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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들>은 별다른 내러티브가 없다. 젊은이들은 적당하게 삶의 과정에서 절망을 겪고 사랑을 나누며 또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는 1950년대 미국사회를 스케치하는 것이며 당대 젊음의 기운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다. 다른 연출작에 비해 <그림자들>은, 유독 카사베츠 감독이 형식적 자유를 만끽한 영화로 볼 수 있다. 할리우드영화의 규범과는 거의 관계가 없으므로. 내러티브는 산만하고, 촬영과 편집 모두 한편의 다큐멘터리 같다. 그런데 역으로 이 산만함이 당시의 관객과 미국 영화인의 호응을 얻었다. <그림자들>엔 문자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약동하는 힘 같은 것이 담겨 있다. 그리고 정의하기 힘든 슬픔까지. 한쌍의 남녀가 희미한 조명 아래서 사랑을 나누고 이후 허탈감에 빠져 서로의 행로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을 보면 아릿한 느낌이 배어난다. 공원을 질주하는 남녀, 요란한 파티의 모습, 대도시의 야경을 차례로 스크랩하면서 <그림자들>은 동
2002서울독립영화제로 만나는 존 카사베츠 감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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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사베츠 회고전 상영작<그림자들> Shadows1959년 | 흑백| 82분존 카사베츠의 장편 데뷔작. 베니스영화제 비평가상 수상작이다. 비트족과 재즈에 열광하는 사람들, 도시의 밤을 배회하는 젊은이들을 빼어나게 담아낸 수작이다.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어지럽게 얽히다가 다시 풀어지는, 자유분방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메이저 영화사라면 도저히 시도할 수 없는 연출기법으로 카사베츠는 인디영화계 스타로 떠올랐다.<얼굴들> Faces1968년 | 흑백 | 130분10여년이 넘도록 결혼생활을 이어온 어느 부부의 이야기다. 이 행복하지 않은 커플을 통해 카사베츠 감독은 미국 중산층의 분열된 자화상을 그려보인다. 지나 롤랜드가 카사베츠 영화로선 처음으로 출연하고 있다. <얼굴들> 또한 베니스영화제 수상작으로 지나 롤랜드는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카사베츠 영화에서 중요한 분수령으로 평가할 만한 작품.<영향 아래 있는 여자> Woman Under the Inf
2002서울독립영화제로 만나는 존 카사베츠 감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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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이 <해리 포터>나 <스타워즈>에 비해 현저하게 유리한 점이 있다. 우선 <스타워즈>에는 원작이 없다. 조지 루카스가 휘황한 상상력으로 선과 악의 싸움을 장황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사실 이야기상으로는 미진한 점이 많다. <스타워즈 에피소드2>의 로맨스도 공감과 연민보다는 실소를 자아내는 경우가 더 많다. 한편의 영화가 끝나고, 다음 작품이 과연 어떤 이야기로 전개될 것인가를 기다리고 예측하는 재미도 있지만 특히 <에피소드1>과 <에피소드2>는 ‘이야기’라는 면에서 좀 미진했다. <스타워즈>에 비해 <해리 포터>는 막강한 원작이 있다. 그 원작들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정도가 문제다. 그러나 <해리 포터>도 <스타워즈>와 마찬가지로 ‘제작 기간’이라는 반드시 넘어야 할 험준한 난관이 있다. <해리 포터>는 편마다 아이들이 한살씩 성장하는 설정
모습 드러낸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첫 시사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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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영웅담, 풍요로운 서사<반지의 제왕>은 선과 악의 싸움을 그린 판타지다. 사우론이라는 절대악의 존재가 있기는 하지만, <반지의 제왕>은 오히려 내면의 두려움과 흔들림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 반지를 모르도르의 불길에 던질 자는 가장 나약한 호빗족의 프로도다. 프로도는 끊임없이 반지의 유혹에 흔들린다. 만약에 간달프가 없었다면, 만약에 샘이 없었다면 프로도는 결코 모르도르로 가지 못했을 것이다. 반지는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자신이 최고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한다. 보로미르가 그렇게 반지의 유혹에 눈이 멀었었고, 파라미르 역시 같은 상황에 처한다. 반지의 소유자였던 골룸은, 사실 골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프로도가 찾아준 이름처럼, 스미골일까 주인을 믿으면서 골룸에게 사라지라고 말한 스미골이었지만, 의심하는 순간 다시 골룸은 돌아온다. 우리 마음속의 미혹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프로도에게 반지가 주어진 것은, 그가 나약함을 알기 때문이다. 프
