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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숍에서 숨은 비디오를 찾는 즐거움이야말로 영화광들의 특권이다. 떠들썩하게 개봉하지 않고 비디오숍으로 직행하는 영화들 중에 정말 보석 같은 영화가 있다. 극장가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될수록 흥행성이 없다는 이유로 간판도 올리지 못하는 영화는 더 많아지고 규모가 작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 영화가 처한 입지는 좁아진다. 숨은 비디오 찾기는 그런 작가들에 대한 지지와 응원이며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재능을 격려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영화광들은 극장에서 채우지 못한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다. 비디오를 보기 좋은 시간, 20편의 조용한 걸작들을 소개한다.
숨은 비디오 걸작 1 - <심플 플랜>과 샘 레이미 감독
핏빛 아메리칸 드림 위에 내리는 눈
<뉴욕타임즈>는 98년 말 미국영화의 큰 수확 두 가지로 폴 슈레이더의 <어플릭션>과 샘 레이미의 <심플 플랜>을 꼽았고, <타임>은 <심플 플랜&
설 연휴 비디오 가이드 [1] - <심플 플랜>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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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OK, <노랑머리>는 NO!
변재란 |<개같은 날의 오후>나 <그대 안의 블루>는 스스로 페미니즘을 주창했지만 정공법을 피해갔다. <개같은…>은 개그적 요소를 집어 넣었고, <그대 안의 블루>는 계몽적인 남성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따라서 독해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김소영 |그런 맥락에서 <거짓말>을 얘기하면 재미있겠다. <거짓말>의 처음 한 시간은 지루했다. 그런데 집이 불타는 장면에서 갑자기 여성친화적인 영화로 변하더니 굉장한 즐거움을 주었다. 전혀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사실 사도매조키즘은 남성중심적인 장르인데 갑자기 표변하복적인 순간을 드러냈다. <여고괴담…>이 처음부터 전복성을 예상됐던 영화였다면 <거짓말>은 뜻밖의 전복성이 발견된, 잘 만든 영화였다. 장선우 감독에게 편견 같은 게 있었다. <꽃잎>부터 <나쁜영
99 한국영화 페미니즘 성적표 [3] - 여성평론가 대담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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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부인은 아직도 집을 떠나지 못했다
장소 한겨레신문사 5층 회의실
시간 1월17일 오후6시
참석 김소영(영상원 교수), 변재란(영화평론가), 심영섭(임상심리학자·영화평론가)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천만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다. 여성평론가이면서 아줌마이기도 한 세 여자가 빵을 함께 뜯어먹으며 동서고금의 영화들을 두고 왕수다를 떨었다, 여성관객의 이름으로. 과연 페미니즘영화의 신전에 모실 영화는 무엇인가.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은 다 달랐지만, 어떤 영화는 함께 칭찬했고 어떤 영화는 함께 물어뜯었다. 여성평론가들의 식탁에서, 나쁜 영화가 좋은 영화가 되고 좋은 영화가 나쁜 영화가 되는 조화가 일어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하게 된다. 자 이제,이 ‘아줌마들의 저녁식사’에 올려진 메뉴들을 함께 시식해보자.
여성의식도 좋고 작품성도 뛰어난 영화는 없나?
