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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데뷔작 만드는 9명의 감독에게 듣는다 - 충무로에 나를 던진다!아무리 한국 영화계가 데뷔하기 쉬운 곳이라고 하지만 막상 첫 작품을 만들게 된 감독들을 만났을 때 그런 느낌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더러는 캐스팅 단계에서 좌절을 맛보고, 더러는 3년간 매달린 시나리오를 휴지통에 버리는 아픔을 겪으면서 데뷔에는 재능만큼 운도 따라야 한다는 걸 실감하는 이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올해 첫 영화를 만드는 여기 9명의 감독들도 마찬가지다. 일찍 능력을 인정받아 데뷔의 기회를 잡은 감독도 있지만 상당수 감독들이 여러 차례 데뷔할 뻔한 경험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들을 영화의 길로 인도한 것은 무엇이었나? 첫 영화는 어떻게 나왔는가? 그들은 데뷔작에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2003년 데뷔작을 내놓는 임필성, 이철하, 이우현, 김현성, 이수연, 윤학열, 최동훈, 민준기, 김용화 등 9명 신인감독의 출사의 변을 들어보자. - 편집자극한의 땅, 하얀 갈림길에서 | 출사표1- <남극일기&g
2003 신인감독 출사표 - <남극일기>의 임필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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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이들을 위한 만찬 | 출사표2 - 의 이수연 감독이러다 감독됐지요이수연(32) 감독은 행동파다. 뭔가를 가만히 보기만 하는 건 그녀의 몫이 아니다. 잘하든 못하든 직접 해야 한다. 중학교 때부터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사정도 비슷하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차츰 영화가 좋아졌다. 책 귀퉁이에 그림을 그려 후루룩 넘겨보는 초보 애니메이션일지라도 내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그런 그이다보니 대학 시절 “영화는 안 만들고 사회과학 토론부터 하는” 영화 동아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일. 대신 대학 1학년 때 한 단체에서 개최한 8mm 영화강좌를 들었고, 아르바이트한 돈을 쏟아부어 장만한 8mm 카메라로 아마추어영화 몇편도 찍었다.그녀의 열정은 졸업 무렵 기막힌 우연으로 이어졌다. 어디선가 스크립터를 모집한다는 소문을 들은 “친구 하숙집의 옆방 언니의 친구”가 대학 4년 내내 “평생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부르짖었던 ‘친구 하숙집 옆방 동생의 친구
2003 신인감독 출사표 - <4인용 식탁>의 이수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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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가족이 있는 풍경! | 출사표3 - <오! 해피데이> 윤학열 감독이러다 감독됐지요사람들은 ‘세 번째’라는 단어에 유독 민감하다. 세 번째 만남, 세 번째 기회, 세 번째 실패는 왠지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아 꼭 붙잡거나 훌훌 털어버리고 싶어진다. 윤학열 감독은 십년 넘는 세월 동안 영화를 탐내다가 그 세 번째 기회에 몸을 던진 사람이다. 이야기하는 재능을 타고나 작가가 됐다고 말하는 그는 희곡과 방송,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쌓아오면서도“어린 마음에 멋있어 보였던” 감독이 될 기회를 노려왔다. 선우완 감독과의 작업이 첫 번째, 원안을 쓴 <블루>가 두 번째. 기약없이 미뤄지는 일정 때문에 떠나보내야 했던 두번의 기회가 지나고, 마침내 세 번째 <오! 해피데이>가 왔다. 그리고 “이번에 놓치면 영영 영화를 못할 것 같아” 두 아이의 아빠 윤학열은 나이 서른여덟에 감독이 됐다.극작과를 다닌 그가, 결혼하면서 “작가의 아내가 되게 해주겠다”고
2003 신인감독 출사표 - <오! 해피데이> 윤학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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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계 100만불의 사나이, 충무로로 가다 | 출사표4 - <라디오 스타>의 이철하 감독이러다 감독됐지요1997년, 광고회사 코래드에 몸담고 있던 시절, 이철하(33)는 무서울 게 없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일찌감치 근성을 인정받아 특채로 프로듀서 직책을 얻었고 이후에도 승승장구, 남들보다 먼저 광고업계의 꽃이라 불리는 자동차 광고 제작을 따냈던 그는 두려움을 몰랐다. 첫번째 자동차 광고를 제작하면서 연출료만 100만달러를 호가하던 콧대 높은 마이클 베이 감독을 픽업하겠다고 무모하게 나선 것도 그 때문. 거액의 개런티 문제로 거래는 결국 성사되지 못했지만 감독 섭외를 위해 벌였던 잦은 해외 출장은 그에게 엄청난 자극을 줬다.당시 그가 드나들던 프로파갠더는 마이클 베이를 비롯, 데이빗 핀처, 마크 로메닉 등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넘나들며 에너지를 뿜어내는 할리우드의 에너제틱한 감독들을 키워낸 프로덕션. “영상작업을 한다면서도 제대로 된 비주얼 교육 한번 받지 못했
