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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프로젝트 1, 2호 나가신다
무엇을 꿈꾸고 있나
우노필름 대표에서 싸이더스 부사장으로 직책이 바뀌었지만 차승재씨는 변함없이 “나는 영화제작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차승재씨는 비유컨대 공장장이 된 것이다. 냉장고 하나 사는 일까지 직접 나서야 했던 우노 시절과 달리, 전문경영인이 관리를 전담하게 돼, 프로듀서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지금이 차라리 마음 편한 점이 있다고 한다. 충무로를 놀라게 한 로커스와 우노의 합병도 영화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차승재씨의 변. 엔터테인먼트의 산업화가 한국이 제일 뒤져 있어 이 상태로는 외국 엔터테인먼트회사가 침투할 경우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 만일 외국계 매니지먼트회사에 사정해야 배우 캐스팅이 가능한 상황이 온다면 영화 만들기 자체가 힘들어진다는 얘기다. 싸이더스가 영상콘텐츠와 매니지먼트를 겸하는 것도 그런 이유. 요컨대 기업을 못하면 영화도 못하는 상황에서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다.
벤처시대 충무로 3인방 [4] - 차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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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가능성 100%, 투자자는 내가 고른다
무엇을 꿈꾸고 있나
시네마서비스를 창립했을 때 강우석 감독의 지상목표는 “스크린쿼터 없어져도 한국영화를 걸 수 있는 극장배급망 확보”였다. 서울극장 곽정환 회장과 손잡고 <투캅스2> <편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주유소 습격사건> <텔미썸딩> 등 잇단 히트작을 내놓으면서 배급사로서 시네마서비스의 위치는 확고해졌는데 이는 올해 20여편의 영화를 배급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외화까지 포괄해서 직배사와 맞먹는 배급력을 갖춘 회사를 만든다는 강 감독의 계획은 어느 정도 실현된 셈. 그러나 강 감독의 고민은 시네마서비스가 배급사일 뿐 아니라 투자사라는 데 있다. 자체 자본만으로 굴러가는 회사는 아니기에 강 감독은 늘 또다른 투자자를 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들여왔다. 과거엔 삼성, 대우 등 비디오회사를 중심으로 한 대기업이 파트너였고 최근엔 삼부파이낸스, 국민기술금융, 산은캐피탈 등
벤처시대 충무로 3인방 [3] - 강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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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함수의 변수들: 자본과 인터넷, 그리고 해외시장
그러나 최근 상황이 시네마서비스, 삼성, 대우 3강체제나 시네마서비스, 삼성, 일신창투 3국시대와 동일한 배경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첫째 자본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 둘째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매체가 변화를 끌고 간다는 점, 셋째 국내시장에 국한된 경쟁이 아니라는 점이 큰 차이다. 돌이켜보면 지금 영상사업에서 손을 뗀 대기업들도 타임워너나 디즈니 같은 콘텐츠 그룹을 목표로 했다. 영화, 비디오, 음반, 매니지먼트 등 각 사업부문에 현장과 무관한 대기업 인력들이 포진했고 결과적으로 인력에 드는 비용도 건지기 힘들었다. 반면 금융자본은 최소의 인력으로 가벼운 몸놀림을 보여주며 비교적 수업료를 조금 내고 영화산업에 끼어들었고, 시네마서비스는 극장에서 들어오는 자본을 재투자하는 자생적 모델을 제시했다. 현재 영화자본의 주축은 금융자본 중에서도 벤처자본이다. 성장가능성 높은 정보통신 관련주에 집중하며 분산투자하는 벤처투자의
벤처시대 충무로 3인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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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는 돈이 많다?
온나라가 벤처열풍에 몸살을 앓는데 충무로가 무사할 리 없다.
대기업, 금융에 이어 몰려오는 제3의 자본은 벤처.
그러나 벤처는 영리하다.
흥행성이 없으면 투자하지 않는다.
충무로에서 자본을 투자할 만한 파워를 가진 이들로 강우석, 차승재, 강제규를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활화산' 충무로를 재편하는 3인방이 펼칠 인터넷 신삼국시대가 궁금하다.