변재란 |최근 영
99 한국영화 페미니즘 성적표 [2] - 여성평론가 대담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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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화예술기획의 여성관객 1천명이 뽑은 최고의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우리가 그 여자, 춘희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청결 불감증에 걸려 있고 좀처럼 치마를 입지 않으며, 물을 병째로 들이켜고 좋을 땐 희한한 웃음소리를 낸다. 우리는 이것말고도 그녀에 대해 열 가지는 더 얘기할 수 있다. 춘희가 곧 우리니까. 춘희, 아니 한국의 ‘보통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이 여성관객이 매긴 페미니즘 성적표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여성문화예술기획이 ‘여성관객 1천명이 뽑은 최고의 영화·최악의 영화’ 네 번째 설문조사 결과다. 춘희만큼 우리와 꼭 닮은 여주인공을 지켜보며 함께 폴짝거린 건 참으로 오랜만이다. 가느다란 한국 여성감독의 계보를 이어줄 이정향의 출현도 가뭄에 단비 내린 듯 반갑다. 한편, 최악의 영화로는 여성의 육체와 섹슈얼리티를 천박하게 포장해 내돌렸던 <노랑머리>가 선정됐다. 여성은 언제나 ‘주요
99 한국영화 페미니즘 성적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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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뎐> 시나리오를 쓴 김명곤씨와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 때 인연을 맺었다. 연극계 출신의 김명곤씨는 영화배우 중에서 판소리를 정식으로 배운 거의 유일한 사람이며, <서편제>에서 딸의 눈을 멀게 하는 비정한 소리꾼 유봉으로 출연해 잊혀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두 사람이 판소리 춘향전에 대해, 그리고 영화 <춘향뎐>에 대해 주고받은 이야기.
김명곤 | <서편제> 찍을 때부터 감독님이 <춘향뎐> 하실거라고 알았어요. <서편제> 때문에 해남에 헌팅갈 때 차에서 내내 제가 조상현씨 판소리 완창 춘향전을 틀었잖아요. 아, 이거 영화로 만들어야 되는데, 그러셨죠.
임권택 | 맞아. 내가 그때 감흥이 도무지 잊히질 않는 거야. <창>하고 한해 쉬면서 이런저런 소재를 찾았지. 전통적인 데서 뭔가 얻으려고 도자기 굽는 데도 가고 전통 차 재배하는 데도 가고, 많이 돌아다녔거든. 그런데, 이 춘향전
<춘향뎐>과 임권택 [4] - 임권택 vs 김명곤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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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뎐>이 가장 난해한 촬영이었을 것 같다. 색채부터 화려하기 그지 없다.
=난해하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걸 했다. 이전엔 한번도 내 스타일을 바꾸려했던 적이 없었다. 난 70년대부터 카메라를 들었고, 어두운 시대에 살면서 아름답게 찍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묵화의 느낌이 강한 화면이 됐다. 움직임도 별로 없고, 빈 공간이 많은 쓸쓸한 화면. <춘향뎐>에선 아름다운 한국적인 색을 마음껏 표현하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다. 소품과 의상까지 본래의 색을 최대한 선명하게 잡겠다는 생각이었다. 낮은 톤을 버리고 우리 색의 느낌이라면 극단적으로 화려해보자는 것이었다. 필터도 코럴파스칼을 특별히 주문해서 썼다. 그것도 모자라서 필터 3, 4개를 겹쳐서 썼다. 색감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 흐린 날 촬영은 거의 피했다. <춘향뎐>의 색이 토속적이면서도 화려하고 인공적인 느낌이 든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느낌을 줬다면 난 만족
<춘향뎐>과 임권택 [3] - 정일성 촬영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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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7.24
문제의 사랑가 장면. “이리 오너라. 업고 노자”로 시작되는 이 대목은 아마도 <춘향뎐>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장면의 하나일 것이다. “5, 6일이 지나니 두 남녀는 부끄럼을 잊고….” 서로의 몸을 알게 된 어린 남녀는 이제 수줍음을 버리고 서로 수작하다가 병풍 뒤로 들어가 옷을 벗어던지고 몸을 맞대야 한다. 문제는 그 전과정에 소리가 흐르고 모든 동작이 한컷에 담겨야 한다는 것. 3분 가까이 한 호흡으로 소리의 리듬을 타는 고도의 사랑놀이. 수줍은 첫날밤을 찍은 22일분은 무난하게 넘어갔지만, 이 장면에선 조승우가 눈에 띠게 굳어 있다. 경험이 없는 16살 소년이 하긴 어떻게 능청맞게 여자의 몸을 희롱할 수 있으랴. 조승우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 리듬감도 절실함도 없어보였다. 처음엔 조용히 타이르기만 하던 임 감독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속절없이 이틀이 흘러가고 전 스탭은 초긴장상태. 임 감독이 폭발했다. “니네 어리광을 언제까지 받아줘야
<춘향뎐>과 임권택 [2] - 제작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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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이라는 것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아무리 도망가고 싶어도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결국 그 삶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먼길을 돌아 <춘향뎐>의 입구에 도착했다. 스스로 휴지같다고 표현한 1960년대, 동시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낸 1970년대, 그리고 방황과 구도의 1980년대를 보낸 뒤, 우리 것의 뿌리를 탐사한 90년대의 끝자락에서 그는 마침내 불멸의 고전 ‘춘향뎐’과 만난 것이다. 이것은, 그러나, 회귀이면서 동시에 혁신이다. 서구적 영화문법을 훌훌 털어내고 그를 전율케 했던 판소리의 감흥으로 모든 형식적 규율을 제압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춘향뎐>은 그래서 임권택 영화 이력의 결산이라기보다, 새출발처럼 보인다. 막 데뷔한 신인감독처럼, 그는 솟구치는 흥분과 불안을 눌러가며 판소리 춘향가를 조심스럽게 영화로 옮기기 시작했다.