2003 신인감독 출사표 - <라디오 스타>의 이철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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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산 아이디어는 나의 힘! | 출사표5 - <귀곡산장>의 이우현 감독이러다 감독됐지요성균관대 4학년 졸업생은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았다. 무늬만 조경학과였던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진로도 큰 굴곡은 없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여전히 조경에는 관심이 있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를 좋아하는 보통 관객” 정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전환은 선배의 소개로 찾아간 직장 면접 이후에 찾아왔다. 면접을 마치고, “이 길을 계속 갈 것인가” 고민하던 중에, 신문에 난 “대문짝같이 큰 영상원 시험 공고”를 봤다. 게다가 “수능시험도 보지 않았다!”. 합격을 했고,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이우현 감독은 영상원에서도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기 감독’이었다. 그는 2학년 때 만들었던 16mm <장남이라서>를 아이디어 하나의 힘을 통해 무성영화로 선보였다. 3학년 때의 작품 <광대이야기>는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본선에 올랐고,4학년 졸
2003 신인감독 출사표 - <귀곡산장>의 이우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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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인생은 아름다워 | 출사표6 - <나비>의 김현성 감독이러다 감독됐지요“자신을 표출하고는 싶은데, 방법이 영화밖에 없었던 것 같다.” 1985년 미국, 시카고.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민을 간 사춘기 소년에게 바뀐 환경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아직 설기만 한 영어는 물론이거니와 백인도 흑인도 아닌 동양인이란 이질감이 종종 또래에 쉽게 섞여들 수 없는 벽을 세우곤 했다. 위안이라면, 비디오를 섭렵하며 영화 안에서 피고 지는 무수한 이야기 속에 공감을 찾는 것. 어머니 손에 이끌려 본 <죠스>에서 마냥 무서웠던 느낌 외에 남은 기억이 없을 만큼 어려서부터 영화를 접한 소년은, <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에 반했던 4학년 때 이미 감독이라는 조숙한 꿈을 품어온 터였다.딱히 할 일도, 친구도 없던 당시 미국에서 “웬만한 한국 사람들보다 더 한국영화를 많이 본” 덕분에, 오랜 이민 생활에도 우리말이 자연스러운 한편
2003 신인감독 출사표 - <나비>의 김현성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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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사기극은 꼬리를 물고 | 출사표7-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감독이러다 감독됐지요“며칠만 버티면 살 수 있었는데….” (훌쩍) 초등학생 시절 어느 날 최동훈(32) 감독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TV에서 본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안네의 일기>를 본 뒤 안네가 너무 불쌍하게 여겨졌던 것. 이 불면의 시간 속에서 영화라는 신세계를 발견한 최동훈은 어릴 적부터 “거짓말하기, 그러니까 이야기 만들기”를 낙으로 삼으며 생활했다. 그가 서강대 국문학과에 들어간 것은 ‘야부리꾼’의 당연한 행보처럼 보인다. 같은 과의 다른 친구들처럼 그라고 소설가의 꿈이 없었겠냐만은 “워낙 엉덩이가 가벼워 진득이 글을 쓰지 못하”던 그는 영화를 향한 이정표를 따르기로 결심한다.동아리 ‘영화공동체’에 가입한 최동훈은 다양한 얼굴의 영화와 조우했다. 선배들의 ‘권유’에 따라 유럽영화를 보긴 했지만,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은 70년대 또는 그 이전의 미국영화였다.앨런 J. 파큘라는
