨네21>의 2002 외화 비망록 [1]
-
최고의 캐스팅 최악의 캐스팅우리는 영화가 인간을 존중하길 요구한다. 특히 실재한 인물을 다루는 전기영화일 때 기대치는 한없이 치솟는다. 더블린 출신 작가 아이리스 머독과 영문학자 존 베일리의 오래 지속된 연애를 그린 <아이리스>의 주디 덴치, 짐 브로드벤트 커플은 머독과 베일리라는 두 인물뿐 아니라 둘 사이의 공기까지 맑은 거울에 비춰냈다. 반면 원작의 캐릭터를 ‘연쇄살인’한 캐스팅은 <레드 드래곤>의 에드워드 노튼과 랭프 파인즈. 노튼은 악과 교감하는 자기 혈관 속의 어둠을 두려워하면서도 스스로를 싸움터로 몰아세우는 FBI 요원 그레이엄의 신경증에 감염되는 데 실패했고, 랠프 파인즈는 학대당한 트라우마와 외모 콤플렉스의 노예가 된 돌로하이드가 되기에는 거북살스럽게 잘생긴 사내였다.올해의 동물: 거미2002년은 아라크노포비아(거미공포증) 환자에게는 길고 눅눅한 악몽이었다. 올해 영화계를 접수한 동물은 여름 이후 쉬지 않고 은막 위에서 스멀거린 타란튤라의 후예들.
<씨네21>의 2002 외화 비망록 [2]
-
오리발 상말로는 “날 사랑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고 해놓고 소년의 마음을 훔친 <워크 투 리멤버>의 맨디 무어. 행복이 비등점에 달할 때쯤 기다렸다는 듯 털어놓는다. “나, 백혈병이야.” 일 벌여놓고 내빼기로는 <워터 보이즈> 신임 수영부 교사 사쿠마를 따를 수 없다. 미모로 남학생들을 불러모아놓고서 깜박 잊었다는 듯 기혼 사실을 밝힌 뒤 출산휴가를 받아 사라지더니 모진 풍파 다 지나고 영화 끝날 때가 다 되어서야 흥뚱흥뚱 나타난다. 하지만 맨디 무어도 감당 못할 오리발 상 임자는 따로 있다. <어바웃 어 보이>에서 아이가 무심코 던진 딱딱한 빵을 맞고 두개의 진짜 오리발을 하늘로 뻗은 채 죽어간 죄없는 런던 공원 오리의 혼백을 차마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멘.가장 무의미한 전쟁(제목 표기 확인요!)에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일갈한 대로 고귀한 전쟁은 없다. 하지만 2002년의 미국 전쟁영화처럼 헛되고 생뚱맞은 시행착오들도 드물었다. 게임 스테이
<씨네21>의 2002 외화 비망록 [3]
-
2002년 최고의 영화는 무엇인가 최고의 배우는 누구인가 한해를 마감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기억을 더듬고 그들의 이름을 되새기며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직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영화의 감동이야말로 올해의 추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도 <씨네21>은 내부 기자, 평론가 등 필진 2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서 최고의 영화, 감독, 각본, 촬영감독, 제작자, 남녀배우를 선정했다. 집계 결과 최고의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 근소한 차이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2위를 차지했으며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뒤를 이었다. 올해의 영화인으로는 최고의 감독, 시나리오, 남녀배우 등 4개 부문을 <오아시스>가 차지했다. 이창동, 설경구, 문소리가 그들. 제작자와 촬영감독은 임권택 감독의 오랜 파트너인
<씨네21>이 꼽은 올해의 영화,영화인,10대 사건
-
한국영화 베스트 5 - 생활의 발견“ 홍상수는 항상 정직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순간 홍상수는 메시지를 보낸다.” 정성일“ 허허실실 윤리학 이부작.” 심영섭“ 멈춰 있는 듯하면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홍성남홍상수 감독의 네 번째 영화 <생활의 발견>은 이제는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홍상수식’으로 ‘모방과 흉내’라는 모티브를 다시 한번 집요하게 파고든 영화이다. 전작 <오! 수정>에서부터 조짐을 보인 변화의 가능성은 이 영화를 통해 더욱 밀도 있고 유연해진 구성으로 발전했다. 영화평론가 김봉석씨는 이에 대해 “<생활의 발견>에서는 ‘난 과정을 믿고 거기에 건다’던 홍상수의 태도가, 한결 너그러워졌다. 이번에는 집요하게 인물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거나 복마전을 헤매게 하지 않는다. 깨달음이나 변신을 의도하지도 않는다. 그저 마라톤 선수처럼 꾸준하게 달려간다. ‘정체성은 물질적’이란 말대로, 인간의 물질성을 침착하게
2002 한국영화 베스트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