모습 드러낸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첫 시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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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가 손짓해 나를 부른다백색의 마법사로 부활한 간달프가 써내려간 ’간달프의 書’반지원정대를 이끄는 현숙한 마법사, 간달프가 돌아왔다. 돌아오겠다고 호언장담할 새도 없이 모리아의 심연 아래로 추락했지만, 그의 부활을 의심한 관객은 거의 없었으리라. ‘회색의 마법사’로 불렸던 간달프는 눈 덮인 산에서 ‘백색의 마법사’로 부활하고, 흩어졌던 반지원정대와 대전투를 이끌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간달프 역의 이언 매켈런이 ‘Grey Book’이란 제목으로 부지런히 써내려갔던 1편의 제작일지는, 올해 ‘White Book’으로 이어졌다. 너무 분주했던 탓인지 짤막하게 날아온 ‘간달프의 書’를, 발췌해서 실었다.2002년 6월25일뉴질랜드의 고대 마오리어 이름은 Aotearoa, ‘길고 흰 구름의 나라’다. 지난주 뉴질랜드 북섬에 있는 오클랜드공항을 낮게 날아 빠져나오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남쪽의 웰링턴으로 가는 1시간 동안은 어둡고 저기압을 지나느라 심하게 흔들리는 데다 비가 창을 때
모습 드러낸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첫 시사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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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만이 진정한 진정성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영화예술> <세계 영화사> <영화스타일의 역사> 등 영화 연구 입문서를 비롯한 다양한 저서를 내놓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 교수가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씨네21>은 모종의 ‘공작’에 착수했다. 그것은 보드웰 교수와 홍상수 감독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었다. 영화의 언어구조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온 ‘구조주의자’ 보드웰 교수가 남달리 눈여겨본 영화인 목록에 홍상수 감독이 자리해 있다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홍상수 감독의 내러티브와 비주얼이 보여주는 미학적 특성이 허우샤오시엔과 차이밍량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미니멀리즘 유파에 속해 있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개성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계 영화사>의 개정판과 그의 새로운 저서에 이러한 연구내용을 담아낸 바 있다. 지난 9월 공항 검색 강화로 비행기를 놓쳐 USC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보드웰,홍상수를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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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전작들과 같고 다른 점
보드웰 | 당신의 영화는 많은 요소들로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매우 생략적이기도 하다.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부 보여주지 않으면서, 드라마틱 포인트를 넌지시 알려주는 식이다.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가 이런 갭을 채워주고 있다고 생각한다.최근의 아시아영화를 보면 미니멀리즘적 스타일로 접근하면서도 기본적인 것들을 채우지 않는다.당신 영화에서 보이는 것 같은 조밀함은 없다.
홍상수 | 언뜻 보면 단순한 이야기이고 어떻게 보면 단순한 상황 속에 다른 종류의 요소들이 중첩되고, 그런 요소들이 시간상의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가 스스로에게서 발견한 영화의 형태였던 것 같다. 맨 처음 영화를 만들 때 첫 촬영날부터 이런 식의 형태가 마치 내 속에 오래 존재했던 것처럼 나의 모든 영화적 결정들을 지배해왔다.