1998. 9.16
“춘향전 판소리로 영화할 거야
<춘향뎐>과 임권택 [1] - 제작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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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극에 고증이 필요한가?
미술- 잃어버린 대륙의 역사, 로드무비의 특성 살린 상징적 면 부각
고증 자료가 많지 않은 과거의 어느 시대를 시각화하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다. 발해가 배경인 <무영검>의 미술팀은 자료가 부족한 까닭에 고증보다는 상상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작업해야 했다. “영화미술이 재현의 목적을 가진 건 아니”라고 믿는 하상호 미술감독은 자료에 연연하기보다는 “잃어버린 대륙의 역사, 로드무비라는 드라마에 기여하는 상징적인 미술”을 구현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발해의 역사와 고구려의 미술을 검토하고 그가 내린 결론은, 발해의 미술은 ‘화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시대적인 정서나 분위기상 브라운 계열의 어둡고 차분한 색감이 어울린다고 봤다.” 마치 필터를 쓴 것처럼 모노 톤으로 보이는 화면은 이런 컨셉을 형상화했기 때문. 발해와 거란의 갈등 구도가 중요한 만큼 시각적인 대비에도 공을 들여, 거란의 경우 어둡고 탁한 붉은색을 주조로, 짐승
<무영검> 중국 촬영현장을 가다 [3] - 미술·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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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발해의 여자 무사인가?
서사- 미지의 여백인 발해사에 관한 대담한 상상
<무영검>은 무려 4년 동안 ‘김영준 무협 프로젝트’로 기획, 준비됐던 작품이다. 5년 전 데뷔작 <비천무>가 흥행은 나쁘지 않았지만, 완성도의 문제를 아프게 지적당한 만큼, 김영준 감독이 같은 장르로 복귀한 것은 의외다. 이 배경에는 <비천무> <무영검>의 제작사 태원엔터테인먼트 정태원 대표의 ‘설득’이 있었다. “<비천무>를 너무 급하게 진행해서 감독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홍콩팀과 일하면서 액션에 대해 배운 것도 있고, 중국 로케이션 때 바가지 쓰면서 큰 경험을 했다. 다시 찍으면, 더 적은 비용으로 더 좋은 장소에서 더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더라. 비법을 알고 있는데, 안 하려니 억울했다. 그래서 감독을 설득했다. 이번엔 준비 기간과 비용을 충분히 주겠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비천무> 제작의 비화. 정태원 대표가 &l
<무영검> 중국 촬영현장을 가다 [2] - 서사·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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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푸둥공항에서 차로 달리기를 네댓 시간. 40도에 육박하는 더운 날씨에 헐벗은 남자들이 우글대는 도시 무석의 세트장에 다다랐다. 고궁처럼 생긴 입구를 지나니, 지도 없이는 다닐 엄두가 안 나는 너른 세트장이 펼쳐져 있다. 이 세트장에선 장나라가 출연하는 중국 드라마를 비롯해 서너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동시에 촬영되고 있다고 한다. 세트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호수에 인접한 낡고 허름한 가옥들의 거리가 나타난다. 바로 여기서 김영준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무영검>의 막바지 촬영이 7월4일부터 이어져오고 있었다. 102회차 촬영이 있던 7월5일, 취재진이 찾아갔을 때는 발해의 마지막 왕자 대정현(이서진)과 그를 지키는 무사 연소하(윤소이)가 거란족의 침탈로 폐허가 된 발해 마을을 지나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말쑥한 복장에 움직임이 거의 없는 이날의 장면은 무협물인 <무영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정적인 촬영이었다.