‘돈은 넘치는데 영화가 없다.’ 최근 충무로의 상황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발에 채는 게 돈”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자본은 지금 매우 빠른 속도로 영화시장의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다. 영화제작에 투자하는 목적으로 모은 펀드만 해도 100억원 규모 자본이 4개나 된다. 일신창투 수석심사역이던 김승범씨가 독립해 만든 튜브엔터테인먼트의 투자조합, 미래에셋창투에서 모은 코리아픽처스 1·2호, 유니코리아에서 내건 드림캐피탈, 무한기술투자가 차승재씨를 내세워 만든 무한영상벤처투자조합 등이 모두 100억원
벤처시대 충무로 3인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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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실험은 전진한다
독립영화 작가들이 관객을 만나기 위해 직접 준비했던 인디포럼이 첫발을 내디딘 것이 1996년 5월. 인디포럼96이 ‘아마추어에서 작가까지’라는 슬로건 아래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개최된 이래로 9년이 흘렀다. 그리고 오는 5월28일(토)부터 6월6일(월)까지 10번째 인디포럼이 새로운 서울아트시네마(구허리우드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인디포럼2005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디포럼의 지난 10년을 돌아보는 내실있는 기획전. 인디포럼 역대 상영작 중 홈페이지 투표를 통해 관객이 직접 선정한 작품 6편(<관객선택>), 역대 상영작 중 영화의 가능성을 확장했다고 여겨지는 프로그램 선정작 9편(<새로운 풍경>), 인디포럼에선 상영되지 않았지만 다시 관객을 만나야 한다고 평가되는 프로그램 선정작 5편(<아웃 오브 인디포럼>)이 그것이다. 20편에 달하는 기획전 영화들은 인디포럼 10년을 넘어 독립영화의 10년을 조망할 수 있는 작
인디포럼 10년, 독립영화 10년 [6] - 인디포럼 추천작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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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7; 퀴어
소수자의 욕망, 커밍아웃하다
1997년 9월 열릴 예정이었던 제1회 서울퀴어영화제는 그로부터 1년 뒤,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창립한 것은 1998년 9월. 표현의 자유와 검열문제로 독립영화계가 유난히 들썩거렸던 무렵이다. 독립영화인과 동성애운동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많은 싸움을 함께했고,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었다. 물론 독립영화와 퀴어영화의 밀접한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선 이러한 집단 경험 이외에 좀더 근본적인 지적이 필요하다. 영화에 뛰어든 뒤 커밍아웃한 이송희일 감독은 1997년 퀴어문화축제를 통해 자극받아 첫 작품인 <언제나 일요일 같이>를 만들었고, 이 작품은 제1회 퀴어영화제와 인디포럼에서 상영됐다. “독립영화계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커밍아웃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사실. 그리고 그런 문화행사 자체가 커밍아웃하지 못한 동성애자 감독들에게 작품을 찍을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퀴
인디포럼 10년, 독립영화 10년 [5] - 퀴어&독립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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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5; 스타
홍보전략에서 브랜드로
김동원, 변영주, 송일곤, 류승완, 정지우, 김용균, 임필성, 신재인, 이송희일, 노동석, 김정구, 민동현, 원신연, 이경순, 최하동하, 채기, 이하…. 이들 외에도 독립영화계의 스타로 꼽히는 감독들은 많이 존재한다. 독특한 영화세계, 의미있는 성과, 참신한 시도, 또는 감독 개인의 캐릭터 등 덕분에 일부 감독들은 언론이나 영화제 등의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유운성씨는 독립영화계의 스타가 1997년 무렵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스타 만들기는 인디포럼 등 영화제가 자리잡지 못했던 당시만 해도 독립영화의 존재감을 주류사회에 알리는 유효한 전략이었다. 그런 전략을 영화저널을 중심으로 한 매체들이 받아들이면서 스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몇몇 스타는 독립영화라는 미지의 대지로 대중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얼굴마담’ 또는 ‘필요악’ 구실을 한 셈이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제작되는 독립영화의 편