2003 신인감독 출사표 -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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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르지만, 우리는 형제! | 출사표8 - <빌리브>의 김용화 감독이러다 감독됐지요유년 시절, 김용화(32)는 ‘태권소년 마루치’를 꿈꿨다. 소년체전에서 은메달을 딸 정도의 실력도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시합 나가서 몇분 만에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운동이 벅찼고 허무했다” 그렇다고 목표 없이 무데뽀 심산으로 책상머리에 앉을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뭘 하고 싶은 거지”라는 그의 화두는 소일거리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각종 도색잡지 뭉치를 뒤지다 스르르 풀렸다.한 영화잡지의 커버를 장식한 한 털북숭이 남자와의 운명적 조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였다. 당시에는 누군지도 몰랐던 그는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그의 허연 수염을 보고서 저 나이 먹도록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전해볼 만한 일이구나” 여겨졌다. 하긴 그와 전혀 무관한 일도 아니었다. 영화광이었던 아버지 손잡고 춘천의 신도극장과 육림극장을 오가던 시절의 흥분, 운동하면서도 짬짬
2003 신인감독 출사표 - <빌리브>의 김용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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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웅 이순신, 이렇게 태어났다 | 출사표9 - <천군>의 민준기 감독
이러다 감독됐지요
민준기(35) 감독의 성격은 이마만큼이나 시원시원하다. “가발 CF모델도 했다니까요”라며 말문을 튼 그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게 6살 때였을 거예요. 테렌스 영이 감독한 <레드 선>이라는 영화를 봤거든요.” 이 변종 서부극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배우 미후네 도시로가 사무라이로 나왔는데, 어린 민준기로선 그가 일본도로 총알을 튕겨내는 장면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이때 시작된 영화의 판타지는 1984년 <E.T.>로 이어졌다.
“마지막 장면에 무지개가 뜨는데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나도 이런 영화를 만들어 관객에게 행복감을 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무렵, 갑자기 가계가 흔들려 2년 동안 레스토랑에서 웨이터 생활을 해야 했지만, 감독에의 꿈은 그로 하여금 1988년 단국대 연극영화과에 1기로 입학하게끔 했다. 하지만 대학 3학년 때
2003 신인감독 출사표 - <천군>의 민준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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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코미디를 뒤집었다“다음 뉴스입니다. 정치, 사회, 경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지식인 H씨. 그는 매주 일요일 저녁 9시가 되면 만사 제쳐두고 반드시 TV 앞에 앉아서 를, 안 본다고 합니다. ” 이 증상은 비단 H씨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지난 1999년 가을 이후 우리 모두에게 나타난 증상이다. ‘사바나 추장’ 심현섭, ‘수다맨’ 강섬범, ‘황마담’ 황승환, ‘이장님’ 김준호, ‘갈갈이’ 박준형, ‘우격다짐’ 이정수, ‘옥동자’ 정종철, ‘세바스찬’ 임혁필, ‘우비삼남매’ 등이 차례로 등장하며 우리의 기피증세는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바로, 같은 시간 방송되는 <개그콘서트> 때문이다. 햇수로 5년 동안 방영돼오면서 영 시원찮다 싶으면 ‘번개탄’까지 동원해 뜨거운 불씨를 다시 활활 태워왔던 이 프로그램은 좀처럼 시청률 10위권을 벗어나지 않았고, 맨땅에 구르고 진화한 끝에 자신만의 독특한 노하우와 완고한 시스템를 정착시켰다. 결국 지난해 말 심현섭, 강성범,
<개그콘서트>가 우리를 사로잡은 7가지 이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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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는 여러모로 80년대 말, 많은 인기 코너들을 생산해내며 장수를 누렸던 <쇼 비디오 자키>에 젖줄을 대고 있다.하지만 두 프로그램이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앞서 지적한 내러티브의 부재와 함께 개그맨 실명과 개인사에 대한 과감한 사용이다.“이덕재 장군”, “김시덕 장군”, “니가 강서구 화곡동 신정초등학교다닐 때…” 등 모든 코너에서 강박적이라고 느낄 만큼 자주 실명과 출신학교 등을 강조하는 것은 개그맨 개개인의 스타성과도 연결될 뿐 아니라 프로그램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가장 빠른 방법이다. 사실 극화된 코미디에서 여간해서는 자기 이름을 내지 않고 그 캐릭터에 걸맞은 이름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리고 지어진 이름이 리얼리티를 부여받기 위해선 캐릭터가 극의 상황에 몰입되길 요구한다. 하지만 콩트형식이 아닌 코미디는 다르다. 출연자 개개인이 한 코너가 아니라 프로그램 전체를 통해 캐릭터라이징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맹구’나 ‘영구