보드웰 | 영화학교 출신인 걸로 알고 있는데, 학교에서 콘티 그리는 법이나 스토리보드 작성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보드웰,홍상수를 만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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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웰 | 당신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캐릭터들이 미디어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생활의 발견>의 남자 주인공은 영화배우이고, <오! 수정>의 인물들은 TV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나는 이것이 당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 영화 만들기의 자기 반영적 작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홍상수 | 지금까지는,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공간이건 상황이건 직업이건 간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선택한 것 같다. 그것은 영화를 만들면서 해야 하는 수많은 결정들이 어떻게 잘못돼 갈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익숙함이 판단에 어떤 직감적 레퍼런스로 존재하길 바랐기 때문인 것 같다.
보드웰 | 혹시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옛날 문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역사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아님 다른 장르영화라도.
홍상수 | 많은 다른 가능성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지금까지 내 안의 영화적 욕망은 두 가지로 나뉜다.한쪽 욕망은 지금까지 해온 것을
보드웰,홍상수를 만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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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 그리고 기억에 관하여
보드웰 | <오! 수정>을 흑백으로 찍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홍상수 | 무엇보다 내가 흑백 시절의 고전영화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꼭 한번은 흑백을 찍고 싶었고, 촬영 시간대인 겨울과 흑백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또 다른 이유는 흑백이라는, 컬러보다 조금 더 단순한 자극체 속에서 영화 속에서 필요로 하는 작은 디테일간의 비교가 좀더 쉽게 이루어졌으면 했다.
보드웰 | 당신의 영화를 보면 매번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는 네 사람의 시점을 서로 다르게 교차시키고 있고, <강원도의 힘>에서는 두 사람의 시점으로 전개하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는 점에서 좀더 복잡한 시도를 하고 있다.<오! 수정>은 또 다르다. 두 사람이 겪은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표현해낸 것이다.한 버전은 마일드하게 또 다른 버전은 터프하게 담아냈는데, 관객은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워
보드웰,홍상수를 만나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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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는 양허요청안을 WT) 사무국에 제출한 상태입니다.→ 정부는 오히려 스크린쿼터 제도를 확대할 필요는 없는지를 따져야 해요. 교역 대상으로만 문화를 보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양허요청안을 제출한 것은 한심한 일이죠. 양허요청안을 철회하고 몇몇 소수 국가에만 유리한 문화 분야의 자유화 논리에 맞서야 합니다. 전 문화에서 정체성을 유지하고 다양성을 늘리기 위해서 국제적인 연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겠습니다. 또 국내 방송쿼터도 강화해야 합니다. 할리우드영화의 독점을 막기 위해서 한 국가에서 만든 영화의 방영 비율을 50%이하로 강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한국영화의 경우는 자정 이전인 주시청시간에 국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등 규정을 손질해야 해요.문화예산을 좀더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그 방안은 무엇입니까.→ 각 당의 공약을 보면 교육, 문화, 여성, 환경 등등 뭐든 다 올리겠다고 말합니다. 재원을 개발하겠다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죠. 저희는 세제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권영길 인터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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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처럼 영화는 사각의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다. 