인디포럼 10년, 독립영화 10년 [4] - 스타&정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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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5; 영화집단
독립영화 발전의 동력, 지금은 재충전중
“그동안 독립영화의 역사는 영화집단의 역사였다.” 원승환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의 이야기처럼 영화집단은 독립영화 탄생의 맹아였으며 발전의 동력이었다. 1980년대 서울영화집단, 장산곶매, 바리터, 노동자뉴스제작단 등의 성과는 1990년대 들어 영화제작소 청년(김용균, 정지우, 박찬옥, 임필성, 이두만, 장희선 등), 푸른영상(김동원, 김태일, 오정훈 등), 기록영화제작소 보임(변영주, 장호준 등), 젊은영화(이송희일, 김성숙, 채기, 고은기, 박경목 등), 파적(김정구, 윤영호, 김설우, 유하 등), 영화제작소 몽(박지원, 김희진 등)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 신생 영화집단은 이념적 지향을 공유(청년, 푸른영상, 보임)하기도 했지만, 영화적 지향을 함께하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띠어나갔다. 이에 따라 독립영화의 지평은 급속하게 확장됐다. 1995년 독립영화협의회 워크숍 멤버들이 만들었던 젊은영화 또한 사정
인디포럼 10년, 독립영화 10년 [3] - 영화집단&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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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1; 검열
‘표현의 자유’를 향한 고된 싸움
198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검열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은 대부분 충무로보다는 독립영화 진영에서 터져나왔다. <파랑새> <부활하는 산하>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를 관람하는 것은 시위 참여와 다를 바 없었다. 1996년부터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전투는 극에 달했다. 그해 6월 푸른영상 김동원 감독이 불구속수사 처리된다. 이틀 뒤 대책위가 설립되며 표현의 자유와 영상 관련 악법 철폐에 대한 영화계의 대응은 급물살을 탄다. 그리고 10월 헌법재판소는 공륜의 영화 사전검열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다. 1997년 인디포럼의 상영 중단 사태, 퀴어영화제 무산으로 다시 불붙은 검열 철폐와 사전심의에 대한 논란은 제2회 인권영화제 사태를 통해 말 그대로 ‘폭발’한다. 홍익대쪽의 집행위원장 고소, 시설물 보호 요청, 상영장 봉쇄, 옮겨진 상영장 난입, 압수 수색, 개막작 상영 직전 단전
인디포럼 10년, 독립영화 10년 [2] - 검열&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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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독립영화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인디포럼’이 처음 관객을 만난 것이 1996년 5월. 공교롭게도 이 시기를 전후한 몇년간은 독립영화계와 검열당국의 지루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레드헌트>와 <세발 까마귀> 등의 영화와 퀴어영화제, 인권영화제 등 수많은 독립영화제들이 사전심의를 거부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외쳤다. ‘도전과 실험정신, 그리고 소수문화를 향한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독립영화가 지닌 건강한 정치성의 당연한 결과였다. 이는 다시 개별 독립영화들로 연결됐고, 주류영화와는 다른 새로움을 원했던 관객은 독립영화제로 모여들었다. 개인적인 에세이가 주를 이루는 외국과 달리, 첨예한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을 본연의 의무로 여겼던 한국의 독립큐멘터리들은 영화제를 통해 더욱 큰 사회적 파장을 그렸다. 더 많은 대중들이 독립영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상업영화 감독에 버금가는 인
인디포럼 10년, 독립영화 10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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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가 얘기? 인간에 대한 얘기!
윤종찬 | 편집은 어땠는가. 단편영화는 내 돈 들여 찍는 거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장편영화는 주변에서 말들이 많지 않나.