<개그콘서트>가 우리를 사로잡은 7가지 이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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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사투리’는 어느 날 떡하니 박준형의 머릿속에서 잉태된 ‘순수혈통’의 코너는 아니다. 이런 유의 영어교육프로그램을 응용한 사투리 교육코너는 SBS 창사초기 코미디나 강원방송 정규 라디오 프로그램 등에서 보거나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뿐이 아니다. <개그콘서트>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코너들은 어디서 본 듯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지난 1월19일 보수작업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는 ‘봉숭아학당’이다. 이미 이창훈의 맹구 시절부터 시작된 이 코너는 <개그콘서트> 내에서도 수많은 멤버이동을 보이며 장수하고 있다. 한참 인기를 끌었던 박성호의 ‘뮤직토크’만 해도 “냉장고를 녹이는 뜨~거운 남자” 박세민이 80년대 코미디에서 써먹던 ‘팝개그’의 재탕이었고, 난쟁이처럼 무릎으로 발을 대신하는 ‘몽당친구들’은 이미 <개그콘서트> 내에서 이병진이 선보였던 코너다. 하지만 이런 현상에 대해 김영식 PD는 “미묘한 데커레이션이 불러일으키는
<개그콘서트>가 우리를 사로잡은 7가지 이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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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의 띄어쓰기가 낳을 수 있는 다른 해석의 결과처럼 <개그콘서트>는 동작이나 상황보다는 끊임없이 말을 해체시키고 재결합하는 언어적 유희에 집중한다. ‘무사들의 대화’, ‘생활사투리’, ‘우비삼남매’, ‘우격다짐’ 등 <개그콘서트>의 많은 코너들이 “언어를 가지고 노는 코너”들이다.“당신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란 표준어를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각각 “좋은 겅께 챙겨”, “오다 줏었다!”는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는 ‘생활사투리’나,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발로 차! 발로 차!” “저 푸른 초원 위에, 교복을 벗고…” 식으로 서로 다른 노래의 구절을 이어붙임으로써 엉뚱한 뜻을 만드는 ‘도레미 삼총사’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언어유희는 단순한 슬랩스틱코미디와는 달리 관객을 귀찮게 하는 부분이 있다. 얼마 전 새로 선보인 ‘우비삼남매’는 <개그콘서트>의 방향과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험용 리트머스 같은 코너다. 애니메이
<개그콘서트>가 우리를 사로잡은 7가지 이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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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 사랑할까요?서른 넘긴 지 오래인 남녀에게 요정 애칭이 거북살스럽긴 하지만, 줄리아 로버츠가 로맨틱코미디의 팅커벨이라면 휴 그랜트(43)는 오베론쯤으로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현재 은막에서 휴 그랜트보다 로맨틱한 코미디언, 혹은 그보다 코믹한 연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왕도 왕 나름. 요정의 왕이라고 한들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왕에게는 경배하는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하긴 휴 그랜트와 자주 비교되는 선배 캐리 그랜트도 비슷했다. 마치 이름이 정한 팔자인 양 두 사람의 그랜트는 언제나, 당연히, 지척에 있는 스타로 여겨질지언정(GRANTED), 존재해주어서 고맙다는 따위의 감격어린 치사를 받는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배우로서 쓸쓸한 노릇 아닌가, 라고 굳이 염려해줄 필요는 없다. ‘배우 휴 그랜트’의 소명을 누구보다 가볍게 여기는 것은 휴 그랜트 본인이기 때문이다. 어느 명사보다 재미있는 인터뷰를 남기면서도 의미심장한 인물로 여겨지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연기 경력 20년
네 가지 키워드로 읽는 휴 그랜트의 매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