최초의 영화가 그랬듯 21세기의 영화도 그 틀만은 변함없이 유지할 것이다. 영화가 회화의 발전사를 엿보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캔버스에 펼쳐진 그림처럼 필름에 담길 이미지는 사각 프레임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카메라를 통해 들여다본 세상이 미켈란젤로의 구도, 렘브란트의 조명, 르누아르의 색채를 동경하는 동안 영화는 아무 스스럼없이 자신보다 수천배 오래된 예술의 자양분을 빨아들였다. 처음엔 뤼미에르의 영화처럼 활동사진에 불과했지만 멜리에스 같은 선각자는 배경에 그려넣은 그림만으로 마술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일 표현주의는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영화는 전통적인 무대미술로 담을 수 없던 <메트로폴리스>의 미래 도시까지 설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도 어떤 측면에서 영화미술의 필요성에서 탄생했다. 원시시대든 21세기든 자유롭게 시간을 오갈 수 있고, 서부의 황무지부터 맨해튼의 빌딩숲까지
<장화,홍련><살인의추억> 등 프로덕션디자인의 매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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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홍련>그 소녀, 어두운 복도 끝에 서 있네어떤 영화 ‥‥‥‥‥‥‥‥학창 시절 이런 시시한 소리가 괴담이랍시고 돌지 않았는지. “밤 늦게 집에 들어왔는데, 거실에서 엄마가 TV를 보고 계시더라고. 지나쳐서 복도를 걸어가는데 안방에서 엄마가 나오는 거야.” 썰렁한 이 이야기가 의외로 무서울 수 있는 게, 이전의 단독주택들은 아파트와 달리 집이 크든 작든 복도가 긴 경우가 많았다. 전기 아낀다고 불을 꺼서 어둡고, 목조 바닥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그 복도, 우리 집의 한 공간을 다니기 무섭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집에서 만나는 엄마가 귀신일 수도 있다니. <장화, 홍련>이 바로 ‘가정 안의, 가족관계 속의 공포’를 다룬다. 설화 <장화홍련전>을 현대로 옮겨왔지만, 김지운 감독 말에 따르면 원작을 번안 내지 각색했다기보다 “마구 훼손”했다. 한 시골 파출소에 10대 후반의 수미가 찾아와 여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박 순경은 다음날 수미가
<장화,홍련><살인의추억> 등 프로덕션디자인의 매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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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리얼리티가 초현실로 바뀔 때어떤 영화‥‥‥‥‥‥‥‥1986년 경기도의 한 마을에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됐을 때만 해도, 이건 그저 ‘단순한’ 살인사건이었다. 하지만 주변 곳곳에서 여인들이 차례로 목숨을 잃기 시작하자, 이 일련의 사건은 하나의 이름 아래 불리기 시작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 그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은 아직까지 미궁에 빠져 있는 이 사건의 심장부 속으로 들어간다. 아니, <살인의 추억>은 차라리 이 공포스런 사건을 포함한 그 시대, 그곳을 지금, 여기로 소환해내는 영화다. 박두만과 서태윤이라는 대조적인 성격의 두 형사를 통해 이 사건을 조명하는 이 영화는 스릴러적인 재미를 추구하기보다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정면으로 느끼게 해주며, 당시의 풍속도보다는 이 사건 위에 드리워진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게 된다. 또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도록 한 시대의 경직된 분위기, 과학수사보다는
<장화,홍련><살인의추억> 등 프로덕션디자인의 매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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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켜라!>비틀리고, 휘고, 엇물리고어떤 영화‥‥‥‥‥‥‥‥지구가 크나큰 위험에 처했다. 개기월식 때면 외계인들은 지구를 파괴할 것이다. 오직 한 사람, 병구만이 이 사실을 알고 지구를 수호하려 한다. 이를 위해 외계인으로 추정되는 강 사장을 납치해 잔인하게 고문하는 병구는 과대망상 환자이거나 편집광처럼 보인다. 강 사장은 병구가 예전에 다니던 공장의 사장으로, 병구의 모가지를 자른 장본인이며, 병구 어머니를 혼수상태에 이르게 한 주범이기도 하다. 병구가 마약 중독자라는 점으로 짐작건대 외계인과 지구파괴 음모에 관한 그의 생각은 망상의 발로처럼 보이지만, 그의 논리는 꽤나 정연하고 구체적이다. 이처럼 <지구를 지켜라!>는 납치한 사람과 납치당한 사람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이며 망상과 현실의 괴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장준환 감독의 야심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화살촉이 노리는 과녁판에는 인류의 역사에서부터 지금의 사회제도까지를 포
<장화,홍련><살인의추억> 등 프로덕션디자인의 매력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