그러나 쉬운 촬영은 없는 법이다. 비
<무영검> 중국 촬영현장을 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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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 가운데 특히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시나리오 데뷔작으로 택한 이유는? <레볼루션 No.3>도 가능했을 텐데.
=<플라이…>는 먼저 시나리오 초고를 쓰고 그걸 바탕으로 소설화했던 작품이다. 가장 영화적이지 않나 싶었다. 영화를 한다면, 어렸을 때 좋아하던 성룡의 <취권>이나 이소룡의 작품 같은 액션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하고 싶었다. <플라이…>는 판타지적인 분위기도 있지만 출발은 굉장히 현실적이다. 일본 영화계엔 요즘 절대 없는 작품이다. 출발 자체가 비현실적인 SF영화 같은 거야 있지만. 내가 다른 분야(소설계)에서 온 사람이기에 나름대로 힘있게 이런 기획을 밀어붙일 수 있겠다 싶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기획을 냈으면 대번에 뭉개졌을 거다. 남자들만 나오는 얘기야? 연애 이야기는 어디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사실 <레볼루션…>에 대해선 한국을 포함해 수많은 영화화, 드라마화 제안이 있었지만
가네시로 가즈키 [2]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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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Go)>의 원작자로 널리 알려진 재일동포 3세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플라이, 대디, 플라이>가 지난 7월9일 일본에서 개봉했다. 또 최근 <레볼루션 No.3> <플라이, 대디, 플라이>에 이은 ‘좀비스’ 삼부작 <스피드>를 출간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영화화된 그의 작품이 벌써 <Go> <꽃> <연애소설> 3편에 달한 데서 알 수 있듯 그의 작품은 언제나 ‘영상적’이란 말을 들어왔다. 작품마다 옛날 영화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가네시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꿈꿔왔다고 한다. 영화 개봉을 핑계로 지난 7월1일 도쿄의 도에이 영화사에서 가네시로를 만났다. 영화와 문학, 정치가 비슷한 비율로 뒤섞인 인터뷰였지만 그의 희망대로 정치 이야기는 많이 자제한 결과다.
가네시로 가즈키(37)의 이야기는 <Go>에서 출발한다. 가네시로 자신이 가장 닮았다고 꼽는
가네시로 가즈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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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살아 있다고 설정하면 어떨까”
미스터리 심리썰렁물이라는 부제가 붙은 <아파트>는 사람 잡는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다. 청년 ‘고혁’은 맞은편 동에서 밤 9시56분만 되면 여러 집의 불이 동시에 꺼지는 현상을 목격한다. 불가사의한 암전현상과 연속적으로 발생한 의문사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발견한 고혁은, 항상 외로이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여인을 구해내기 위해 죽음의 아파트로 뛰어든다. 2004년 5월19일부터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 연재되었던 <아파트>는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며 감상하는 인터넷 만화의 독창적인 재미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새로운 회가 업데이트되는 날이면 다음(Daum)의 서버가 느려질 만큼 많은 독자들이 몰려들었고, 일본에 판권도 두둑하게 팔았으며, ‘공포영화 전문감독’ 안병기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하지만 다양한 캐릭터들의 시점으로 옮겨가며 진행되는 <아파트>의 각색이 쉬울 리가 없다. “지금 시나리오
원작자와 감독이 만났을 때 [5] - <아파트>의 강풀+안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