임필성 | 다행히 싸이더스는 그런 점에서 감독들을 덜 괴롭히는 회사다. 차승재 대표가 요구한 건 딱 하나, 두 시간 내로만 끊으라는 거였다. 가장 논란이 됐던 장면은 민재의 꿈이었다. 마지막 오로라가 나타나기 전에 민재가 쓰러지면서 꿈을 꾸는데, 사라진 대원들이 서울의 공원 비슷한 장소에 모여 있다. 출발하기 전인 듯도 하고, 이미 죽은 사람들인 듯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애착이 강했다. 민재가 처한 가장 최악의 순간에 따뜻한 서울이 나오는 거다. 충격적인 아우라가 있을 줄 알았는데, 지나치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엔 최도형 대장이 안 나온다. 관객이 민재와 최도형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갑자기 스토리를 까먹을 것 같았다. 그 장면 말고는 별 이야기가 없었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상한 특
<남극일기>를 말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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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려면 투쟁해야 한다"
며칠 전 독감에 걸렸다는 임필성 감독은 병원에 들렀다가 오느라 조금 늦겠다고 전해왔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윤종찬 감독은 아직도 후반작업 중인 <청연>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충무로 4대 재앙이라고 들어보셨어요?”라고 농담처럼 물었다. 제작비가 엄청나고, 촬영을 참 오래했고, 결과를 장담 못하는 영화 네편. 윤종찬 감독은 <남극일기>와 <청연>이 그중 두편이었다고 했다. 어쩌면 지루한 마라톤 코스를 함께 뛰어온 동료가 앞질러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이 아닐까. 그러나 편집 중인데도 시간을 내준 윤종찬 감독은, 미안해하며 감기약을 먹는 후배를 맞아 이해와 공감 섞인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대담 도중 임필성 감독은 가끔 “<소름>도 그렇지만…”, “<청연>도 비슷할 텐데…”라는 말로 답을 시작하곤 했다. 이성과 논리를 무색하게 하는 직관, 이유를 묻는 행위 자체가 의미없는
<남극일기>를 말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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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에게서 딜레마를 배웠죠”
이성욱 | 우선 <친절한 금자씨>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궁금합니다.
박찬욱 | 현재 편집까지 끝난 상태입니다. 오늘은 사운드에 대해서 처음으로 상의를 했습니다. CG나 디지털 색보정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후반작업도 남아 있죠. 이 영화가 어떤 영화가 될지…. 확실한 것은 <복수는 나의 것>과도 다르고, <올드보이>와도 다르다는 점인 것 같아요. 그리고 세편 중에서 제일 이상한 영화…. (웃음) 그것도 확실해요. 이영애씨가 하는 행동이나 표정이나 말투나 이런 것이 무슨 생각으로 저러고 다니는지 잘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영화가 한 3분의 2쯤 갔을 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탁 수정하는 순간이 나와요. 갑자기 궤도수정을 하기 때문에 당황하게 될 거예요. 그것이 뭐 매력이라면 매력일 테고. 만약 그것이 실패하면 영화에 그동안 적응해온 관객은 굉장히 당황하고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다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
영화인 7인 특강 [4] - 문소리·박찬욱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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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내 종교이자 남자친구, 무서운 선생님”
“오늘 강연 제목이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캐릭터’인 걸 보면, 저를 다양한 장르 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한 배우로 평가하신 것 같아요. 소재나 형식에 반복적인 요소가 있고, 그런 것들로 분류될 수 있는 게 장르일 텐데, 제가 출연한 영화 대부분이 장르에 맞추기 어려운 영화들이었어요. 왜 장르와 손 잡고 일하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면, 제가 인형 같은 외모가 아니라 사람 같은 외모를 가진 관계로 장르영화와 친해질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장르영화 배우들은 데뷔부터 정해진 타입이 있잖아요. 김지미씨는 모던 여성, 최은희씨는 고전 여성, 장미희씨는 지적인 여성, 그리고 문근영양은 국민 동생, 이런 식으로요. 저는 <오아시스>를 통해서 모든 이미지를 깨버렸다고 생각해요. 6월에 들어가는 것도 비장르영화인데, 그런 인연은 제 관심이 거기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도쿄 필름엑스에 심사위원으로 갔을 때 아시아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영화인 7인 특강 [3] - 문소리·박찬욱 ②